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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스크랩 ‘개화파’ 김옥균 vs ‘그를 죽인’ 홍종우 ?[선택! 역사를 갈랐다]
잠실/맥(조문희) 추천 0 조회 49 14.09.23 11:4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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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 역사를 갈랐다] (26)

‘개화파’ 김옥균 vs ‘그를 죽인’ 홍종우

 

●혁명가 인정받는 ‘김옥균’ vs 테러리스트 된 ‘홍종우’

 

정부 차원에서 주요한 역사적 개념을 규정하는 북한에서는 그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갑신정변을 ‘근대 부르주아 혁명운동’으로 변경했다. 한국에서 김옥균(金玉均·1851~1894)과 갑신정변에 대한 견해는 연구자들 간에 일치하지 않으나 대체로 근대국가 수립을 위한 최초의 혁명적·진보적 개혁운동으로 보고 봉건제 청산을 위한 ‘위로부터의 개혁’을 전개하였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일본이라는 외세 동원 문제를 지적하면서도 변혁 주체로서의 역할은 인정하는 편이다.

 

반면 이와 대비시켜 우리에게 비교적 덜 알려진 홍종우(洪鍾宇· 1850~1913)는 대다수 사람들이 갑신정변 주도 인물인 김옥균 암살범이자 독립협회와 대척점에 있던 황국협회를 주도하던 반(反)개화, ‘테러리스트’로만 이해하고 있던 인물이다. 당연히 그 평가는 부정적이기 때문에 최근까지도 보수반동 성향의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과연 그럴까.

 

 

 

▲ 김옥균과 홍종우(오른쪽·프랑스 기메박물관 소장 사진)는 개화기에 개혁을 요구했다. 그러나 개혁의 방법론은 달랐다. 결국 조선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 홍종우는 고종이 제거하길 희망하던 ‘개화파’ 김옥균을 상하이로 유인해 3발의 총을 쏴 죽였다.

 

 

●‘갑신정변’ 3일천하… 실패한 비운의 개화파 김옥균

 

조선을 개혁하겠다는 큰 뜻을 품고 일으킨 1884년 갑신정변이 3일 천하로 끝난 뒤 반역자로 처단된 고균(古筠) 김옥균. 권력과 세력을 잃고 망명지를 떠돌다가 목숨을 잃고 주검마저 능욕을 입은 비운의 개화파….

 

갑신정변의 실패는 정변의 주체들과 일정 부분 이해를 같이했던 윤치호의 아버지이자 군부대신 등 고위관료를 역임한 윤웅렬도 예견하고 있었다. 그는 갑신정변의 실패 요인을 다음의 여섯가지로 꼽았다.

 

1. 군주를 위협한 점

2. 외세를 믿고 의지한 점

3. 민심이 따르지 않은 점

4. 청국의 군사력을 과소 평가한 점

5. 왕과 왕비의 의향을 어긴 점

6. 당붕(黨朋)의 도움 없이 일을 조급하게 처리한 점

 

갑신정변의 행동대장으로서 정권의 핵심인사 살해에 앞장섰던 서재필은 후일 회고담에서 실패 원인을 ‘민중의 무지몰각’에 돌리고 있다. 그는 광범위한 민중의 원동력과 잠재력을 믿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매도했다. 정변은 국민적 동의 없이 진행된 것이다.

 

후일 김옥균은 일본을 ‘이용’했다고 말하지만 오히려 이용당한 것이고 위험한 선택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봉건제도 청산을 위한 노력에만 초점을 맞추었지만 상대적으로 제국주의 침략 세력에게는 관대하거나 이를 생각하지 못한 한계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와 친한 일본인들은 후쿠자와(福澤諭吉), 도야마(頭山滿), 고도(後藤像二郞) 등 ‘대아시아주의자’이자 한국 침략을 적극 옹호한 인물 일색이었다.

말년의 김옥균은 이른바 삼화주의(三和主義)에 심취해 있었다. 그는 ‘흥아지의견’(興亞之意見)에 기초해 이를 설명했는데, 그 골자는 ‘삼국제휴 서력방알’(三國提携 西力防?)을 통해 아시아를 부흥시킨다는 것이다. 이를 제창하게 된 것도 정신적 스승인 후쿠자와의 영향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흥아지의견’은 현재 남아 있지 않아서 과연 김옥균이 후쿠자와와 같은 입장을 가지고 있었는지 아니면 삼국이 대등한 관계에서 평화롭게 공존공생하자는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1904년 러일전쟁 직후 그동안 일본에 망명했던 갑신정변과 을미사변 관련자들은 모두 귀국하여 복권되고 식민지 시기 대다수는 친일의 거두로서 식민지 지배의 일익을 담당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김옥균에게는 유신(維新)을 처음 제창한 사람이고 문명의 선각자로서 충달공(忠達公)이라는 시호가 융희 4년(1910) 7월 27일에 추증되었다. 김옥균 추종 세력은 이후 1920년대에 들어와서도 그의 이전 활동을 과장·미화하였다. 식민지 시대 말기에 이르면 일제는 만주 침략을 시작으로 대륙 침략을 본격화하는 과정에서 대동아공영권을 통한 아시아 지배와 조선 민중에 대한 무제한의 통제 명분을 김옥균이 주장한 삼화주의에서 찾았다. 김옥균의 삼화주의는 그의 의지와는 다르게 숱하게 왜곡되어 갔다.

 

●홍종우, 실정 맞는 근대화 추구… 佛르피가로도 ‘개화인사’ 인정

 

경기도 몰락한 선비의 가문에서 출생한 홍종우는 어린 시절 경제적으로 빈곤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중 1886년 3월부터 프랑스행을 결심하여 1888년 나가사키와 규슈, 오사카를 거쳐 도쿄에 도착했다. 이어 1890년 12월 파리로 들어갔다. 그는 프랑스 유학 후 거의 2년 동안 파리 기메박물관에서 연구보조자로 활동하면서 춘향전, 심청전, 직성행년편람(直星行年便覽) 등 한국의 고전과 점성술책, 일본과 중국의 고전을 프랑스어로 번역하는 일에 종사했다. 홍종우는 프랑스어 번역본 ‘다시 꽃이 핀 마른 나무’(심청전)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공화국에 사는 데 습관이 된 프랑스인들을 대상으로 이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우리 선조가 세운 정부 형태에 우리가 집착하는 것을 탓하지 않을 것임을 확신한다. 이것은 기질의 문제이다. 기후가 국민의 관습에 끼치는 영향은 오래전에 증명되었다. 그 누구도 인디언들이 에스키모인과 같이 옷을 입지 않았다고 해서 그들을 비난하지 않는다. 그와 마찬가지로 나라마다 다른 정체(政體)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정부 형태를 유지하면서, 이번에는 우리가 유럽문명을 이용하고자 한다. 이 일에 있어 우리를 돕고자 하는 자들에게 우리는 존경과 애정을 바칠 것을 미리 약속한다.”

 

홍종우의 정체관이 그간의 시대 담론과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목표는 조선의 전통과 서양 문화를 조화·절충하는 새로운 방법으로 대중을 계몽하는 데 있었다. 그러나 그의 입장은 성리학적 질서와 체제를 유지하고자 했던 척사위정론자들과 다른 것이었으며, 민족 주체성과 민족 문화에 대해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근대화 지상주의론자와도 구분되었다.

 

1893년 귀국을 결심한 그는 그해 12월 일본에 도착하였다. 이때 고종의 밀명으로 도쿄에 온 이일직과 만났고, 그로부터 김옥균 암살을 제의받게 된다. 홍종우는 김옥균을 만나 프랑스 정국을 소개하고 세계 대세와 동양 정세를 논하는 한편 그의 상하이행을 유도했고 상하이 동화양행에서 김옥균은 결국 홍종우가 쏜 세 발의 총탄을 맞고 즉사한다.

 

그가 본격적으로 국내 활동을 시작하는 시기는 아관파천 이후부터다.

그는 국왕을 황제로, 세자를 황태자로 높이는 한편 조선을 대한제국으로, 건원 연호를 ‘광무’(光武)로 정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는 대한제국 수립과 황제 즉위식의 초석이 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홍종우는 대한제국 성립 당시 비서원승으로 활약한 이래 각 방면에서 활동하면서 여러 차례 전반적인 개혁을 주장하였다. 경제 문제에 관한 개혁론은 대외적으로 열강의 조선 이권 침탈에 대한 절대불가론으로, 내적으로는 국가재정의 확충과 국내 상인의 몰락에 대처하기 위한 방법론인 보호주의로 나타난다.

대표적인 것은 한러은행 설치 반대, 외상의 도성 개잔(開棧)과 내지행상 반대, 절영도 석탄고 임대 및 광산이권 양도 반대, 조선 연해어업 및 홍삼 사매(私買) 반대, 방곡실시, 광무연호 주조, 상권보호 등이다. 정치·사회 문제에 관한 개혁론은 군주권의 절대화, 군권(軍權)의 확립과 군사권 간섭 반대, 각부 고문관과 각국 공사의 내정 간섭 반대, 불평등 조계 개정, 만국공법의 철저한 준수, 공정한 인사정책, 민선의원(民選議院) 설립 등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는 근대적 지도체제의 확립을 위해서는 정부의 자립과 과감한 개혁이 이를 보조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러일전쟁을 거쳐 1910년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이 식민지가 되자 그는 ‘개화당의 영수’ ‘조선독립의 혁명가’ 김옥균 암살범으로 다시 각인되었고, 근대화를 저해하는 데 가장 앞장섰던 사람으로 치부되었다. 그러나 그는 명실상부한 개화인사였다. 프랑스 저명 신문 르피가로지도 그렇게 보고 있다.

잘 알다시피 홍종우는 프랑스 최초의 한국 유학생이자 많은 부분 우리 실정에 맞는 근대화를 도모하였다. 그가 수구파라는 결정적인 근거도 없고 그 역시 수구적인 언급을 한 바 없다.

 

●편견 지우고 입체적으로 보아야

 

김옥균과 홍종우는 조선을 근대화시키고자 하는 의지는 같다 하더라도 양자 간에는 분명한 대립각을 갖고 있었다. 김옥균과 달리 홍종우는 조선이 근대국가로 이행하는 데 가장 큰 장애물은 외국으로부터의 도전이라고 인식하고 자주적 근대화를 추진하려고 했다. 그는 조선의 역사와 현실을 서구에 알리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그러면서 우리의 정체성을 지키는 선에서 근대화가 이루어지기를 진심으로 바랐던 것이다.

 

현실 사회에 대한 객관적 인식의 부재 상태에서 문화적 전통과 제도를 고려하지 않은 채 서구 및 일본의 제도를 무차별하게 도입하는 것은 오히려 그 나라의 발전에 커다란 해를 끼칠 수도 있다. 김옥균처럼 문명개화를 위해 불가피한 것으로 보면서 제국주의 이웃 강국을 끌어들여 근대화를 달성하려는 방식은 정당화되기 힘들다. 만약 그럴 경우에는 자칫 국가를 상실할 위험이 뒤따른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할 것이다. 시대는 다르지만 갑신정변 당시와 지금 한국을 둘러싼 동북아의 국제 정세는 묘하게 일치하고 있다.

 

조재곤(동국대학교 연구교수)

/ 서울

 

 

 

 

 

김옥균은 '애국적 혁명가'? 아니, '희대의 사기꾼'!

 

[프레시안 books] 박은숙의 <김옥균, 역사의 혁명가 시대의 이단아>

 

김기협 역사학자

 

사람에게 사람만한 관심거리가 따로 없다. 인문학과 사회과학은 모두 사람에 관한 학문이다. 역사학도 그중 하나다. 사람을 살피는 방법으로서 역사학이 다른 학문이나 공부와 다른 특징이 무엇일까.

 

역사의 흐름 속에서 인간을 바라보는 것이 역사학이다. 역사 속에서 인물의 모습을 바라볼 때 나는 하나의 큰 나무를 마음속에 떠올린다. 사람 하나하나를 나무를 뒤덮은 잎사귀, 꽃, 열매로 본다. 이들 모두 각자의 위치에서 나무와 나름대로의 관계를 맺고 있다. 이들의 신진대사가 나무의 성장과 생존에 어떤 작용을 하는지 이해하려 애쓰는 것이 역사 공부다.

 

나무를 바라보는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잎사귀보다 꽃과 열매에 모이는 것처럼 역사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는 특출한 인물들이 있다. 힘, 용기, 성실성, 지혜, 착한 마음 등 많은 사람들이 받드는 미덕이나 장점을 두드러지게 보여준 인물들이다.

 

'민중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나무의 생명에 꽃이나 열매보다 잎사귀의 역할이 더 크다는 점을 지적한다. 옳은 지적이다. 그러나 역사 흐름의 실제 인식에는 특출한 인물들이 지표 노릇을 한다. 역사의 기본 흐름은 이름 없는 민초들이 끌고 간다 하더라도, 두드러진 굴곡에서는 특출한 인물들의 역할이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특출한 인물의 전기는 역사 서술의 중요한 분야다.

 

전기 작가 중에는 꽃과 열매를 나무에서 떼어내 정물화로 그리는 이들도 있다. 꽃과 열매의 시각적 특성을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데는 좋은 방법일 수 있다. 그러나 역사 서술로서의 전기는 꽃과 열매를 나무와의 관계 속에서 보여주는 풍경화라야 한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대상 인물의 모습을 그리며 그 의미를 해석해야 하는 것이다.

 

식민사학의 그늘

 

 

 ▲ <김옥균, 역사의 혁명가, 시대의 이단아>(박은숙 지음, 너머북스 펴냄). ⓒ너머북스

 

 

박은숙의 <김옥균, 역사의 혁명가, 시대의 이단아>(너머북스 펴냄) 책날개에 쓰인 저자 소개를 보니 저서 중에 <갑신정변 연구>(역사비평사 펴냄), 역서 중에 <추안급국안 중 갑신정변 관련자 심문 : 진술 기록>(아세아문화사 펴냄)이 있다. 김옥균을 역사의 흐름 속에서 바라볼 준비를 갖춘 연구자로 보인다.

 

목차도 잘 짜였다. 배경과 사람됨을 다룬 제1장에서 죽음과 평가를 다룬 제5장까지 짜임새도 괜찮고, 특히 다각적 인간관계를 다룬 제6장을 붙인 것은 대상 인물에 대한 시각을 입체화해 주는 아주 좋은 시도다. 김옥균의 사람됨과 역할에 대해 나는 박은숙과 거의 상반된 시각을 갖고 있지만, 제6장의 내용은 내 시각을 내 나름대로 확충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박은숙이 김옥균과 갑신정변에 다분히 긍정적인 시각을 가진 데는 연구자가 연구 대상에게 애착과 애정을 느끼게 되기 쉬운 스킨십의 원리를 어느 정도 감안할 수 있다. 그런 애착과 애정이 사건이나 인물에 대한 피상적 관찰을 뛰어넘어 더 심도 있는 고찰을 가능하게 해주는 일도 많다.

 

그러나 김옥균과 갑신정변을 둘러싼 초기 연구사의 지독한 편파성을 감안한다면 박은숙의 애착과 애정에 너무 절제가 없다는 느낌이 든다. 일제 식민사학이 오랜 기간에 걸쳐 갑신정변을 극도로 미화하고 일본인의 개입을 감춘 사실은 밝혀질 만큼 밝혀져 왔다. 전문 연구자가 아닌 나도 조동걸의 <현대 한국 사학사>(나남출판 펴냄)와 이태진의 <고종 시대의 재조명>(태학사 펴냄)으로 웬만큼 파악할 수 있었다.

 

평가는 차치하고, 일본인의 개입이라는 사실 문제부터 보자. 김옥균 등이 다케조에 신이치로 공사를 계속 쫓아다닌 것을(105쪽에 보면 우정국에서 일을 저질러 놓은 다음 창덕궁 들어가기 전에도 공사관에 들러 '기색'을 살폈다고 한다. 맙소사!) 박은숙은 "협조를 약속한 일본 공사의 변심"을 걱정한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런 큰 사업에 약속해 놓고 변심을 걱정한다고? 일본 공사가 정변의 주체였고 김옥균 일당이 그로부터 세부적인 지시를 얻기 위해 쫓아다닌 것이라고 하는 훨씬 그럴싸한 설명이 저자에게는 떠오르지도 않는 것일까?

 

자금 문제도 거사 1년 전에 박영효가 자기 집을 일본 공사관에 팔아 대금 5000원을 받았다고 한다(94쪽). 왕실 부마의 저택을 왜 팔았지? 팔고서 집을 비워줬나? 박영효가 비워준 집을 공사관에서 갑신정변 전에 어떤 용도로 어떻게 썼다는 사실을 확인하지 않는 한, 이 저택 매매는 거사 자금 지급을 위장하기 위해 조작한 것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조동걸은 <현대 한국 사학사> 293쪽에서 거사 한 달 전인 11월 3일 일본 공사관의 천장절 축하연에 김옥균 일당을 초청했을 때 다케조에가 거사를 종용한 사실과 부산에서 조선어를 배우며 훈련 중이던 일본 청년들이 정변에 대거 가담했다가 피살당한 사실을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이 무시해 왔음을 지적했다. 이 사실들을 박은숙도 무시하고 있다.

 

나는 갑신정변이 일본공사관의 작품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렇게가 아니면 설명하기 힘든 여러 문제들이 지적되어 왔다. 갑신정변이 김옥균 일당의 주체적 작품이라는 견해를 저자가 갖고 있다면 지금까지 지적되어 온 문제를 좀 해명해 주기 바란다. 이 지적들을 묵살한 채 100년 전 식민사학자들의 주장을 답습하는 것은 21세기 독자들의 갑신정변 이해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김옥균 vs. 김홍집

 

책을 읽어나가다가 어느 대목에서 화가 버럭 났다. 그러면서 잠깐 반성했다. 내 견해와 다른 견해를 본다 해서 꼭 화를 낼 일은 아니지 않은가? 이 대목에서 왜 내가 흥분하고 있지? 이런 대목이었다.

 

 

갑신정변 때 김옥균은 서울 시장 격인 한성부 판윤에 김홍집을 임명하도록 배려했다. 그러나 갑신정변 후 김홍집은 일본으로 망명한 김옥균을 "우리나라로 잡아와 법대로 사형을 집행하여 신과 사람의 분을 풀게 해달라"고 고종에게 진언했다. 또한 1894년 김옥균의 시체가 양화진에 도착하자, 시원임 대신의 일원으로서 모반대역부도죄를 적용하여 능지처참의 형벌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김옥균에게 사적인 원한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정치 관료로서 그의 처신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68쪽)

 

 

김홍집과 김옥균이 초년에 자별한 관계를 가진 적이 있다는 이야기에 이어진 서술이다. 역적 김옥균에 대한 김홍집의 엄격한 태도를 저자는 정치 관료로서의 '처신'으로 해석한다. 게다가 왕년의 자별했던 관계를 등진 김홍집의 의리 없음을 질책하는 기색까지 보인다. 정변 당시 한성부 판윤 임명이 마치 김옥균이 베푼 '배려'라도 되는 듯 내세워 김홍집의 '배신'을 더 부각시키려 하고 있다.

 

쿠데타 중의 고위직 임명이 배려가 아니라 재앙이었다는 사실은 형조 판서와 외아문 참의에 임명된 윤웅렬-윤치호 부자가 그 연루 때문에 어떤 고생을 하는지 적으면서도(252~253쪽) 분명히 밝힌 것 아닌가. 동조자를 얻기 위해 관직을 뿌린 것은 쿠데타 일당의 얄팍한 전술이었다. 내가 김옥균 입장이라면 평소에 꼴 보기 싫던 놈을 골라 감투를 뒤집어씌웠을 것이다. 그것보다 더 호되게 괴롭히는 길이 세상에 무엇이 있었겠는가?

 

1880년대 조선이 겪고 있던 변화에는 여러 측면이 있었고, 연구자에 따라 중시하는 측면이 서로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유교 질서의 몰락'이 하나의 중요한 측면이었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1884년 시점까지 유교 질서는 많이 퇴락해 있었지만 뼈대는 아직 건재했다. 그 11년 후 민비 살해 사건이 어떤 충격과 반발을 일으켰는지 보라. 갑신정변 때 쿠데타 일당이 왕에게 한 짓은 살해라는 결과에 이르지 않았을 뿐이지, 죄의 성격은 11년 후의 민비 살해와 똑같은 것이었다. 왕을 죽여 버릴 경우 자기네가 일본 우편선을 탈 수 없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죽이지 못했을 뿐이라고 나는 본다.

 

이런 대역부도에 대한 규탄을 박은숙이 '처신'으로 폄하하는 까닭이 무엇인가? 유교 질서가 이미 존재하지 않고 있었다고 보는 것인가? 김홍집은 1896년 2월 아관파천 때 일본 공사관으로 피신할 것을 거부하고 고종의 살해 명령(이것은 '처형' 명령이 아니라 불법적 살해 명령으로 나는 이해한다.) 앞에 목숨을 내놓았다. 신하의 본분 지키는 자세를 목숨으로 증명하고 유교 질서 속에 죽음을 맞은 것이다.

 

나는 김홍집의 인품을 김옥균과 비교할 수 없이 높이 보는데 박은숙은 김홍집을 처신에나 신경 쓰는 구태의연한 관료로 몰아붙이면서 김옥균을 선각자, 혁명가로 떠받든다. 아무리 제 눈에 안경이라지만, 너무한다. 김옥균 받드는 거야 천천히 따지더라도, 김홍집을 이렇게 우습게 보는 사람은 도대체 어떤 도덕관을 가진 사람일까?

 

갑신정변의 이념이 있는가?

 

김홍집과 김옥균에 대한 박은숙과 나의 평가가 상반되는 것은 일단 유교 질서에 대한 관점의 차이에 이유가 있는 듯하다. 저자는 조선 쇠퇴의 원인이 유교 질서에 있다고 하는 100년 전 일본인들의 식민사관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그러니 개화파의 정책과 노선이 유교 질서를 해치는 측면에서 아무 문제도 느끼지 않고, 김홍집이 유교 질서에 목숨 바친 의리를 김옥균에 대한 개인적 의리보다 사소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나는 유교 질서에 절대적 가치가 있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당시의 조선을 구성하는 가장 큰 요소의 하나였고, 개화 또는 개혁이 주체적으로 이뤄지기 위해 역할을 가지고 있던 요소라고 생각한다. 유교 질서의 의미와 가치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역사의 연속성을 부정하는, 조선의 역사는 끝났고 완전히 이질적인 새 역사가 시작되고 있었다고 하는 식민사관의 본질이다.

 

그래, 새 역사가 전통의 뒷받침 없이 시작되고 있었다면 그 새 역사란 것은 어떤 바탕 위에 펼쳐지고 있었단 말인가? 일본 식민사학자들은 갑신정변의 '근대성'에서 새 역사의 원리를 찾는다며 갑신정변을 떠받들었다. 전통적 유교 질서를 얼른 내다 버리고 근대성에 매달리는 사람이 '개화(開化)'의 '지사(志士)'였다고 하는 것이다.

 

'정령(政令)'이란 이름으로 나온 갑신정변 정책 노선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가 쌓여 있다. 그런데 나는 그 내용보다 그 작성 과정이 정책의 성격을 더 명확하게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12월 4일(음력 10월 17일) 우정국 거사에 이어 왕의 신병을 확보하고 그 이튿날 하루를 정적 살해와 병력 확보에 쓴 다음 5일 밤에야 정령 작성을 시작했단다. 세상에! 그런 준비도 안 해 놓고 사람 죽이는 짓부터 시작했단 말인가! 그런 상황에서 서둘러 작성한 정령을 놓고 갑신정변의 '이념'을 논해야 하는 후세 학자들이 참 딱하다. 내가 보기엔 정변의 지지 세력을 얻기 위해 마구 써 갈긴 것일 뿐인데.

 

이것 역시 김옥균 일당의 주체적 결정보다 일본 공사관의 주도에 의해 정변을 벌인 것이라고 볼 만한 강력한 정황 증거다. 주체적 결정에 의한 것이라면 동지를 모으기 위해서라도 정강 정책을 미리 준비해 놓게 된다. 동지들 사이의 토론 과정에서 나오게 되어 있다. 공사관이 준 돈으로 공사관이 시키는 일을 하는 것이기에 정책 준비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전술 전략적 동기로 급조한 정령 속에 좋은 말은 다 들어 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한 '독립'과 '평등'에 어떤 진정성이 들어 있었나? 거사에 실패하고 망명한 자들이 그 뒤에 진정한 독립 노선을 추구하는 모습을 보였는가? 독립신문이 있고 독립협회가 있었다고? 그것을 진정한 독립 노선이라고 본다면 나는 더 할 말이 없다.

 

'평등'은 또 어떤가? '평등'에 대한 신념이 눈곱만큼이라도 있었다면 '나으리'들을 모시고 일본에 망명한 '아랫것'들이 이렇게 울분을 터뜨릴 수 있었겠는가?

 

동지들 간에 사회적 신분과 위상을 경계로 갈등이 빚어지기도 했다. 양반 세도가였던 김옥균-박영효-서광범-서재필 네 사람은 숙소를 따로 마련하고 일본의 유지나 외국인들을 접견했으며, 해동대원들을 마치 집에서 데려온 집사처럼 부렸다. 이때 김옥균은 주로 유혁로가, 박영효는 이규완이 시중을 들었다. 이러한 처사에 이규완 등이 울분을 터뜨리며 비판하자, 김옥균 등은 얼굴을 붉히면서 그들에게 사죄했다. (150쪽)

 

오직 권력만을 좇았던 김옥균

 

역사 서술로서의 인물 전기에는 도덕적 평가가 빠질 수 없는 요소다. 도덕적 평가란 그 시대의 도덕적 규범과 대상 인물의 가치관을 맞춰보는 작업이므로 이 작업을 통해 그 인물의 역사적 실존이 확인되는 것이다.

 

김옥균을 "희대의 사기꾼"이나 "절세의 풍류객"으로 내놓으려면 그가 얼마나 사기 치는 재주가 좋았는지, 주색잡기에 솜씨가 좋았는지만 밝히면 된다. 그러나 그를 이 책의 부제처럼 "역사의 혁명가"로 띄워주려면 시대와 인물 사이의 관계를 밝혀줘야 한다.

 

망명 기간 중 김옥균의 생활을 구성한 두 가지 요소는 돈과 권력을 향한 기회주의적 행태, 그리고 방탕한 향락이었다. 그 방탕에 대해서는 박은숙도 변명해 줄 엄두가 나지 않는지, 자객의 위협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방탕한 태도를 취했다는 일부 회고담에 대해 "왠지 김옥균을 아끼는 사람들이 그를 위해 변명을 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고 했다(183쪽).

 

그러나 김옥균이 쌀 투기, 탄광 개발, 광산 경영, 국유림 불하 등 시도했다가 실패한 사업들에 대해서는 "담대한 모험가적 기질"이니 "21세기에 요구하는 모험적 창조 경영"이니 침이 마른다(189쪽). 그런 시도가 왜 모두 실패했을까? 시대를 너무 앞서간 천재였기 때문인 것처럼 풍기는 저자의 암시보다는 그 인간이 너무 무책임하고 자기중심적이어서 실패했을 것으로 보는 편이 더 상식에 맞는 것 같다.

 

박은숙은 김옥균 일당이 국가의 장래를 위해 희생적인 자세로 거사에 나선 것이라 한다.

 

사실 김옥균과 개화당 동지들은 기득권 세력으로 부귀영화가 보장되어 있었다. 하지만 국가의 근대화와 자주독립을 이루겠다는 마음으로 자신들의 자리에 안주하지 않고 정변을 일으켰다. (90쪽)

 

어떤 부귀영화를 누가 보장해 줬단 말인가. 거사의 첫 번째 목적이 민영익의 살해였다. 당시 25세의 민영익은 민비의 (입양한) 친정 조카로서 고종 측근 정치의 최대 수혜자였다. 김옥균 역시 측근 정치의 큰 수혜자였는데, 민영익에 비하면 낮은 등급 수혜자였다. 김옥균은 한 때 9세 아래의 권력자 민영익 막하에 드나들어 '죽동궁 8학사'(죽동궁은 민영익의 저택)로 거명되기도 했다.

 

민영익의 권세에 대한 질투심이 김옥균에게는 최대의 동기였다고 나는 본다. 그가 평범한 수준의 부귀영화를 바랐다면 웬만큼 보장받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보장된 수준의 부귀영화에 만족할 인물이 아니었다.

 

김옥균 일당의 섣부른 거사로 인해 개화의 대의가 '결과적으로' 저해되었다고 박은숙은 인정한다. 그런데 나는 김옥균의 대의 훼손을 '결과적'인 것이 아니라 '원천적'인 것으로 본다. 애초부터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권력 획득을 위해 그 대의를 이용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진정 국가와 민족을 위한 대의라면 그토록 무책임하고 불성실하게 일을 저지를 수가 없었다.

 

1873년 말 대원군이 퇴진하고 고종이 친정에 나서면서 측근 정치의 형태로 권력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자격이 안 되는 인물에게 엄청난 권력을 몰아주면서 임금 개인에 대한 절대적 충성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민 씨 세도'라 하는 것도 민 씨를 내세운 측근 정치였다. 고종은 30여 년 동안 절대 권력자를 키워주고 그에게 배신당하기를 반복했다. 측근으로 낙점받기 위한 야심가들의 경쟁이 극한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다.

 

김옥균은 이 경쟁에 가장 열심이던 사람의 하나였다. 연하의 권력자 민영익에게 빌붙어 지내다가 입지가 좀 확보되자 개화 정책을 수단으로 민영익과의 경쟁을 시도했다. 그것이 한계에 이르자 정변이라는 극한적 수단을 들고 나왔던 것이다. 그의 목적은 개화가 아니라 권력이었다. 왜 그렇게 단정하냐고? 권력을 기준으로 보면 초년에서 말년까지 그의 모든 행동이 수미일관하게 설명되지만 개화를 기준으로 보면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소년의 정체는…

 

주어진 체제로부터 가장 큰 혜택을 받는 계층이 체제의 보전에 책임을 지는 자세는 유교 질서만이 아니라 모든 안정성 있는 체제의 기본 조건이다. 특권층의 책임감이 실종되는 권력의 사유화는 19세기 조선의 몰락 과정에서 중요한 현상이었고, 이것이 고종의 측근 정치로 극한에 이르렀다. 갑신정변의 중요한 의미는 개화 노선보다 권력 사유화 현상의 극단화에 있었다고 나는 본다.

 

민영익, 김옥균, 이완용. 어린 나이에 생가보다 훨씬 권세 높은 집안으로 입양한 사람들이다. 입양의 자격이 재능에 있었던 사람들이다. 재능 하나만을 믿고 도덕적 기준을 잃어버린 것이 초년의 입양 경험을 통해 정체성의 혼란을 겪은 결과일지도 모를 일이다.

 

209~211쪽에 "김옥균의 평가, 애국적 혁명가와 매국적 반역자 사이"란 제목의 짤막한 절이 있다. 그 절의 맨 끝에 서재필의 평가를 옮겨놓은 것은 그 평가에 박은숙이 동의하는 뜻으로 보인다.

 

그는 상당한 학자이었을 뿐만 아니라 다재다예한 인물이었고, 정적들에게 허다한 비방을 듣긴 했지만, 나는 그가 대인격자이었고, 처음부터 끝까지 진정한 애국자이었음을 확신한다.

 

어울리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됨을 알아볼 수 있다고 한다. 김옥균을 극찬한 사람들은 일본 제국주의자들이었다. 김옥균을 죽이러 왔다가 인품과 사상에 감복해서 동지가 되었다는 사람은 친일파 중에도 최고 저질 친일파 송병준이었다(163쪽). 나는 서재필의 인품을 살펴볼 기회가 없었는데, 위와 같은 말을 정말 남겼다면 '인격'과 '애국심'에 대한 식견이 무척 천박한 사람이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박은숙의 김옥균에 대한 평가에는 전혀 동의하지 못할 점이 많지만, 대상 인물의 실제 모습을 보여준다는 전기의 기본 목적에 충실한 점은 인정한다. 그래서 더 답답하다. 마지막 절에 나오는 일본 소년 와다 엔지로. 아홉 살 때 오가사와라 섬에서 김옥균과 만나 열일곱 살 때 상하이의 호텔에서 김옥균이 살해당하는 곁에 있었던 소년.

 

박은숙이 충실히 적어놓은 사실만 봐도 김옥균이 상하이까지 다른 동지도 아닌 그 소년을 왜 데리고 갔었는지 상식적인 의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저자는 어떤 의문이 떠오르는 기색도 보여주지 않는다.

 

 

 

 

- 상기 글에대한 답변 -

 

 <김옥균, 역사의 혁명가 시대의 이단아> 김기협의 서평에 답한다

 

박은숙 역사학자·<김옥균 역사의 혁명가 시대의 이단아> 저자

 

이 글은 지난 6월 24일 발행된 '프레시안 books' 45호에 실린 역사학자 김기협 <프레시안> 상임편집위원의 <김옥균, 역사의 혁명가 시대의 이단아> 서평에 대한 저자의 반론이다. (☞관련 기사 : 김옥균은 '애국적 혁명가'? 아니, '희대의 사기꾼'!)

 

<김옥균, 역사의 혁명가 시대의 이단아>(박은숙 지음, 너머북스 펴냄)는 서세동점의 물결이 거세던 1851년에 태어나 쇄국-개항-임오군란-갑신정변을 경험하고,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나기 직전 생을 마감한 김옥균의 44년 생애를, 시대와 권력과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접근해보려 한 시도였다.

 

지방 수령의 양자로서 유학적 소양을 쌓던 성장기, 과거 시험 수석 합격자로서 정·관계 진출 및 관료로서의 활동, 개화와 자주 독립을 향한 열정과 갑신정변, 망명 시절의 고뇌와 조선을 향한 일편단심, 경계를 넘어선 인간관계 등을 다루었다.

 

이를 통해 격변의 시대가 인간을 어떻게 규정해 나가는지, 야망의 인간이 새로운 시대와 어떻게 조응해 가는지, 시대와 인간의 상호 작용을 엿보려 했다. 김옥균은 전환기 조선의 길로 개화와 자주 독립의 노선을 제시하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질주했다. 그의 자유로운 영혼은 기획된 삶에 안주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에 운명을 건 모험적 혁명가로서의 길을 갔다.

 

한편으로 그는 주도면밀한 분석과 전략에 소홀하여 대사를 그르치거나 손해를 보는 일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얍삽하게 시세(時勢)를 저울질하거나 개인적 이익을 도모하지 않았으며, 끝까지 시대적 과제와 자신의 신념에 충실했다. 김옥균은 우리가 첫발을 내딛었던 자본주의 세계 체제 속에서 전통과 근대라는 이중의 부조리와 시대적 고민을 온몸으로 체현한 인물이었다.

 

지난 6월 24일 '프레시안 books' 45호에 실린 김기협의 서평은 김옥균과 갑신정변을 둘러싼 다양한 논의와 평가의 또 다른 단면을 읽을 수 있었으며, 역사학은 물론 '누가' '언제' '왜' 등과 같은 근원적 문제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역사학이 기록물(문헌 자료·금석문 등)의 '사실' 확인 없이 '감'으로 해석해도 되는 것이었던가? 하고 되묻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서평의 견해는 내게 충격적이었다.

 

그는 김옥균을 '역사의 혁명가'라기보다는 "희대의 사기꾼"이나 "절세의 풍류객" 쪽에 더 무게를 두는 것 같다. 갑신정변 와중에 김옥균이 일본공사관에 들른 것과 관련하여 "일본 공사가 정변의 주체였고 김옥균 일당이 그로부터 세부적인 지시를 얻기 위해 쫓아다닌 것"이라고 주장하고, 정변 자금과 관련하여서는 박영효 주택의 매도가 "거사 자금 지급을 위장하기 위해 조작한 것"일 가능성을 제기한다.

또한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이 무시해 왔던 "부산에서 조선어를 배우며 훈련 중이던 일본 청년들이 정변에 대거 가담했다가 피살당한 사실을" 나 또한 무시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그 근거는 대부분 '정황 증거'에 기반하고 있다.

 

그간 김기협은 역사학계의 갑신정변과 김옥균 등에 대한 평가에 대해 매우 불편해 했을 것 같다. 그러나 서평의 지적처럼 "역사의 흐름 속에서" 갑신정변과 김옥균을 이해하고, '정황'이 아닌 '사실'에 기초한 해석을 토대로 생산적 담론이 진행되기를 바란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말대로 "21세기 독자들의 갑신정변 이해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제 김기협이 제기한 '답답'한 문제들에 대한 나의 견해를 밝히고자 한다.

 

다케조에 신이치로 일본 공사가 갑신정변의 주체였는가?

 

김기협은 그간 갑신정변과 김옥균에 대한 역사학계의 '지독한 편파성'에 몹시 불편했던 것 같다. 더구나 그것이 '갑신정변을 극도로 미화한' 식민사학자들의 주장을 '답습'하는 것이어서 더욱 그랬다고 한다.

 

그래서 새로운 역사적 사실을 주장한다. 갑신정변 때 김옥균 등이 일본 공사관에 들른 부분에 대한 것으로, "일본 공사가 정변의 주체였고, 김옥균 일당이 그로부터 세부적인 지시를 얻기 위해 쫓아다닌 것"이라고 한다. 곧 갑신정변의 주체는 일본 공사였고, 김옥균 일당은 세부적인 지시를 받는 하수인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렇게 '훨씬 그럴싸한 설명이 저자에게는 떠오르지 않는 것일까?' 하면서 저자의 아둔함을 나무란다. 그러면서도 "갑신정변이 일본공사관의 작품이라는 확인을 갖고 있지 않다"고 한 발짝 물러서는 모습을 보인다.

 

이 견해는 갑신정변이란 개화당이 주체적으로 일으킨 사건이라는 기존의 연구 성과와 자료들의 기록을 뒤집어엎는 획기적인 주장이다. 그간 숱하게 논의되어 왔던 갑신정변의 근대 변혁 운동으로서의 성격은 물론이거니와 개화당과 그 사상적 기반인 개화 사상의 틀을 일거에 무력화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그 근거로 제시한 것은 없다. 다만 '그렇게가 아니면 설명하기 힘든 여러 문제들이 지적되어 온 것'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정황 증거'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그는 왜 갑신정변이 김옥균·박영효 등 개화당이 주도했다는 그간의 숱한 연구 성과들과 당대의 기록들을 인정하지 않는 것일까?

 

연구 성과는 차치하고, 당대의 자료들을 보자. 정변 당일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일기>와 <일성록>에는 "역당(逆黨) 김옥균 등이 난을 일으켜 어가를 경우궁으로 옮기고, 민태호·조영하·민영목…을 죽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보수적 유학자인 황현도 <매천야록>에서 "박영효·김옥균 등이 난을 일으켜 대궐을 침범하고 임금을 경우궁으로 옮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일찌감치 정변에 책임이 없다고 발을 뺏고, 군대 동원도 고종의 요청에 의한 것일 뿐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갑신정변을 진압한 청은 정변의 주체를 어떻게 보았을까?

 

10월에 조선에 유신당(維新黨)의 난이 일어났다. (…) 유신당의 우두머리인 김옥균 홍영식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이 모의하여 정권을 잡은 자들을 살해하고 그 자리를 대신하였다. <청사고(淸史稿)>

 

심지어 원세개는 "10월의 변란은 주견(主見)이 없는 일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하면서 자신에게 협의했으면, "중립을 지켜 그 일을 성사시켰을 것"이라고 했다 한다(<매천야록>).

 

이처럼 당대의 공적 기록과 사적 일기, 외국인의 기록들 또한 모두 갑신정변의 주체를 김옥균·박영효 등 개화당 인물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런데도 김기협은 당대의 기록들과 많은 선행 연구자들의 견해를 믿지 않고, 정변의 주체를 '일본 공사'로, 갑신정변은 일본 공사관의 작품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것일까?

 

그렇게 해야만 이른바 '식민사학'을 벗어난 것일까? 식민사학이 갑신정변과 김옥균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에? 식민사학의 논지는 역사적 사실에 관계없이 무조건 반대로 해야만 식민사관을 극복하는 것일까?

그러면 갑신정변과 김옥균을 부르주아 혁명, 애국적 혁명가로 바라보는 북한의 인식도 식민사학의 일환인가? 나로서는 그의 시각이 오히려 답답하다. 다양한 시각을 인정하지만 역사학을 전공하시는 분의 말씀이라 더욱 곤혹스럽고 당황스럽다.

 

일본 공사가 정변을 '종용'했을 수 있다. 그렇다 해서 일본 공사가 곧 주체가 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김옥균과 개화당원들이 일본 공사의 '종용'을 그대로 받아들일 사람들도 아니지만 말이다. 망명지 일본에서도 조선의 자주 독립을 주장함으로써 일제의 버림을 받았던 김옥균이 공사의 '지시'를 받을 정도의 인물은 아니라고 본다.

 

갑신정변 3일 동안의 김옥균 등 주도 세력과 행동 대원들의 행적을 찬찬히 추적해 본 결과, 갑신정변의 주체는 김옥균·박영효 등 개화당 세력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갑신정변 연구>(박은숙 지음, 역사비평사 펴냄), <추안급국안 중 갑신정변 관련자 심문·진술 기록>(아세아문화사 펴냄)).

 

다만 당시 일본으로서는 임오군란 이후 위축된 자국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서 정변을 지원했을 것이고, 김옥균 등은 정변 성공을 위해 (결국 패착의 카드가 된) 일본의 군사 지원을 받아들였다고 본다. 동상이몽의 카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박영효 저택 매도, '거사 자금 지급 위장용'인가?

 

나는 박영효 집 매도 자금의 정변 투입 가능성을 언급했는데, 그는 이를 거사 자금 지급 위장용으로 해석하고 있다. 박영효의 집을 일본에 판 것을 두고, "거사 자금 지급을 위장하기 위해 조작한 것"이라고 언급했다. 그러면서 왜 팔았지? 집을 비워줬나? 공사관에서 어떤 용도로 썼나? 하고 묻고 있다. 이 또한 '그럴싸한' 추측이다. 어쨌든 하나하나 짚어보자.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박영효 가옥 매매는 당시 일본 서리공사 시마무라(嶋村久)와 조선정부 외아문독판 민영목 사이에 공문서로 처리되었다는 점이다(<구한국외교문서 1권>, 106쪽). 양국 간 공식 문서로 처리된 사안이 '위장'용이었을지는 매우 의문스럽다. 그것도 '역적'들의 '거사 자금 지급' 위장용으로 말이다.

 

왜 팔았을까? 그에 대한 직접적 설명이 없어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지만, 무언가 큰 목돈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가옥을 판매한 시점이나 박영효의 현실적 입장 등을 고려해 보면, 그의 위장설보다는 정변 자금설이 훨씬 더 그럴싸하게 보인다.

 

집을 비워주었나? '비워주었다'는 기록은 보지 못했지만, 집을 팔았으면 당연히 집을 비워 주는 게 상식이 아닐까? 김기협은 이러한 상식을 인정하지 않고 '위장'으로 해석하고자 하지만, 현실은 상식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박영효의 집을 매입한 일본 공사관은 3월 21일(양력 4월 16일) 그곳으로 이전했다. (개항 후 일본공사관은 淸水館(현 천연동)에 있었는데, 임오군란 때 민중의 공격으로 불에 타버렸다. 그 후 남부 진고개의 李鍾承 집(현 충무로2가)을 임시 공사관으로 사용하다가 1883년 말 박영효의 저택을 매입하여 이전했던 것이다.)

 

그리고 15만원을 투입하여 오구라(大倉組)에게 맡겨 공사관 건립 공사를 시작했으며, 9월 16일(양력 11월 3일) 완공했다(<경성부사 2권>, 573~575쪽). 이 건물을 지어놓고 일본인들은 "경성 최초의 양식 2층 건물로, 당시에는 굉장히 아름답고 화려했다"고 자랑을 늘어놓았으나, 한 달 후 갑신정변 때 민중들의 공격으로 소실되었다. 당시 박영효의 집은 대지가 2177평에 달하였는데, 현 천도교중앙대교당 부지(1215평)의 2배 정도에 달했다.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1884년경 박영효의 부인과 가족은 압구정 근방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윤치호를 비롯하여 개화당 동지들이 압구정으로 박영효를 찾아가 술을 마시고 시국을 논하곤 했던 기록이 나온다.

 

양국 간 외교 문서와 일본 공사관의 이주, 공사관 건물 신축 등을 보면, 박영효 가옥의 매도는 위장이 아니라 실거래였음을 알 수 있다.

 

'일본 자객' 쇼시마를 그대로 드러내다!

 

김기협은 조동걸의 책을 인용하여 "부산에서 조선어를 배우며 훈련 중이던 일본 청년들이 정변에 대거 가담했다가 피살당한 사실"을 '식민사학자들이 무시'했던 것처럼 똑같이 무시했다고 나를 질책한다.

 

나는 일본 자객의 참여를 무시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자료에 등장하는 참여자 이름까지 밝혔다. 책 104쪽을 보자.

 

민영익이 밖으로 나오자 김옥균의 핵심 참모인 유혁로(柳赫魯)가 이끄는 일본인 자객 쇼시마(小心和)가 큰 소리를 지르면서 먼저 찔렀고, 그 옆에 있던 행동대원 윤경순과 이은종도 민영익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실제 갑신정변에 참여한 일본인 자객은 한 사람 보인다. 그것도 우정국연회장에서 민영익을 공격할 때만 보이고, 그 이후 일본인 자객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물론 정변 도중에 죽지도 않았다. 각종 연대기 자료는 물론, 갑신정변 때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한 행동대원들의 행적과 진술을 꼼꼼히 검토한 결과다.

 

또 그는 "부산에서 조선어를 배우며 훈련 중이던 일본 청년들이 정변에 대거 가담했다가 피살당한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데, 부산에서 조선어 배우던 일본 청년들이 정변에 대거 가담한 직접적 자료가 있는지를 되묻고 싶다. 서울을 무대로 한 정변 과정에서 일본 청년의 '대거 참여' 모습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당시 갑신정변의 소식이 알려지면서 서울과 각지에서는 유언비어가 난무했으며, 백성들은 "왜놈 죽여라, 역적놈 잡아라"고 외치면서 길거리를 휩쓸었고, 일본인과 개화당 관련자들을 살해하려 했다. 이때 맞아죽거나 칼에 찔려 죽은 일본인들이 38명에 달했으며, 수원에서 상경하던 군인 이소바야시(磯林眞三) 등도 있었다. 혹 백성들에 의해 살해된 일본인들에 대한 설이 잘못 전해진 것 아닐까 짐작해본다.

 

김홍집 vs. 김옥균

 

나의 김홍집 '처신' 발언에 '화'가 났다고 한 것을 보면, 김기협은 김홍집에 대한 애정이 각별한 것 같다. 우선 그는 정변 때 인사에서 김홍집의 한성판윤 임명을 두고 '배려가 아니라 재앙'이라 한다. 그럴 수도 있다. 정변이 실패한다면….

 

그러나 권력을 장악하고 인사를 단행할 단계에서 김옥균은 정변의 실패를 예상하지 못했다. 따라서 '꼴 보기 싫은 놈'에게 악의적으로 '감투'를 씌운 것은 아니라고 본다. 내가 본 김옥균은 적어도 그렇게 옹졸한 인간 유형은 아니다.

 

그리고 김기협은 윤치호의 경우를 예로 들었는데, 윤치호와 김홍집의 경우는 차원이 다르다. 윤치호는 거의 매일 개화당 세력과 정사를 의논하고 어울렸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개화당원으로 취급했지만, 김홍집은 연배도 많았을 뿐만 아니라 개화당 세력과 거의 어울리지 않았던 사람이다.

 

나는 김홍집을 직접 연구한 바 없지만 그의 이력을 대략 들여다보면, 1880년에 수신사로 일본에 갔다 귀국할 때 중국인이 지은 <조선책략>이라는 책을 가져왔는데, 친(親)중국·결(結)일본·연(聯)미국을 주장하는 내용이었다. 이는 당시 '유교 질서'를 주장하는 유생들의 거센 반발을 초래하여 만인소 사건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갑오개혁 때는 일제의 무력으로 탄생한 군국기무처 총재가 되어 각종 개혁 정책을 펼쳤는데, 왕권 축소와 신분제 폐지 등 '유교 질서'와는 거리가 있는 것들이었다. 그가 주도한 일련의 개혁은 왕권을 지키려는 고종의 반감을 불러일으켰으며, 갑신정변 때 김옥균 등이 주장했던 변법적 개혁 노선과 거의 흡사했다.

 

나는 일제의 무력을 배경으로 한 점은 안타깝지만, 김홍집 내각의 개혁에 긍정적 시각을 갖고 있다. 다만 김홍집의 일련의 행적은 김기협의 말처럼 '신하의 본분을 지키는 자세'나 '유교 질서 속에 죽음을 맞은 것'과는 거리가 있다는 생각이다. 김홍집이 왜 '고종의 살해 명령'을 받았는지, '왜대신(倭大臣)'으로 지목되어 살해되었는지, 그 배경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김홍집의 행적 속에서 '유교 질서'를 지키려 한 것도, '신하의 본분'을 지키려 한 것도 찾기 어려웠다. 오히려 '시세(時勢)'에 영합한 기회주의적 처신에 가까운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하여 김홍집을 비난할 생각은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세에 영합하면서 살아가기 마련이고, 김옥균처럼 자신의 신념을 위해 모든 것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은 소수이기 때문이다.

 

유교 질서를 버린 김옥균 vs. 유교적 전통 위의 개혁 추구

 

김기협이 말하는 '유교 질서'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지만, 대략 당대를 지배하던 성리학적 유교 이념에 바탕을 둔 질서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가 매우 강조하는 '유교 질서'에 관련된 언급을 보자.

 

저자는 조선 쇠퇴의 원인이 유교 질서에 있다고 하는 100년 전 일본인들의 식민사관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그러니 개화파의 정책과 노선이 유교 질서를 해치는 측면에서 아무 문제도 느끼지 않고, 김홍집이 유교 질서에 목숨 바친 의리를 김옥균에 대한 개인적 의리보다 사소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나는 조선 쇠퇴의 원인이 유교 질서에 있다고 한 바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유교적 충효를 실현하려 했던 김옥균의 유학자적 면모에 주목했다. 갑신정변 또한 유교적 질서를 벗어나 단절된 변화를 추구한 것이 아니라, 전통의 토대 위에서 전개된 개혁이었음을 밝혔다.

 

김옥균이 유교의 공리공론을 경계하고 모순을 비판했다고 해서, 그것이 곧바로 유교의 부정과 파괴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김옥균·박영효 등이 유교 자체를 부정하거나 파괴하려 한 흔적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오히려 김옥균은 중국과 조선의 옛 전통을 예로 들어 개혁의 합당함을 설득하려 하였으며, 박영효는 "유교를 다시 치성(熾盛)하게 하여 문덕(文德)을 닦으면, 국세(國勢)가 또한 이로 인하여 다시 성(盛)하게 될 것을 기대할 수 있다"고 하였다. (…) 그들은 당대 최고의 문벌 양반 출신들로서, 태어날 때부터 지배 계급의 이데올로기인 유교적 예의와 법도를 익히고, 유교 경전과 시문을 배웠다. 그들과 유교 문화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었다. (71~73쪽)

 

일반적으로 갑신정변은 전통적 사회 제도와 조직, 사상까지도 타파하려 한 혁명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갑신정변의 개혁안들은 전반적으로 전통의 바탕 위에서 근대적 제도를 수용하려 한 것이었으며, 기존의 봉건적 지배 질서를 파괴·전복함으로써 새로운 질서를 창조해 내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 기존의 제도와 틀을 유지하면서 근대적 제도와 운영 방식을 필요에 따라 선택적으로 도입하려 하였다. 그들은 개량적 개혁의 방법론을 채택한 것이다. (118쪽)

 

이 책에서 저자는 많은 사람들이 김옥균 등에 대해 갖고 있는 "전통적 유교 질서를 얼른 내다 버리고 근대성에 매달리는 사람"이라는 지독한 편견과 달리, 김옥균의 유학자로서의 면모에 주목하고, 유교적 전통의 토대 위에서 근대적 제도를 수용하려 한 갑신정변의 성격을 강조했다. 그런데 평자는 왜 나의 견해를 전통과의 단절론에 연결시키면서 식민사학으로 몰고 가는 것일까?

 

오직 권력만을 좇았던가?

 

갑신정변의 개혁안인 정령(政令)은 '마구 써 갈긴 것'에 불과한가? 아니다. 자신들의 구상을 조율한 것이라고 하는 게 적절하다고 본다. 당시 정령은 국왕의 명령인 '전교(傳敎)'의 형태로 나가고 있었기 때문에, 김옥균·박영효·홍영식 등의 개화당 세력과 이재원 등의 종친, 신기선 등의 관료들이 모여 박영교 등이 작성한 초안을 검토하고 다듬었다. 그의 말처럼 '마구 휘갈긴'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개혁 구상을 형식과 절차에 따라 재정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망명 시 동지들 간에 신분을 경계로 차별한 것은 이규완의 지적대로 '계급 사상의 폐단'을 바로잡는 행태가 아니었으며, 비판받아 마땅하다. 나 또한 그 부분을 지적했다. 그러나 역으로 생각하면, 세칭 '아랫것들'이 '감히' 대감들에게 차별적 대우에 항의하고, 대감들 또한 '아랫것들'의 문제제기에 수긍하고 사과할 줄 아는 평등 인식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은 평가할 만하다 하겠다. 참고로 개혁안의 '인민평등권' 주장은 인권의 측면보다는 부국강병 달성을 위한 국가 경영자의 입장이 우선적으로 반영된 것으로, 병역·조세·교육의 평등을 우선 시행하려 한 것으로 보고 있다.

 

김기협은 "민영익의 권세에 대한 질투심이 김옥균에게는 최대의 동기였다"고 한다. 주어가 생략되어 있어 무엇의 동기였는지 확실치는 않지만, 아마 갑신정변의 최대 동기를 민영익에 대한 질투심으로 보는 게 아닌가 싶다. 이러한 인식에 동의하기 어렵지만, 나는 '권세에 대한 질투심'이라면 김옥균의 민영익에 대한 것이 아니라, 민영익과 민 씨 일파의 김옥균에 대한 질투심이 작렬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당시 정치 마당에서 기득권을 차지하고 있던 민영익과 민 씨 일파는, 고종의 지원을 받아 나날이 영향력을 확대시켜 권력의 핵심에 접근해 오는 김옥균과 개화당 일파를 두고 볼 수 없었다. 이에 치도사업(治道事業)과 신식 군대 양성 등 개화당의 정책을 사사건건 중단시켰고, 특히 김옥균을 '집어삼키려' 했다. 이러한 정황은 "민영익·윤태준 등 민 씨 일파가 고종과 소원해졌다"고 한 원세개의 보고문 등에도 잘 나타나 있다.

 

그는 김옥균의 일생이 수미일관 권력으로 설명된다 했다. 상당 부분 공감한다. 시대불문하고 정치 무대에 선 사람들은 생리적으로 권력을 향해 움직인다. 자신 또는 당(黨)의 정책구상과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현실적으로 권력의 바탕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를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

 

다만 권력을 어떻게 행사하고, 어떤 정책을 폈는지, 어떤 사회를 만들려고 했는지, 개인의 부귀영화를 위한 것인지, 국가와 사회의 발전을 위한 것인지 등의 기준을 적용하여 평가해야 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김옥균은 개인의 부귀영화보다는 조선의 부국강병, 개화와 자주 독립을 실현하기 위하여 권력을 장악하려 했다고 생각한다.

 

'정황'에 기초한 '식민사관' 비판과 그 위험성

 

김옥균의 사상과 개혁 구상의 핵심은 '개화'와 '자주 독립' 두 가지로 압축될 수 있으며, 죽을 때까지 그를 지배한 화두였다. 또한 자본주의 세계 체제에 편입된 당대의 시대적 과제이자 조선이 나아가야 할 지표이기도 했다.

 

김옥균이 추구했던 개화와 자주 독립은 오랫동안 "반(反) 유교, 전통과의 단절, 친일"이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김기협의 지적대로 "식민사학이 오랜 기간에 걸쳐 갑신정변을 극도로 미화"하고, 김옥균을 근대성의 선전 도구로 악용했기 때문에 그러한 평가가 더욱 고착화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식민사학이나 김기협이나 김옥균과 갑신정변에 대한 시각은 "반(反) 유교, 전통과의 단절, 친일"이라는 점에서는 거의 동일하다. 다만 평가는 상반된다.

 

그러나 내가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김옥균은 유교의 공리공론을 비판하고 실사구시를 강조했지만, 결코 유교를 부정하지 않았다. 최후 순간에도 <자치통감>을 읽을 정도로 유학자적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갑신정변 또한 기존의 제도와 틀을 유지하는, 전통의 바탕 위에서 근대적 제도와 운영 방식을 선택적으로 도입하려 했다.

 

친일 문제와 관련하여 갑신정변 때 일본군을 끌어들인 것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김옥균은 외세의 이용이라는 측면에서 끌어들였겠지만, 아무리 '주체적'이라 해도 외세를 끌어들인 위험성은 비판받아야 하며 저자 또한 비판했다.

 

갑신정변 당시 김옥균은 조선에 식민지적 권력을 행사하는 청을 몰아내기 위한 반청(反淸) 독립에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또한 굳이 친일·친미 등 '친'자를 붙이자면, 일본 공사보다는 미국 공사와 더 친했고, 친미 쪽에 더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망명 후에는 일본 정부의 냉대 속에 이곳저곳으로 유배되면서 냉엄한 국제 질서를 다시 보았으며, 중국과 러시아의 역할에 주목하면서 오히려 '반일적' 성향을 띠어갔다. 또한 중국을 맹주로 한 조선의 중립국 방안을 주장하기도 했다. 따라서 일본 정부로서는 김옥균의 주체적 자주독립론의 '위험성'을 묵과할 수 없었기 때문에 김옥균 암살 모의를 방조하고 협조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러한 나의 입장을 책의 곳곳에서 강조해 왔다. 하지만 김기협은 아랑곳하지 않고 개화파를 "전통적 유교 질서를 얼른 내다 버리고 근대성에 매달리는 사람"으로, 갑신정변의 주체는 일본 공사이며 김옥균은 일본 공사의 "지시를 얻기 위해 쫓아다닌" 자로 이해한다.

 

그러나 그 주장의 근거가 '정황 증거'와 '감'이라는 점에 심각한 문제점이 있다. 김기협이 수시로 들이대는 '식민사학'의 문제점을 극복하려면, 치밀한 논증과 자료적 뒷받침 아래 논리적 반박이 이루어져야만 공감대를 이끌어낼 수 있다. 그런데 정확한 논증과 자료적 뒷받침 없이 '정황 증거'와 '감'을 들이댄다면, 오히려 상당한 실증적 자료에 기반 한 식민사학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김기협의 '정황 증거'에 의한 식민사학 비판은 공감대를 형성하기는커녕, 역설적으로 식민사학의 정당성을 인정해 주는 매우 위험한 태도로 보인다. 개인적으로 말하자면 아직도 사사건건 식민사학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 또한 참으로 안타깝게 생각한다.

 

이처럼 김옥균과 갑신정변을 바라보는 입장은 '거의 상반된 시각'을 갖고 있다. 김기협은 그것을 '유교 질서에 대한 관점의 차이'로 언급하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역사를, 전환기 근대 변혁 운동을 읽어내고 해석하는 방법론과 인식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된다.

 

/ 프레시안.

 

 

 

 

[뉴 다큐 | 잃어버린 근대를 찾아서]

 

비상한 시대 특별한 재주 아쉬운 죽음

 

1920년대 서울

 

● 지난 회 이야기

1920년 봄, 조선인에 의해 창간된 신문에는 1년 전 장례를 치른 고종 황제의 이야기가 뒤늦게 실려 있다. 고종의 죽음과 국장 당시 조선인은 그 소식을 오로지 총독부신문 매일신보를 통해 들었다. 그때 국장행사에는 조선과 일본의 주요 인사들이 총집결했다. 장의행렬의 군병력은 조선군사령관 우쓰노미야 타로가 지휘했다. 놀랍게도 그는 3·1독립선언이 있기 이틀 전에 선언문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의 하나인 권동진과 만났다. 그는 조선인 재일망명객들과도 가까이 지냈다.

 

 

김옥균.

 

 

김옥균(金玉均)은 10주기를 맞아 비로소 무덤에 비(碑) 하나를 얻었다. 1904년 3월에 세워진 그 비의 후면을 가득 채운 비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비상한 재주를 가졌으나 비상한 시대를 만나 비상한 공도 없이 비상한 죽음을 맞이하였다….’

 

글은 박영효(朴泳孝)가 지었다고 말미에 새겨 있다. 1000자에 가까운 비명(碑銘)의 끝 문장은 이렇게 되어 있다.

 

‘그와 생사를 같이한 정리가 있다 하여 내게 글을 청하였다. 눈물로 먹물을 삼아 후세인들에게 고해 그가 비상한 사람이었음을 알린다.’

 

글씨는 이준용(李埈鎔)이 썼다고 되어 있다. 박영효의 이름 앞에는 정1품 금릉위(錦陵尉)라는 칭호가 붙어 있다. 박영효 다음에 새겨진 이준용의 이름에는 종2품이라는 감투가 씌워 있다. 대원군의 장손자인 이준용의 품계에 대비하면 박영효의 지위의 높음이 절로 실감된다. 이준용은 고종의 장조카이지만 박영효는 고종의 선대 임금인 철종의 사위다. 그것도 무남독녀 외동딸과 혼인한 부마도위(駙馬都尉). 13세의 옹주는 비록 3개월도 채 못 지내고 11세의 신랑과 사별했지만 금릉위 정1품 상보국숭록대부(上輔國崇祿大夫)의 눈부신 직함은 평생의 동반으로 박영효의 곁에 살아 있다.

 

비가 선 곳은 도쿄(東京) 도심의 공원묘지 내 외국인묘역이다. 33세 때부터 나라 밖으로 나가 살던 김옥균은 죽어서도 제 나라에 묻히지 못했다. 죽어 귀국한 몸의 사지는 절단되어 땅바닥에 나뒹굴며 뭇 동포의 구경거리가 되다가 형체도 없이 지상에서 사라졌다. 그 유해의 일부를 일본인 추종자가 몰래 수습해 일본으로 날라다 무덤을 만들고 절에도 안치했다. 그렇게 10년이 흘러 마침내 동족에 의해 비명을 새긴 비석을 갖게 된 것이다.

 

너비 1m의 비석은 자연석의 거친 질감을 살려 위로 가며 약간 좁아지다 3m가 되는 끝 높이에서 예각을 이루며 마감되어 있다. 어떤 사람은 거기서 하늘을 향해 뻗은 묵직한 칼을 연상한다. 칼날은 부러진 듯도 하고 아닌 듯도 하다. 심지어 광개토대왕비의 축소판을 떠올리는 이도 있다. 두께가 얇아서 그렇지 앞뒷면만 보면 가로 세로 길이나 거기 쓰인 글자 수는 반도의 북쪽 광개토대왕비의 절반가량 된다. 흐린 날에 멀리서 보면 야윈 승려의 모습이 떠오른다는 시각도 있다. 그것은 갸름한 얼굴에 날씬한 몸매로 알려진 김옥균의 실루엣을 닮았다는 것이다. 상하이에서 그의 사체를 검시한 보고서는 그의 신장을 155㎝로 적고 있다. 비석은 그의 키 두 길 정도가 되는 셈이다. 그는 불교에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불교 대하기를 비 맞은 중 보듯 하는 조선 지배층의 유교 근본주의 풍토에서 보면 김옥균은 이 점에서도 이례적이었다.

 

 

조선에선 무덤도 불가

 

광개토왕비가 압록강 너머 간도에 있는 것은 그렇다 치고 김옥균의 무덤과 비는 왜 바다 건너 도쿄에 있는가. 조선 땅에는 그의 무덤을 만들 수 없었기 때문이다. 상하이 객잔에서 동족의 총을 맞고 청나라 기선에 실려 서해를 건너 월미도에 기착하고, 다시 조선의 배로 옮겨져 인천을 거쳐 한강을 거슬러 만선의 조기 배처럼 환호 받으며 경강으로 들어와 양화진에 부리어 능지처참된 그의 흩어진 몸을 내려다보며 장대 위에 걸린 그의 머리에는 대역적임을 알리는 팻말이 봄날의 강바람에 한참을 흔들렸다. 그의 죽음에 기뻐하는 사람은 많아도 슬퍼하는 사람은 적었다. 슬퍼할 사람은 이미 죽거나 숨거나 도피해 보이지 않았다.

 

갑신년에 정변을 일으킨 그는 갑오년에 주검으로 귀환했다. 그 사이 10년 세월을 그는 일본에서 살았다. “나는 인천으로 절대 안 간다”는 임금을 달래고 달래다가 나르는 총탄 속에서 마침내 갈라져 서울을 빠져나가 인천에 정박 중인 일본 기선을 타고 배 밑창에서 며칠 밤낮을 뒹굴며 혼미해진 심신으로 일본에 상륙해 시작한 망명 생활은 실의와 낙담의 연속이었다. 다시 말해 상갓집 개 신세라고 하는 것이 어떤 처지인지를 몸소 체험하는 세월이었다.

 

도쿄에서 장차 그의 무덤이 되는 곳 가까이에 살던 그는 도쿄 남방 1000㎞ 떨어진 최남단 절해고도로 유배돼 태평양의 아열대 원시림 속에 생존하게 된다. 겨울에도 눈 볼 일 없고 1년 내내 습기 속에 류머티즘을 앓으며 돌고래를 길손처럼 보며 지냈다. 오가사와라(小笠原)-듣도 보도 못한 이름의 그 섬에는 주민 38명이 살고 있었다. 조선이 일본에 개항을 하던 1876년에 일본령이 되어 본토민의 이주가 막 시작된 곳이었다.

 

정변을 일으키기 전해에 김옥균은 동남개척사(東南開拓使)가 되어 동해 바다 고래잡이 업무를 관장한 경력이 있다. 조선 건국 이래 처음 생긴 이 직책을 수행하면서 그는 울릉도에 불법 체류해 벌목을 일삼던 일본인 255명을 철수시키고 본토인의 울릉도 이민을 추진했다. 2차에 걸쳐 16가구의 조선주민 54명이 그때에 이주했다.

 

동해와 태평양은 완전히 다른 바다였다. 오가사와라 섬에서 그의 상대는 주로 동네 아이들이었다. 정약용 정약전 형제의 80수년 전 귀양살이와는 차원이 또 다른 것이었다. 그곳 일본 최남단을 2년 만에 겨우 벗어나자 이제는 최북단 홋카이도(北海道)로 옮겨져 한없는 눈과 냉기로 류머티즘이 골수에 사무치는 경험을 한다.

 

그 속에서 북해도의 이민 개척 행정기관인 개척사(開拓使)가 활발히 추진하고 있던 농장일도 난생 처음 경험하게 된다. 그가 회고록에서 자주 쓴 표현대로 “그 숱한 일을 다 적을 수는 없다.” 일본 영해의 광대함과 사방으로 경계를 확장해나가는 일본의 활력을 최일선에서 그처럼 생생히 체험한 조선인은 그 이전에 없었다. 1881년부터 갑신정변 이전까지 사절단에 끼어 도쿄를 몇 차례 방문하면서 받았던 충격과는 또 다른 경험이었다. 북해도 식민 개척의 대본영인 삿포로에는 개척사가 직영하는 맥주 양조장도 가동되고 있었다. 독일에서 맥주 제조법을 배워와 1876년부터 생산을 개시한, 개척사의 상징인 빨간 북극성 마크를 단 삿포로 맥주였다.

 

 

10년 만의 귀국

 

남과 북 양극을 오가면서도 김옥균이 가장 오래 산 곳은 도쿄였다. 후쿠자와 유기치(福澤諭吉)를 위시해 그와 친교를 나누는 후원자들이 다들 거기에 있었고 망명 생활 중 중요한 일이 있었다면 대개 거기서 이루어졌다.

 

도쿄에 거주하는 조선인은 그 말고도 많이 있었다. 같은 배로 온 박영효와 갑신정변의 행동대원들은 물론 12년 뒤 그가 죽고 난 다음에 건너온 이준용도 그 하나였다. 두 사람이 김옥균의 비문을 쓰게 된 이유 중 하나는 무엇보다 두 사람이 재일 망명객이었다는 데 있다. 그들이 비명을 써서 유족에게 준 1904년 2월은 일본 육군 선발대가 인천에 상륙해 서울로 들어가고 해군이 요동반도 여순(旅順)의 러시아함대를 공격함으로써 러일전쟁이 개막한 시점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러시아가 거꾸러지지도 않은 이상 조선 내에 김옥균의 비문을 쓰겠다고 나설 사람은 없어보였다. 갑오년의 청일전쟁과 갑진년의 러일전쟁 사이 10년간 조선 내 지배 권력은 러시아를 중심으로 돌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김옥균이 살해되고 곧 청일전쟁이 발발해 청국의 10년 지배가 끝났고, 그의 사후 10년 만에 비문이 세워질 때 러일전쟁이 일어나 러시아를 몰아내려 하고 있다.

 

박영효와 이준용은 도쿄 거주 조선인 중 단연 최고급 신분이었다. 박영효는 김옥균과 목숨을 걸고 쿠데타를 벌인 갑신정변의 동지다. 김옥균은 1884년 이래 10년간 일본생활을 견디다 못해 마지막 돌파구를 상하이에서 찾아보려다 무덤으로 걸어 들어간 격이 되고 말았다. 함께 일본으로 건너온 박영효는 김옥균이 비명에 가고 불과 5개월 뒤인 1894년 8월 조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청일전쟁 발발로 급변한 정국의 분위기가 그를 불렀다. 청나라 군대를 조선에서 몰아내기 위해 조선은 일본군을 돕는다는 내용의 군사동맹이 체결되기 3일 전이었다. 10년 뒤 러일전쟁을 맞아 일본이 강요한 공수동맹과 같은 식이었다.

 

박영효를 고종에게 강력 천거한 내무대신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백작은 박영효 귀국 두 달 뒤 신임 일본공사로 부임했다. 그는 10년 전 박영효에게 정변을 일으켜보라고 부추긴 장본인이다. 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로부터 조선 문제에 관해 전권을 위임받고 특파된 그는 역대 조선 주재 일본 공사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초중량급 인사였다. 두 번째로 총리직을 맡아 청일전쟁을 지휘 중이던 이토 히로부미는 이노우에와 동향으로 친구이자 동지였다. 1885년 말 일본에 내각제도가 탄생하고 초대 내각 총리대신으로 이토가 임명되었을 때 이노우에는 외무대신이었다.

 

33세의 김옥균과 23세의 박영효가 일본으로 도피한 지 1년 되던 때였다. 이토와 이노우에는 그로부터 23년 전 에도(江戶)에서 영국공사관 방화사건을 벌이며 서양 오랑캐 배척(攘夷)운동에 적극적이었다. 그러다 다음해 둘은 함께 영국 유학을 떠났다. 스스로의 무력함을 깨닫고 외국에 대해 제대로 알아야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은 열렬한 개국파로 변신했다. 신임 공사 이노우에는 그의 부임과 박영효 귀국 사이에 이미 평양성 전투를 승리로 이끈 제1군 사령관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와도 고향 친구였다. 일본 육군의 창설자로 불리는 야마가타는 이토가 총리를 네 차례 역임하는 사이사이에 두 차례 총리를 지냈다.

 

 

갑신에서 갑오로

 

그렇게 귀국한 박영효는 10년간의 대역무도(大逆無道) 죄인에서 벗어나 7개월간 내부대신을 지냈다. 고종과 민비로부터 실권을 부여받은 박영효는 10년간의 원을 풀기라도 하듯 개혁을 추진해나갔다. 이른바 제 2차 갑오개혁이라 불리는 이 기간에 213건의 개혁안이 제정되고 시행되었다. 하루 한 개꼴로 새로운 법안과 규칙이 만들어졌는데 그중 3분의 1에 박영효의 서명이 들어있었다.

 

총리대신 김홍집의 반발을 사고 심지어 이노우에 공사로부터도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며 과감하게 몰아치는 박영효의 개혁조치는 3개 파로 분열 대립하던 조정의 분위기를 더욱 술렁이게 했다. 마치 갑오년이 아니라 갑신년으로 되돌아간 느낌마저 있었다.

일찍이 일본 망명 중에도 박영효는 지치지 않고 국왕과 대원군에게 서신을 보내 개혁조치를 촉구한 바 있다. 그중 고종에게 보낸 1888년의 상소문은 그 길이가 한문으로 1만3000자에 달했는데 총론에 이은 8조의 각론은 114항목에 이르렀다. 4년 전 갑신년에 미처 펴지 못한 개혁정책의 기본구상이 총정리되어 담겨 있었지만 책 한 권 되는 분량의 그 글을 조정의 누가 펼쳐보았는지는 확인할 바 없다. 이제 두말 할 것 없이 그 모든 것을 실행에 옮길 기회가 왔다. 바쁠 수밖에 없었다. 마음은 조급하고 행동은 과격했다. 의정부가 내각으로 바뀌고 아문(衙門)이 부(部)로 변경됨과 동시에 모든 제도가 근대화되었다. 그 모범은 일본식 근대화였다.

 

 

갑신정변의 주역인 김옥균(앞줄 왼쪽에서 네 번째)과 동지들.

 

 

이 와중에 박영효가 처리한 사안 중 하나가 이준용을 체포해 심문한 일이다.

 

그동안 이준용은 자신을 국왕으로 추대하려는 대원군의 계획에 여러 차례 동원되었고 계획은 번번이 실패했다. 차남인 고종과 민비를 폐위시키고 장남의 아들 준용을 왕위에 앉히려는 대원군의 기도는 갑오년 동학농민봉기와 청일전쟁의 발발 이래 그가 권력의 전면에 다시 들고 나면서 더욱 뚜렷해졌다. 그해 말 대원군의 실각 후 주일특명전권공사로 나가라는 제의도 거절하고 국왕 반대파의 상징처럼 버티고 있는 이준용을 박영효는 을미년 봄 민비의 명에 따라 잡아들였다. 이준용 파의 정적 하나가 암살된 사건이 꼬투리가 되었다. 갑신정변 당시 행동대로 활약한 박영효의 집사 출신 이규완(李圭完)이 체포와 수사를 맡았다. 그는 박영효를 따라 일본으로 갔다가 박영효를 따라 돌아와서 경무관이 되어 있었다. 그는 갑신정변 전해에 서재필과 함께 일본 군사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고 함께 귀국해 궁정 쿠데타에서 행동대장 서재필을 도와 요인을 제거하는 무력을 행사했다.

 

이준용은 혹독하게 취조받았다. ‘매천야록’에 황현은 이렇게 기록했다.

 

 

이준용이 국문을 받을 때 서광범이 신문에 임했는데, 온갖 고문을 가하여 발가락이 다 떨어져나갔다. 이준용은 항의하여 외치기를 “오직 속히 죽기를 바랄 뿐이다. 더 할 말이 없다”고 하였다. 옥졸들도 다 눈물을 흘렸다.(…)

 

신문이 진행되는 동안 대원군 이하응은 의금부 정문에서 기다려야 했다. 임금은 궁내부 관원을 보내 매일 세 번 그의 거동을 살피게 하였다. 마침 점심때가 되어 모시는 자가 콩죽과 절편을 올렸다. 이때 고문을 가해 두들겨 패고 큰 소리로 울부짖는 소리가 앉은 자리에까지 들려왔다. 이하응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죽을 후룩후룩 다 먹고는 소반에 떨어진 콩가루까지 젓가락으로 떡을 집어 묻혀 말끔히 먹었다. 이 노인은 정말 무서운 사람이다 ―그를 본 사람이 내게 전해준 말이다.

 

 

이준용은 특별재판소에 세워져 사형판결을 받았다. 격분한 대원군은 재판소로 뛰어갔으나 입장조차 할 수 없었다. 인근 민가를 얻어 숙식하며 대원군은 항의 농성을 벌이며 이를 갈았다고 한다. 을미사변 5개월 전의 일이다.

 

“이준용의 이름이 죄인의 진술에서 나왔으니 대질 조사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법무아문에서 잡아오도록 하고 특별법원을 설치하여 신문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렇게 처음 국왕에게 보고한 법무대신은 서광범이었다. 박영효와 동시에 10년 만에 미국에서 돌아온 서광범은 박영효를 도와 사법제도 개혁에 여념이 없었다. 일본으로 도주했을 때 갑신정변의 4인 중 김옥균만 일본에 남고 3인은 미국으로 향했었다. 제일 어린 서재필은 비교적 잘 현지 사정에 적응해나갔고 서광범은 외롭게 연명해갔다. 박영효는 도무지 적응이 안 되었던지 “양반을 몰라보는 나라”라는 말을 남기고 이내 일본으로 되돌아갔다.

 

그로부터 10년 뒤, 미국에서 영양실조로 폐병을 앓고 있던 서광범은 뜻밖의 귀국명령을 받고 일본 정부에 뱃삯을 빌려 귀국했다. 귀국하기 1년 전 미국에서 그를 본 윤치호는 1893년 8월 13일 일기에 그 나름의 시각으로 이렇게 썼다.

 

“서재필은 인색하고 이기적이고 비애국적인데 행복하게 살아가고, 서광범은 관대하고 애국적이고 정이 깊은데 근근이 살아가고 있다.”

 

서광범은 굳이 따지자면 서재필의 11촌 아저씨뻘이었다. 박영효와 서광범이 귀국해 활동한 지 5개월째 되던 때 외무협판 자리를 제의받고 서재필은 응하지 않았다. 워싱턴에서 막 의사개업을 하고 신혼이었던 그가 귀국을 결심하게 되는 것은 몇 달 더 지나 재망명길에 미국을 들른 박영효에게서 조언을 듣고 나서였다. 11년 만에 서울에 들어온 서재필은 당시 기분을 훗날 이렇게 쓰고 있다.

 

“정부건 민간이건 서로 헐뜯고 죽이는 과거와 다름없는 조선적 광경을 목도하였다. 나는 속상하고 낙담하여 몰래 다음 배편으로 미국으로 다시 돌아가려 하였다. 그러나 유길준은 백방으로 나를 만류하고 이런저런 책임을 나에게 권하였다.”

 

서재필은 미국에서도 자주 얼굴 대할 일 없었던 서광범을 찾아가 만났다. 서광범은 공교롭게 일주일 뒤 미국으로 떠났다. 그때 1895년 말은 박영효가 다시 망명을 떠난 뒤여서 세력권에서 밀려나 있던 서광범은 미국공사 부임 형식을 빌려 나라 밖으로 고요히 밀려나는 중이었다. 그는 워싱턴에 부임한 지 얼마 안 되어 아관파천과 함께 들어선 친러파 내각에 의해 직위를 박탈당했고 지병이 도져 숨졌다. 김옥균이 상하이에서 피살된 지 2년 만이었다.

 

 

이준용 ·박영효·유길준

 

이준용을 극형으로 몰아가려던 계획은 김홍집-김윤식-어윤중으로 대표되는 중도 주류파의 진언을 감안한 고종의 결정에 따라 유배형으로 낙착되었다. 이준용의 할머니인 부대부인(府大夫人) 민씨가 궁궐에 들어가 자결을 시도하는 소동 끝에 작은 아들 고종을 압박해 겨우 맏손자를 살려낸 것이다. 일찍이 고종의 배필로 민비를 천거한 사람이 민씨 부인이었다. 그의 남동생 민승호는 민비의 양오빠로 입적해 민씨 척족의 수령으로 군림하게 되었고, 대원군이 권좌에서 밀려난 뒤에 집으로 배달된 폭탄에 민비의 아버지와 함께 폭사했다. 이준용에 대한 1895년 4월의 판결문은 이러하다.

 

 

이준용은 지난해 6, 7월경에 동학당이 곳곳에서 봉기하여 인심이 흉흉한 때를 타서 비밀 모의를 하고 동학당에 그 모의를 통고하여 경성을 습격하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성안의 백성들이 놀라서 소동을 피우고 대군주 폐하가 난을 피하여 다른 곳으로 피해갈 것이니 그때를 타서 그가 사령관으로 있는 신식군대 통위영(統衛營)의 군대들로 대군주 폐하와 왕태자 전하를 시해하고 한편으로는 정부 당국자들 중 김홍집 안경수 유길준 이윤용 등을 살해하여 정부를 전복하고 왕위를 찬탈하려고 꾀하였다. 그 뒤 동학당이 떨쳐 일어나지 못하고 무뢰배들도 많이 모집하지 못하여 모의가 중도에 차질을 빚게 되었다.

 

 

이준용은 몇 개월 뒤 특사로 석방되었다. 그리고 곧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해가 바뀌어 1896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이준용을 사법 처리한 뒤 박영효는 일본군 교관의 지도로 막 신설된 훈련대(訓練隊)를 군부대신으로부터 자기 휘하로 끌어들여 신속히 규모를 확대해나갔다. 그러면서 미국인 교관이 훈련시킨 시위대(侍衛隊)가 맡고 있던 궁정호위를 훈련대로 교체하려고 했다. 친러파 입김이 작용하는 시위대를 갈아치우고 왕실과 러시아의 접촉을 감시하려는 의도였다. 대세는 일본으로부터 급속히 러시아로 쏠리는 중이었다. 청국과의 전쟁에 이겨놓고도 러시아와 유럽 삼국의 간섭을 받아 전리품 요동반도를 무력하게 내주는 일본을 이제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분위기가 조정에 감돌았다.

일본공사의 후원으로 입각한 박영효와 서광범도 고종과 민비로부터 더 이상 존중받지 못하게 되었다. 그 무렵 ‘민비시해 음모’라는 괴소문이 흘러나왔다. 궁성호위대 교체 계획이 반역모의 혐의를 받은 것이다. 신임 경무사 안경수에게 박영효를 체포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훈련대에는 해산령이 하달되었다.

 

박영효는 일본공사관에 피신했다. 악몽의 갑신년과 유사한 상황이 10년 만에 다시 벌어졌다. 음모설을 빌미로 김홍집-김윤식-어윤중 그리고 신예 유길준으로 주축을 이룬 체제 중심세력에 밀려 제거되는 중이었다.

 

박영효는 쫓기듯이 용산에서 배를 타고 강을 따라 내려갔다. 인천으로 향하는 7월의 녹음 너머로 지난해 3월 김옥균의 넋 빠진 몸이 실려와 해체된 양화진 언덕이 올려다보였다. 돌아보니 그가 서울에 머문 기간은 채 1년도 되지 않았다. 그는 다시 일본 망명객이 되었다. 파면된 그를 대신해 유길준이 내무대신 서리를 차지했다. 그리고 민비가 시해되었다. 해산 위기에 몰린 훈련대의 간부 군인들은 일본공사관 수비대와 행동대와 대원군을 따라 경복궁으로 들어가 일을 벌였다.

 

권력과 고통을 주고받는 사이

 

 

‘서유견문’의 저자이자 개화운동가였던 구당 유길준.

 

 

을미사면 이후 박영효의 애초 소원대로 시위대는 훈련대에 편입됐다. 그러나 미국과 러시아의 압력에 밀려 훈련대는 결국 해산되고 시위대는 오히려 친위대(親衛隊)와 진위대(鎭衛隊)로 확대 개편되어 부활했다. 앙앙불락 대립하던 민비와 훈련대는 연이어 둘 다 사라졌다. 을미사변 당시 훈련대 1대대장 우범선과 2대대장 이두황, 3대대장 이진호를 비롯한 경복궁 투입 군인 간부 다수가 해가 바뀌어 아관파천 직후 일본으로 도피했다. 동시에 법부대신 장박, 군부대신 조희연, 경무사 권형진과 함께 내부대신 유길준도 일본군의 보호를 받으며 일본행 배에 올랐다.

 

그들과 별개로 이준용은 이미 일본으로 떠난 뒤였다. 이준용을 일본에 3년 유학 보내는 문제는 을미사변 며칠 전에 일본공사관과 대원군 사이에 협의된 사항이었다.

 

박영효가 떠난 지 반 년쯤 지나 이준용과 유길준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제각기 사정에 따라 일본에 도착했다. 서로 부담스러운 세 사람이 도쿄 일대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도쿄의 조선 망명객은 그 수가 점점 늘어나는 만큼이나 면면이 다채로워져 갔다. 그리고 이들은 박영효와 이준용과 유길준을 정점으로 하여 보이지 않는 계보를 지어가고 있었다. 몸은 도쿄에 있어도 마음은 다들 서울에 있었다.

 

두 번째 망명길에 오른 박영효와 초행길의 이준용은 그렇게 본의 아닌 재일 거류민이 되어 1904년에 이르러서는 김옥균의 비석에도 이름을 함께 보태는 인연이 되었다.

 

이준용은 일찍이 1884년 갑신정변에서 발표된 혁신내각의 명단에 그의 아버지와 함께 잠시 이름을 올렸다. 군주에 대한 충성이 여전함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왕실의 종친(宗親)을 포함시켜 구색을 맞춘 조각(組閣)에 일방적으로 포함된 것이었다. 박영효의 뜻인지 김옥균의 결정이었는지 알 길 없으나 거사를 벌인 개화당 요인들, 민씨 척족(戚族)을 제외한 중신들, 그리고 왕가의 종친들이 나열되는 그 명단의 맨 끝에 이준용은 세마(洗馬)의 직책으로 올랐다. 말을 닦는 일이 아니고 왕세자를 모시고 경호하는 정9품 직책이었다. 네 살 아래 사촌동생 이척(李拓)을 살피는 일이 이씨 왕가의 장손인 그에게 주어진 것이다.

 

“세자는 바른 사람을 보고 바른 말을 듣고 바른 도리를 행한다.”

 

옛말에도 있듯이 14세 나이에 첫 관직으로서 세마는 명예로운 직분이긴 했다. 부마(駙馬)처럼 세마(洗馬) 역시 흔치않은 직위임은 분명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그로서는 어떤 마음이었는지 알 수 없다. 대원군은 10년 권좌에서 물러난 1873년 이후 아들 고종과 적대관계였고 이준용은 늘 대원군에게 새로운 섭정의 기회를 안겨줄, 고종과 왕세자를 대체할 잠재적 대안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이준용이 부지불식간에 받은 이틀간의 직책은 결국 종이 문서에 불과한 채로 정변 실패와 함께 허공에 날아갔다.

 

일찍이 아버지 이재면(李載冕)은 장남이면서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7세 아래 동생 재황(載晃)이 고종으로 즉위하는 것을 지켜보며 평생 이인자로 물러나 살아야 했다. 그의 직책은 종1품까지가 천장이었다. 그 위로는 올라가지 못했다. 죽고 없는 선왕의 사위, 인연 끊어진 지 오래인 옹주의 부마라는 이력 하나로 정1품을 시종일관 유지하는 박영효에도 따라가지 못하는 처지다. 갑신정변의 내각 명단에서도 아버지 이재면은 박영효는 물론 서광범보다 아래였다. 고종의 사촌형인 이재원(李載元)은 자기 집에서 경황없이 진행된 조각의 결과 좌의정인지 영의정의 자리를 받았다고 했다. 역시 이틀 후에 사라지고 만 종잇 조각에 불과했지만 대원군의 장남이 대원군의 조카에게 밀리는 처지였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임금의 친형으로서 집안의 이인자도 되지 못하는 셈이다. 이준용 부자에 대한 고종의 경계심과 의도적 홀대는 비상시국에서도 풀어지지 않은 것이다.

 

일본으로 건너간 이준용은 2년여 유럽을 돌다 1899년 일본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해서 예정된 3년 기한이 지나도 귀국은 허용되지 않았다. 그의 유학 중에 할아버지가 유명을 달리하였다. 할머니를 뒤따라 한 달 간격으로 작고한 것이다. 부대부인 민씨는 남편과 아들과 며느리를 둘러싼 상호 고통이 손자 대에까지 유습되는 광경을 목도하면서 숨지기 1년 3개월 전에 조선 천주교회의 뮈텔 주교(민덕효· 閔德孝)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가 숨진 해 동학의 2대 교주 최시형이 혹세무민의 사교 집단의 괴수로 처형당했다. 최시형보다 더 왕권을 교란하는 위험인물로 간주되어온 대원군 이하응은 이제 아들을 몰아내고 손자를 군왕으로 추대하는 계획을 더 이상 꾸밀 수 없게 되었다. 3년 전 며느리를 제거할 때 이미 그의 정치적 수족도 함께 빠져버렸다.

그럼에도 격리 추방된 손자 이준용은 귀국할 수 없는 몸이었다. 1903년. 이준용은 일본에서 33세가 되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57세의 나이로 재혼을 했는데 신부는 스무 살이라는 소식이 서울에서 전해져 왔다. 이준용은 일본에서 별 뚜렷한 행적을 드러냄 없이 지내다 훗날 고국으로 돌아가서 10년을 살다 죽게 되는데 그때 나이가 47세로, 아버지 사후 5년 뒤였다.

 

황제를 위협해서라도

 

박영효는 일본으로 되돌아가서도 여전히 권토중래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 1차 망명 10년간 그랬듯이 머리를 끊임없이 조선에 두고 지냈다. 과거와 차이가 있다면, 구구절절 상소문을 적어 바다 건너 권력자에게 보내어 자기의 개혁의지를 주장하고 청원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자를 자기 뜻에 맞는 사람으로 교체하는 작업에 나섰다는 점이다. 그가 생각하는 권력 교체의 대안은 그와 나란히 바다를 건너온 이준용은 물론 아니었다.

 

박영효의 심중에 있는 사람은 의화군 이강(義和君 李堈)이었다. 의화군은 1894년 10월에 청일전쟁 위문사절로 일본을 다녀간 이후 일본에 거주하는 시간이 늘어갔다. 궁궐 밖에서 태어난 그는 첫째 왕자의 어머니 민비의 미움을 받으며 성장했고 커서는 스무 살 아래 셋째 왕자의 어머니 엄비의 견제를 받으며 궁궐 밖과 나라의 바깥을 떠돌며 지내왔다. 그는 망명객 아닌 망명객이었다. 박영효가 접근해 그를 보살폈고 그는 많은 시간을 박영효와 함께 보냈다. 이준용이 작은아버지 고종에게 느끼는 증오와 이강이 아버지 고종에게 느끼는 원망은 차원이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고종의 둘째 왕자 이강은 7세 위 사촌간인 이준용의 후광이 대원군의 몰락과 더불어 옅어지면서 본인 의사와 관계없이 국왕 교체 기도의 중심에 자주 거론되게 되었다. 그러한 시도 역시 이준용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모조리 실패했으며, 그러잖아도 고단한 이 불우한 왕자의 심신을 한층 피폐하게 하는 데 일조했다. 그가 불우한 것은 권력의 결핍 때문이 아니었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은 권력을 갈망했고 주로 그런 사람들이 이강을 필요로 했다. 이강이 필요로 하는 것과 이강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같은 것이 아니었다.

 

박영효는 도일 이후 1900년 여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의화군이던 시절부터 의친왕(義親王)으로 호칭이 변경된 시절까지 이강을 왕으로 옹립해보고자 시도했다.

 

박영효는 일본으로 두 번째 망명한 지 3년이 되던 1898년, 독립협회 회장을 지낸 안경수(安·#53566;壽)가 도모한 황제 폐위 모의에 간여한 것으로 지목되었다. 이 일로 일본으로도주한 안경수는 2년 뒤 입국해 자수했으나 가차 없이 처형당했다. 그때 판결문은 안경수의 죄상에 대해, 을미사변 때 군부대신으로서 취한 부적절한 처신과 아울러 다음 죄목을 들고 있다.

 

 

사건을 주모하고 군대와 결탁하여, 러시아 공관으로 통하는 (경운궁의) 뒷문을 굳게 지킨 다음 (황제 양위) 의견을 아뢰어서, 만약 윤허받지 못하게 되면 황제를 위협해서라도 기어이 성사시키려고 하였다가 체포령이 떨어졌다는 말을 듣고 일본으로 도망갔다.

 

 

박영효는 다시 1년 뒤 조정 대신들에 대한 폭탄 테러를 사주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또 1년 뒤 그는 마지막 시도를 벌였다. 일본의 국제항 고베에서 망명동지들을 규합해 정부 전복을 위한 모금운동을 벌이고 모금책을 국내로 밀파한 것이다. 그는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갑신년에 일본의 힘을 빌려다가 실패했으니까 이번에는 우리의 힘만 가지고 혁명을 해보리라 하고 경상도 전라도 함경도 등지 인사들과 연락을 취해서 일제히 난을 일으켜 가지고는 최후로 경성을 함락하고 신정부를 건설할 계획을 세웠다. 거사를 할 양으로 동지 5인을 본국에다 보내었더니 이 사람들이 약조대로 난리는 아니 일으키고 부산으로 동래로 혁명 연설을 하고 돌아다니다가 다 붙들려 죽고 말았다. 그래서 이 계획도 수포로 돌아갔다.

 

이 일로 그는 궐석재판에서 교수형을 언도받았다. 그를 처단하기 위한 자객이 본국에서 파견되기 시작했다. 선왕의 사위라는 호신부도 거의 효력을 다해가는 듯 보였다.

 

 

용납 못하는 개화당과 사대당

 

박영효와 이준용, 그리고 이강이 있는 일본에 망명객으로 합류한 유길준은 만감이 교차했다. 1896년 2월이었다.

 

개화의 파고 높은 1881년에 조선의 대표로 어윤중을 수행해 윤치호와 함께 조사시찰단으로 이 땅에 첫발을 내디딘 지 15년이다. 그 초행길에서 민영익의 후원에 의해 최초의 일본 유학생이 된 유길준은 2년을 체류하다 임오군란 사과 사절로 일본에 온 박영효를 따라 귀국했었다. 외부(外部) 업무를 보면서 임금에게 개화와 부국강병의 상소도 올려보고 한성판윤 박영효 밑에서 한성순보 신문 제작 준비 작업도 해보았다.

1883년에 미국 시찰단의 대표 민영익의 수행원이 되어 미국의 저력을 목격한 뒤에 최초의 미국 유학생으로 눌러앉아 이를 체감했다. 근대문명의 동서 대표국을 첨단에서 대면하는 조선의 대표 국비유학생이 그에게 주어진 자격이자 임무였다. 하버드대학 진학을 목표로 예비학교에서 수학하던 1884년 12월의 어느 날 동급생에게서 뉴욕타임스를 얻어 읽던 그는 ‘무정부 상태의 조선’이란 기사를 접하고 놀라 교실에서 뛰쳐나갔다. 갑신정변이었다. 칼을 휘두른 사람이나 맞은 사람이나 다 그의 지인들이었다.

 

귀국 명령에 따라 그는 대서양 항로를 따라 영국 포르투갈을 거쳐 수에즈운하를 통과해 싱가포르 홍콩으로 해서 일본으로 들어왔다. 작년에 그를 떨어뜨려놓고 떠난 민영익 일행이 귀국하던 노선이다. 사절단 대표 민영익은 미국에서 왕자의 대우를 받았는데 귀국길에 미국 정부는 그와 일행을 구축함 트레튼 호로 데려다주었다. 부대표로 함께 온 홍영식은 민영익과 의견 차이가 벌어져 대판 싸우고는 다른 배를 타고 귀국했다.

노선도 정반대로 택해 미국대륙을 횡단해 태평양을 건너 들어왔다. 두 사람의 이때 불화는 이후 김옥균의 표현대로 사대당과 개화당 간에 벌어진 ‘서로 용납할 수 없는(不相容) 형세’의 기미였다.

 

등을 돌리고 동으로 간 민영익은 다음해 홍영식 편 수하에 의해 처참하게 난자당했고 해를 따라 서쪽으로 향한 홍영식은 그 이틀 뒤 민영익을 왕자처럼 떠받드는 민씨 척족의 관군에 의해 피살되었다. 그때 스치는 총탄 속에서 헤어져 나라를 떠난 서광범과 임금 곁을 따라가서 죽음을 맞은 홍영식은 한 해 전 미국에서 찍은 한 장의 사진 속에서 민영익을 가운데 두고 좌우에 나란히 앉아 있다. 그 뒷줄에 유길준이 서 있다.

 

유길준이 귀국길에 보고 들은 기록은 귀국 후 그에게 닥친 연금(軟禁) 생활 7년 동안 정리되어 1895년 ‘서유견문(西遊見聞)’으로 출판된다. 개화와 근대화의 사활적 중요성을 체험적 사실로 서술한 이 인문지리서 겸 국제정세보고서는 출판대국 일본에서 근대식 활자본으로 발행되었다. 그리고 2년도 못 되어 그가 일본으로 망명하자 금서가 되어버렸다. 출간 5년 전에 유길준은 탈고된 원고를 고종에게 바쳤다. 당시 일본 신문은 “서유견문이 조선 당국에 필요한 서적임에도 유감스럽게도 부패한 관리들 때문에 비난을 받고 국왕의 손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고 썼다.

 

 

망명자의 동정을 탐지하라

 

유길준이 도착한 도쿄에는 조선 망명객이 수십 명 있었다. 거기에 국비유학생과 사관생도들도 있었다. 유길준이 처음 유학하던 15년 전과는 딴판이었다.

 

도쿄의 망명객들은 서울에 돌아갈 날과, 그날에 찾아들어갈 자리에 대해 항상 유념하고 있었다. 아관파천 이후 들어선 친러시아 내각을 어떻게 와해시킬 것인가―이는 나라의 문제이면서 자신의 문제였다. 그리고 이것이 나라를 위하는 길이고 자신을 위한 길이라고 다짐했다. 그를 위한 방법을 모색함에 있어서는 저마다 생각이 달랐고 제 각기 파벌을 지어 따로 움직였다. 유길준도 예외는 아니었다.

 

망명 초기 유길준은 국민계몽을 위한 번역작업에 몰두했으나 1900년에 들어서면서 일본과 러시아의 각축이 팽팽해지자 정치적인 모색에 접어들었다. 이 당시 유길준의 예견은 한국을 둘러싸고 러시아와 일본의 갈등이 전쟁으로까지 발전하면 한국은 망한다는 것이었다. 두 나라를 조화하게 하여 전쟁에까지 이르지 않게 하는 방법은 한국의 내정을 개혁하는 데 있다, 그러려면 친러 정권을 물리치고 국왕폐하를 받들어 내각을 일신하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었다.

 

유길준은 7월의 박영효의 쿠데타 기도에 일절 간여하지 않았다. 심지어 함께 기거하는 을미사변 망명객 이두황(李斗璜)에게도 자신의 구상을 의논한 적이 없었다. 그런 그가 거사 실행을 결심하게 된 것은 8월 인천 실업계의 거물 서상집(徐相潗)을 만나면서부터였다. 주일공사로 부임한 조병식을 따라 도쿄에 들른 서상집은 실은 망명자의 동정을 탐지하라는 고종의 밀명을 받고 박영효와 유길준을 정탐할 의도였다. 그런 서상집을 국내의 거점으로 믿고 자금을 비롯한 쿠데타의 모든 국내 업무를 맡기는 순간부터 유길준의 1902년 쿠데타 실행 계획은 실패가 예정되어 있었다.

 

1901년 궁리되기 시작한 모의의 진행방향은 대략 이러했다.

 

‘일본에서 유길준이 주선한 유학 사관들을 행동대장으로 삼아 군사들을 매수하고 하수인을 모집하여 궁궐로 들어가 폭약을 설치하여 터뜨리고 사관 몇 명은 고종이 다른 곳으로 옮겨가지 못하도록 지키고 있으면서 동시에 일본공사관에 궁궐을 지켜줄 병력을 요청한다.’

 

갑신정변 때와 별다를 바 없는 구상이었다.

 

여기서 유학사관(遊學士官)이라고 하는 사람들의 역할은 갑신정변 때 무력을 행사해 정적을 처단한 청년들과 같은 역할이다. 1883년 유학을 떠나 군사학교에서 훈련을 받고 귀국한 서재필 휘하의 그 청년들은 지금 유학사관들의 선배가 된다. 후쿠자와 유기치가 설립한 게이오의숙(慶應義塾)에서 일본어를 배우고 그가 만든 시사신보(時事新報)를 읽으며 세계의 신문명을 접하고 도야마(戶山)학교에서 근대 군사교육을 받은 이 선배들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지금의 유학생들은 신식 군인으로 육성되고 있었다. 한 가지 차이라면 그때와 달리 이제 정식 육군사관학교 생도라는 점이다.

 

 

육사 11기

 

유길준이 동원 대상으로 삼은 유학사관들은 1895년에 내부대신 박영효의 주선으로 일본육사에 입학한 21명이었다. 이들 95학번 생도들은 1899년 11월에 졸업해 6개월의 견습 사관을 마침으로써 전 과정을 이수했다. 육사 11기생으로 일본군적을 떠나 고국에 돌아가면 신식 군대를 이끌 정식 장교가 될 몸들이었다.

 

그런데 이들의 귀국길은 막혔다. 친러시아 정권의 눈에 이들 재일사관들은 재일망명객과 마찬가지로 친일분자로 비쳤다. 취업과 신분 보장은 물론 당장의 생계마저 곤란에 빠져 미아와 같은 신세가 되어버린 이들은 한탄과 증오를 키워가며 준(準)망명객이 되어갔다. 그리하여 83학번 선배 생도들의 운명을 따라가려 했다

 

1900년 10월, 당국에 탄원도 할 겸 노백린(盧伯麟) 어담(魚潭) 등 육사 11기생 사관 6명이 귀국했다. 이들과 연락이 두절된 채 남아 있던 나머지 15명은 조직을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혁명일심회(革命一心會)라 이름하고 ‘무관으로서 러시아파의 정부를 전복하고 간신잡배를 일소하여 참된 한국의 독립을 꾀한다”는 취지를 담았다. 그리고 이렇게 서약했다.

 

‘황제 폐하와 황태자 폐하를 폐위시키고 의친왕을 왕위에 올리며 국사범으로 정부를 조직한다.’

 

이들은 자연스럽게 유길준에 흡수되어갔다. 유길준의 시국 강의와 앞날의 계획을 경청하고 난 이들은 종전의 의견을 수정해 새 서약서를 작성했다.

 

‘황제 폐하를 받들어 정부를 조직한다.’

 

서약서에 쓰지는 않았어도 ‘의친왕을 추대하며 망명 중인 사람들을 중심으로 새 정부를 구성한다’는 묵계는 여전히 있었다.

 

유학 사관생도들은 유길준 외에도 여러 망명객과 수시로 접촉하면서 영향을 받았다. 육사 11기 어담은 회고한다.

 

 

우리들은 본래 망명자를 방문하는 것이 엄금되어 있었지만 나는 남몰래 권형진(전 경무사) 유길준(전 내부대신) 씨의 문을 두들겼다. 부대에 들어간 후에도 공휴일에는 반드시 상경하여 이것만은 멈추지 않았다. 내가 반복해서 노력하여 명사 선배를 방문한 것은 생동하는 학문을 하기 위해서였으며. 또 실제 대단히 유익한 바도 많았다. 이 때문에 세계의 대세(大勢)가 통하고 일본의 국정(國情) 민정(民情)도 알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본국에 대한 그분들의 감상을 묻고, 금후 만약에 우리들이 취해야 할 방침 등에 대해서 크게 가르침을 받은 바 있다. 망명선배는 선배로서 본국의 정치사정을 설명하고 무엇인가 격려 편달을 주었다. 그래서 나의 정치사상은 실로 이 시기에 양성된 것이며 후년 처세하는 데도 이 시대의 선인의 가르침이 대단한 역할을 하였다.

 

 

다시 오가사와라

 

유길준이 일본에서 준비할 수 있는 것은 더운 피의 혁명일심회 장정들뿐, 그 밖의 모든 것을 맡긴 국내의 파트너가 고종과 유길준 사이에서 이중첩자 노릇을 함으로써 유길준의 계획은 무산되었다.

 

고종은 유길준의 쿠데타 음모 계획의 윤곽을 일찍부터 보고받고 있었다. 계속 음모가 진행되도록 놔두어 망명객들을 국내로 잠입하게 해서 일망타진, 뿌리를 뽑을 생각이었다. 고종은 망명객 문제에 대해 갈수록 신경을 곤두세우는 듯했다. 유길준과 뜻을 함께하며 국내에서 여러 조선인 및 일본인들과 구리개 일대에 모여 밀회를 거듭하고 있던 오세창(吳世昌)은 이 같은 낌새를 느끼고 서울의 한 일본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그런데 이 사람을 통해 소문이 일본 주재 한국공사관에까지 전해짐으로써 일본 정부와 고종은 유길준 일파에 대한 조치를 미룰 수 없게 되고 말았다.

 

조선과의 관계를 고려한 일본은 즉시 대응에 나서 사관생도 9명을 붙잡아 3명은 조선으로 추방하고 나머지는 일본 주변 섬으로 유배했다. 추방된 3명은 훗날 처형되었다. 유길준은 오가사와라 섬으로 유배되었다. 김옥균이 2년간 유배되었던 그곳이었다. 오세창은 인천의 일본 거류지로 피신해 있다 결국 망명선을 탔다. 망명객 하나가 도쿄에서 추방되고 또 한명의 망명객이 신입으로 추가되었다. 1902년이었다.

 

오세창은 일찍이 유길준이 창간 작업을 하다 떠난 한성순보에서 기자 일을 하고 일본 문부성의 초청으로 도쿄외국어대학교에서 조선어 교사로 1년 근무했다. 그전에 유길준은 스승 박규수(朴珪壽) 작고 후 오경석(吳慶錫)의 집을 드나들며 아들 오세창과 교유했다.

 

유길준은 김옥균보다 더 오래 오가사와라에 있었다. 김옥균의 북해도 유배를 합한 만큼의 기간이 지나 1906년까지 그곳에 있으면서 김옥균이 살던 곳을 방문하기도 했다. 김옥균의 비문은 박영효의 이름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 문안 작성은 유길준이 해준 것이라는 말이 있다. 만약 그러하다면 유길준은 절해고도 유배 기간의 절반을 통과하는 시기에 그보다 16년 앞서 거기 와 살았던 5년 선배 김옥균을 기리며 장문의 명문을 익명으로 써주었다는 얘기가 된다.

 

새 망명객

 

도쿄에 낯선 얼굴 하나가 나타났다.

 

잘 차려입고 돈 잘 쓰고 마차를 굴리고 자동차도 타고 다니고…. 튀는 조선인 하나가 어느 날부터 망명객들의 시선을 붙잡았다. 이름은 이상헌(李祥憲)이라고 했다. 듣도 보도 못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 행색이나 씀씀이나 풍채는 금릉위 박영효도 왕족 이준용도, 지구를 한 바퀴 돈 유길준도 주눅 들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1901년부터 출몰하기 시작한 괴 조선인의 신분은 1902년 유길준이 도쿄에서 추방되고 오세창이 건너오면서 차츰 드러나기 시작했다. 권동진과 오세창이 언제부터인가 그를 따라다니는 것이었다. 아무도 이상헌을 정치적 망명객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정체불명의 이상헌은 가명이고 본명은 손병희(孫秉熙)임이 드러났다.

 

누구보다 먼저 이두황이 그를 알아보았다. 1894년 11월 30일. 충남 공주로 향하는 동학농민군과 이두황이 이끄는 정부군이 맞닥뜨렸다. 우금치 전투 발발 바로 전이었다. 손병희가 지휘하는 충청도 북접(北接) 10만 대군은 전봉준(全琫準)의 전라도 남접(南接) 군과 논산에서 극적으로 합세해 진군하는 중이었다. 동학군의 사기가 절정에 달한 무렵이었다. 죽산(竹山) 부사(府使) 이두황이 이끄는 부대 외에는 제대로 반격도 없을 정도였다. 전봉준이 호기롭게 격문을 써서 충청도 관찰사 박제순(朴齊純)에게 날려보낸 것도 이즈음이었다.

 

손병희는 종교 본연의 자세를 고수하며 무력투쟁을 꺼리는 최시형의 뜻을 좇아오다 마침내 북접과 극적인 합의를 이루고 전봉준과 의형제를 맺으며 결전에 나선 것이었다.

 

손병희의 존재는 순식간에 도쿄에 퍼졌다. 망명객은 물론 일본 고위층까지 그에게 관심을 나타냈다. 손병희는 이미 19세기의 손병희가 아니었다.

 

알고 보니 그도 망명자였다.

 

박영효가 일본 망명 생활을 접고 정계로 복귀해 기세를 올리던 갑오년 그해, 박영효와 동갑인 손병희는 동학 입교 10년 만에 북접의 우두머리인 통령(統領)이 되었다. 33세였다. 듣기로 미국의 임금은 대통령이라는 호칭을 갖는다는데 북접의 수령이 통령이라면 동학의 교주는 대통령이나 진배없는 셈이다.

 

우금치 전투에서 동학 5만 명을 잃고 처참히 패퇴한 후 손병희는 교주 최시형과 기약 없이 헤어져 스승의 원래 가르침대로 기도와 수련과 설법에 의지하며 흩어진 신도를 격려하고 떨어진 교세를 확장하는 데 주력했다. 1897년 10월 대한제국이 발족하고 11월 독립문이 완공되던 다음달 3대 교주에 오른 그는 대원군이 세상을 뜨고 서재필이 조국을 떠나던 1898년에 최시형이 체포돼 처형되자 도피 암약 생활을 이어가다 1901년 나라 밖으로 나간 것이었다.

 

그는 신도들 중에서 유학생 수십 명을 뽑아 도쿄로 불러들였다. 그동안 박영효가 사관생도들을 국비로 유학 보내도록 주선한 것과 엇비슷한 규모였다. 손병희는 국비가 아니라 교비(敎費)로 유학자금을 제공했다. 동학은 여전히 그 수를 가늠하기 힘들 정도의 인력과 자금력을 자랑하는 최대 민간 집단이었다. 1901년 가을부터 다음해 봄까지 도쿄에 머무는 동안 유학생 24명을 불러오더니 다시 입국해 1904년 러일전쟁 발발과 함께 다시 나올 때는 40명을 또 데려왔다. 그 2차 유학생의 명단 중에는 이광수(李光洙)도 있었다.

 

도쿄 망명자 사회에 새로운 파벌 하나가 또 형성됐다. 손병희는 기존 망명객들과는 다른 새로운 유형의 망명객이었다. 가장 자유로우면서 가장 강력한. 아무리 개화파라 하지만 유학의 기풍을 바탕으로 하여 높은 가문을 배경으로 하는 여타 망명자들은 동학 무리의 괴수로 알려져온 이 신분도 미천한 신종 망명객 앞에 잠시 당황했다.

 

이들이 몸담은 20세기 첫해의 도쿄는 인구 200만 명의 국제적 대도시였다. 인구 수로 서울의 10배 규모였고 군사 정치 경제 문화면에서는 더 컸다. 손병희는 곧 박영효와 막역한 친구 사이로 녹아들어갔다. 그를 따르는 동갑 권동진과 세 살 아래 오세창을 동학에 입도시키고 제자로 받아들였다. 손병희는 이등박문과도 만나고 장곡천호도 장군과도 격의 없이 지냈다. 쌍두마차 한 대 사서 도쿄 거리를 휘저으며 조선서 건너온 충청도 부자양반 행세로 위장하고 다닐 때부터 그는 의도적으로 범위가 큰 교유를 위해 그러는 듯했다. 그는 양반이 아니었다. 만약 양반이었다면 아마 무관의 제왕과도 같은 그 자리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대관(大官)들과 자리를 함께하려면 내 자신부터 대관과 같은 차림을 하고 다녀야 한다”는 장곡천의 말을 그는 실천에 옮긴 것이라 했다. 그는 술상을 마주할 때면 박영효에게 즐겨 말하곤 했다.

 

“부마도위 금릉위 박영효는 무엇이며 아전(衙前)의 아들 손병희는 또 무엇이냐.”

 

서자로 태어난 손병희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 반항하며 자라났다. 그런 그를 국왕의 아들 이강은 자주 찾아왔다. 그 역시 서자였다. 그의 아버지가 임금이므로 아무도 그를 서자라고는 하지 않았을 뿐이다. 어떤 때는 이강이 술에 취해 흐느끼며 손병희를 “아버지”라고 부른 적도 있다 했다. 이강은 손병희와 박영효보다 아홉 살 아래였다. 그런 이강을 바라보는 손병희의 형형한 눈길은 마치 “너나 나나 아비는 없다”고 말하기라도 하는 듯했다. 이강은 어쩌면 태어나서 한 번도 아버지라는 말을 입 밖에 내지 못하고 살아온 것인지도 몰랐다.

 

손병희의 계획

 

러일전쟁이 일어났다.

 

승산은 일본에 있다고 본 손병희는 전쟁이 일어나기 전부터 중대 구상을 했다. 일본과 연합해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내정을 개혁하는 문제였다. 즉, 일본군의 힘을 빌려 쿠데타를 일으켜 러시아파 내각을 제거함으로써 정치를 혁신하는 한편으로 전쟁에 동학군을 참전시켜 일본군과 함께 러시아를 격퇴시킨다는 것이었다. 그 목표는 박영효와 유길준이 항상 이루고자 했던 것과 동일하다. 단지 그에 상응하는 물리력을 이쪽에서도 대등하게 제공한다는 자세가 큰 차이점이었다. 그것이 동학의 힘이며 손병희의 독보적 권력이기도 하다.

 

이 목적을 위해 두 가지 작업이 진행되었다. 일본에서는 권동진으로 하여금 일본군 참모와 교섭하도록 하고, 손병희의 동생을 국내에 파견해 거사 준비를 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공교롭게 1903년 8월 동생은 서울에서 천도교 두령 모의에 참석 후 도쿄로 돌아오는 길에 부산의 여관에서 급사했다. 이틀 뒤에는 도쿄에서 일본군 참모가 급사했다.

 

손병희는 핵심 측근 이용구를 도쿄로 불러들여 ‘진보회’를 결성하라고 지시했다. 도쿄는 마치 새 시대 동학의 임시정부처럼 보였다. 이어 ‘단발 지령’을 내렸다. 세계 문명에 참여하고 일심 단결한다는 의미라 했다.

 

어느 날부터 전국에서 20만 신도가 단발을 하고 검은 옷을 입고 나타나더니 ‘국정혁신’을 외치며 방방곡곡에서 들고일어났다. 마치 무기를 들지 않은 제2의 동학봉기를 연상시켰다. 정부의 단발령에 반대한다고 만백성이 궐기하던 10년 전에는 상상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위생에 좋고 생활도 편리하게 하는 단발을 촉진한다며 유길준이 솔선해 왕태자의 머리를 잘랐다가 지탄과 원한을 받은 것이 10년 전의 일이다.

 

러일전쟁이 끝났다.

 

러시아는 조선에서 사라졌다. 그 와중에 동학은 분리됐다. 이용구가 진보회를 집어 삼켜 동학의 절반 이상을 가져가버린 것이다. 지도자가 나라 밖에 있는 동안 일어난 일이었다. 진보회는 일진회로 통합되었고 어느덧 동학의 후예들이 국권을 삼켜가는 일본을 충실히 지원하는 세력으로 변해 있었다.

 

손병희는 낯선 일본에 망명의 첫발을 디딜 때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두 사람으로 동생과 이용구를 대동했다. 이제 그의 가장 측근에는 일본 땅에서 얻은 권동진과 오세창이 있다, 이런 것도 개벽(開闢)인가. 개벽은 새 세상이 열리는 것, 후천 개벽은 인심(人心) 개벽에서 시작하는 것이라 그는 수도 없이 말해왔다.

 

 

망국의 귀환

 

머지않아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

 

대한제국은 일본의 보호국이 되었다. 보름 뒤 손병희는 천도교로 교명을 바꾸어 일진회의 이용구와 결별했다. 동학은 해체되었다. 동학이 붕괴시키고자 한 정권도 붕괴되었다.

 

한 달 뒤 1906년 새해가 시작되고 손병희는 공개적으로 귀국했다. 더 이상 눈을 피해서 다니지 않아도 된다. 일본에서처럼 공개적으로 다녀도 안전하다. 부산에서 대구, 서울에 이르는 경부선 연도에는 4만여 명의 신도가 나와 그를 환영했다.

 

1906년 벽두부터 귀국하는 망명객들이 줄을 이었다. 망국의 귀환이었다.

망국에서 망명객들은 안전했다. 무엇 때문에 떠나갔고 무엇 때문에 돌아왔는가.

 

손병희와 박영효와 이준용과 유길준이 저마다 붕괴시키고자 소원한 정권은 일본이 대신 붕괴시켰다.

그들은 나라가 망하고서 비로소 망명에서 풀려났다.

국왕은 권좌를 유지하기 위해 청국에 의지하고 러시아에 의지하고 일본에 의지하면서, 체제 전복을 모의하는 망명자들을 견제해왔다.

이제 청나라도 러시아도 사라지고 왕권도 주권도 사라진 나라에서 그들은 다시 만나게 되었다. 이제 그들이 할 일은 무엇인가.

 

박영효와 이준용과 유길준은 1907년 고종이 폐위되고 나서야 입국했다.

박영효는 훗날 갑신정변 때를 회고하면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정권쟁탈이 무슨 인생의 제일의 의미가 되리오.(…) 죽은즉 청산의 한줌 흙이더라.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는 물을 것도 없고 지금에 와서 사후약방문을 쓰는 일은 할 필요가 없다. 다만 나는 조선의 혁명이란 지극히 어렵다는 것과 로마는 망하는 날에 망한 것이 아니라는 감상을 감히 느끼게 된다.’

 

서재필은 미국에 정착해서 이렇게 썼다.

 

‘그리스도는 한 로마인에게 시체를 잘라 저자에 버리는 형벌을 당했으나 로마사람들이 그를 미워한 것이 아니고, 그를 미워한 것은 유대인이었다. 그의 동포가 그를 알지 못한 것이었다.’

 

 

 

<참고문헌>

갑신정변 회고록,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저, 조일문 신복룡 편, 건국대학교 출판부, 2006/ 이광린, 한국사강좌5, 일조각, 2002/ 고종실록/ 황현, 매천야록 중, 명문당, 2006/ 신동준, 개화파열전, 푸른역사, 2009/ 윤병희, 유길준연구, 국학자료원, 1998 / 안승일, 김옥균과 젊은 그들의 모험, 연암서가, 2012/ 의암 손병희선생 기념사업회, 의암 손병희선생 전기, 1967

 

 

박윤석

동아시아 삼국의 근대를 탐구하는 연구자.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동아일보에서 기자로 20년 일했다. 건국대학교 언론정보대학원에서 한국근대와 근대신문에 대해 강의했다.

 

/ 신동아

 

 

 

 

 

 

 

지덜끼리 싸우다가 망한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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