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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9월 1일 연중 제22주일(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
제1독서 : 신명 4,1-2.6-8
제2독서 : 야고 1,17-18.21ㄴ-22.27
복 음 : 마르 7,1-8.14-15.21-23
그때에 1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예수님께 몰려왔다가,
2 그분의 제자 몇 사람이 더러운 손으로, 곧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보았다.
3 본디 바리사이뿐만 아니라 모든 유다인은 조상들의 전통을 지켜,
한 움큼의 물로 손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으며,
4 장터에서 돌아온 뒤에 몸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는다.
이 밖에도 지켜야 할 관습이 많은데, 잔이나 단지나 놋그릇이나 침상을 씻는 일들이다.
5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
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사야가 너희 위선자들을 두고 옳게 예언하였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7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8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14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다시 군중을 가까이 불러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모두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
15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21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22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23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
<오늘의 묵상>
안소근 실비아 수녀
오늘 독서와 복음은 모두 들음에 대하여 말하는 듯합니다.
신명기에서 모세는, 이스라엘이 율법을 실천하면
다른 민족들이 그들을 지혜롭고 슬기롭다고 하리라고 말합니다.
인간이 자신의 머리로 좋다고 여기는 것을 선택할 때보다,
하느님께서 이것이 바른길이라고 알려 주시는 것을 따라갈 때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 판단을 고집하지 않고 하느님 말씀을 따라갈 수 있는 것이 지혜입니다.
야고보서에서도 온갖 좋은 것은 위에서 온다고 하며,
공손히 받아들이라고 말합니다.
공손함, 그것은 신명기에서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가리킬 것입니다.
내가 내 안에서 더 좋고 더 옳은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우기지 않고
하느님의 생각에 순응하는 것이 공손함입니다.
그런데 복음에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듣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판단을 고집하느라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들은 인간의 전통은 바꿀 수 없다고 여기고,
하느님의 말씀이 들어올 여지를 남겨 두지 않습니다.
열왕기 상권 3장에서 솔로몬이 “듣는 마음”을 청하는 장면이 떠오릅니다.
듣는 것은 귀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이고,
우리에게는 이 ‘듣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내 생각이 옳다고 주장하지 않고 하느님의 말씀이 더 지혜로움을 인정할 때,
다른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일치하지 않거나 내 이익에 부합하지 않더라도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말씀이 더 옳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마음이 있을 때
그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지혜에 귀를 기울이며 그 지혜가 이끄는 대로 살아갑시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부부싸움에서 가장 큰 원인은 “당신은 왜 변하지 않느냐?”가 아닐까 싶습니다.
어느 자매님께서 남편에 대한 불만을 제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눈물까지 흘리시는 것을 보니 그동안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하셨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남편의 이 모습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를 물으니,
결혼과 동시에 그 모습을 보였다는 것입니다.
결혼하신 지 40년이 넘으셨으니, 40년 넘게 힘든 시간을 보냈다고 하소연하십니다.
그래서 이렇게 여쭤보았습니다.
“40년 넘게 변하지 않으셨는데, 과연 남편분께서 변하실 수 있을까요?”
우리의 불만족은 상대가 달라지기를 바라면 바랄수록 커집니다.
상대의 변화를 바라는 것, 그래서 조금 더 나은 자기 배우자가 되기를 바라는 것은
분명히 이기적인 감정이지만 피하기 어려운 마음일 것입니다.
상대방이 변하면 자기가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래서 이기적인 감정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상대는 이 변화로 오히려 불행해질 수 있습니다.
40년 넘게 유지했던 자기 모습을 버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상대가 변하지 않아서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는 방법을 생각해야 했습니다.
그래야 자기가 불행이라는 틀에서 비로소 벗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은 사랑만을 이야기하시고 당신 삶으로
직접 사랑을 보여주셨던 주님의 사랑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 행복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반대편에 서 있던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끊임없이 예수님께 변화를 요구합니다. 제발 율법을 지키라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서도 제자 몇 사람이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보고서 따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이야기해 주십니다.
단순히 손을 씻고 음식을 먹는 행위보다 깨끗하고 흠 없는 마음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하십니다.
하느님의 계명은 인간의 전통과 관습 위에 있습니다.
당연히 하느님 섬기는 행위가 손 씻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그런데도 자기와 다른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에게 죄를 짓게 하는 것은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 다름 아닌 바로 일의 계획과 방향을 세우는 인간의 의식에서 나온다고 하시면서
진정으로 무엇을 실천해야 하는지를 말씀하십니다.
이 주님의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 말씀에는 제2독서의 야고보 사도가 말씀하셨듯이,
우리의 영혼을 구원할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제1독서 신명기 말씀처럼, 오로지 주님의 명령을 지켜야 합니다.
결국 주님의 사랑에 집중하면서, 자기의 진짜 행복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그 무덥던 찜통더위도 물러가고,
그 세찬 바람과 매섭게 퍼붓던 비도 그치고,
9월의 드높은 하늘의 가을입니다.
오늘 말씀전례의 주제는 ‘율법의 올바른 실행’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신명기>의 말씀으로,
주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율법을 주면서 보여주신
사랑과 지혜를 생각하라는 모세의 따뜻한 권고 말씀입니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내리는 주 너희 하느님의 명령을 지켜야 한다.
너희는 그것을 잘 지키고 실천하여라.”(신명 4,5-6)
모세는 이스라엘은 주님의 법을 지켜
다른 민족에게 하느님 사랑과 지혜를 보여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법을 지키면 이스라엘 백성에게 생명과 축복이 올 것이라고 말합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야고보는
우리의 실천이 참된 실천이 되기 위한 식별 기준을 밝혀줍니다.
첫째 기준은 그것이 '위에서, 곧 빛의 아버지에게서 내려오는 것'인지를 보는 것입니다.
이를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온갖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은사는 위에서 옵니다.
빛의 아버지에게서 내려오는 것입니다.”(야고 1,17)
그러니 하느님께서는 인간애를 포함하면서도 초월하십니다.
무엇보다도 위로부터 오는 하느님의 생명을 나누어주시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교회는 민주주의를 지지하지만,
민주주의가 인류를 구원한다고 믿지는 않습니다.
둘째 기준은 그것이 말씀의 원리를 따르고 있는지,
곧 말씀을 실천하고 있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이를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안에 심어진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이십시오.
~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야고 1,21)
왜냐하면 바로 “그 말씀에는 우리의 영혼을 구원할 힘이 있습니다.”(야고 1,21)
그러니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 1,22)라고 말하며,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이러한 ‘율법과 말씀의 올바른 실행’은 겉모습이 아니라
마음에 있음을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과의 정결법 논쟁을 통해 말해줍니다.
그들의 주장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조상들의 전통’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시나이 율법을 십계명의 성문율법 외에도 구두율법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율법을 613개로 확대하여 지켰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러한 ‘조상들의 전통’을
겉으로는 지키면서 자신들을 거룩하게 여기는 반면,
그렇지 못한 이들, 곧 가난하고 소박한 이들을
'저주받은 사람들'(요한 7, 49)이라고까지 하면서 족쇄를 씌워 짐 지우고,
반면에 예수님의 가르침을 배척하면서
다른 이들이 그분을 따르는 것마저 막았습니다(마태 23, 13).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르십니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마르 7,8)
그러고 나서 군중을 가까이 불러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모두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
~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이 나온다.”(마르 7, 14-22)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율법의 올바른 실천’을 가르쳐주십니다.
사실 참된 실천은 법의 원칙에 대한 외면적 준수가 아니라,
법의 근본정신에 맞게 사는 내면적 삶과 추종입니다.
곧 마음과 행실의 상관관계를 말해줍니다.
이를 흔히 우리는 ‘수행’이란 말로 사용합니다.
행위를 닦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행위를 닦는 일은
그 행위를 유발시키는 뿌리인 마음을 닦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행동은 우리의 마음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마음에서 행위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마음을 담아 실행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문제는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나쁜 생각입니다.
바로 그 나쁜 생각이 사람을 더럽히는 원인이 됩니다.
그러니 ‘겉이 아니라 속을 사랑으로 채우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사랑을 실천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사랑이 율법의 완성입니다.”(로마 13,10)
그렇습니다.
율법의 완성은 ‘사랑’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사랑의 실천을 과업으로 짊어지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모든 실천이 다 옳은 것은 아닙니다.
실천하더라도 ‘참된 실천’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곧 아무것이나 실천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생각에 따라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심어진 ‘하느님의 말씀을 깨닫고 실천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의 전통’을 따라 실천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계명을 따라 실천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진정 중요한 것은 실천하더라도 ‘빛 안에서 실천’하는 것이요,
사랑하더라도 ‘진리 안에서 사랑’하는 일입니다.
사도 요한은 말합니다.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8)
<오늘의 말·샘 기도>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킨다.”(마르 7,8)
주님!
몸에 밴 잘못된 관습과 전통에 매여 당신의 계명을 거스르지 않게 하소서.
틀에 맞춘 잘못된 지식과 신념을 지키려다 당신의 사랑을 거스르지 않게 하소서.
나의 옳음을 주장하기에 앞서, 나 자신을 지키기에 앞서,
당신을 사랑하는지를 묻게 하소서.
제 뜻이 아니라 당신의 뜻이, 제가 원하는 하늘나라가 아니라
당신이 원하시는 하늘나라가 되게 하소서. 아멘.
마음을 다스려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은 우리를 구원으로 부르는 사랑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우리를 위하는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이 시간 주님의 마음을 생각하는 가운데
우리도 주님의 마음으로 변화되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9월 순교자 성월을 맞이하며
목숨을 바쳐 주님을 증언했던 순교자들의 믿음을 본받고
또 그들의 영성을 살 수 있는 은총이 주어지길 기도합니다.
언젠가 영화의 한 장면을 보았는데 손 잘린 사람이 발가락으로 노름을 하더라고요.
그것은 손이 도박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도박을 하기 때문입니다.
가끔 텔레비전 뉴스에 비춰지는 죄짓고 벌 받으러 가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부끄럽다고 손으로 얼굴을 가립니다.
그렇지만 마음이 죄를 지었는데, 손으로 얼굴을 가린다고
죄지은 마음이 가려지지는 않습니다.
때때로 ‘손버릇 나쁘다’, ‘손 크다’라는 말을 합니다.
이 말은 마음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고운 손이라도 나쁜 짓을 하는 손은 고운 손이 아닙니다.
아무리 거친 손이라도 좋은 일을 하는 손은 고운 손입니다.
사실 겉모양도 중요하지만, 마음 관리를 잘하는 것이 더 소중합니다.
잠언에 보면
“무엇보다도 네 마음을 지켜라. 거기에서 생명의 샘이 흘러나온다”(4,23).
“평온한 마음은 몸의 생명이고 질투는 뼈의 염증이다.
”(마음이 편안 하면 몸에 생기가 돌고 마음이 타면 뼛속이 썩는다)(14,30)라고
적고 있습니다. 속마음이 중요합니다.
사무엘 상권 16장에 보면 사무엘이
주 하느님의 뜻을 받들어 왕으로 성별한 사람을 선택하게 됩니다.
그때 이사이의 아들 중 “엘리압”을 보고 속으로
“주님의 기름부음 받은 이가 바로 주님 앞에 서 있구나.”하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무엘에게
“겉모습이나 키 큰 것만 보아서는 안 된다.
나는 이미 그를 배척하였다. 나는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
(사람들은 겉모양을 보지만 나 야훼는 속마음을 들여다본다)(16,7)하고 이르셨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다윗에게 기름을 붓게 됩니다.
성경은 이렇게 마음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하고
질문하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마르7,6-7).하며
이사야 예언자의 말을 인용하셨습니다.
당시 조상의 전통이라고 하는 것 중에,
하나는 식사를 하기 전에 손을 씻는 것입니다.
시장에서 사 온 음식, 시장에 다녀온 몸, 그리고 그릇들을 씻었습니다.
위생상 이유를 댈 수 있겠지만 바리사이들에게는
밖에서 부정탈 수 있었던 것을 씻기 위한 정결례였습니다.
돼지고기 같은 부정한 음식에 손을 대거나 부정한 사람,
즉 나병환자를 만나면 부정을 탄다고 생각했고,
이런 부정은 물로 씻으면 없어진다고 알고 있었으며
거룩한 신에게 잘 보이려면 그에 합당한 정결함을 지녀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신의 노여움을 산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도 성당에 들어올 때 성수를 찍어 기도합니다.
거룩한 하느님 대전에 들어서면서
온갖 악한 생각을 빼어 버리고 거룩해 지기를 소망합니다.
(주님, 이 성수로 저의 죄를 씻어 주시고,
마귀를 몰아내시며 악의 유혹을 물리쳐 주소서.)
그리고 나갈 때는 거룩해져 나가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성수를 찍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내용을 살아내지 않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레위기나 민수기를 보면 피해야 할 금기사항,
부정 탓을 때 회복하기 위한 속죄 절차 등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데(민수기5장.9장.19장),
바빌론 유배라는 국가적 재앙을 겪고 자신들을 반성했습니다.
하느님과의 계약에 충실하지 못했던 부정,
하느님의 정의를 실천하지 못한 부정,
하느님의 거룩함을 더럽힌 부정을 저질러서 재앙을 겪었다고 받아들였습니다.
그 후 부정한 죄를 없애기 위해
“거룩한 백성이 되어야 한다”(레위20,7)는
율법의 요구에 따른 정결법은 점점 확산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마음의 정화는 소홀히 하고 손을 씻고 그릇을 씻는 형식에 매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정화의 대상을 구체적으로 지적하십니다.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
외적인 형식에 연연해하지 말고 내면을 깨끗이 하라는 것이
예수님 말씀의 근본 의미입니다.
사실 우리도 그렇습니다.
화장하고 예쁜 옷을 차려입고 멋지게 하느님 앞에 나왔지만,
마음 안에 들어 있는 것은 하느님만이 아십니다.
하느님 마음에 드는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정말 아름답고 예쁜 모습은 고해성사를 통해서 마음의 정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모든 허물을 용서받고 주님의 거룩함을 입는 것입니다.
성무일도 시편에 보면
‘겉꾸민 우리 위선 흉측하오니 당신의 은총으로 벗겨 주소서…
겹겹이 둘러싸인 어두움 속에 내 마음 거짓으로 가득하오나
하느님 전능으로 다스리시면 내 마음 백옥같이 희어지리다.”하고 노래합니다.
허물로 누벼놓은 날들이지만 하느님의 권능과 주님의 자비가 있기에
기쁨과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현대인은 ‘얼짱’,‘몸짱’이라는 외면을 가꾸는 데 온갖 노력을 다 쏟습니다.
그러나 정작 ‘마음 짱’, 속을 가꾸는 일에는 소홀합니다. 아니 방치합니다.
정말 고쳐야 할 것은 얼굴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마음에 도금을 입히는 것이 문제입니다.
마음에 도금을 입히지 마십시오. 혹 도금이 되었거든 하루라도 빨리 벗겨내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새 사람이 되십시오.
이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그분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지를 분간 하도록 하십시오”(로마12,2).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 1,22).
예수님께서는 전통을 무시하시지 않았고,
다만 그것이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인가에 마음을 두셨습니다.
우리는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복음의 근본 가르침을 바탕으로 마음의 거룩함을 회복해야 합니다.
알맹이와 껍데기를 구별하는 지혜안에 머물기를 희망하며
주님 앞에서 마음속을 환히 바라보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비둘기가 콩밭으로 날아가는 것은, 비둘기 마음이 콩밭에 있기 때문이고,
원숭이가 나무 위로 올라가는 것은, 원숭이 마음이 나무 위로 가 있었기 때문이다.
몸은 마음이 가 있는 곳으로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을 좋은 곳에 두어야 한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6,2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본당에 목수회가 발족했습니다.
제가 미처 알지 못하는 많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실시 사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커피 머신 water line 교체, 변기 flush diaphram 교체,
친교실 문 Adjustment, 성전 바닥 타일 수리,
잔디밭: 흙 파인 곳 흙 채우기, 여자 화장실 천정 라이트 교체,
부엌 후드 라이트 교체, 부엌 천정 형광등 교체,
여자 화장실 누수 수리, 농구장 보수”
예정 사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Blower & Power Washer Tune-Up, 성전 문 Adjustment,
성전 십자가의 길 라이트 교체, 성전 천정 라이트 교체,
Asian Jasmine 구매 및 설치, 죽은 나무 또는 관목 교체, Top Soil Spreading,
남쪽 주차장 누수 - Water Leak Testing, 놀이터 Boundary – Concrete,
놀이터 Rubber Mulch 교체, 제대 Handicap Ramp, 성전 바닥 Vacuum Purchase,
제구실 누수 수리, 성당 주위 보도 및 외벽 검은 곰팡이 제거, 성당 입구 처마 스테인 제거,
북쪽 주차장 물 고임: Parking Lot Striping, 부지 서쪽 경계선 주위 정리,
농구장 Shade Installation, 새 창고 주위 보도블록 설치”
저는 봐도 잘 모르는 부분이 있는데 형제님들은 세밀한 부분까지 해야 할 일들을 찾아냈습니다.
해야 할 바를 알고, 묵묵히 실천하는 형제님들의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제가 댈러스에 온 지 어느덧 6개월이 넘었습니다.
지난 6개월 동안 있었던 일을 돌아봅니다.
창고 만드는 일, 벽화 그리는 일, 농구장 꾸미는 일에 함께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는 밭에 묻혀있는 보물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창고 공사에 함께 하면서 목수회 봉사자들을 만났습니다.
벽화 작업하면서 청년들을 만났습니다.
농구장 단장하면서 사도회 형제님들을 만났습니다.
댈러스 성당에 숨어있는 많은 보물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구역모임, 반 모임에 함께 했습니다.
구역 미사, 반 미사를 함께 하면서 교우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생생한 현장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본당에서 멀리 떨어진 구역 교우들의 고충도 알 수 있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소홀해진 구역모임이 다시 활기를 찾으니 좋았습니다.
이렇게 구역모임이 자리를 잡으면 쉬는 교우들을 방문할 수도 있고,
주일 점심 친교 봉사도 수월하게 할 수 있고,
9월 22일에 있는 본당의 날 행사에도 많은 구역이 참가할 수 있을 겁니다.
26기 사목회가 임기를 마쳤고, 27기 사목회가 출범했습니다.
26기에는 공석인 자리가 더러 있었는데, 27기에는 모든 분과의 봉사자가 선임되었습니다.
기꺼이 봉사를 맡아 주신 27기 사목회 임원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열정과 신앙이 충만한 봉사자를 보내주신 하느님께도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제가 해야 할 일을 생각합니다.
구역과 반 모임의 활성화를 위해서 함께 하려고 합니다.
사제관과 수녀원을 신축하려고 합니다.
지금은 사제관도 수녀원도 성당 밖에 있습니다.
성전 신축할 당시에 비용이 부족했고, 당시는 성당이 너무 외진 곳에 있어서
사제관과 수녀원을 신축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제 성당 주변에 건물도 많이 생겼고,
지금의 사제관과 수녀원을 매각하면 건축비용도 감당할 수 있다고 합니다.
성당에 사제관과 수녀원이 있으면 모임에 참석하기도 수월합니다.
수녀님이 성당에서 기도하기도 좋습니다. 교우들과 소통하기도 좋습니다.
바늘 가는 데 실이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성당에 사제관과 수녀원이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2027년은 본당 설립 5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본당 설립 50주년을 준비하려고 합니다.
저는 뉴욕에 있을 때, 50주년을 기념하는 성당을 보았습니다.
‘메이플 우드 성당, 퀸즈 성당, 워싱턴 DC 성당,
필라델피아 Holy Angels 성당’이 50주년 행사를 하였습니다.
본당 설립 50주년을 맞이하면서
‘영적인 준비, 친교의 준비, 전례의 준비, 문화의 준비’를 하려고 합니다.
새로운 100년을 향한 비전을 제시하려고 합니다.
저 자신을 위해서도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건강을 위해서 몸과 마음을 가꾸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의사여 먼저 너의 병이나 고쳐라.”
사제가 먼저 주님의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제가 먼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사제가 먼저 주님께서 지고 가신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가 해야 할 일을 이미 알려 주셨습니다.
‘겸손, 헌신, 희생, 나눔, 기도’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을 가까이하는 것입니다.
오늘 제2독서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하느님 아버지 앞에서 깨끗하고 흠 없는 신심은,
어려움을 겪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아 주고,
세상에 물들지 않도록 자신을 지키는 것입니다.”
어느덧 9월입니다.
주님의 제자로서 지난 8개월 동안 무슨 일을 했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남은 4개월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뜻을 하나씩 실천하면 좋겠습니다.
모든 죄는 마음에서 나온다.
조욱현 토마 신부
오늘 말씀의 주제는 선과 악이란
사물이나 관습에 있지 않고 인간의 마음에 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실천하라고 가르쳐 주는
계명과 법규들을 잘 들어라. 그래야 너희가 살 수 있다.”(신명 4,1)
계명과 법은 우리를 속박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의 선물로 이해되는 법을 말한다.
그 법은 생명의 원천이며, 윤리적 압박의 도구로서가 아니라, 자유의 원천이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 법을 통하여
당신 백성과 가까이 계시며, 당신 백성과 대화를 계속하신다.
인간은 많은 경우에 하느님의 말씀을
인간의 편의대로 이해하고 해석하여 변질시키고 있다.
오늘 복음의 논쟁 시작은 주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식사를 하였다는 것에 있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5절).
조상들의 전통이라는 것은 조상들이 율법 해석으로 만든 규칙들이었다.
이 전통 중에는 모세의 율법에는 없는 많은 규정이 있다.
그들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 조상들의 전통을 선과 악의 척도로 삼고 있다.
조상들의 전통을 하느님의 계명보다도 선악의 척도로 생각하기 때문에,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것이 되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을 위선자라고 하시면서 이사 29,13을 인용하신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6-7절)
예수께서 전통을 비난하시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 전통들이 사람의 계명에 지나지 않는데도
그 전통들을 하느님에게서 오는 계명보다 더 중요시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8절) 하시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기보다는 인간의 헛된 생각을 고집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인간 생활을 압박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바리사이적 형식주의가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
얼마나 만연되어 있는지를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렇다고 새로운 시대에 맞게 우리 마음을 열고 변화시키려는 마음도
가질 생각을 못 하고 그냥 전통에 물들어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지금 우리 교회 안에도, 그리고 나 자신 안에도 이러한 면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여야 한다.
나에게서 악습을 어떻게 버려야 할지를 생각하고 나 자신을 바꾸어 가야 한다.
선과 악은 우리 각자가 행하는 자유롭고 의식적인 모든 선택이 이루어지는 인간의 마음속에
즉, 인격의 심층부에 있다는 것을 설명해 주신다.
“너희는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14-15절)
마음 안에, 모든 죄로 가득 차 있는 그 마음에서,
하느님과 이웃을 거스르는 마음으로 더러워진다.
예수님의 말씀은(21-23절) 무섭다.
마음에서 나오는 이러한 것들이 사람을 더럽힌다고 한다.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21-23절)
인간을 더럽히고 하느님과의 관계를 끊는 것은 인간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들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인간의 모든 종교적 윤리적 생활을 발견하고,
인간 자신의 참된 모습을 발견하도록 이끌어 주신다.
인간의 참된 모습은 바로 인간의 마음에서 나오는 진실한 태도에 있다.
그러므로 음식이나 외적인 행동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계명은 바로 이웃에 대한 사랑이며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것이라고 하신다.
이 모든 것은 하느님 말씀의 법을 순종하는 마음으로 듣고 실천함으로써,
즉 우리의 마음 안에서 생활화하고 실행함으로써 이룰 수 있다고 야고보 사도는 말한다.
하느님께로부터는 오로지 선한 것들만 온다고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진리의 말씀이 오는데
이제 그 말씀을 생활화하고 실현함으로써 능동적으로 구현시켜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진리의 말씀은 우리에게 벌이 되고 말 것이다.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보 1,22)
말씀을 실천하고 있다는 척도는
특히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이웃에 대한 우리의 구체적인 태도이다.
실천적인 신앙에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의 진실성이다.
믿는다고 하면서 그 신앙을 증거가 되지 않으면,
즉, 살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이러면 신앙 자체가 형식적인 신앙, 바리사이에 불과하다.
하느님의 법은, 하느님의 규정은
인간을 구속하기 위한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규정을 어기면 죄가 된다는 것으로 규정 지키기에만 급급해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하느님과 이웃 앞에 사랑이 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하느님의 뜻으로 마음이 무장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 마음에서 악한 것들이 나와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다.
의식이나 전통만을 중요시할 때 이웃을 거스르게 되며,
결과적으로 하느님을 거스르게 된다.
불결한 것은 바로 이것이며 인간을 더럽히는 것이다.
전통이나 규정을 올바로 알아듣지 못하면 그것을 더럽히는 결과가 되고 만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은 어떠한 모습인가를 반성하면서
항상 주님의 뜻으로 충만한 우리 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사랑이 생략된 법이요, 인간미가 상실된 규칙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교회 행사를 주도해 나가다 보면 가끔 크게 착각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전례나 미사의 가장 중심, 핵심, 본질, 주체는 당연히 하느님이시지요.
우리를 향한 하느님 사랑의 강렬한 표현인 예수님이 주인공입니다.
이 사실을 망각하는 경우가 간혹 있습니다.
언젠가 제법 큰 행사를 한번 주관한 적이 있었습니다.
참으로 할 일이 많더군요. 기획안을 제출했습니다.
승인을 받자마자 행사를 추진할 위원회를 구성했습니다.
각 분야의 실무자를 선정해 즉시 실무에 착수했습니다.
제 성격상 적당히 하는 것, 스스로가 용납이 안 됩니다.
그야말로 혼신의 노력을 다했습니다.
이런 노력 덕분에 행사는 아주 경건하고 아름답게 진행됩니다.
1부 전야제, 2부 미사, 3부 친교의 마당...
행사는 조금도 빈틈이 없었습니다.
나중에 피드백을 받아보니 행사에 참석한 사람들 대부분이 대만족이었습니다.
다들 간결하지만 깊이 있는 그 행사를 통해 많은 분들이 깊은 하느님 체험을 했습니다.
행사가 끝난 후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얼굴들이 흡족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저 자신은?
큰 반성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행사 내내 제 머릿속에는 오로지 행사가 완벽하고 정확하게
끝나야만 된다는 강박관념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저 일만 죽으라고 했던 힘겨운 시간이었습니다.
그 행사를 통해 많은 사람들 마음 안에 하느님 사랑의 불길이 활활 타올랐지만
정작 제 안에는 아무 변화도 감동도 없었습니다.
그 기간 동안 예수님은 제 안에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그저 과로에 찌든 한 영혼이 힘겨워 허덕이고 있었습니다.
많은 경우 주객이 전도됩니다.
행사를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주기보다는
개인적, 사적, 이기적 욕구나 기대를 충족시키려 합니다.
하느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보다는 사람들에게만 기쁨을 주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드러나야 함에도 불구하고 나만 잔뜩 드러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으로부터 강한 질책을 받고 있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그랬습니다.
백성의 인도자들이었던 그들은 하느님보다는 셀 수도 없이 많은 율법에,
지극히 세밀한 생활 규칙에 더 우선권을 두었습니다.
수도회나 교회 안에도 많은 규칙들, 법조항들이 존재하는데,
도대체 왜 그런 것들이 만들어졌을까요?
돈보스코 성인의 말씀을 들으면 보다 쉽게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규칙들이 왜 존재하는지 아십니까?
우리의 규칙들은 사랑 안에서 모든 문제들이 순조롭게 진행되기 위한 수단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으로부터 심하게 질타당하는
가장 큰 이유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들이 강조하는 율법에는 사랑이 결핍되어 있었습니다.
이웃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당시 그들의 외양은 무서웠습니다.
어딜 가든 율법이란 잣대를 들고 다녔습니다.
혹시라도 누군가가 율법을 어기면 여지없이 율법서를 들이대었습니다.
싸늘한 눈초리, 냉랭한 얼굴, 엄격한 잣대, 호시탐탐 이웃의 실수를 노리는 표정...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사랑이 생략된 법이요, 인간미가 상실된 규칙입니다.
서공석 요한 신부
우리가 오늘 제1독서로 들은 「구약성서」의 「신명기」는 율법의 起源에 대해 말하였습니다.
율법은 이스라엘이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기억하며 살기 위해 필요한 지침이었습니다.
모세는 설명합니다.
“우리가 부를 때마다 가까이 계셔주시는,
주 우리 하느님 같은 신을 모신 위대한 민족이 또 어디 있느냐?”
율법은 하느님이 가까이 계신 사실을 사람들에게 상기시킵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하느님이 자기 안에서도 일하시게 하기 위해
그분이 하시는 일을 스스로 실천합니다.
율법은 바로 그 깨달음과 그 실천이 발생하게 하는 指針이었습니다.
인간사회에는 각종 법이 있습니다.
그 법을 잘 지키면 그 사회에서 무사히 살지만, 그것을 지키지 못하면 화를 입기도 합니다.
道路交通法을 예로 들면, 우리가 그것을 잘 지키면,
우리 보두가 도로를 자유롭게 이용하여 잘 이동할 수 있지만,
그것을 지키지 않으면, 우리는 교통사고를 내거나, 범칙금을 물어야 합니다.
도로교통법은 우리 모두가 도로를 잘 이용하는 혜택을 줍니다.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율법은 하느님이 함께 계신 사실을 환기시키고,
그분과 함께 사는 혜택을 누리도록 도와줍니다.
그것은 인간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함께 사는 자유의 혜택을 누리도록 합니다.
하느님의 일을 인간이 자유롭게 실천하도록 도와주는 율법입니다.
이스라엘을 600년 가까운 세월을 강대국의 식민지로 살았고,
예수님 시대에는 로마제국의 식민지였습니다.
오랜 식민지 생활을 겪은 이스라엘이 식민 지배를 벗어나
國權을 회복하는 것은 그들이 지닌 宿願이었습니다.
그 민족적 숙원을 성취하기 위해, 당시 유대교 實勢들이 제시한 것은
율법을 충실히 지켜, 하느님의 도움을 얻어, 독립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바리사이파 사람과 율사’는
그런 주장을 하던 유대교의 실세들입니다.
그들이 오늘 是非의 주제로 삼은 것은
‘조상의 전통’이라 불리는 그 시대의 위생법입니다.
팔레스티나는 서쪽에 지중해를 두고, 북쪽과 남쪽과 동쪽에 사막이 둘러싸고 있습니다.
비는 1월과 2월 사이 한 달 동안만 오고, 평소에는 매우 건조합니다.
바람이 불면, 주변 사막의 모래가 날려옵니다.
우리나라가 한 해에 몇 번씩 겪는 황사현상이
그곳에서는 雨期인 1월과 2월을 제외하고 1년 내내 일어난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물이 귀한 지방이라, 사람들은 물을 아낍니다.
그런 지역 여건을 생각하면, 오늘 복음이 말하는
‘조상의 전통’이라는 위생법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음식 먹기 전에는 반드시 손을 씻고, 시장에서 돌아오면 몸을 씻으라는 법입니다.
잔이나 단지나 놋그릇 등, 음식물을 담는 용기들도 자주 씻으라는 법입니다.
율법을 철저히 지켜야 한다는 생각은 율법의 존재 의미는 생각하지 않고,
지켜야 한다는 강박관념만 주었습니다.
숲은 보지 못하고 나무만 보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조상의 전통’을 따르지 않는다고 항의하는 자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고집하고 있다.”
오늘 「제1독서」가 말하듯이, 이스라엘 백성이 지혜로웠던 것은
자기들의 삶 안에 가까이 계시는 하느님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인간과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여,
하느님이 인간의 삶 안에 주님으로 살아 계시게 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대교 실세들은 율법을 이스라엘 國權의 회복이라는
인간 욕망을 성취하는 수단으로 삼아버렸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율법을 문자대로
철저히 지켜야 한다고 사람들에게 강요하였습니다.
우리의 욕망을 성취하고,
그것을 하느님이 주신 축복이라 생각하는 경우는 우리에게도 흔히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 유대교 지도자들이 하던 오해와 같은 것입니다.
입학시험에 자녀가 성공하면, 하느님의 축복이고,
사업이 잘되면, 혹은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면
하느님이 축복하셨다고 생각하는 오해들입니다.
모든 일이 하느님 안에 이루어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몇 사람을 예뻐해서 그들의 念願을 이루어주고,
다른 사람들은 실패하게 하시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예뻐서 이스라엘을 지배하던 로마제국을 망하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축구 선수들을 하느님은 예뻐하시고, 상대 팀을 패배하게 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께 빌어서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것을 얻어내어,
자기 한 사람 잘되겠다는 것은 인류가 있으면서부터 가진 욕심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중요한 일 앞에 井華水를 떠놓고 빌었고,
가물면 祈雨祭를 지냈습니다.
沈淸傳에 나오는 심청은 공양미 300석을 바치고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는 특권을 얻었습니다.
중요한 일을 앞두고 하느님에게 기도하지 말자는 말이 아닙니다.
받은 것을 은혜롭게 생각하지 말자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나 한 사람의 뜻이 이루어진 것을
하느님의 축복으로 생각하고, 말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말했습니다.
“너희는 하느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킨다.”
하느님에게 빌면, 나에게 특혜를 베풀어주신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 利己心의 소행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들 가운데 있다.”(루카 17,21)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혜택을 받았다고 믿는 사람은 그것을 사랑하지 않고,
그 은혜로움을 다른 사람에게 실천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우리 안에 살아 계시게 합니다.
세계 제2차대전 중 독일 나치 수용소에서
서른아홉의 젊은 나이로 1944년 처형당한 독일 신학자가 있습니다.
본회퍼(Dietrich Bonhoeffer)라는 개신교 목사입니다.
그분이 獄中에서 남긴 詩가 있습니다.
그는 그 시에서 우리가 하는 일과 하느님이 하시는 일을 설명합니다.
“사람들은 비통할 때 하느님을 찾습니다.
그분께 빵과 기쁨을 달라고,
도움을 달라고 부르짖습니다.
병에서, 죄에서, 죽음에서,
구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이도,
믿지 않는 이도 모두가 하는 일입니다.”
신앙인이든 비신앙인이든 모두가 실천하는 우리의 관행이라는 말입니다.
이 시는 계속됩니다.
“.....
사람들은 하느님이 비통할 때 하느님을 찾습니다.
가난하고 천하고, 쉴 곳도 먹을 곳도 없는 하느님을 봅니다.
죄와 연약함과 죽음에 버려진 하느님을 봅니다.
하느님이 고통당하시는 동안 그리스도인은 하느님 곁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불행한 이웃, 버려진 이웃 안에 계시는 하느님을 본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웃을 돕는 것은 그 이웃 안에 계시는 하느님을 알아보고,
그 하느님과 함께 있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詩는 이렇게 끝맺습니다.
“....
하느님은 비통함에 잠긴 모든 사람을 찾아오십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빵으로
그들의 몸과 마음을 먹이십니다.
하느님은 그리스도인들 위해 또 믿지 않는 이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모든 사람을 용서하기 위한 일이었습니다.”
하느님은 비통함에 잠긴 모든 이, 신앙인이든 非 신앙인이든, 모든 이와 함께 계시고,
우리를 통해서 그들을 위해 하시는 일이 있다는 말입니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