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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파공동문하.
작금의 정체된 무림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개방과 화산을 제외한 팔파
의 수뇌부가 머리를 맞대고 만들어낸 일종의 소모임 연합이다.
각파에서 능력 있고 어린 제자를 하나씩 뽑아 사문의 비기를 전수한 후에
일정시간동안 그 여덟 명을 합숙시켜 각 유파의 장단점을 비교한다는 그야
말로 획기적인 계획을 세운 것이다.
각파의 속내도, 만들어진 목적도, 어느 것 하나 명확하게 밝혀진 것이 없이
팔파공동문하라는 다소 과도적인 조직이 출범되었지만 이를 인지했던 무림
인이 채 서른이 넘지 않았으니 이들의 거사가 얼마나 조심스러웠는지 알 수
있었다.
거창한 명분과 파격적인 - 아무리 구파가 서로 호형호제한다지만 문파의 절
기를 서로에게 보이는 일은 절대로 없다 - 운영방식으로 출범부터 비밀스
러웠던 그들이 마침내 첫 번째로 여덟 명의 아이들을 배출한 건 채 열흘이
되지 않았다.
그 가운데 종남에서 파견되었던 인물이 바로 싱글싱글 웃던 사내, 오청지였
다.
굳이 숨기려고 하지도 않았고, 밝히려 하지도 않았지만 이왕 드러난 일이라
생각했는지 오청지는 싱글거리던 눈빛을 거두고 오연한 얼굴로 장추삼을
내려보았다.
실질적인 팔파공동제자... 이 직함 앞에 자유로울 무림인이 과연 있을까?
"팔파공동제자!?"
장추삼도 놀랐는지 오, 하는 감탄성을 내질렀다.
딱 한번.
머리를 끄덕인 그가 뭔가를 생각하다 머리를 벅벅 긁으며 걸음을 옮겼다.
"아니, 내가 뭐 팔파공동전인이라 해서 그리 부담 가질 것 없네."
난데없이 바뀐 말투. 손을 저으며 웃는 오청지의 얼굴에 은은한 자부심이
어렸다. 그래도 여전히 장추삼은 걸음을 옮겼다.
"괜찮다니까. 괜찮으니까..."
장추삼에게 다가간 그가 다시 어깨에 팔을 얹었다. 아무래도 일반 무인들에
게 팔파공동제자라는 직함은 너무 부담스러운가보다.
이럴 때 윗사람으로서의 관용을 보여줘야 한다.
그리고...
"너... 주식이 까마귀고기인 거냐, 아니면 대가리가 비정상적으로 나쁜 거
냐?"
"뭐, 뭐라고?!"
사람은 워낙 황당한 경우를 당하면 경직되어 일순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못한다. 어깨에 얹은 팔을 치울 생각도 하지 못하고 버벅이는 오청지의 팔
목을 어깨로 툭 민 장추삼이 손을 뒤로 저으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할 말 없다고 했지, 그새 잊었나?"
으드득.
이를 갈아 부치는 오청지의 기세는 사뭇 무서운 것이었으나 장추삼은 그저
고소를 머금을 뿐이었다.
"그만 갈아라. 이빨 닳아 없어질라."
"가, 감히 내게..."
"내 참..."
장추삼이 픽 웃었다.
"아까부터 듣자하니 감히 라는 말을 자주 쓰던데 말이야... 아무리 봐도 내
가 니들보다는 나이가 많거든?"
그가 오청지를 똑바로 쏘아보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모습을 보자니
'세상에서 가장 한심한 것에 대한 동정'같은 느낌이 들어 여인의 얼굴이
다시 한번 붉어졌다.
"억울하면 먼저 태어나던가... 이 싸가지야."
"으아아아!"
호랑이의 울부짖음이 이럴까?
제 분에 못이긴 오청자가 발작적으로 소리를 지르며 앞으로 나섰으나 여인
에 의해 제지당했다.
"삼, 삼사저!"
"경거망동하지 말랬지. 우리가 여기 싸움하러 왔니? 넌 대체 언제 철이 들
려고 이러는 거야?"
"하지만 저자가..."
청년들보다 한두 살 정도 연배로 보이는 여인이 오청지를 책망했다. 말하는
투로 보아 그녀 역시 팔파공동문하의 일원인 듯 싶었다.
"저자가 뭐? 대화하기 싫다는 사람 붙잡고 늘어진 건 너였다고! 엉뚱한 소
릴랑 그만두고 가자!"
"그래도..."
"어서!"
사실 무림에서 팔파의 공동전인이라는 의미는 기대한 것이다. 무공도 무공
이려니와 공동전인이라는 이름이 붙으면 그들의 신분은 두어 배분 정도 격
상되는 것이 일반적인 불문율이니까.
중소문파의 가주가 버선발로 뛰쳐나올 만큼의 위치. 그것이 바로 팔파의 공
동전인인 것이다. 이러한 관행에 물든 무림이다 보니 오청지의 분노도 일견
이해가 가는 부분이 있다.
단, 모든 일엔 예외가 있는 법이고... 장추삼이라는 인물은 예외 그 자체라
는 걸 그들이 몰랐다는 게 죄라면 죄일까.
대충 상황이 정리된 듯 싶자 점소이가 전낭을 조심스레 오청지에게 건냈다.
물론 부셔진 기물 값을 빼고.
오청지도 여인의 말은 거역할 수 없는 듯 시근덕거리며 마지못해 걸음을 문
가로 옮겼고 두 멍청이들도 슬금슬금 자리를 떠나려 했다.
장추삼 역시 멀거니 서있을 처자가 아니라 제방으로 올라가기 위해 휘적휘
적 2층 계단을 향하고 있었다.
그때...
우당탕!
"너무 늦었습니다! 하는 일도 없이 공사다망하여 두분 사숙께 이런 결례를.
.. 음?"
"저 역시... 어?"
미친 소 마냥 객잔문을 열어 젖히고 들이닥친 두 명의 중년인.
"이, 이게 무슨 소란이지..."
뭔가 세 나가는 발음. 유전인가 보다. 이로 미루어 표정까지도 공사다망했
던 보통 체구의 중년인은 기영제일 테고.
"대체 무슨 일이..."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좌중을 은연중에 압도하는 사내가 바로 호북에서 검
한 자루로 입신(立身)했다는 파형 황진원임에 틀림없었다.
그들이 뜨악할 만도 한 것이 장내는 완전 아수라장이었다. 아직 치우지 않
은 음식 찌꺼기들이 바닥을 나뒹굴고, 부셔진 탁자들이 어지러이 객잔을 수
놓고 있었으니 누가 보아도 무슨 일이 있었음을 짐작케 할 광경이었다.
"아버지!"
옆집의 덩치 큰 개에게 쫓기다 마실 나갔던 주인을 보고 꼬리치는 똥개라도
이리 처량할까. 기고만은 거의 기영제의 품에 안겨 징징거렸다.
"수보야, 너 이리 좀 와 보거라!"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황진원이 그의 아들을 불렀다.
"이게 대체 무슨 일... 이놈! 네 옷이 그게 다 뭐란 말이냐!"
황수보에게 자초지종을 묻던 황진원의 눈썹이 역팔자를 그렸다.
"아, 아니, 그게..."
장추삼의 주먹에 한바퀴 구른 황진원의 상의엔 완자국물과 흙먼지가 뒤범벅
이 되어 있었다.
뭔가 캥기는지 고개를 숙이고 쩔쩔매는 황수보와 달리 기고만은 부지런히
사건을 고해바쳤다.
'놀고있네.'
2층 계단을 하나 오르던 장추삼도 이 소란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기고
만이 하는 말을 듣자니 아주 웃기지 않은가.
아, 다르고 어, 다르다 했다. 같은 사건이라도 상황을 조금만 비틀거나 말
하는 이의 관점에서 설명을 하게 되면 벌어진 일들이 전혀 이상한 방향으로
흐를 수도 있고 때로는 주객이 전도되는 경우도 있다.
본시 말을 잘하는 건지 위기의 상황에서 보이는 놀라운 순발력인지 몰라도
기고만의 말빨을 거의 최상급이었기에 그 자리에 없었던 사람이라면 누구라
도 그의 말에 홀랑 넘어갈 판이었다.
얘기의 방향은?
물론 장추삼과 점소이는 죽일 놈이요, 자신들은 선의의 피해자로 귀결되었
다.
"저기요, 저기 계단의 저 놈이 그랬다니까요! 어서 혼내주세요!"
문득 슬퍼졌지만 꾹 참고 기영제가 장추삼을 불렀다.
"소협, 잠시 얘기 좀 나눌 수 있겠나?"
"할 말 없어요."
기영제의 얼굴에 고소가 맺혔다. 아마도 자신을 모르나 보다.
"초면에 실례라는 건 알지만 상황이 이러니 어쩔 도리가 없지 않은가. 태극
검 기영제의 이름을 봐서라도 잠시 내려와 주게."
과연 대인다운 풍모. 무학에의 조예는 깊지 않으나 천성이 호방하고 사람
사귀기를 좋아하여 강호에서는 기영제를 꽤 높이 평가하는 편이었다.
아무리 무림이라고 해도 꼭 무학만으로 양명(揚名)하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
다.
나이를 초월하고 지위마저 무시한, 그야말로 최상의 부탁. 강호상에 이런
청을 거절할 이가 몇이나 있을까. 그러나 상대는 장추삼이었다.
어쨌든 정중한 청이기에 그도 뭔가 화답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웃
었다.
씨익.
"바빠요."
그리고 빙글 몸을 돌려 계단을 오르며 손까지 흔들어 주었다.
이 정도면 최상의 예의 아니겠는가!
"네 이놈! 보자보자 하니까 아주 방약무인한 놈이로다! 어서 내려오지 못할
까!"
등뒤에서 천둥 같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안 봐도 황진원이라는 것을 알았
지만 돌아보기 싫어서 한숨을 쉬던 장추삼이 계단 바닥을 발로 툭툭 쳤다.
"그래서... 뭘 어쩌자는 거요..."
이때 여인이 황진원과 기영제의 옆으로 가서 몇 마디를 던졌다. 무슨 말을
했는지 몰라도 기고만과 황진원의 얼굴이 석양처럼 붉어지고, 그들의 입에
서 작은 탄식이 흘러 나왔다.
이들의 변화를 눈치챘을까. 장추삼이 다시 한 계단 오르려는데 황진원이 또
불러 세웠다.
"발걸음을 멈추어라!"
'아, 또 뭐야...'
"자식놈이 칠칠맞아 얻어터진 거야 알 바 아니지만 존장에 대한 예도 모르
고 설치는 녀석을 보아 넘겨줄 만큼 아량이 넓은 내가 아니다! 썩 내려와서
기형께 예의를 표하거라!"
장추삼이 우뚝 멈춰 섰다.
"이봐요, 아저씨..."
"뭐라고!"
분기탱천한 황진원이 앞으로 나섰으나 한번 열린 장추삼의 입은 쉴 줄을 몰
랐다.
"존장에 대한 예? 좋지, 좋고 말고. 다 좋은데 말이요. 그 예의라는 거...
꼭 아저씨의 방식대로 따라할 필요는 없는 거요. 예의란 마음에서 우러나와
야 진실한 거 아니겠소? 사람마다 예의를 표하는 방법이 다를 수도 있단 말
이오. 그것을 가지고 자신의 규격에 맞지 않는다고 길길이 날뛴다면 그 사
람은 예를 받을 자격조차 없다고 생각하오만?"
왜 자신의 틀에 맞춰서 세상을 보려고만 고집할까, 하고 말을 맺는 장추삼
의 눈길이 부담스러웠는지 황진원이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근데 기분이 나쁘다. 구구절절 옳은 소린데 뭔가 손해를 본 느낌이다.
"오냐. 참으로 입을 잘 놀리는구나. 어디 갈대 같은 혓바닥만큼이나 주먹도
훌륭한지 내 직접 봐야겠다!"
억지다.
옆에 서있던 기영제도 좀 심했다고 생각했는지 황진원의 팔을 잡았다.
짝짝짝!
"오호, 강호에 인물 났군! 정말 대단한 언변이야!"
박수를 치며 비꼬던 오청지가 장추삼을 가리키며 키득거렸다.
"말뿐 아니라 꼬리를 마는 실력도 대단합디다. 안 되겠다 싶으면 유연한 보
법으로 자리를 뜨더구려. 정말 대단한 사람입니다."
"훗! 훗!"
장추삼이 끊어 웃었다. 아무래도 손을 좀 봐줘야 할 아이 같다.
"보법... 좀 보여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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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몸을 돌린 장추삼의 눈에 오청지 따윈 들어오지 않았다. 대답 역시
개의치 않았고.
뚜벅.
커다란 덩치도 아니다.
뚜벅.
발을 굴러 일부러 크게 소리를 내지도 않았다.
뚜벅.
그는 그저 계단을 내려오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오청지는 숨이 막혔다. 평범한 발자국 소리일진데 그에
게는 마치 납덩어리가 심장을 짓누르는 느낌으로 다가왔다.
'이, 이 느낌은 뭐냐!'
대조적으로 장추삼의 신색은 지극히 태연했다. 아니, 태연하다 못해 평온하
기까지 했다.
그렇게 오청지의 앞까지 이른 장추삼이 주위를 둘러보고 고개를 한번 갸웃
거렸다.
"좁은데..."
자리 없으니 제삼자들은 빠지라는 얘기.
순간 두 중년인의 얼굴에 여러 가지 표정이 어우러졌다. 그건 분노와 허탈,
그리고 황당함이 뒤섞인 것이라 한가지 단어로 설명하기 어려웠다.
"보자보자 하니까 아주 가관이로구나! 이 분이 뉘신지나 알고 그런 경거망
동..."
"말 많네."
낮게 투덜거린 장추삼이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있는 황진원의 눈을 똑바
로 응시했다. 그런데 말은 다른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어이, 관둘까?"
당연히 대상은 오청지였다.
'이, 이놈!'
절대 거절할 수 없게 만들어놓고 천연덕스레 딴청을 부린다.
"모두들 잠시만 비켜주시길 바라오!"
잠시 중압감 비슷한 것이 들었던 걸 부인하지는 않았지만 순간적인 착각이
라고 자위하며 오청지가 포권으로 양해를 구했다.
생각해 보니 우스운 놈이다. 기세나 실력으로 보아 분명 무림인인데 어찌
팔파의 위명 앞에서 저리도 방자한 태도를 보인단 말인가.
'이런 부류가 있긴 있지.'
어찌어찌 잔재주를 익혀 시골 촌 동네를 주름잡고 다니는 부류들. 아직 임
자를 만나지 못해서 무한정으로 커진 간을 복대처럼 두르고 다니는 얼간이들.
오청지의 입가에 절로 웃음꽃이 피었다. 방금 전까지의 중압감은 전부 어디
로 갔는지 그의 얼굴에선 여유가 넘쳐 흘렀다.
"본 때를 보여주지, 하룻강아지."
"좋지."
장추삼도 마주 웃었다.
이때 오청지는 한가지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강호인 가운데 여덟 개, 아
니 아홉 개의 커다란 문파 앞에서 자유로울 사람들이 또 있다는 것을.
'하늘 높은 줄 모르는 놈...'
기영제와 황진원이 주춤거리며 물러서지 않자 이를 갈아 부치던 오청지가
신경질적으로 그들을 노려보았다.
"지금 내 부탁을 무시하는 거요!"
"아, 아니 그래도..."
"썩 비키시오! 저런 방자한 위인에게 따끔한 충고를 내리지 않고서 어찌 팔
파의 공동제자라 얼굴을 들고 다니겠소! 두 분은 아무런 걱정 마시고 잠시
만 자리를 피해 주시구려!"
그의 서슬에 찔끔한 두 사람이 마지못해 걸음을 옮겼다. 아비 눈치를 살살
보고있는 한심 그 자체의 자식놈들을 데리고.
남은 사람이 문제다.
오청지는 슬며시 여인을 쳐다보았다.
'어?'
분명 뭐라고 할 것만 같았는데 놀랍게도 삼사저라 불린 여인은 멀거니 객잔
천장을 응시하고 있지 않은가.
"저... 삼사저..."
기영제와 황진원을 닦달할 때완 전혀 다른 모습. 오청지는 혀로 입술을 축
이며 여인의 눈치를 살피기에 여념이 없었다.
"삼사저... 저기요..."
"알아서 하렴?"
"예?"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반응. 그가 아는 삼사저는 이런 경우를 무척이나 싫
어하기에 분명 한 소리 들을 거라 각오했었다.
그저 예쁘장하고 잘 웃는, 평범한 처녀 정도로 보일지 몰라도 오청지에게
그녀는 흉신악귀보다 더욱 무서운 존재였다.
나이? 배분?
물론 그런 것들도 걸린다.
하지만 오청지도 사내란 말이다! 인위적인 서열가지고 여인네에게 꼬리를
말 정도로 바보는 아니다! 그럴 거면 같이 다니지도 않았다!
문제는...
"네가 저지른 일이니 네 힘으로 수습하라고. 정말 귀찮은 애로구나!"
이게 웬일이냐!
삼사저의 내락은 오청지에게 햇살이었다. 또 문제 일으켰다고 혼날 줄 알았
는데 알아서 하라니.
"하하, 그럼 나중에 뭐라고 하기 없기예요?"
너무 기분이 좋아져서 웃는 오청지를 무시하고 장추삼이 바닥을 발로 툭툭
치다 고개를 들었다.
"더 기다려야 돼는 건가?"
"후후후..."
나름대로 음산하게 웃으며 오청지가 뒷말을 붙였다.
"보법을 보여준다고 했지? 우습군. 당신은 이제부터 보법의 정수를 맛보게
될 것이야. 그리고 팔파공동문하의 위대함까지도 몸으로 알게 될 것이고."
"그래?"
반문한 장추삼이 문득 점소이 쪽을 돌아보았다. 아이는 걱정과 근심으로 가
득 찬 얼굴로 거의 울상이 되어 있었다.
'녀석...'
안심시킬 필요는 없다. 그런 건 말로 하는 게 아니다. 직접 보여주면 된다.
그의 입가에 그려진 미소가 마음에 들지 않았을까. 오청지가 눈살을 찌푸렸
다.
"그 잘난 보법은 얼굴로 보여주는 거냐?"
이때 장추삼이 불쑥 물었다.
"한번이라도... 대지가 이끄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나?"
"뭐?"
황당한 질문에 오청지가 멍한 얼굴이 되었다. 아닌 밤에 홍두깨도 유분수지
, 대체 무슨 말인가.
"이제 보니 미친..."
"단 한번이라도...바람이 부르는 소리에 이끌린 적이 있나?"
"무슨 말을 하는 거야!"
펄쩍 뛰는 오청지를 물끄러미 보던 장추삼이 고개를 저었다.
"난 말이야... 자주 듣곤 해..."
"이런 미친 놈!"
알 수 없는 위압감에 놀라 오청지의 신형이 저도 모르게 뒤로 죽 물러섰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면서도 무게가 실린 보법.
다급한 순간에 어미를 찾는 아이의 심정일까. 그가 밟은 보법은 종남의 북
두천강보(北斗天剛步)였다. 유려하면서도 장중한 기세로 상대의 기를 꺾는
다는 천고의 보법.
순간적으로 일곱 개의 방위를 점하여 적의 이목을 뺏는 동시에 상대의 빈틈
을 장악하는, 그야말로 가장 모범적인 보법이 바로 종남의 북두천강보였다.
과연 명성은 헛되지 않았는지 물러섰던 오청지가 어느새 장추삼의 옆으로
바짝 따라붙고 있었다.
그리고...
파박!
장추삼의 신형이 분열하기 시작했다.
'뭐, 뭐야!'
이 기사에 오청지의 발길이 순간적으로 멈칫거렸다.
"환술? 오냐! 네놈은 알고 보니..."
말을 토하면서도 온몸 깊숙이 내리 박히는 느낌을 지울 도리가 없기에 오청
지의 얼굴이 하얗게 탈색되었다.
분열된 상대방의 하나하나는 언제든지 자리를 박차고 나올 태세에서 조소하
듯 자신의 일거수 일투족을 주시하고 있었다.
뼛골 깊숙이 전해져 오는 위기감과 공포. 이처럼 생생한 존재감과 위협을
주는 객체들이 어찌 허상들이라 하겠는가!
이때 꿈결처럼 어떤 울림이 들렸다.
... 사물의 움직임이란 정지된 여러 시간들이 순식간에 맞물려 돌아가며 그
려낸 족적에 불과하다. 네 보법 역시 끊어서 관찰하면 무수한 순간들이 눈
에 들어오고, 그것의 고리들을 내가 취한다면 승패가 어디로 기울지는 말로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
지금 피어오르는 동정호의 안개, 그 안개의 스러짐, 그리고 그림자...
얼간이처럼 서있는 오청자의 앞으로 변환을 멈춘 장추삼이 낮게 뇌까렸다.
"이것이 바로 산무영이다."
쿵!
주체할 수 없는 전율에 오청지의 무릎이 파르르 떨렸다. 눈이 있어도 잡아
내지 못했다. 발이 있어도 쫓지 못했다. 이 위대한 보법 앞에서 그런 것들
은 모조리 무용지물이었다.
그는 지금 무학의 한 차원 너머를 본 것이다.
"다, 당신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오청지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조, 좋소! 지금까지 당신을 과소평가 했던 불찰을 인정하는 바이오. 하지
만 나의 배움 역시 아직 다 펼친 것은 아니오!"
"얼마든지."
슉!
말을 기다리지도 않고 몸을 날린 오청지가 장추삼의 면전으로 쇄도해 들어
갔다. 워낙 갑작스런 공격이라 누구라도 방비를 하지 못할 기습이었지만 한
번 놀란 오청지로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러나...
스륵.
또다시 펼쳐진 산무영 앞에 그의 공세는 무위로 그쳐야만 했다. 어느새 장
추삼은 오청지의 배후를 점하고 있었으니까.
무사가 적에게 뒤를 준다는 것은 그 어떤 것보다 치욕스러운 일. 반사적으
로 몸을 돌린 오청지가 손을 기묘하게 틀어 다가올 공세를 방비하려 했다.
허나 그의 손이 채 펼쳐지기도 전에 희끗한 무언가가 들이닥쳤고 오청지는
자신의 목줄기를 움켜준 장추삼의 싸늘한 눈망울을 마주해야만 했다.
"켁켁!"
... 사물의 움직임에 있어 그것을 가능케 할 최적의 지점이 있기 마련이지.
상대방의 공세를 피하든, 공격을 하든 간에 꼭 필요한 절대요처는 비워져
있는 법이거든.
이런 최상의 지점을 파악하고 그것을 점하려 할 때 오감을 믿는 것은 바보
짓이지. 싸움은 느낌이니까.
홀연히 떨어진 우레, 광오하리 만치 무서운 속도를 쫓는 눈길, 그리고 한잔
의 술...
"이것이 추뢰보다."
218
툭!
손아귀의 힘을 풀어버리자 오청지가 바닥으로 힘없이 떨어져 내렸다. 그의
동공은 완전히 비어 있어 마치 살아있는 사람 같지 않았다.
초라하게 널부러져 있는 오청지를 물끄러미 보던 장추삼이 그의 목을 잡고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더 있어! 더 보라고!"
허나 오청지의 동공은 완전히 풀린 상태. 너무나 커다란 충격으로 인해 이
지가 상실된 터였다. 입가로 흘리는 가는 신음성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
다.
무슨 말이 먹히겠는가!
"야! 아직 끝나지 않았다니까!"
"으..."
"에이, 재미없어!"
오청지의 목을 좌우로 흔들던 장추삼이 다시 그를 나줘야 했다. 힘없이 흔
들리는 그를 보자니 어쩐지 너무 답답했기 때문이다.
"젠장!"
바닥에 쪼그려 앉아 무릎 사이에 얼굴을 쳐박고 있는 오청지의 옆에 장추삼
이 털썩 주저앉아서 연신 뭐라고 투덜거렸다.
"하여튼 요즘 것들은 즉흥적이고 인내심이 없어. 싸움 한번 졌다고 인생이
끝나나! 이기든 지든 최선을 다했으면 된 거지. 생사결도 아닌 마당에 형뼐
의 사람한테 진 게 그리 창피하다는 거야? 웃기지도 않아서..."
주위는 철저한 침묵, 여섯 명의 관전자들은 숨소리조차 죽이고 장추삼의 일
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었다.
툴툴거리던 그가 느닷없이 오청지의 등판을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쫙 소리나게.
"야, 너 몇 살이야?"
"반말하지 마시오..."
"얼레? 아주 죽은 건 아니었군? 잘 됐다. 하여튼 너 몇 살이냐?"
"반말하지 말라니까!"
지극히 침전된 한마디가 그나마 남아있던 오청지의 기개를 완벽하게 끊어버
렸다.
"죽는다..."
'컥!'
직감적으로 안다. 이 성질 더러워 보이는 놈은 죽이지는 않겠지만 죽기 전
까지 때릴지도 모른다는 것을. 다 때려 놓고 천연덕스레 '아팠냐' 따위의
접대용 대사를 날리며 하품을 할 인물이라는 것을.
"스, 스물 하나다..."
"다?"
으드득...
이를 갈았지만 방법이 없다. 놈은 세고 자신은 초라하다.
"그럼 뭐라고..."
"다?"
"요..."
꼬리를 말았지만, 기세도 꺾였지만 자존심만큼은 아직까지 시퍼런지라 늘어
트린 두 손을 불끈 움켜쥔 오청지의 눈에서 굵은 루주가 흘러내렸다.
이런 광경을 사형과 사제들이 본다면 뭐라 할 것인가! 아니, 사부님들이 보
신다면!
"으흐흑..."
"얼레? 울어? 내참, 대책이 안 서는 녀석이로군. 하기야 나도 너만한 나이
땐 주관이 없었지. 그저 제 잘난 맛에 취해서 살긴 했다."
코웃음 칠 힘도 없었지만 하도 가소로워서 오청지가 그만 고개를 떨궈버렸
다. 어디서 쓸만한 재간을 좀 익힌 모양인데 그런 걸로 예단할 강호가 아니
란 말이다.
'이런 자와 동급 취급을 받다니...'
접싯물이라도 있으면 콱 코를 박아버리고 싶은데 아쉽게도 접시들이 모조리
깨져있다.
너무 억울해서일까.
오청지가 어깨까지 들썩이며 울기 시작하자 주절거리던 장추삼의 눈이 왕방
울만큼 커졌다. 어이없어서 주위를 둘러보던 그의 시선이 삼사저라 불린 여
인에게 멈췄다.
그녀는 처참하게 망가진 사제를 철저히 외면하고 있었으니까.
'흠...'
고개를 한번 끄덕인 장추삼이 오청지의 등판을 다시 한번 때렸다.
이번 소리는 아까보다 더 컸다.
"사내자식이 뭘 그런 거 가지고 징징거리는 거야!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보
다 많은..."
"답답한 소리하지 마시오! 당신과 나는 다르단 말이오! 강호의 미래를 책임
져야할 내가..."
"강호의 미래를?"
"그렇소! 강호의 질서를 확립하고 무림정기를 수호해야하는 것이 우리 팔파
공동문하 출신들의 기본적인 취지란 말이오!"
"그것 웃기는군."
킬킬거리던 장추삼이 같잖다는 얼굴로 오청지를 내려보았다. 그 표정을 보
노라니 자신이 천하에 둘도 없는 멍청이가 된 기분이라 오청지가 발끈하려
는데 다시 장추삼이 빈정거렸다.
"그걸 누가 시켰는데? 꼴 난 팔파의 높은 분들인가? 그들이 강호를 대신할
수 있다는 거야?"
"이런 답답한! 당신은 대체 팔대문파를 뭐로 생각하고 있는 거요!"
으르릉 거리는 오청지의 눈길을 무시하고 바닥을 손가락으로 툭툭 치던 장
추삼이 혀를 끌끌 찼다.
"강호란 게 몇몇 사람이 결론을 내리고 또 책임질 만큼 작고도 좁은 거였어
?"
"당신이란 사람은!"
벌떡 일어서려는 오청지의 어깨를 꽉 누르며 장추삼이 낮게 물었다.
"강호가 뭔데?"
"뭐요?"
이런 답답한 질문을 하다니. 너무 우스워서 오청지가 입을 쩍 벌렸다.
강호도 모르는 사람과 이런 대화를 했단 말인가!
"이제 보니 당신..."
"강호가 뭐냐고. 네게 있어서의, 네가 지켜야할 강호 말이야."
강호가 뭐긴?
수많은 기인이사들과 협객, 협녀가 사마외도를 호호탕탕 무찌르고 정의를
세우는 곳. 꿈과 희망과 대의가 흐르는, 그런 낭만의 대지.
지나가는 누구라도 붙잡고 물어보면 바로바로 대답이 튀어나올 평범하기 그
지없는 질문.
그런데...
"벙어리라도 된 거야? 강호가 뭐냐고 묻잖아?"
그런데...
"답답한 친구로군. 강호가 뭐냐니까?"
그건 어디까지나 남이 세워 놓은 관념일 뿐.
"모른다는 거야?"
피상적으로 듣고 받아들인 허상과 망상의 신기루.
"지금 뭐 하는 건데?"
무조건적으로, 무비판적으로 형성된 과거로부터의 퇴적물.
"대답... 안 할 거냐?"
여태까지...
"답답한 친구로군."
여태까지 나는 타인이 설정해놓은 울타리가 세상의 전부인줄로만 알고 있었
구나...
다시 한번 닥친 정신적 충격에 멍청한 얼굴로 초점 없는 시선을 들어 천장
을 바라보는 오청지의 어깨에서 손을 떼고 일어서려던 장추삼이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 반쯤 폈던 무릎을 굽혔다.
"어이, 어이! 그렇게 심각한 얼굴을 하면 말한 사람 무안해지잖아."
"......"
"이거야 원..."
고개를 도리도리 젓고 일어선 장추삼이 한구석에서 눈동자만 굴리고 있는
두 중년인을 보다 짜증 섞인 손길로 머리를 벅벅 긁었다.
역시 이런 상황은 그와 어울리지 않는다.
"난 볼일 끝났는데... 내게 볼일 남은 사람 있소?"
한마디로 불만 있는 사람은 지금 말하란 소리. 건방지기 이를데 없는 그의
말에 대꾸 비슷한 것도 나오지 않았으니 호북을 오시한다는 두 명의 고수로
서 영 체면이 서지 않는 일이었다.
그렇게 얼어붙은 좌중을 둘러보던 장추삼이 짧은 한숨을 내쉬고 몸을 빙글
돌렸다.
"그럼 난 이만."
"소협에게의 강호는 뭔가요?"
불쑥 터져 나온 질문. 고개를 돌려보지 않아도 삼사저라는 여인의 물음임에
틀림없는데.
"나 바쁜데..."
등을 보인 상태에서 귀찮음을 노골적으로 풀풀 풍겼지만 뒤따르는 대답이
없는 걸로 보아 그의 사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음이 분명했다.
사실 그는 진짜 바쁘단 말이다!
하지만 저지른 일이 있는지라 이대로 발을 빼기 어려운 형편이다.
"내게 있어서의 강호라..."
한숨처럼 서두를 뱉고 입을 찡긋거리던 장추삼이 반쯤 몸을 비틀어 여인을
응시했다.
"사실 난 강호를 잘 모르거든. 더 솔직히 말해 강호초출이라 불러도 할말이
없는 사람이지. 하지만 어렴풋이 보이긴 해서 주절거린 거니..."
"그 어렴풋한 강호를 알고싶은 거예요."
피해가긴 틀렸다. 하지만 왠지 쑥스럽다. 찬찬히 여인을 보던 장추삼이 손
을 들어 자신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고 싶어졌지만 참았다.
바보들 틈에 끼어서 웃고만 있었다고 똑같이 도매급으로 취급했는데 이렇게
마주하니 괜찮은 구석이 많은 여자가 아닌가.
선입견은 아직도 그의 발목을 붙잡고 있나보다.
"내가 잡아끌면 멀어지고, 한 발 뒤로 물러서면 다가오는... 그런 거겠지.
난 욕망에 충실한 사람들을 미워하지는 않지만 욕망 그 자체인 군상들을 보
면 구역질이 나거든."
"그것이 강호인가요?"
차분히 묻는 여인이 마음에 들어 씨익 한번 웃고 턱을 문지르던 장추삼이
코끝을 잡아 훑어 내리고 손바닥을 들어 여인에게 보였다.
"오늘 아침에 분명히 세수를 했는데도 코를 만지니까 또 기름기가 묻어 나
오거든. 아무리 깨끗한 물로 씻는다 해도 코에서 기름기를 완전히 씻어 내
릴 수는 없어."
여인의 눈이 초롱하게 빛났다.
"강호도 그런 거 같아. 마음 속에서 밀어내려 할 땐 이미 그 속에 숨쉬고
있고, 알고 다가서려 하면 그저 힘 자랑하기 좋아하는 소인배들의 집합을
맞닥트리게 되지. 결론적으로..."
말을 늘이고 고개를 쳐든 그가 벌린 입을 다물고 입술을 축였다.
이럴 때 하운이 있었으면 정말 좋았을 텐데.
"결론적으로... 힘의 가치를 어디다 두느냐로 강호란 놈은 갈리겠지. 내게
있어서 강호라, 내가 품고있는 강호의 정의는 좀 남다를 거요."
여인이 웃었다. 탁자에서와는 달리 정말 기분 좋게.
"언젠가는 꼭 없어져야 할, 하지만 지금 당장은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 그
런 필요악이지. 필요 이상으로 만들어 놓은 힘과 힘들의 완충지대라고나 할
까. 일반인들과 다른 무엇을 소유한 이들의 우월감을 채워주는 공간. 만약
이런 곳이 없다면 벌써 난리가 나도 한참은 났겠지."
"그럼 협(俠)은 뭐죠?"
"가진 자들의 사치지. 애초부터 지닌 무엇을 믿고 나대지만 않았더라면 협
이니, 정의니 하는 단어는 필요도 없었다고. 결국적으로 협행이라는 것 자
체도 그 무엇을 발산하는 대리만족의 한 방편에 불과하거든."
무림 자체가 가진 근원적인 모순.
강호초출의 입에서 터져 나온 말치고는 무척이나 깊은 울림을 지닌 것이라
여인도, 두 명의 중년인도 순간적으로 자신을 돌아보았다.
첫댓글 협?
즐감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