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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
"현실도 별로 다를 바가 없지. 한번 쥐면 결코 놓으려하지 않거든. 그것이
권력이든, 금력이든... 아무튼 기득권을 쥔 층에서 자발적으로 그것을 반납
하는 경우는 없지. 더 큰 문제는 때가 되어 놓아야 할 경우에도 그런 사실
자체를 부정한다는 거지. 천시(天時)를 역행하는 행동엔 늘 무리수가 따르
게 되고 그래서..."
한숨을 크게 쉬고 유한초자가 신나게 사발을 돌리는 사내를 쳐다보았다.
"그래서 비극이 초래되는 거라네."
농을 걸만도 한데 왠지 장추삼도 숙연한 기분이 되어 노강호의 슬픈 눈길을
쫓았다.
그 순간!
"저 자식... 저럴 줄 알았다니까!"
팔을 걷어 부친 장추삼이 으르릉거렸다. 그의 예상대로 도박꾼은 현란한 손
길로 사람들의 혼을 뺏고는 실타래를 자신의 소매 속으로 집어넣었던 것이
다.
"순진한 사람들의 등을 쳐? 이놈을 그냥..."
텁!
앞으로 나서는 그를 유한초자가 제지했다.
"아, 왜 그래요?! 저런 놈들은 물고를 내야한다니까! 썩을 놈들! 말리지 마
요. 죽이진 않을 테니까!"
"자네가 이곳에 영원히 머물 것이 아니라면 나서지 말게. 언제까지 저들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나."
"그래도 당장 벌어지는 일을 외면 하..."
"착각하지 마라!"
느닷없는 호통. 추상같은 기세였기에 장추삼이 움찔 놀라 희둥그레진 눈으
로 유한초자의 눈치를 살폈다.
"네가 뭘 어쩌겠다는 거냐! 저들은 저들 나름대로의 법칙에 맞추어 살아가
는 거다! 우리가 나설 부분이 아니라는 거야! 한번은 도울 수 있겠지. 그
다음은? 그 다음의 일까지도 책임지겠다는 거냐!? 이그러지고 비뚤어졌다
싶은 것이 인생이다! 네가 뭔데 남의 인생을 바꾸려 드느냐! 알량한 우월감
으로 한번의 관심을 보이느니 차라리 외면하는 편이 낫다!"
유한초자가 몸을 돌려 한가로이 떠가는 구름을 바라보았다. 가을이라 높고,
청명한 날씨 때문에 한번 더 높아진 가을 하늘을 아무런 걱정 없이 유영하
는 뭉게구름의 유유자적함이 몹시도 부러워서 유한초자의 노안에 아쉬움이
맺혔다.
"이들을 위해서라도, 그리고 너를 위해서라도 말이다..."
꼬랑지가 팍 말린 장추삼이 화난 주인의 눈치를 살피는 개처럼 고개를 떨구
었다.
맞는 말이다. 같잖은 싸움실력으로 깽판을 놔서 이번 패거리를 몰아낸다고
해도 얼마 후에 또 다른 녀석들이 찾아들 터였다. 이곳은 시장이니까. 어차
피 선택은 이들의 몫이다. 도박을 하든, 그냥 지나치든 그가 간여할 일이
아니다.
하지만 장추삼은 장추삼. 그것 이외에도 다른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아따, 그 영감. 목청도 좋네. 저런 기백이면 새장가 들어도 되겠다. 내가
소리에 쫄아들다니... 가만?'
"그렇게 소리지를 것까진 없었잖소!"
다 맞는데 뭔가 억울해서 장추삼이 엉뚱한 걸 들먹이며 대들었다. 의외의
반격에 어이없는 표정이 된 유한초자가 도박판으로 고개를 돌렸다. 상대해
봐야 입만 아프고 꼬투리를 잡으면 한도 없는 놈이다.
"왜 대답을 못해요! 저딴 거 보지말고 내 말에나 대답하란 말이오! 왜 사람
많은 곳에서 소리를 질러서 사람 면박을 주냔 말이오!"
"저딴 거라니? 저 손놀림 좀 보게. 가히 예술적이라 평하고 싶군. 내공도
없는 일반인의 손이 저렇게 현란하게 춤을 추다니! 놀라워, 정말 놀라워!"
그의 말마따나 사내의 손은 엄청난 속도와 변화를 보이며 움직이고 있었다.
거기다 한술 더 떠 불규칙적인 수직운동도 가끔 보였는데 아마도 구경꾼들
의 눈을 홀리려는 동작 같았다.
"에이. 저 정도는 유도 아니지~"
"음?"
"우리 동네에는 저 치들보다 고단수의 도박꾼이 있단 말이오!"
"호오~"
유한초자가 관심을 표하자 신이 난 장추삼이 침을 튀기며 장광설을 늘어놓
기 시작했다. 하지만 본래 전달하려던 내용이 절반도 섞이지 않은, 그냥 동
네 자랑에 불과했다.
"물가만 싼 게 아니라니까! 거기다 사람들 인심은 어찌나 좋은지, 물건 사
면서 동전 일 푼 깎는 건 일도 아니에요! 동네가 좋아서 그런지 처자들까지
엄청 고와요! 뭐, 이런 게 자랑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암루에서 도박패
를 돌리는 처자도 중원에서 일미(一美)소리 들을 정도거든! 속임수? 허, 끝
내주지! 저런 건 애들 장난 수준이라고! 그 여자가 한몫 잡으려 힘을 쓸라
치면..."
신나게 떠들던 장추삼이 갑자기 실 끊긴 인형처럼 모든 동작을 멈췄다.
"쓸라치면, 쓸라치면..."
같은 말을 웅얼거리던 그가 별안간 머리를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이제 알았다! 이런 바보 같은 놈, 그걸 이제야 기억하다니!"
멍청히 하늘을 올려보던 그가 유한초자의 의아한 눈을 마주하고 씨익 웃었
다.
"갈 데가 있어요."
"그게 무슨..."
"그래, 모든 건 처음이었어. 멍청하게 외곽만 빙빙 싸돌았던 거야."
휙 몸을 돌린 그가 성큼성큼 발길을 옮겼다. 혼자 남은 유한초자가 순간 멍
하니 서 있다가 급히 손짓을 했다. 이 무슨 뚱딴지같은 경우인가?
"이, 이보게! 그게 무슨 말인가!"
이미 멀어진 그가 고개만 돌리고 유한초자에게 손을 흔들었다.
"아쉽지만 일단 여기서 헤어집시다! 안녕히!"
멍청하게 서서 입을 벌리고 있는 유한초자를 지그시 바라보다 몸을 돌리고
걸으며 장추삼이 나지막이 뇌까렸다.
"인연이 아직 끝난 것도 아닌데 뭘 그리 아쉬워하는 건지..."
***
전서구 한 마리가 급히 날았다. 방향은 사천, 더 정확히는 당문을 향해.
그만 놀지?
문제는 우리동네였어. 빨리 돌아오라고.
덤으로, 유한초자가 퍼트렸다는 시구(詩句) 말이야... 풀어버렸어.
듣고 싶으면 속히 귀환하라고.
입이 근질거려 죽겠으니까.
212
정말 이만큼 이면 많이 참은 거다!
사흘, 무려 사흘이나 이 빌어먹을 객방에서 딩굴거리며 시간을 죽였단 말이
다.
사흘이라면 눈 깜짝할 사이라고?
웃기는 소리다. 무지 바빠서, 몸이 서너 개라도 부족해서 자나가는 바퀴벌
레에게라도 손을 내밀고 싶은 상태라면 사흘이라는 시간이 우습게 흘러갈지
모르지만 아무 할 일도 없이 객방의 천장에 핀 곰팡이의 문양을 보며 사람
의 얼굴을 떠올리기엔 너무 긴 시간이란 말이다.
솔직히 시간이야 잠으로 죽일 수도 있다. 워낙에 주위가 조용한 편이라 잠
시 눈이라도 붙일라치면 어느새 낮과 밤이 뒤바뀔 정도이긴 하다. 그리고
사람에게 있어서 잠은 잘수록 는다.
맛대가리 없는 음식도 참을 만은 했다. 전에는 안 그랬다는데 - 그가 직접
경험하지 않았을 뿐더러 제보자 자체가 거짓을 모르는 이기에 일단 믿기로
했다 - 숙수가 바뀌었는지는 몰라도 급격히 떨어진 음식 맛이 객잔을 찾은
그의 발목을 잡았지만 놀랍도록 저렴한 가격을 생각한다면 그것 또한 이해
해야할 부분이라고 치부했다.
평소의 장추삼이라면 이런 생활에 적잖이 만족했을지도 모른다. 간섭하는
이 없지, 편히 쉴 수 있는 공간 확보되었지, 때 되면 내려가서 식충이들 달
래면 되지... 뭐, 부족한 것이 없었으니까.
문제는 그가 할 일이 있다는 거다. 꼭 해야만 하고,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고, 또한 장추삼의 급한 성격상 더는 미뤄두지 못할 일이라는 거다.
"뭐 하는 거야, 진짜!"
투덜거리던 장추삼이 그의 객방에서 벌컥 문을 열고 나왔다. 전서구를 보낸
지 벌써 닷새가 흘렀건만 아직도 소식조차 없다함은 무슨 문제가 생겼거나
아니면 게으름을 부리고 있다는 소리다.
"문제는 무슨!"
문제라면 전서구를 받은 이들의 일신상에 좋지 않은 일이 벌어져서 제시간
에 도착하지 못했다는 의미인데 그건 웃기는 소리다. 그가 부른 이들이 비
록 천하제일을 다투는 초고수는 아닐지라도, 그래서 강호를 암약하는 존재
들과의 대전시 백전백승은 불가능할지 모른다 쳐도 위험신호조차 알리지 못
하고 무릎을 꿇을 리는 없다.
강호에선 그저 신진고수네, 삼성의 두 사람이네 하지만 장추삼의 눈에 비친
둘은 결코 그 정도로 평가받아서는 안 되는 존재들이다. 길지 않은 강호행
이었지만 직접 몸으로 부딪쳤기에 지금 일세를 풍미하고 있는 고수급들의
실력을 대충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소림의 잘난 세 땡중도 그렇고, 멀리서 손만 휘두르는 배불뚝이 노인의 얍
삽함도 안다. 멋 부리기 좋아하는 남궁가의 전대가주가 얼마나 정심한 검법
을 지녔는지도 알고, 육천염이라는 자들이 내뿜었던 화기도 아직까지 생생
하단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잘났다는 위의 인물들 가운데 장추삼을 놀라게 한 사람은 없
었다. 딱 붙으면 이길지 질지는 몰라도 일단 마주보며 자신과 견주었을 때
꽁지를 말고픈 충격을 준 이는 없다.
그게 뭐 대단한 거냐고 묻는다면 주저 없이 '예!'라고 답할 그다. 무림인이
건, 동네건달이건 간에 둘 다 힘을 밑천 삼아 살아간다고 보면 자신이 가진
무력이야말로 가장 큰 자산이라 하겠고 또한 그것으로 본인의 위치가 결정
되어진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둘 다 자신이 가진 힘을 정확히 파악해서 그에 맞는 자리에 서야 한다
는 공통점도 있다. 옆에서 치켜올린다고 괜시리 들떠서 깝죽거리다가 모진
놈 만나는 날엔 그 즉시로 여태까지 쌓아올린 자리가 초토화됨은 물론 그
세계에서 영원히 퇴출 될 수도 있으니까.
'이 세상에서 퇴출 되는 경우도 있지...'
그래서 자신보다 상대가 중요한 거다. 비록 별 볼일 없는 하급무인이라 해
도 상대방이 그보다 약하면 이기는 것이 무림이고 일류를 상회하는 고수라
고 해도 그보다 위의 무력을 소지하고 있는 자와 싸우면 필패(必敗)하는 것
이 강호의 율법이다.
다행히 장추삼은 동네건달 시절부터 눈썰미 좋기로 유명했었다. 그래서 웬
만한 시비가 들어와도 일단 상대방과 자신을 견주고 아니다 싶으면 일단 뒤
로 물러날 줄도 알았다.
'다는 아니었군.'
뭐, 속된말로 뚜껑이 열릴 정도로 흥분한 상태가 한 번 있었고 그래서 처참
한 개망신과 함께 그 세계를 떠났어야 했다.
단 한번의 실수 때문에...
전화위복이 되었긴 했지만 엄격하게 말해서 그건 분명히 실수였다. 잘 되었
든, 못 되었든 그 순간만큼은 의심할 여지없이 비참한 나락으로 굴러 떨어
졌던 순간이다. 막말로 상대방이 독한 마음만 먹었다면 장추삼의 인생은 그
날로 종쳤을지 모른다는 거다.
제 버릇 개 주겠는가?
그건 무림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어 또다시 같은 상황이 벌어졌었고 죽음의
목전(目前)까지 이르렀었다. 결과론 적으로야 이겼지만 상황으로 보아서는
필패가 당연했었고 또 그랬어야만 했던 순간이었다.
재수는 중복되지 않는 법이니까.
해서... 그는 어느 누구보다 사람을 평가함에 있어 냉정을 유지하자고 스스
로에게 수도 없이 다짐했다. 두 번의 실수면 충분하니까.
그런 견지에서 처음 언급한 고수들은 그리 커다란 문제가 아니었다. 재대로
붙어도 크게 꿀릴 일이 없는 상대였다. 그의 근육이, 그의 힘줄이, 그의
전신감각이 증언해주었다.
하면 전서구를 받을 두 사람은?
글쎄, 일대일로도 될까?
'생각해보니...'
만만한 인간이 어떻게 하나도 없다는 건가!
일단 언제나 부드러운 하운의 물결 같은 검로.
물? 말이 좋아 물이다. 언제든지 해일처럼 거대한 존재로 뒤바뀐다 해도 하
등 이상할 것이 없는 강함을 숨겨둔 검이 무슨 물인가? 거기다 변화 또한
기오막측하여 자신이 전력을 다해서 피한다고 해도 모조리 비껴낸다고 장담
하기도 어렵다.
선한 미소의 동료이기에 더 잘 알고 있다. 이런 사람이 한번 불타오르면 절
대로 꺼지지 않는 화염화(火焰花)를 꽃피워낸다는 사실을. 이런 사람이 마
음을 먹을 때 천지가 경동할거라는 사실을.
생각해보니 무서워서 장추삼의 목이 조금 움츠러들었다. 일반론을 떠올린
게 아니라 하운이 펼쳐냈던 검의 족적을 따라 걷고 내린 결론이다. 일반인
은 생각하기 어려운 해석력, 그걸 그려낼 수 있는 오성까지 더해지자 하운
이란 사람이 갑자기 전혀 다른 모습으로 자리 매김 했던 거다.
'아주 괴물이잖아!'
동료가 아니라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괴생명체와 동행했었다는 사실에 장추
삼이 허탈하게 웃었다.
또 다른 동료는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떠올릴 필요도 없고.
왜냐고?
그는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무서우니까. 무력이니, 나발이니, 다 떠나서 존
재감만으로 장추삼을 굴복시킬 기개가 있다는 것은 자신에 대한 믿음이 뒷
받침되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결론적으로...
"오지 못할 이유가 없잖아!!"
벌떡 일어서서 비명을 지른 그가 씨근덕거리며 천장을 쏘아 보다 곧 한숨을
쉬고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렇다면 후자라는 건데 이 또한 납득이 가
지 않았다.
미끼는 충분했다. 물지 않고는 못 배길 만큼 통통하고 맛난 떡밥을 뿌려두
었다. 둘의 성격상 절대로 외면하지 못할 거란 말이다. 유한초자가 남겼다
는 시구(詩句)는 두 동료의 흥미를 끌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재료였다.
그 시를 풀게 되었을 때 느꼈던 감동을 어찌 말로 다 설명할 수 있으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던 수많은 얼굴들. 특히 얼음덩어리의 고고함을 가
장한 가증 그 자체의 표정이 떠오르자 저도 모르게 쾌재를 부르지 않았던가
. 비천혈서라는 말이 언급되자마자 양광에 눈 녹듯 보이던 흔들림을 아직까
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그동안의 압박과 설움을 통쾌하게 날려버릴 생각을 하니 마냥 기분이 좋았
다. 살살 약올리면서 충분히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었다. 어쨌든 칼자루는
자신이 쥐고 있기에 어떤 식으로든 놀려먹을 방법은 충분했다. 아무튼 장추
삼에겐 즐거운 순간일 테고 두 명의 동료에게 있어서는 중요한 실마리를 제
공받기에 또한 괜찮은 일이 될 터.
그런데도 오지 않는다.
'그럼 뭐냐...'
이런 저런 가정으로도 도저히 알 수 없는 일이라 머리를 벅벅 긁던 장추삼
이 입맛을 쩝쩝 다시다 힘없이 객방을 나섰다. 뭘 하든 먹고살자는 짓이고
그의 배에선 끊임없이 자신의 공동화를 소리로서 호소하고 있었으니까.
"오늘은 대체 뭘 먹는다..."
그 손에 그 맛이다. 그게 그거고 그 나물에 그 밥이지만 자칭 미식가이자
신의 혓바닥으로의 자존은 지키고 싶다. 하지만 여건이 도와주지 않으니 어
쩌겠는가. 배고프면 미식가도 개밥을 먹을 수도 있고, 신의 혓바닥도 종종
하계로 내려오게 된다.
사람 좋게 웃는 주인장의 웃음과 이제는 나흘 사이에 익숙해져버린 점소이
아이의 친근한 미소를 적당한 응대로 얼버무리면서 탁자에 앉았다. 마음 같
아서야 대놓고 난리라도 치겠지만 웃는 낯에 침을 뱉지 못하는 건 장추삼이
심약해서 만은 아닐 것이다.
'저런 얼굴을 하고 인사를 하는 데야 같이 웃을 도리밖에 없잖아. 젠장...'
고민은 잠시뿐이었다. 숙수의 실력과 어제 먹은 완자의 맛이 한꺼번에 어우
러져 그의 대뇌와 혀를 스치고 지나가자 장추삼은 깊은 한숨을 한번 토하고
고개를 들어 점소이를 바라보았다.
"너도 여기서 밥을 먹느냐?"
"예?"
"그러니까... 에휴... 아니다."
이때 손살같이 주인이 튀어왔다. 얼마나 손님이 없으면 단 나흘을 묵었을
뿐인 그의 작은 한마디에도 이리 경기를 일으킨단 말인가?
"무, 무슨 일이십니까! 이 녀석이 결례라도 범했다면 그저 하해와 같은 마
음으로 용서를 바랍니다! 아직 철모르는 녀석이니 이번 한번만 봐주십시오,
대인!"
'대인은 무슨 얼어죽을...'
비장한 주인장의 표정을 보노라니 기가 막혀서 나오던 말도 들어갈 판이다.
"아, 그게 아니라..."
"이 녀석! 어서 대인께 사죄를 드리지 못하겠느냐! 이런 천하에 몹쓸 놈!
네놈이 그러고도 어찌 점소이라 자처하겠느냐! 자고로 훌륭한 점소이의 자
질은 일단 손님의 눈빛 한번을 스쳐봐도 심기가 얼마나 어지러우신가, 에서
부터 점심은 뭘 자시고 싶은가를 파악해야 하며..."
이 무슨 아닌 밤에 홍두깨인가?
모진 놈 옆에 잇다 벼락맞는다고, 점소이는 그저 '예'한마디 던진 것뿐인데
천하에 다시없는 바보점소이로 전락하여 엄한 잔소리의 세례를 들어야했다
. 원인제공자인 장추삼의 심기도 편치 않음은 당연했고.
따지고 보면 손님의 심기를 헤아리지 못하는 쪽은 주인이다. 왜 손님이 들
지 않는가는 분석해볼 생각도 없이 그저 들어온 사람들에게 허리를 굽히고
만 있다. 친절 또한 객잔을 운영함에 있어 중요한 덕목이겠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이 나오지 않는 한 이 객잔이 북적거리기는 난망한 노릇이다.
'누가 자질이 없는 건지...'
애초에 이런 곳에서 만나기로 한 것 자체가 실수였다. 첫 번째 전서구를 받
은 하운이 표국에서 만나기보다 청빈로에서 조금 떨어진 객잔에서 회합을
가지자고 한 것까진 좋았는데 하필이면 이런 곳을 지명할 건 뭐란 말인가.
전서(傳書)상으로는 분명 괜찮은 시설에 저렴한 가격, 그리고 정갈하면서도
맛있는 음식이라고 분명 써있었거늘.
'내 이제부터 하형의 다른 건 모두 믿어도 음식에 관한 부분은 절대, 완전
히, 하나도, 무슨 말을 하더라도, 아니 목숨을 걸더라도 믿지 않는다!'
그래봐야 공염불이다. 그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애꿏은 점소이를 구
제해주는 게 다였으니까.
"왜 엄한 애를 들들 볶고 그래요?! 그만 좀 하고 아무거나 먹을 것 좀 내
와요! 배고파 죽겠는데 제발 짜증나게 하지말고!"
버럭 소리를 지르자 찔끔한 주인이 쥐잡듯 점소이를 노려보다 코가 땅에 닿
도록 장추삼에게 절을 하고는 주방 쪽으로 손살같이 튀어갔다. 뭘 주문할지
모르지만 기대 하지 않았기에 어차피 관심도 없었다.
그저 주린 배만 채우는 게 지상과제니까.
손님은 달랑 그 하나. 객잔 밖에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점심식사를 하
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을 한 명이라도 끌어보려던 점소이는 장추
삼의 식사가 얼추 끝날 때가 돼서야 포기하고 풀 죽은 얼굴로 돌아섰다.
"잘 안 되니?"
213
어깨를 툭 치자 깜짝 놀라 고개를 치켜든 점소이의 얼굴에 곧 씁쓸한 미소
가 걸렸다.
"좋다고는 말하기 힘드네요."
"음..."
"남들이 보기에야 마을끼리의 연결점이기에 좋은 목으로 보일지 몰라도 사
실 이곳은 썩 괜찮은 자리가 아니지요. 어차피 뜨내기손님들이 찾는 곳은
성에서 들어와 가장 가까운 객잔이니까요. 뭐든 소문날 만큼 유명한 것이라
도 있다면 그나마 낫겠지만 이 동네나 저희 객잔에서 그런걸 기대하는 건
무리거든요."
"흐음..."
늘 싱글거리기에 좀 모자란 아이라고 봐왔는데 아무래도 잘못 생각한 것 같
다.
"숙객(宿客)이 없다면 점심이나 저녁식사 손님이라도 받아보려 하는데 그조
차 여의치 않아요. 식사손님들이라면 뜨내기가 아니거든요. 언제나 느끼는
부분이지만 손님들의 입은 참으로 냉정합니다."
'어라, 이놈 봐라?'
평범한 체구에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얼굴. 특징이라 부르기도 뭐하지만 굳
이 특이점을 꼽자면 사람 좋은 웃음을 늘 잃지 않는 정도가 전부로 보였건
만.
그런데 자신의 논지를 펼치기 시작하자 어찌 이리 달라진단 말인가. 미소
속에 녹아있던 두 눈이 초롱한 빛을 발하고, 야무지게 다문 입술은 사내의
기상을 표현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깊지 않은 배움일 텐데 전하고자 하는 바를 막힘 없이 표현할 수 있는 언변
의 뒤로 나이에 맞지 않는 세월의 무게가 녹아 있다.
"그렇다고 술손님을 받기엔 객잔이 터무니없이 비좁고... 보통 씀씀이가 큰
술손님들은 무리를 지어 다니시거든요. 그런데 저희 객잔은 그런 분들이
오셔도 받기 어려운 실정이랍니다. 한심한 얘기지만 굴러 들어오는 은자를
멀거니 보면서 놓치는 격이지요."
나름대로 훌륭한 분석. 바보 같은 미소 뒤에는 세상을 나름의 기준으로 분
석하고 판단하는 안목을 숨기고 있었다.
무엇보다 장추삼의 마음을 끈 것은 소년의 대화방식이었다. 점소이 아이는
얘기를 하면서 똑바로 청자의 눈을 주시하고 있었다.
'또래의 여느 아이들과는 차원이 다르구나.'
같은 나이 때의 자신을 돌아보고 저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진 그가 애써 화
제를 돌렸다.
"너 왜 여기 있느냐?"
"예?"
"왜 이곳에서 일을 하느냐고? 집이 가까워서 그런 거냐? 아니면..."
무슨 말인가, 하고 장추삼을 쳐다보던 아이가 곧 그 의미를 파악하고 빙긋
웃었다. 역시 두뇌회전이 비상한 소년이었다,
"집 같은 건 없어요."
'이런...'
"아뇨, 아뇨, 그런 표정은 제발 거두어 주세요! 이 세상에 고아가 어디 저
하나뿐이겠어요. 중원천지의 부모 없는 아이들에게 번번이 그런 슬픔을 보
이신다면 손님의 주름살이 백 개라도 모자라겠습니다."
한마디 한마디가 예쁜 아이다.
"그래, 내가 잘못했다. 왜 이곳에 있는 거니? 내가 보기에 너의 기준에서도
한참은 모자란 객잔임이 분명한데 말이다."
"그러니까 있는 겁니다."
"음?"
"생각해보세요. 본시 장사가 잘 되는 곳이라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고
그건 며칠만 봐도 한눈에 들어올 거예요. 이전 사람들이 구축해놓은 규칙대
로도 충분히 괜찮은 객잔이란 말이죠. 처음에야 좋겠지만 나중에는 그들의
일부분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거든요. 또한 그런 객잔이라면 저 같은 아이가
설자리 따위는 없지요. 어차피 잘 굴러가는데 손 한번 더 밀어준다고 눈에
뜨이겠어요?"
"네 말이 맞다."
흥미가 일어 아예 가까운 탁자에 앉아 턱을 괸 장추삼이 아이의 다음 이야
기를 기다렸다. 주인장의 발호를 눈으로 제지하는 것을 잊지 않고.
"꼭 객잔이 아니더라도 좋아요."
"그건 무슨 말이냐?"
"손님."
"어?"
느닷없는 아이의 부름에 깜짝 놀란 장추삼이 묘한 얼굴을 지어야만했다. 점
소이의 표정은 뭐라고 말로 형용키 어려운 자신감으로 충만 되어 있었으니
까.
"이런 말이 결례겠지만... 지금 손님의 위치에 만족하십니까?"
"어..."
생각해보지 않았다. 워낙 숨가쁘게 돌아간 요즘이기에 그런 건 까맣게 잊고
있었나보다.
대답을 못하고 버벅이는 그를 보던 아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다 말을 이었다.
"저는 말이죠. 십 년이 지난 후의 제 모습을 그려보곤 합니다. 그야말로 점
소이노릇을 잘해서 자그마한 객잔이라도 하나 가지고 있을까, 아니면 돈을
벌어서 점포를 열고 비단을 파는 모습... 어떤 식으로든 지금보다는 나은
모습을 그려보곤 하지요."
장추삼의 흐뭇한 미소는 얼마 후에 싹 거둬져야했다.
"어느 곳, 어느 장소에서든 사람답게 사는 자신을 그리는 것만큼 위안이 되
는 것도 없지요. 문제는 십 년이 지나든, 삼십 년이 지난 세월이든 자신이
해야만 하는 일을 하고 있느냐는 거랍니다."
"자신이 해야만 하는 일?"
"예. 저 밖에 하지 못하고, 그래서 저를 필요로 하기에 제가 아니면 안 되
는 일 말이지요. 만약 그런 일을 하고 있다는 확신이 든다면 어떤 일을 하
더라도 만족할 거예요. 그것이 어떤 일이라도 말이죠."
"내가 아니면 안 되는 일이라..."
"예, 자신이 아니면 누구도 하지 못하는 일. 자신이기 때문에 해야하는 일.
비록 보잘것없고 주목받지 못한다고 해도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이야말로 자
신의 위치에 제대로 서있는 분들이 아닐까요? 그래서..."
이때 손님들이 들이닥쳤기에 대화는 끊어져야했다.
"어서 옵쇼!"
언제 주위를 살피고 있었는지 객잔 문이 열리기도 전에 달려나간 점소이가
몇몇의 손님들을 부지런히 안내했다. 말을 하는 와중에서도 사람들의 동향
을 놓치지 않았음이니 진정 뛰어난 눈썰미라 아니할 수 없다.
들어선 손님들은 일군(一群)의 젊은이들이었다. 그들은 들어서면서부터 불
평을 늘어놨는데 생각에 잠긴 장추삼은 이들을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로서는 일종의 화두와 대면한 셈이었다. 만약
같은 이야기를 나이 지그시 든 노인이나 어깨에 힘 팍팍 세운 장년인에게
들었다면 크게 신경 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의례 있어 보이는 말을 내뱉으니까.
책임지지도 못하는 언사에 취해 휘둘릴 바보는 아니다. 하지만 소년의 얘기
는 더없이 진솔했기에 장추삼의 마음이 흔들렸으리라.
고개를 파묻고 생각에 빠져있던 그가 문득 탄식처럼 한마디를 토했다.
"한심하군."
"뭐!"
"지금 뭐라고 했느냐!"
뒤쪽 탁자에서 벌떼처럼 일어섰다. 아마도 그의 독백을 잘못 알아들은 탓이
다.
순간 짜증이 울컥 올라왔지만 참기로 하고 장추삼이 귀찮다는 기색이 역력
한 손짓을 하며 나른한 목소리로 이들을 제지했다.
"혼잣말이니까 신경 쓰지 마시오."
"뭐라고?"
"이런 성의 없는! 얼굴을 썩 돌리고 말을 해라!"
이들과 장추삼은 서로 등을 맞대고 앉아있었기에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없는
처지였다.
"서로 얼굴까지 볼 일 없고... 그냥 하던 일들이나 하라니까 그러네."
차분한 그의 말은 젊은이들의 기세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이들 청년들은
입신(立身)의 나이와 걸맞지 않는 정신연령을 지녔기에 작은 힘을 커다란
자랑으로 여기고 있었으니까. 본시 소인배들의 특징은 약자에게 강하고 강
자를 만나면 여지없이 꼬리를 마는 법이다.
귀찮아서 좋게좋게 넘어가자는 그의 응대를 '약한 모습'으로 판단한 청년들
이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이놈아, 얼굴을 돌려라! 아니면 무릎을 꿇고 석고대죄로 잘못을 고하던가!
우리들의 기분을 망친 죄 크지만 날씨도 좋고 귀한 분도 모신 날이니 네놈
의 행동에 따라 따귀 몇 대로 벌을 대신해줄 수도 있다!"
'따귀라...'
"겁을 집어먹을 거면 처음부터 알아서 기었어야 할 거 아니냐! 사내녀석이
비겁하기는... 큿큿!"
'겁?'
삥-
장추삼이, 아니 사내라면 누구나 듣기 싫어하는 말이 여과 없이 그의 고막
을 난타했다. 넘어갈 부분이 있고 응징을 해줄 부분이 있다.
아무리 철부지들이라고 해도.
'도저히...'
용서가 안 된다.
스르륵.
마치 해파리의 움직임처럼 장추삼이 일어섰다. 무지 천천히.
"아쭈? 곧 죽어도 찍소리는 내보겠다는 거냐? 가소롭다, 가소로워!"
카랑카랑한 목소리 놈에겐 한 두 방정도 가슴에 꽂아주고...
"아예 겁 대가리를 상실했군? 너무 겁을 먹어서 완전히 돌아 버렸나봐, 카
카!'
요놈, 겁이니 비겁 운운한 바람 빠진 음성에 깐죽깐죽 웃기까지 하는 놈.
'넌... 당분간 고기 먹을 생각하지 마라...'
씨이익.
장추삼의 입가에 그야말로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미소가 스치고 지나갔다.
며칠 적적하던 차에 이런 오락거리가 절로 굴러 들어오다니.
'빌어먹을 하늘도 가끔은 예쁜 짓을 하는군 그래. 이제부터 슬슬 재수가 돌
아오려나?'
딱 봐서 안 되는 놈들을 건드리는 성격은 아니지만 이런 경우에 참을 자가
누가 있을까... 라고 앞으로 벌어질 행위를 정당화하며 그가 몸을 돌리려
하는데 점소이 소년이 재빨리 뛰어왔다.
"소, 손님들! 점잖으신 체면에 이 무슨 경우입니까! 진정들 하시고 곧 음식
이 나오니 즐겨주시기 바랍니..."
퍽!
둔중한 소리와 함께 반대편 탁자에서 고개를 조아리던 아이가 장추삼에게로
굴러왔다. 입가에 흐르는 한줄기 혈선.
"어디 점소이 따위가 앞을 막는 거야, 재수 없게!"
"낄 때 껴라. 이 천한 놈아!"
순간 장추삼의 눈에서 화광이 일렁였다.
"이익!"
"차, 참아주세요! 참아주세요!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제발 참아주세요! 제
발 요!"
미처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소매 자락을 붙잡으며 매달리는 점소이를 차마
내치지 못하고 씨근덕거리던 장추삼이 긴 한숨과 함께 의자에 몸을 실었다.
깊숙이...
소년의 눈은 말하고 있었다.
이것이 지금 자신이 해야할 일이라고!
깨지고 부서져도 분란을 막아낸다면 자신의 몫을 충실히 이루어낸 것이라고!
'아...'
언제 나뒹굴었냐는 듯 해맑게 웃으며 벌떡 일어선 점소이가 다시 청년들의
탁자로 가서 아까보다 더한 아부로 그들의 기분을 맞추기 시작했다.
몇 차례의 알밤과 욕설이 장추삼의 마음을 후벼팠지만 그로서는 어쩔 도리
가 없었다. 지금은 나설 수도 없고, 나서서도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으
니까.
'그래, 지금 나선다면 지금은 좋겠지. 저런 싸가지들에게 수모를 받지 않을
테니. 하지만 그 다음은? 그리고 그 다음은?'
한번 의존하게 되면 여태까지 쌓아온 아이의 성은 여지없이 무너질 것이다.
물론 장추삼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떠날 터였고. 든 자리는 모르지만
난 자리의 공백은 처절하리만큼 커다란 상처로 자리할 것이 분명하다.
그 공허를 무엇으로 메우겠는가.
214
젊은이들도 곧 기분이 풀어졌는지 장추삼 따위는 잊고 그들만의 얘기로 객
잔을 가득 채웠다. 대화를 듣고싶지는 않았지만 화자(話者)들의 목청이 워
낙 좋아서 귓구멍을 막지 않는 다음에야 듣지 않을 수 없었다.
몇 마디가 그의 귓전을 오가고 장추삼은 정말 탁자에 엎어져 낮잠이라도 자
고 싶어졌다. 어찌나 우습고 가소롭던지.
한마디로 자화자찬 일색이었고 그나마 사실적이지도 않았다. 변설자들이 옮
기는 강호영웅들의 무용담들도 이보다 화려할까?
카랑카랑한 목소리의 청년은 검정오존과 어느새 동급이 되어갔다. 대체 얼
마나 검을 잘 쓰는지 몰라도 그의 말대로라면 북궁단야나 하운이 쓰는 검은
이빨 빠진 쇠붙이 정도로 전락할 정도였다.
바람 빠진 음성은 더 가관이었다. 이 자의 말을 듣노라니 화자의 정체가 무
엇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으니까.
'뭐 하는 놈이야?'
그는 천하의 고수라는 사람들을 모조리 아는 것처럼 그들과의 친분관계를
자랑했는데 이야기 내내 자신에 대한 언급은 일절 피했다. 단지 어느 지방
의 고수와 호형호제하는 사이고 어떤 문파의 누구와 몇 번 식사를 같이했다
는 것이 얘기의 주제였다.
한심한 것은 탁자에 모인 이들의 반응이었는데 그가 거론하는 고수의 명성
이 높을수록 감탄성이 커져만 갔으니 장추삼으로는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물론 사람이 살아감에 있어 대인관계처럼 중요한 것은 없다. 하지만 무림인
이라면 결국 자신의 힘으로 인생을 개척해야 하는 법. 제아무리 천하제일의
고수와 두터운 관계라고 해도 그 자신이 약하다면 결국 도태되는 것이 무
림의 율법이다.
호가호위(狐假虎威)에는 한계가 있으니까.
보기 좋게 핀잔을 날려주고픈 마음은 굴뚝이었지만 끊임없이 돌아보며 웃는
점소이 때문에 장추삼은 꾹 눌러 참아야했다.
사실 간간이 들려오는 여인의 웃음소리로 미루어 어느 정도 이해는 간다.
남정네들의 만용과 실수는 여자의 향기에 취했을 때 종종 발생하는 현상이
니까.
'그래, 그래. 고금을 막론하고 짝짓기 시기의 수컷들은 눈에 뵈는 게 없다
고들 하지. 발정이 날대로 났는데 뭐가 두렵고, 무엇이 신경 쓰이겠냐. 저
정도로 눈물겨운 몸부림의 성과가 차다 찬 냉소라면 나라도 벽에 머리를 박
고 죽어버릴 거야.'
장추삼의 비웃음은 그들에게 전달될 리 없었고 청년들은 행색부터 없어 보
이는 그를 염두 하지도 않았다. 그도 그럴 법 한 것이 청년들은 나름대로
호북에서 이름을 날리는 세가의 자식들이었으니까.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연신 자기의 얼굴에 스스로 금칠 하기 바쁜 청년, 그
는 호북성에서 검 하나로 따진다면 능히 열 손가락에 든다는 황진원(黃眞元
)의 둘째 아들 황수보라는 인물이었다.
중원무림에선 알려지지 않은 명호지만 그래도 이곳 호북에서는 파형(波形)
황진원의 이름으로 안 되는 일이 거의 없다고 봐도 옳다.
장추삼이 콕 집어서 응징을 내리려했던 바람 빠진 음성의 사내는 무당파의
속가제자로 사문의 재정에 큰 몫을 담당하고 있는 기영제(寄嶺制)의 장자(
長子) 기고만이라는 작자였다.
호부(虎父)밑에 견자(犬子)라고 했던가?
황진원과 기영제는 비록 중원무림메서 주목받을 만큼의 실력을 가진 것은
아니었지만 호북무림에서는 나름대로 인정받는 사람들이었고, 인품 또한 광
명정대하여 그들을 아는 이들이라면 누구라도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자식들은...
워낙 조용해서 장추삼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나마 가장 반짝이는
눈동자로 어쩐지 일행과는 동떨어진 곳에 위치하는 듯한 청년 하나.
야릇한 웃음소리로 얼간이 같은 두 청년의 혼을 빼기에 여념 없는 여인네는
별반 중요해 보이지 않았다. 그저 좀 괜찮은 외모와 가문을 믿고 남자들
가운데에서 여왕벌 행세하기 바빠 보이는 바보였으니까.
'아아... 어쩐지 이 자리에 앉아있는 내 자신이 너무 한심하게 느껴지네,
젠장.'
점입가경의 바보놀음에 비웃기도 지쳐 장추삼이 객방에 올라가 잠이라도 청
하려고 일어서려 했다. 게으름이라는 측면에서 다소 문제가 있지만 정신건
강이나 기타를 고려한다면 수면을 취하는 게 차라리 나았으니까.
"참, 자네들 그 사실 모르지? 뭐, 알면 이상한 일이지만... 크크."
바람 빠진 목소리, 기고만이 또 뭘 늘어놓으려는지 야릇한 웃음과 함께 입
을 열었다.
'그놈 참 지겹네. 야야, 뭔가 멋지게 보이고 싶으면 제발 곁다리 얘기는 그
만두고 네 이야기를 해 봐라. 대체 뭐 하자는 자식인지...'
천천히 걸음을 옮기려던 그의 발목을 남의 얘기 좋아하는 기고만이 잡아챈
것은 어쩌면 우연일지도 모른다.
"이건 정말 극비인데... 흐흐, 극비고 말고! 하지만 내 특별히 자네들에게
는 말 해줌세. 우리 아버님이 아니시면 절대 알지 못할 기밀사항인데 말이
야... 조만간 무당의 장문이신 청허진인(淸虛眞人)께서 폐관수련에 들어가
실 거라네."
"그, 그게 정말인가? 아니, 어쩐 일로 장문께서 폐관참수까지 결심하셨단
말인가!"
적당히 장단을 맞춰주는 황수보의 놀람에 더욱 기고만장해져서 입이 죽 찢
어진 기고만이 나름대로 호탕한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무리 나라고 해도 어찌 그것까지 알겠나? 폐관하신다는 것 자체만 해도
비밀 중의 비밀이거늘. 무당에서도 이 사실을 아는 분들이 거의 없다고 하
네. 나나 되니까 이런 걸 아는 게지. 아마 사나흘 후면 결행하실 듯 하네."
무게 잡으며 말을 잇던 기고만이 목소리를 낮춰 일행에게 당부를 잊지 않았
다. 그의 말대로 극비는 극비인가보다.
"지금 들은 얘기는 그야말로 극비사항이란 말일세. 절대 세어나가서는 안
된단 거야. 내 말 명심하라고... 크크. 자네들, 친구 잘 둬서 이런 정보 얻
는 거지. 어디 가서 이런 얘기를 들을 수 있겠는가?"
장추삼의 얼굴이 묘하게 변해버렸다. 아무리 잘난 척 할게 없다고 해도 자
신과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의 얘기를 화제로 본인의 성가를 띄우려드는 기
고만의 행태가 너무 가소로워서였다.
'어이구, 이 한심한 친구야. 그래. 자랑할 게 얼마나 없으면 알지도 못하는
무당 장문의 폐관소식 주어들은 걸 가지고 자랑이나 하냐. 나 같으면...'
갑자기 그의 얼굴이 하얗게 탈색되었다.
'나 같으면... 뭐라고!'
그 순간 요리가 나왔는지 청년들의 탁자가 시끌벅적해졌다. 허나 기분 좋은
소란스러움도 잠시.
"야 임마! 너 이리 와봐!"
"카악, 퉷!"
또다시 청년들이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다. 음식 때문일까?
"무, 무슨 일이십니까?"
황급히 청년들에게로 향하는 점소이의 얼굴에 짙은 어둠이 깔려있었다.
탁자 앞에선 소년에게 황수보가 완자 하나를 내밀었다. 짜증을 가득 담은
얼굴로.
"네놈이 쳐 먹어봐라. 이걸 사람이 먹으라고 만들어 내온 거냐?"
"아... 그, 그게..."
기다렸다는 듯 기고만이 빈정거렸다.
"아아, 이런 비천한 놈이 제대로 된 음식 맛을 봤을 리가 없지 않겠나? 돼
지새끼만도 못한 인생을 사는 녀석에게 음식얘기를 하다니. 너무 많은걸 기
대하지 말게나... 크크."
"에라, 네놈이나 먹어라!"
황수보가 완자접시를 들어 소년의 얼굴에 던졌다.
팍!
산산이 깨지는 접시, 비산(飛散)되는 국물들. 그리고...
무척이나 뜨거웠을 텐데 점소이는 한마디의 비명조차 지르지 않았다. 그저
늘어트린 주먹을 꾹 쥐었을 뿐.
이에 기고만의 눈이 가늘어졌다.
"안주를 줬으니 술도 줘야하지 않겠는가? 먹어라, 술인지 썩은 물인지 모르
겠지만 말이다... 크크."
술병을 들고 일어선 그가 점소이의 머리에 그것을 가만히 부었다.
콸콸.
쏟아지는 술을 얼굴로, 몸통으로, 그리고 가슴으로 받으며 점소이는 그저
눈을 내리 감고만 있었다. 아니, 떨리는 입술과 흔들리는 마음의 진동을 제
어하려 노력했다는 게 맞을까?
'절대로, 절대로 울지 않아. 절대로 물러서지 않겠어. 절대로 도망치지 않
겠어!'
이심전심일까?
눈물을 참으며 다짐하는 아이의 마음은 고스란히 장추삼에게로 전해졌고 그
의 가슴은 까맣게 타들어만 갔다.
한 잔 술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는데...
비릿한 완자국물과 매캐한 죽엽청을 뒤집어쓴 소년의 몰골은 누가 보아도
비참했지만 청년들에게는 그저 재미난 광경의 하나일 뿐이었다.
"이놈, 이렇게 놓고 보니 정말로 웃기잖아? 네 녀석은 점소이를 할 게 아니
라 어디 가서 빌어먹고 다니는 게 낫겠다!"
황수보가 킬킬거리자 기고만이 거들었다. 난장을 부리는 것에도 먼저 나서
지 못하는 위인답게.
"그거 지당한 말이오. 에이..."
장추삼의 눈썹이 서서히 역팔자를 그려갈 무렵 처음 듣는 목소리가 끼어 들
었다.
"에이. 어린애가 뭘 알겠소. 자자, 다들 관두고 다른 객잔으로 옮기도록 합
시다."
치기 어린 목소리. 아마도 일행의 중간자적 입장에 서있는 인물인 듯 싶었다.
그의 말에 따라 여인이 일어섰고 아이를 희롱하던 두 사내도 입가에 머금은
비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로 의자에서 엉덩이를 들었다.
"잘해라, 잘."
소년의 머리를 툭툭 치며 일행이 문을 나서려했다.
"저... 계산은 어느 분이..."
점소이의 말에 중간자적 청년이 몸을 돌렸다.
"아, 얼마인..."
"계산은 무슨!"
버럭 고함을 지르며 돌아선 황수보가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콰앙!
탁자는 그의 주먹에 마치 수수깡처럼 부서졌다. 파괴 시에 별다른 나무파편
이 튀지 않는 것으로 보아 단순한 힘이 아닌, 공력을 사용한 주먹질이었음
이 분명했다.
"개, 돼지나 먹을 음식을 내놓고는 값을 치르라니! 곱게 가주려고 했더니
네놈이 화를 자조하려느냐!"
"맞아, 맞아! 우리 아버님이 누군지 알고 그런 소리를 하느냐! 우리 부친으
로 말씀드리자면..."
또 남의 얘기.
하지만 기영제와 황진원이라는 이름은 확실히 무게가 있었다. 그들 두 사람
의 명호가 언급되자 점소이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갔으니까.
'이런 이런...'
장추삼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역시 애는 애다.
"알겠느냐? 네놈이 어떤 결례를 범했는지 말이다. 한심한 녀석... 이대로
가주는 것도 감지덕지해야할 판에 계산은 무슨 놈의 계산!"
크게 콧방귀를 뀌고 모두들 몸을 돌리는데 주저주저 입술을 달싹거리던 소
년이 끝내 한 마리를 뱉었다. 모기소리처럼 작은 목소리로.
"그러니 계산을 해 주세요..."
"뭐!"
"그러니... 계산을 해 주세요... 많은 돈도 아닙니다... 황대인이나 기대인
의 자제 분들이라면 불쌍한 점소이를 그냥 지나치시지는 않겠지요. 얼마 안
되는 액수이니 적선하신다고 생각하시고 계산을 해 주세..."
퍽!
누가 말릴 사이도 없이 황수보의 주먹이 뻗었고 둔탁한 소리와 함께 탁자
서너 개를 밀치며 점소이가 나뒹굴었다.
"네놈이 끝내 매를 버는구나. 하여튼 비천한 종자들은 사람 말을 못 알아듣
는 법이야!"
얼마나 큰 충격인지 몰라도 일어서려 다리를 버둥버둥 움직이던 소년이 끝
내 무릎을 펴지 못했다.
"오호호! 꿈틀거리는 것 좀 봐. 애벌레 같잖아? 아이 징그러워!"
"원래 출신이 더러운 것들은 벌레처럼 기어다니는 편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
지요. 크크..."
여인의 말에 기고만이 잽싸게 화답했다.
"자자, 가자고 들..."
황수보가 일행을 이끌려는데 다시 작은 소리가 들렸다.
"그래도 계산을 해 주세요..."
고개를 들지는 못했지만 소년의 입은 기계적으로 같은 말을 반복했다. 겁에
질린 주인장은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지만 점소이는 물러서지 않았다.
"아니, 이 놈이!"
"에잇!"
이번엔 황수보가 나서기도 전에 기고만이 튀어나갔다.
"이놈! 이 비천한 놈! 어딜 감히 꼬박꼬박 말대꾸를 하는 거냐! 죽어라, 죽
어!"
점소이의 머리를 발로 짓밟으며 그가 비명처럼 짖어댔다.
"네놈의 아비 되는 놈이나 어미 되는 년이 어떤 출신이기에 이리 찰거머리
처럼 엉겨붙는 거냐! 이번 기회에 네놈의 버릇을 단단히 고쳐주마!"
힘도 뭣도 없는 발길질이었지만 쓰러져있는 아이에게 충분히 고통스러웠고,
그래서 점소이의 두 눈망울에 작은 루주가 한 방울 맺혔다.
'참아야 하나...'
고개를 숙이고 한숨을 쉬던 장추삼의 눈썹이 쫑긋 올라갔다.
'책임지지 못할 일엔 나서지 말라... 그럼...'
신이 난 기고만의 발길질은 그 강도가 더해만 갔고 소년의 입에서 차츰 비
명소리가 새어나왔다.
"이제 그만 두시구려. 자리나 옮깁시다."
중간자적 청년의 말에 발길질을 멈춘 기고만이 신발에 뭍은 피를 점소이의
몸에 슥슥 닦았다.
"에이, 더러워졌잖아! 재수 없게 시리! 오늘은 일행이 있어서 참는다. 운
좋은 줄 알아라!"
씨근덕거리던 그가 일행과 함께 객잔문으로 향할 때 차가운 한마디가 내리
꽂혔다.
"돈 내."
215
순간 문을 나서려던 청년들은 자신들의 귀를 의심해야 했다. 뭔가 소리를
듣긴 들었는데 내용이 도통 이해되지 않았으니까.
약속이나 한 것처럼 네 명의 남녀가 빙글 몸을 돌렸다.
그곳엔...
"뭐야. 지금 입방아를 찧은 놈이 네 녀석이냐?"
황수보가 턱을 문지르며 거만하게 웃었다. 척 보기에 어디서 주먹질 깨나
한 듯 싶은 사내였지만 그가 보기엔 우스울 뿐이었다.
"황형, 황형! 이 객잔에 저놈말고 딴 사람이 또 어디 있소? 저놈이 분명하
오!"
손가락질까지 해대며 호들갑을 떠는 기고만의 눈은 조금 질려있었다. 눈치
와 처세가 비정상적으로 발달한 인물답게 그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놈은 매우 위험하다는 사실을.
그래서 힘 자랑에 여념이 없고 나서기 좋아하는 황수보를 충동질하는 것이
다.
'도, 동네건달같이 보이는 놈인데 묘하게 무서워! 이럴땐 뒤로 빠지는 게
상책이지.'
머리는 그리 돌리면서 부지런히 입을 놀려 황수보의 어깨에 힘을 싣는 기고
만의 행태가 경멸스러웠지만 장추삼은 여전히 같은 말만을 했다.
"돈을 내라고 했다, 음식값."
멀뚱히 그를 보던 황수보가 성큼 한발 나섰다.
"네놈이 아마 이 객잔의 뒤를 봐주나 본데... 동네 건달 녀석이 나설 자리
를 알아야지."
"맞아, 맞아!"
둘의 호흡은 그야말로 환상적인 것이었으나 장추삼에겐 하품 나오는 순간이
었다.
'내 참...'
이제는 객잔 뒤를 봐주는 치란다. 어이없었지만 일단 감정은 뒤로 미루고
하던 일을 마치기 위해 장추삼이 희미하게 웃었다.
"내가 누구이건 간에 너희들은 돈만 내면 되잖아. 귀찮으니까 어서 음식값
이나 내고 사라져라, 응?"
물론 사라질리 없겠지만.
그의 말에 두 청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감히 우리더러 너희라고 했느냐!"
"우리 아버지가 누군 줄 알아!"
두 사내가 동시에 나섰지만 뱉은 대사의 의미가 너무 달라서 하마터면 헛웃
음을 흘릴 뻔했지만 겨우 참고 장추삼이 다시 의자에 앉았다.
다리 꼬는 것을 잊지 않고.
"네 아버지를 내가 왜 알아야 하는데?"
"우리 아버지가 바로 태극검(太極劍) 기영제란 말이다, 크크크크!"
순간 찾아든 적막. 눈을 내리 감고 정적이 가진 뜻을 마음 내키는 대로 만
끽하던 기고만이 슬며시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완전 쫄아 있겠지? 내가 누군데 감히 나서서 까부는 거야... 어?'
그곳엔 쫄은 얼굴도, 당황한 얼굴도 없었다. 단지 매우 의아한 얼굴은 하나
쯤 있었다.
그리고 황당한 응대.
"근데?"
잠시 멍해있던 기고만이 발악처럼 외쳤다. 세상에 뭐 이런 놈이 다 있느냐
는 얼굴로.
"내가 기영제의 아들 기고만이라니까! 너 기영제란 위명을 설마 모르는 건
아니겠지?"
"알아."
"알아? 크크크... 그럼 어서 무릎을 꿇어라!"
"무릎? 왜?"
"우리 아버지가 기영제라니까!"
"그거랑 무릎이랑 뭔 상관인데?"
"이런 답답한 놈을 봤나!"
바닥에서 몸을 일으키던 소년의 귀에 뭔가 소음이 들렸다.
'뭐지...'
눈을 돌려보니 장추삼과 기고만이 우스꽝스런 얼굴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 표정만큼이나 웃기는 대화내용에 저도 모르게 실소를 머금던 점소이의 머
리에 갑자기 뭔가가 세차게 외 부딪쳤다.
'그래, 그거야! 제 아버지가 누구든 간에 자신은 자신일 뿐이야!'
한순간이나마 기영제라는 이름에 움찔했던 자신이 한없이 창피스러워 소년
이 침을 꿀꺽 삼켰다. 비릿하게 느껴지는 피맛. 입천장이 찢어졌나 보다.
어쨌든 해야할 일이 있기에 힘겹게 몸을 일으킨 점소이가 입을 열었지만 등
을 보이고있는 장추삼에 의해 그의 말은 도중에 가로막혔다.
"이제 그만 들 두시..."
"네 몫은 거기까지야."
"예?"
"네가 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란 말이다. 제 아무리 자신만의 일이 있어
서 남의 손을 빌지 않아야 한다고 해도 세상은 그리 간단치만은 않다고! 의
지와 배치되는 상황은 언제든지 벌어진단 말이야, 몽상가 꼬마야."
"그래도 이건..."
"이건? 이건 뭐 어쩔 건데? 솔직히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지금 뭐가 있지?
동네북처럼 두들겨 맞는 거? 아니면 비참하게 바지가랑이 잡고 늘어지면서
돈 달라고 애원하는 거? 한번 말을 해 봐라. 뭘 할 수 있는지를.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대체 뭐가 있는지 말을 해 보란 말이야!"
울먹이려는 소년에게 장추삼이 결정적인 한 마디를 던졌다.
"머리통 깨지고 부러질 정도로 허리를 굽혀봐야 이들에게 동전 일 푼도 받
지 못해."
쿵!
소년의 머릿속에서 뭔가가 복잡하게 얽혀들었다. 막연하게 품어오던 미래와
절대적인 힘 앞에서 무너지는 이상의 괴리.
"인생은 그리 녹록하지 않아."
"인물 났군, 인물 났어! 별 병신 같은 것들이 서로 충고하고 울먹이고...
아주 경극을 하나 올려라!"
황수보가 키득거리자 질세라 기고만이 끼어 들었다. 아버지의 이름빨이 먹
혀들지 않아 적잖이 당황하고 있던 그였기에 남달리 장추삼에게 이를 갈던
차였다.
"하늘 높은 줄 모르는 놈들은 뼈까지 갈아버려야 한다고! 어딜 감히 우리
앞에서 헛소리를..."
퍽!
신나게 중얼거리던 그가 찍소리도 내지 못하고 배를 움켜쥐며 주저앉았다.
그리고 무심한 한마디.
"닥쳐."
순간 싸늘한 한기가 장내에 맴돌았다.
'이, 이럴 수가!'
황수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별 볼일 없는 기고만 따위가 한방에 무너져서
가 아니다. 기고만과 정체불명의 건달 놈과의 거리.
'이건 말도 안 돼. 아무리 빠른 발이라고 해도 한순간에 움직일만한 거리가
아니었단 말이야!'
주둥아리로 거들먹거리는 기고만과 달리 황수보의 실력은 후기지수들 가운
데 그런 대로 인정을 받는 편이었다. 그런 견지에서 낯선 건달의 움직임은
경악할 수준의 것이었으니 놀랄밖에.
솔직히...
'움직이는 것조차 보지 못했다!'
그의 눈에 어린 경악과 달리 싱글거리던 청년의 얼굴에 가벼운 장난기가 솟
아올랐다. 잘은 보지 못했지만 건달 같은 사내의 움직임이 꽤 훌륭해 보였
고, 그래서 흥미가 인 것이다.
그 생각은 여인도 동일했는지 여태껏 남자 홀리는 교태 그 자체의 미소와는
달리 호기심 어린 눈망울로 장추삼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나 긴말 하기 싫어."
바닥에서 기고있는 기고만을 바라보던 장추삼이 고개를 돌려 황수보를 똑바
로 응시했다.
"맞고 줄래. 그냥 줄래."
"뭐, 뭐라고!"
경악은 한순간이었다. 설마하니 동네건달 녀석이 무슨 실력이 있겠는가. 기
껏해야 잔재주 수준이지.
"이, 이놈아!"
황수보의 목소리가 커졌다. 작은 떨림은 미지에의 공포를 수반하는 것이었
지만 아무튼 그는 강하게 나갔다. 놀라운 움직임? 그건 아마도 한눈 팔다
놓쳤나보다.
"내가 우습게 보이나본데..."
이것저것 늘어놓는 황수보를 외면하며 장추삼이 툴툴거렸다.
"그래, 맞아라."
희끗.
역시 놈의 움직임은 빨랐다. 빛살처럼 닥쳐오는 건달의 움직임에 맞춰 황수
보도 몸을 틀어 공세를 방비했다.
이래 보여도 나름대로 인정받는 보법을 익혔단 말이다!
그리고...
퍽!
역시 배를 움켜쥐며 바닥으로 가라앉는 황수보에게서 잠시 머물던 눈을 돌
린 장추삼이 장난기 많은 청년에게 두 손을 들어 보였다.
"자, 이제 누구라도 전낭을 개봉하는데 반대하지 않아. 어서 돈 내고 꺼지
라고."
사내는 신비롭게 웃더니 전낭을 꺼내 비틀거리는 소년에게로 던졌다.
"잔돈은 꼭 줘라."
장추삼이 점소이에게 찡긋 오른쪽 눈을 꿈뻑이자 소년이 무뚝뚝하게 답했다.
"망가진 기물 값은 빼야겠어요."
핏 웃고는 빙글 몸을 돌리는 장추삼에게 싱글거리던 사내가 급히 다가서서
어깨에 팔을 얹었다.
"잠깐, 잠깐만! 잠깐만 기다리시오! 이것도 인연인데..."
"할 말 없어."
스산한 대꾸. 뒤도 돌아보지 않고 팔을 툭 쳐내는 그의 서슬에 일순간 냉랭
한 표정으로 바뀌었던 사내가 다시 엉겨붙었다.
"아니, 뭐 사해가 동도라는데..."
"난... 너 같은 인간이 제일 싫어."
" ! "
느닷없는 말에 사내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내가..."
천천히 몸을 돌려 사내를 직시한 장추삼의 입가에 차디찬 조소가 걸렸다.
대상이 된 사람이라면 접시물에 코를 박고 죽어버리고 싶을 만큼 잔인한 비
웃음이.
"내가, 아니 저 아이가 부당한 요구를 했나? 나도 인정해. 여기 음식, 더럽
게 맛없어. 그야말로 개나 소의 여물로 써야할 판이야. 하지만, 하지만 말
이야... 일단 음식을 시켰으면, 그 음식에 벌레나 머리카락이 빠져있지 않
았다면 돈은 내야할 거 아냐? 너도, 자빠져 있는 놈들도 그걸 잘 알고 있었
을 테고. 하지만 놈들은 억지를 썼지. 근데 넌 팔짱만 끼고 웃었어. 왜 그
랬을까? 넌 그저 귀찮아서 빠진 것 뿐이야."
"음?"
"뭘 놀래?"
장추삼의 비웃음이 더욱 짙어갔다. 그에 따라 사내의 기분은 가일층 나빠졌
고.
"너, 그리고 저쪽 소저... 충분히 나설 수 있는 입장이었잖아? 저놈들하고
급수가 다르다는 것쯤은 알아. 안 그래?"
사실 두 남녀는 특별한 신분의 인물들이었다. 그래서 황수보와 기고만이 대
접을 했던 거고. 또, 잘 보이려 했던 거였다.
순간 고개를 숙인 여인. 하지만 사내는 달랐다.
늘 최고의 위치에 서 있었다고 자부한다. 그에 걸맞는 대접도 받았었고. 힘
으로도, 지력으로도 밀려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런 곳에서 무공 조금 익
힌 나부랭이에게 충고 따위를 듣다니.
"이런 사람들을 눕혔다고 너무 기고만장한 것 같소이다."
"너도 똑같아."
"뭐요!"
"어차피 한방이니 똑같아. 뭘 다르다고 목에 힘을 주는 거야?"
사내의 얼굴에 장난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흐흐..."
그의 웃음에 맞추어 기고만이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이, 이분이 누구신줄 아느냐!"
'어이, 아까는 아버지타령이었잖아...'
기세 등등하게 목 울대를 세운 그가 사내에게 포권을 하며 조잘거렸다.
아무래도 너무 약하게 때렸나보다.
"이분으로 말씀드리자면 팔파공동문하(八派共同門下)의 출신이시자 그 여덟
분 가운데 종남의 수제자로서 비호와도 같이 권을 쓰신다는 비류권(飛流拳
) 오청지대협이시란 말이다!"
길고도 지루한 설명. 그러나 의미는 간단치 않았다.
첫댓글 오늘도 즐감하고 갑니다
즐거운 하루 되시길...
즐감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