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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9월 2일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제1독서 : 1코린 2,1-5
복 음 : 루카 4,16-30
그때에 16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자라신 나자렛으로 가시어,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성경을 봉독하려고 일어서시자,
17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가 그분께 건네졌다.
그분께서는 두루마리를 펴시고 이러한 말씀이 기록된 부분을 찾으셨다.
18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19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20 예수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 시중드는 이에게 돌려주시고 자리에 앉으시니,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였다.
2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22 그러자 모두 그분을 좋게 말하며,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였다.
그러면서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 말하였다.
23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틀림없이 ‘의사야, 네 병이나 고쳐라.’ 하는 속담을 들며,
‘네가 카파르나움에서 하였다고 우리가 들은 그 일들을 여기 네 고향에서도 해 보아라.’ 할 것이다.”
24 그리고 계속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25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삼 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
온 땅에 큰 기근이 들었던 엘리야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이 있었다.
26 그러나 엘리야는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파견되지 않고,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되었다.
27 또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
28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화가 잔뜩 났다.
29 그래서 그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 그 고을은 산 위에 지어져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그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30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오늘의 묵상>
안소근 실비아 수녀
루카 복음서에서는 오늘 복음의 단락이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는 부분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명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루카 4,18) 전하는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백성 가운데 가난한 이들만 따로 모으신 뒤 복음을 전하셨을까요?
그러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세리 자캐오나 니코데모,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 같은 이들도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복음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을 직접 따라다니지 않았던 이들도, 종을 고쳐 달라고 청하였던 백인대장도,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들을 전하여 들었습니다.
그런데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신다고 하는 것은,
그들이 그 소식을 기쁘게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에게,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행위는
기쁜 소식이 아니라 법을 어기는 것이었습니다.
가난한 이들, 구원을 간절히 바랐던 이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과 행위들에서 생명을 얻었지만,
예수님 없이도 부족 할 것 없다고 여기던 이들은
그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지 못하였습니다.
복음은 잡혀간 이들, 눈먼 이들, 억압받는 이들에 대하여 말합니다.
그들은 가난한 이들이었기에 예수님께서 그들 안에 들어가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과연 하느님 앞에서 가난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요?
요한 묵시록 3장 17절에서는 라오디케이아 신자들에게
“‘나는 부자로서 풍족하여 모자람이 없다.’ 하고 네가 말하지만,
사실은 비참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것을 깨닫지 못한다.”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그런 착각에 빠져 기쁜 소식에 귀를 막지 않도록
우리의 가난함을 살펴야 하겠습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앤절라 더크워스의 ‘그릿’이라는 책을 보면, 세 벽돌공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 날, 한 사람이 길을 걷다가 세 명의 벽돌공이 일하는 현장을 지나갑니다.
그는 세 명이 일하는 모습을 보고 각자에게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첫 번째 벽돌공은 “벽돌을 쌓고 있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그는 생존을 위해 노동을 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두 번째 벽돌공은 “교회를 짓고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자기 역할을 인식해서 ‘벽돌 쌓기’라는 직업적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벽돌공은 “하느님의 성전을 짓고 있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그는 자기 일에 관한 목표와 가치를 갖고
이에 따른 실천을 행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 명의 벽돌공은 똑같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태도와 관심을 두느냐에 따라서
받아들이는 것이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에 따른 성과는 어떨까요?
어떤 태도와 관심에 따라 성과에 분명히 커다란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무엇보다 자기가 하는 일이 의미 있고 큰 목표와 가치에 이바지한다고 생각하면,
자기 스스로 더 큰 만족감과 성취감을 느낄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단순히 생존을 위한 일로?
아니면 그저 자기 역할이라는 이름으로 직업적 행위를 해야 할까요?
아니면 의미를 부여하는 삶을 살아야 할까요?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에 가셔서 회당에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십니다.
이는 우리 삶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더 힘차게 살아갈 이유를 만들어 주는 것이었고,
실제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좋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라면서
그 의미를 퇴색하게 만들려는 사람도 가득했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화가 잔뜩 나서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몹니다.
그것도 부족해서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합니다.
의미를 주시는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으니,
예수님과 함께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십니다.
지금 우리의 모든 일은 예수님을 통해 더 큰 의미를 갖게 됩니다.
그 의미를 찾아야 우리가 되어야 분명 지금과 다른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그런데 여전히 과거에 머물면서 생존만을 또 직업적인 선택만을 하려고 합니다.
주님 안에서 의미 있는 삶을 사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루카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시고
갈릴래아로 와 당신이 자란 나자렛에서 희년을 선포하시고,
당신이 메시아임을 드러내시면서 공생활을 시작하십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19)
그리고 “오늘, 이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이루어졌다.”(루카 4,21)고 선언하십니다.
이 희년 선포는 한 마디로, ‘에덴’의 회복,
곧 하느님께서 주신 본래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본래의 신원인
하느님의 자녀로 돌아가게 하시며, 해방을 실현하십니다.
그것은 단지 빚진 이가 탕감 받거나, 눈먼 이가 보게 되거나,
혹은 억압과 묶인 것으로부터 벗어나거나,
가난한 이가 기쁜 소식을 듣거나, 하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죄나 어둠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진정한 해방인 것이 아니라,
빛으로 나아갈 때라야 진정한 해방과 자유를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진리이신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갈 때라야 진정 자유롭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해방이 선포되고 빛이 왔건만,
고향 사람들은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단지 예수님을 환영하지 않았을 뿐만이 아니라,
배척하고 죽이려고 고을 밖으로 내몰았습니다.
그러나 그분을 죽이려는 그들의 음모는 성사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습니다.(루카 4,30)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언덕 위 벼랑에까지 그분을 떨어뜨리려 내몰아갔지만,
그들 한가운데를 유유히 가로질러 가시는 그분을 그 누구도 어찌할 수는 없었습니다.
아직 수난의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당신이 수난을 거절하신 것이 아니라,
다만 당신이 고난을 받으실 때가 아직 오지 않았음을 말해줍니다.
때가 되면 당신께서는 수난을 스스로 받으시게 될 것입니다.
강제로 끌려가신 것이 아니라, 몸소 당신을 내어주실 것입니다.
그야말로 당신께서는 원하시면 붙잡히시고,
또한 원하시면 빠져나가십니다(요한 18,7-8).
당신께서 원하지 않으실 때는 잡혀가지 않으시고,
당신께서 원하실 때에는 스스로 잡혀 나무에 달리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완고하여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거역하였습니다.
혹 오늘 우리도 완고함과 고집으로 형제를 불신하고,
주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지 않는지 들여다보아야 할 일입니다.
주님!
오늘 저희가 결코 당신을 배척하지 않게 하소서!
제 형제를 배척하는 바람에 당신을 배척해 버리는 일이 없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이루어졌다.”(루카 4,21)
주님!
말씀의 영으로 저를 도유하소서!
제 가슴이 뜨거워지고, 제 입에 당신 말씀을 담게 하소서!
제 발 인도하시고, 제 삶이 당신 말씀을 떠받들게 하소서!
들은 바를 살게 하시어, 듣는 가운데 당신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아멘.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반영억 라파엘 신부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어떻게 혼을 내줄까? 고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소리 소문 없이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버렸으면 좋으련만 그게 여의치 않자
결국은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아닌 척하면서 자기 뜻을 관철합니다.
때로는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고, 쓴소리를 들을 수도 있으며
그것을 통해 오히려 자기 계발의 기회로 삼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하든 눌러버리고자 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남의 결정을 받아들이기보다는
오히려 결정하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 더 크게 우리를 지배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려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무지를 일깨우는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모두가 예수님을 좋게 생각했습니다(사도10,38).
그가 하는 말씀이 진리요, 은총의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목수 요셉의 아들로 알려지면서 그 권위는 사라져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여전히 은총의 보유자이시고 권위를 가지고 계셨지만,
사람들의 편견과 선입견은 주어진 은총을 놓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섣불리 알면, ‘아는 게 병’입니다.
사실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면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고 얻게 됩니다.
그러나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이 약속된 구세주시라는 표징과
놀라운 일들을 보여주길 원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구미에 맞는 표징을 제시하기보다는
오히려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불경한 자로 단죄하고 죽이려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교육받은 편견대로 판단하며
자기들 방식으로 구원을 상상하였습니다.
고은 시인이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이라고 통찰한 것처럼 힘이 빠지고
내 것을 내려놓아야 '새로운' 눈을 뜨게 됩니다.
이러한 일은 우리에게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받아들이고, 그러다가 의심하며
심지어 예수가 밥 먹여 주냐? 고 외면하기도 합니다.
자기의 기대가 자기 방식으로 채워지지 않을 때 혼란을 겪으며
‘다 필요 없다’는 결론에 이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당신의 가실 길을 가십니다(루카 4,30).
일찍이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하신 말씀 그대로입니다.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준다.
이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이사55,10-11).
결국, ‘주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이 같지 않고 주님의 길과 우리의 길이 같지 않습니다.
그분의 길은 우리의 길보다 높고 주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보다 높습니다.’
따라서 주님을 바라보며 그분의 삶을 우리가 살아야지
그분이 내가 원하는 대로 맞춰주기를 바라서는 안 되겠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시고 이루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가운데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길 희망합니다.
내 생각과 욕구에 맞지 않으면 내 것을 바꾸어야지
주님께 바꾸라고 떼를 쓰고 배척해서야 되겠습니까?
그러나 현실은 여전히 ‘너 죽을래!’ '살려면 내 입맛에 맞춰!' 하고
구박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의 소리에도 귀를 기울여 보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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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성전 건축 비용 마련이었다고 합니다.
댈러스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의 교우들과 댈러스 교구 주교님이 한국을 방문하였고,
김수환 추기경님에게 추기경님 이름을 사용할 수 있는지 문의하였습니다.
추기경님께서는 성전 건축 비용 마련과 더불어 지역 사회의 복음화를 위해서
‘김수환 추기경 배’ 골프대회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습니다.
팬데믹 기간을 제외하면 매년 골프대회가 성황리에 열렸다고 합니다.
교우는 물론, 교우가 아닌 분들도 골프대회에 참여하였고,
지역사회에 널리 알려진 행사로 자리 잡았다고 합니다.
지난 2월에 제가 부임했을 때, 교우들은 김수환 추기경 배 골프대회를 이야기했습니다.
여러 경로로 알아본 결과 주일에는 가능하지 않고, 평일에 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우려와 걱정과 달리 평일에 골프대회를 개회함에도 160명이 넘는 분이 신청했습니다.
댈러스, 휴스턴, 포트워스, 오스틴에서 신부님과 교우들이 신청하였고,
교우가 아닌 분들도 신청하였습니다.
운동을 통해서 교우들이 친선을 도모하고,
교우가 아닌 분들에게는 가톨릭을 알리는 좋은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힘든 내색 없이 열심히 봉사해 주신 준비위원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이 모든 것을 이끌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도 김수환 추기경님과의 아름다운 기억이 있습니다.
2001년, 제가 적성 본당 신부로 있을 때입니다.
적성 본당은 꽃동네의 오웅진 신부님이 군대에 있을 때 다니던 공소였습니다.
당시 오웅진 군인은 김수환 추기경님을 찾아갔다고 합니다.
추기경님께 공소 건물을 새로 신축하겠다고 하였고,
추기경님께서 후원금을 주셨다고 합니다.
오웅진 군인은 추기경님의 격려금을 바탕으로
땀과 눈물로 공소건물을 세웠다고 합니다.
제가 1999년에 부임했을 때, 그 공소 건물은 여전히 있었습니다.
새로 성전을 지었고, 공소건물은
오웅진 신부님이 창설한 꽃동네 수녀님이 머무는 수녀원이 되었습니다.
저는 김수환 추기경님께 2001년 대림특강을 부탁하였습니다.
추기경님께서는 대림특강과 미사를 하시겠다고 하였습니다.
지금도 기억합니다.
그날은 2001년 12월 8일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이었습니다.
추기경님께서는 적성성당이 서울대교구에서 가장 작은 본당이었기에 기꺼이 오신 것 같았습니다.
저는 동네 입구에 현수막도 걸었습니다.
교우들은 장단의 콩을 갈아서 두부를 만들었고,
임진강의 꽃게를 잡아서 매운탕을 끓였습니다.
본당 교우들뿐 아니라, 인근 지역의 부대에서 군인들도 왔고,
지역의 주민들도 왔고, 문산과 법원리 신부님도 왔습니다.
23년 전에 대림특강을 해 주셨던 추기경님이
이제 ‘김수환 추기경 배’ 골프대회의 이름으로 저와 함께해 주십니다.
천상에 계시는 추기경님께 감사드립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의 말을 인용하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좋은 생각을 하셨습니다.
좋은 결과를 먼저 찾았다면 예수님께서도 포기하셨을지 모릅니다.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표징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사사건건 예수님께 시비를 걸었습니다.
로마의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을 위험한 선동꾼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십자가와 희생보다는 영광의 자리에서 얻을 높은 자리만 꿈꾸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좋은 생각을 먼저 하셨습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입니다.
갇힌 이들에게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눈먼 이들을 보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좋은 생각은 좋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끌어들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를 비롯해서 초대교회의 교부들은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에 신학과 교리의 기둥을 세웠습니다.
수많은 성인과 성녀들은 천상에서 빛나는 별이 되었습니다.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 전에 먼저 좋은 생각으로 하루를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모든 선의 근원이신 하느님,
저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심으시어
생생한 믿음으로 은총의 씨앗이 자라나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좋은 열매를 맺게 하소서.”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주고
조욱현 토마 신부
예수께서는 회당에서 이사 61,1을 읽으신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18-19절)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왜 오셨는지,
또 무엇을 위해서 사셔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예수님의 생애의 핵심을 드러내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이 성경 말씀을 읽고 나서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21절)
그분은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셨고 그들을 가장 먼저 축복하셨다.
그러나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22절)
배우지도 못한 사람이 글을 읽는 것을 보고 신기해하지만,
은총의 말씀에 놀라면서도 그 말씀을 하찮게 여겼다.
예수께서는 왜 고향에서 기적을 행하지 않으시는지
엘리야가 사렙타 마을의 과부에게만 갔고,
엘리사가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고쳐준 이야기를 들어 설명하셨다.
주님의 이 말씀은 완고한 이스라엘 대신
장차 당신을 맞아들여 치유 받을 다른 민족들을 가리킨다.
그리하여 나자렛 사람들은 이 말씀에 분노하여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다.
그들은 주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
주님을 산 위 벼랑으로 끌고 가 거기에서 밀어버리려고 했다.
그러나 그분은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아직 수난의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그 말씀을 알아듣기 위해서는 신앙이 필요했는데,
신앙의 눈이 필요했는데, 그러한 눈을 가지지 못하고 있었다.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배경을 알고 있다는 것 때문에,
그들의 마음과 눈은 가려져 있었으므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일생을 통해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그렇게 사셨다면,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는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가?
우리의 정신, 주어진 시간, 가진 능력을 무엇을 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고 있는가?
우리도 우리의 처지에서 찾으면 할 수 있는 것이 많이 있을 것이다.
우리도 다른 이들 앞에 작은 구세주, 다른 구원자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항상 조그마한 일에서부터 주님의 뜻을 실천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구원을 전해줄 수 있는 우리 되어야 할 것이다.
루카에 의한 예수님 공생활의 목적과 방향
박상대 마르코 신부
우리는 지난 연중 제10주간 월요일부터 제21주간 토요일까지
마태오복음(5,1-25,30)을 평일미사의 복음으로 묵상하였다.
오늘 연중 제22주간 월요일부터 연중 마지막 주간인 34주간 토요일까지는
루카복음(4,16-21,36)을 평일미사 복음으로 듣게 된다.
내용상 많은 부분은 마태오복음과 같지만, 루카복음사가만의 특수사료도 적지않다.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직후, 예수사건(이야기)은 예수의 직접 목격자로부터 입에서 입으로 口傳된다.
구전된 자료를 모아 대략 50-60년경 처음으로 기록된 것을 ‘예수어록’(Q자료)이라 한다.
시기적으로 가장 먼저 집필된 마르코복음은 60-70년경 구전과 예수 어록을 토대로 기록되었다.
마태오복음과 루카복음은 대략 같은 시기인 80-90년경에 집필된 복음으로서
구전과 예수어록과 마르코복음을 참고하여 가감수정 하였고,
상당부분 각기 수집한 특수사료를 첨가하였다.
그래서 이 세 복음서를 공관복음서라고 한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공생활 시작을 알리는 序文이다.
이 서문에 예수님 공생활의 목적과 방향이 담겨있다.
공생활의 목적은 인류구원으로서 이미 하느님께서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예고하신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셔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선포하게 하셨다.“(이사 61,1; 58,6-7; 6,12 참조)는 말씀이다.
예수님 공생활의 방향은 목적이 지향하는 대상에 대한 우선적인 관심이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복음이 사회의 지극히 소외된 자
(가난한 자, 묶인 자, 눈먼 자, 억눌린 자)를 우선적으로 향하고 있다는 말이다.
예수님의 到來로 말미암아, 이 땅에는 새로운 ‘은총의 해’(희년: 레위 25,8-13)가 선포되었다.
따라서 예언서에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은 예수님을 통하여
‘오늘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21절) 바로 이루어지게 된다.
누구든지 예수님과 함께하는 사람은 ‘지금’(nun), 그리고 ‘여기서’(hic) 구원의 성취를 보며,
또한 구원을 先取하게 되는 것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성령에 열린 입과 귀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오늘 독서와 복음의 공통점을 찾는다면 성령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당신이 성령의 도유받은 분이심을
이사야서를 인용하여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성령으로 선포한다고 말합니다.
“나의 말과 나의 복음 선포는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언변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바오로도 그렇고 특히 주님께서 성령으로 말씀하시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알아듣지 않고 화가 잔뜩 나 주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성령으로 말씀하셨지만
사람들은 전혀 그렇게 알아듣지 않고 인간적으로만 알아들은 것입니다.
주님의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면서도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서 바로 든 느낌은 ‘성령 단절’이었습니다.
성령께서 이렇게 탁 막히는구나! 하는 느낌 말입니다.
이번 달 저는 오래간만에 강의하러 미국에 가는데
제게 주어진 주제 가운데 하나가 ‘Listen, Discern, Go forth’입니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복음을 통하여, 형제들과 이웃을 통하여,
사건을 통하여, 이 시대의 징표를 통하여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잘 듣고 식별해야 한다는 내용의 강의를 하게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을 통해서 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잘 식별하게 하시는 분이 성령이신데
그 전에 Listen(경청)하게 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전에 한번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이와 관련하여
옛날에 제가 중요한 체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서품받고 그해 본당에 가서 아주 열심히 강론을 준비하고,
주일은 물론 매일 강론하였고 그래서 평일 강론이 없던 그때
이웃 본당에서까지 신자들이 와서 미사 참석자가 늘었습니다.
한번은 주일 미사 때 정말 많이 준비해 제 생각에도 잘 강론하였고,
그래서 끝나고 돌아가며 많은 분이 강론 좋았다는 인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맨 마지막 신자에게 어떤 내용이 좋았냐고 물었을 때
이것이 당신 마음에 와닿았다고 그분이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제가 정작 강조하고자 한 것이 아니고 지나가면서 한 말이었습니다.
그때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것처럼 제가 충격을 받았는데
‘아! 이것이 성령의 역사로구나!’ 하는 느낌이었지요.
성령께서 제 입을 그렇게 지나가는 말로 열어 주셨고
그분은 그 말을 자기에게 하는 말로 경청케 하신 겁니다.
어쨌거나 중요한 것은 ‘성령 단절’ 이것이 없어야 합니다.
오늘 주님의 고향 사람들처럼 근본적으로 영적인 감수성이 없어서도 안 되고
영적 감수성이 열리긴 열렸는데 일시적으로 영적인 귀가 닫혀서도 안 되지요.
내 안의 욕망과 욕심과 주장들이 아우성쳐 영적인 귀가 일시적으로 닫힌다면
열심한 신자인 우리가 이때 해야 할 것은 그것들의 침묵입니다.
그러므로 매일 강론하는 저는 제가 성령의 힘으로 강론하는지,
저의 강론을 듣는 여러분은 영적 감수성으로 경청하는지
돌아보는 오늘 하루가 되어야겠습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