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허의 감동은 왜 지속하는가? - 海心 구장회 - 아내와 함께 다시 상연되는 ‘벤허’(BEN HUR)를 보러 영화관에 갔다. 신학교 1학년 때 벤허가 대한극장에서 대형화면으로 입체 음향과 함께 상영되어 인기가 대단했다. “1960년은 벤허의 해”라는 구호를 외치며 절찬 상영 중에 있었다. 나는 그때 대한극장에 가서 벤허를 보고 큰 감동을 하였다. 그래서 이번에 다시 상영되는 벤허가 전보다는 상영 시간을 줄었지만 역시 감동을 준다고 하여 다시 극장을 찾게 된 것이다. ‘벤허’는 유대인 루 웰리스(LEW WALLACE)가 뉴멕시코 주지사로 있을 때 저술한 것이다. ‘벤허’의 이름의 뜻이 “믿는 자의 아들”이라는 것만 보아도 기독교 영화인 것이 확인되지만, 56년 전이나 56년이 지난 오늘이나 변함없이 감동을 주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기독교 복음의 핵심인 용서, 믿음, 구원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벤허로 나오는 유다는 부유한 유대인 집안의 아들이고 노예의 딸 에스더를 사랑한다. 절친한 친구 메살라가 로마에 갔다가 유대 땅에 새로 부임한 신인 총독의 호위 사령관으로 귀향하면서부터 유다와 메살라의 친구 관계는 금이 가기 시작한다. 로마의 편을 드는 메살라는 유대인을 위하는 유다를 배신하고 자기 친구인 벤허를 노예로 추방한다. 유다는 노예로서 배에서 구타를 당하며 5년 동안 노를 젓는 고통을 당하다가 배가 적군의 배와 충돌하면서 바다 위에 떠다니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메살라를 원수처럼 생각하고 원수를 갚으려도 한다. 그렇게 진행되다가 마지막에는 4마리의 말이 끄는 전차 경기장에서 메살라와 경주를 하게 되는 데 그 경주 광경이 가장 박력 있고, 스릴 있게 장시간 전개된다. 옛날 영화 벤허나 지금의 영화 벤허 모두 전차 경주가 볼만한 광경이다. 그러나 벤허가 꾸준한 감동을 주는 영화로 지속하고 있는 것은 이런 장면 때문이 아니다. 마지막에 예수님이 등장하면서부터 감동의 역사는 시작된다. 유다가 메살라와의 전차 경기에서 이겼기 때문에 감동을 주는 것이 아니다. 유다가 우승하는 장면은 통쾌한 장면임을 틀림없다. 그러나 예수께서 불쌍한 사람들에게 선을 베풀다가 로마 병정에게 매를 맞고, 결국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 형틀에 양손과 양발에 쇠못을 박고, 옆구리에 창을 받아 피를 흘리는 고통을 당하셨다. 로마 병정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시고 운명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유다도 변화를 받아 ‘벤허’라는 이름처럼 ‘믿는 자의 아들’로 태어난다. 자기에게 패배를 안긴 유다를 죽이려고 이를 갈고 칼을 품고 누워 있는 메살라를 찾아가 원수 같은 사람을 용서하고, 서로 얼싸안고, 다시 좋은 친구가 되어 새 출발 하는 모습이 모든 사람을 감동하게 하는 것이다. 믿음이 있는 곳에 역사가 일어나고, 예수님이 있는 곳에 변화의 역사와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고, 용서가 있는 곳에 화해와 참 평화가 이루어지는 데, 이런 믿음, 구원, 용서로 살벌하던 분위기가 평화로운 장면으로 변화되는 것으로 클라이맥스를 장식하는 영화이기에 영화관에 온 사람들의 마음을 찡하게 만들고,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감동의 역사가 계속되고 있다. 56년 전 서울 대한극장에 벤허를 보러 갔을 때는 극장 안에 빈자리가 없이 꽉 차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 영화관에 갔을 때는 10명도 안되는 사람들이 앉아 있고 분위기가 썰렁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영화가 시작되고 시간이 흘러갈수록 감동의 도수는 점점 커져만 갔다. 배우들이 연기도 잘하지만, 벤허의 내용은 사람의 변화와 믿음의 역사, 죄인이 의인으로 구원받는 역사, 원수 관계였던 사람이 용서의 사랑으로 원수의 담이 스르르 무너져 내리고 서로 손을 잡고 돕는 사람으로 변화가 되는 놀라운 역사가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다. 주인공인 유다와 메살라가 원수 관계에서 다시 친구 관계로 회복되듯이 벤허와 같은 감동적인 스토리가 오늘 우리 사회에서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영화관 문을 나섰다.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엡 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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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海心 블로그 원문보기 글쓴이: 海心 구장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