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평윤씨의 성산(聖山) 파평산(496.9m) 서봉~동봉 종주 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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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평윤씨의 성산(聖山) 파평산(496.9m) 서봉~동봉 종주 산행 (경기 파주시 파평면 눌노리)
오래전에 기회될 때 파평산 산행을 한번 하자고 대종회 주간이셨고, 지금은 파평윤씨 태위공파 회장을 역임하시는 윤종범 조카님과 약속을 했다. 그런데 그 약속 산행이 예상보다 빨리 2019년 5월 11일(토) 갑작스럽게 이루어졌다.
2019년 5월 11일 09:00시까지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늘노리 용연에서 일행들과 만나기로 약속하고 서울, 안산, 인천에서 일행들이 모였다. 모두 6명이다. 구성원중에는 파평윤씨 32세 (윤유식 80세) 34세 윤도균, 윤준욱, 35세, 윤종범, 윤종덕 37세손 윤경식등 모두 6명이다.
일행은 산행전 파평윤씨 성지 용연을 돌아보며, 이날 산행에 참여하신 종친중 연세(80)가 가장 많으신 32세 윤유식 어르신께 ‘6·25 한국전쟁 전후 용연’ 유지보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이어 윤종범 태위공파 회장님으로 부터 용연에 대한 유래와 파평윤씨 설화 전설을 듣고, 용연을 한바퀴 돌아본 후 파평산 산행길에 나섰다.
파평산 산행 들머리는 파평체육공원 파주시 파평면 청송로 484번길 16-50)에서부터 시작해, 옛 용궁사 절터를 지나면 삼거리가 나온다. 이곳에 파평산토지지신(坡平山土地之神)비석이 있는 곳에서 우리 일행은 좌측 등산로를 따라 오른다.
싱그러운 녹음속에 너덜길로 이어지는 등산로는 그다지 험하지 않다. 6명이 두런두런 이야기 나누며 걷는 산행길 재미가 솔솔하다. 가다 힘에 부치면 잠시 쉬며, 걸망에 준비해간 간식을 나누어 먹으며 오른다.
등산로 주변에는 이름모를 야생화가 피어있다. 그런데 이날 산행대장을 맡은 윤경식님이 야생화 이름과 꽃말, 유래를 가르쳐 주어 산행을 하며 우리나라 토종 야생화꽃 공부를하며 이어지는 산행길 재미가 알차다.
어디쯤올랐을까? 코앞에 가파른 디딤돌을 딛고 올라서니 시야가 훤한 개활지다. 이곳에서 용연 방면, 장파리, 그리고 임진강, 북녘땅을 바라보는 조망이 시원하다. 돌아서 뒤를보면 파주의 명산이며 전국 100대명산 감악산이 까깝다.
휴식 후 또 다시 파평산 정상을 향해 약진 앞으로다. 등반길은 대체적으로 육로로 이어져 한결 수월하다. 치마대다. 이곳은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해가리게 시설도 되어있다. 그러나 그 유명한 치마대에 얽힌 자료는 전혀 보이 않는다.
드디어 진행방향 전방에 파평산 서봉 정상이 보인다. 정상 오름길은 테크목 계단길을 따라 가파르게 올라야 한다. 산행 시작 2시간 30분만에 정상에 올랐다. 그런데 이날 산행에 80세로 최고령자이신 어르신은, 젊은사람들 보다 더 정정하게 선두로 파평산 495.9m 정상에 오르셨다.
정상에는 8각정도 세워있다. 그리고 몇 년전에 없던 정상비도 세워있다. 우리는 서둘러 정상등반 사진을 기념사진을 찍고 배낭에 가져온 온 도시락으로 점심식사를 한다. 식사를 마치고 대장이 스마트폰으로 검색을 하더니, 그동안 가지 못하고 먼발치 건너만보던 동봉까지 산행을 할 수 있다고 체력이 가능하냐고 묻는다.
그러자 최고령이신 윤유식 어르신께서 선뜻 앞장서며, 이왕 도전한길에 동봉까지 찍고 하산하겠다고 제일먼저 자원하신다. 그 바람에 나, 대장 3명이 서봉에 이어 동봉까지 종주 산행을 이어 간다. 그런데 이곳 동봉가는길은 등산로가 다듬어지지 않아 거의 개척산행처럼 숲을 헤치며 올라야 한다.
한참동안 아래로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다시 내려온 만큼 또 빡시게 오르는 힘든 산행이 반복된다. 그렇게 오르기를 1시간여 지났을때다. 전방에 갑자기 군사작전도로가 보인다. 그리고 자가용타고 나물꾼들 모습이 보인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분들은 웅담리쪽에서 군사작전도로를 따라 올라온분들이다. 이제부터는 평탄한 신작로길이다. 저만큼 까마득히 올려다보이는 동봉 정상에는 군 작전용 레이더, 시설과 대공포 시설이 되어있다.
정상까지는 오를 수 없다. 올려다 보이는 정상이 마치, 파평산성처럼 우러러 보인다. 3인의 동봉 등반대는 정상에 주둔한 군부대 정문앞에서 산행을 멈춰야 했다.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몇 해전만해도 감히 엄두도 못냈던 동봉까지 오른것만도 다행이다.
하산길에 파평윤씨 5세 윤관장군의 6남 윤언이 금강거사라는 법명을 얻어, 창건했다는 미타사를 돌아본다. 미타사에는 윤관장군님 탱화를 모셨다. 그런데 탱화가 너무 작고 그림자체도 외소하고 볼품이 없다.
미타사는 한국전쟁당시 사찰이 모두 소실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은 판넬로 지은 가건물이다. 무늬만 사찰인셈이다. 고향이 해남이라는 주지스님의 말씀에 의하면, 파평윤씨가 창건한 미타사이니 가능하면 파평윤씨대종회에서 미타사 중건에 도움을 주었으면 하는 바램을 갖고 있다. 그 소리 들으니 마음이 편치않다.
주지스님과 작별 인사를 나누고 하산길이다. 동봉 정상에 오르지 않고 먼저 하산한 일행들이 장 시간 기다릴 것 같다. 그바람에 서둘러 하산하느라 등산로가 아닌곳으로 하산을 한다. 가팔르게 이어지는 개척길은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다행히 안전하게 하산했다. 파평체육공원 앞에서 일행들이 우리를 반가히 맞는다. 산행 시간을 계산해보니, 점심시간 빼고 그럭저럭 6섯시간(28,000보) 산행을 했다.
파평윤씨(坡平尹氏)의 유래
파평 윤씨의 시조 윤신달(尹莘達)은 태조 왕건을 도와 삼국을 통일하고 고려를 건국하는데 공을 세운, 개국공신으로서 태자를 교육시키는 태사삼중대광에 봉해졌다. 그의 5세손인 윤관(尹瓘, 1040~1111) 장군은 고려 문종때에 문과에 급제하고, 1107년(고려 예종3년)에 별무반이라는 특수 부대를 편성한뒤 여진정벌에 나서, 적 5천명을 죽이고 130명을 생포하는 등 북진정책을 완수한공으로 영평(파평)백에 봉해져 후손들이 본관을 파평으로 하였다.
윤신달의 묘는 경북 영일군 기계면 봉계동에 있다. 파평 윤씨의 시조 윤신달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용연(龍淵 : 일명 가연)은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눌로리에 있으며, 태고적부터 지하수가 솟아나는 천연의 연못이다. 옛부터 종중(宗中)에서 준설한 것으로 보이나 기록(記錄)은 찾을수 없다.
근대(近代)에는 서기 1900년 강화문중(江華門中)에서 준설하고 “파평용연(坡平龍淵)”이라는 비석(碑石)을 세웠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6.25동란 당시 크게 훼손되어 1972년 3월에 문정공파(文定公派) 종중(宗中)에서 “파평윤씨 시조 발상지 비(坡平尹氏 始祖 發祥址 碑)”를 새로 새겨 건립하였다.
연못 주위는 초장(草場)이었는데, 1976년 3월에 태울공파(太蔚公派) 예산종중(禮山宗中)에서 수양버들 150株, 은행나무 6株, 벚나무 5株를 식수 하였다. 옛부터 “윤씨연못”으로 공칭(公稱)되어 왔으나 세부 측량 당시에 신고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국유(國有)로 편입되어 있었다.
그때문에 일정(日政)당시에 坡州邑에 거주하는 노(魯) 모씨가 개답(開沓)하기로 허가를 받은 것을 발각(發覺)하고, 宗中에서 소송을 제기하여 승소(勝訴)한 결과 지적대장에는 “윤씨 연(尹氏 淵)”이라고 표시되어 있었던 것을 1977년 1월 14일 大宗會에서 宗中 所有로 소유지 이전등기를 완료했으며, 면적은 2,531평이다. 전설에 따르면 용연에는 용인이 살고있어 연못가가 불결해지면 뇌성이 진동하고 폭풍우가 친다고 전한다.
始祖에 관한 전설이란 신라 진성왕 7년(서기 983년) 음력 8월 15일 용연위에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게 끼고 요란한 천둥과 번개가 치면서 용연 위에 한개의 옥함이 떠 올랐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은 이를 기이하게 여기고 고을 태수에게 고하여 태수가 연못가에 나가보니, 용연 연못에 떠오른 옥함이 연못 가운데로 밀려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러던 중 어느날 날이 저물 무렵 연못가에 빨래를 하던 한 노파가 옥함이 다시 떠오르는 것을 보고 이를 건져내어 열어보니 그 속에는 오색의 우모(羽毛)에 쌓여 있는 어린 사내 아기가 있었다. 찬연한 서기를 발하면서 옥함에서 나온 사내 아기는, 융준용안(隆準龍顔)으로 코가 우뚝하여 용의 상을 닮았으며, 양쪽 어깨에는 붉은 사마귀가 있어 일월(日月)을 상징하고 좌우 겨드랑이에는 비늘이 81개가 돋아 있었으며, 발에는 일곱 개의 검은 점이 있어서 북두칠성의 형상과 같았고 온 몸에는 광채가 솟아서 눈을 부시게 하였으니, 이 아기가 파평 윤씨의 시조가 되는 어른이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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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탄생 설화를 가진 始祖 태사공께서는 파주산 아래에 사시면서 학문과 무예를 닦으셨는데 파평산 마루에 말이 달릴 수 있는 길을 닦고 궁마 훈련을 하시었다. 파평산 마루에서 말을 달리시며 무예를 연마 하시던 곳이 치마대(馳馬臺) 라고 하는데 지금도 태사공께서 길을 닦으셨던 석축의 일부가 남아 있다.
치마대에서 태사공께서 기마술을 연습 하실 때에 애마가 죽었으므로 작은 철마를 만들어 그 곳에 두었는데 후일 어떤 철공이 그것을 훔쳐 갔다가 그만 즉사를 했고, 그때 함께 갔던 사람이 두려운 생각이 나서 흙으로 구운 작은 말을 가져다 놓았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으나 지금은 흔적이 없다.
태사공께서 학문을 닦으시던 금강사(金剛寺)도 지금은 형적이 없고 다만 그 사지만이 남아 있다. 태사공께서는 파주에서 임진강을 건너 개경을 내왕 하실적에 공이 강을 건너실 때에는 항상 강물이 갈라지며 홀연히 백사장이 드러나서 신발을 적시지 않고 강을 건너셨고, 송도에 있는 조정에 출사 하신 뒤에도 말을 타시고 파평면에 있는 사저에서 강너머로 내왕 하시는데 말의 빠르기가 나는 듯 하였고, 강을 건널 때에는 물이 양쪽으로 갈라졌다고 하여 이를 두고 이곳을 ‘물결을 끊고 마시듯이 강을 건넌다’ 하여 여음진(如飮津)이라고 이름을 지었다가 음진(飮津)으로 고쳤는데 이것이 다시 후세에 음이 변하여 임진강이 되었다고 전한다.
또, 尹氏가 잉어를 먹지 않는 이유는 5세 문숙공(諱:瓘)께서 함흥선덕(咸興宣德) 진광포(鎭廣浦)를 건너서 적군을 추격 하시다가 복병에게 포위를 당해서 위급한 지경에 있었는데, 척준경(拓俊京)이라는 부하 장수의 힘을 입어서 간신히 살아 나오시어 이십 여명의 부하들이 보호해서 포위망을 벗어나 돌아 오시다가 광포에 당도 했는데, 해는 저물었고, 광포는 물이 들어와서 다리가 보이지 아니했다. 그 광포에 물이 없을 때에는 드문드문 다리를 놓고 건너 다니고, 물이 들어 올 때에는 건너지 못하여 불통되던 곳인데, 그날은 물속으로 다리의 형체가 보이므로 간신히 건너 왔는데, 쫓아 오던 적군이 이 다리를 건너고 있을 때, 물속에 보이던 다리의 형체가 보이지 않아 적군이 물에 빠져 죽었다.
문숙공은 잉어 떼가 다리를 놓아 건너 오셨다고 해서 그 포구 이름을 모일‘徒’ 비늘‘鱗’자 도인포(徒鱗浦)라 했고, 잉어가 공을 도와 드렸다 해서 윤씨들은 잉어를 먹지 않는다.
이 연못에는 여름철 희귀식물인 노란 "개연꽃"이 자생하고 있다. 인근에 윤씨관련 유적지가 많은데 파평산 정상에는 시조 윤신달이 말을 훈련하던 치마대가 있으며, 파평 윤씨 출신의 해동명장인 윤관 장군이 휴양과 시문을 즐기던 웅담리 상서대와 광탄면 분수리 윤관 장군묘가 있다.
첫댓글 老益壯이십니다.
좀더 많은 종현들 께서 함께 했더라면 좋을 것을요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