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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9월 3일 화요일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 학자 기념일
제1독서 : 1코린 2,10ㄴ-16
복 음 : 루카 4,31-37
그때에
31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의 카파르나움 고을로 내려가시어, 안식일에 사람들을 가르치셨는데,
32 그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33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크게 소리를 질렀다.
34 “아!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35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마귀는 그를 사람들 한가운데에 내동댕이치기는 하였지만,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하고 그에게서 나갔다.
36 그러자 모든 사람이 몹시 놀라, “이게 대체 어떤 말씀인가?
저이가 권위와 힘을 가지고 명령하니 더러운 영들도 나가지 않는가?” 하며 서로 말하였다.
37 그리하여 그분의 소문이 그 주변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오늘의 묵상>
안소근 실비아 수녀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큰 도전이 됩니다.
마귀가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알고,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루카 4,34)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주, 어떤 주장이 교리에 맞는지 그 여부를 따집니다.
물론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그리스도교를 믿는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그 교리에 맞지 않는 주장을 내세우는 경우들이 있고,
이를 식별하지 못한다면 이름뿐인 신자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교리를 정확히 안다고 모두 좋은 그리스도교 신자가 될까요?
오늘 복음에서 마귀는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요셉의 아들이라고만 여기며
벼랑에서 떨어뜨리려 하였던 나자렛 사람들보다 나아 보입니다.
나자렛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던 것을 마귀는 인정합니다.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4,34).
아직 제자들도 그렇게 말할 수 없던 때입니다.
마귀는 그것을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 앞에서 선포합니다.
적절한 말은 아니지만, 그는 자신이 예수님보다 힘이 약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예수님께 순종해서 떠나가기까지 합니다.
그에게 부족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는 예수님을 자신의 구원자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길, 진리, 생명이시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자신을 멸망시키신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하는 일을 방해하시기 때문입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신 예수님과 나의 관계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고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셨다는 것은
여러분에게 어떤 의미를 가집니까?
그 사실은 여러분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칩니까?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아는 것만으로 충분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말실수를 전혀 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요?
주의한다고 하면서도 자기도 모르게 말실수를 해서 상대에게 아픔을 줄 때가 많습니다.
나쁜 의도가 없다 하더라도 말실수는 너무나 자주 이루어집니다.
마트에서 우연히 아는 청년을 만났습니다. 오랜만에 만났기에 정말로 반가웠습니다.
그런데 성당에 오랫동안 나오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던 청년이었는데 결혼했다고 신앙생활을 멈춘 것이 못마땅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성당 나와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고,
이 청년도 알겠다면서 이제 열심히 다니겠다는 약속을 했습니다.
얼마 뒤, 이 청년의 친한 친구와 대화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청년의 아이가 아파서 너무 힘들어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수시로 병원 응급실을 갈 정도로 아프고 약해서
그렇게 좋아하는 성당도 제대로 못 나간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무조건 성당에 나오라는 말만 했으니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싶었습니다.
이 청년을 위한 말이었지만, 제대로 알지 못했던 저의 말실수였습니다.
곧바로 전화 걸어서 사과했지만 저를 만난 이후 마음이 불편했을 것입니다.
자기가 하는 말은 과연 어떤 말이 되어야 할까요?
‘말실수’에 해당하는 아픔과 상처를 주는 말이 되어야 할까요?
아니면 희망과 용기를 주는 사랑의 말이 되어야 할까요?
아픔과 상처를 주는 말은 사람을 살리는 말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아픔과 상처를 남기는 죽이는 말이 아닙니다.
대신 구원으로 이끄는 살리는 말입니다.
사람에게는 가장 유익한 말이고, 더러운 영을 쫓아내는 말이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볼 수 있듯,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은 예수님을 향해 크게 소리를 지릅니다.
“아!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 잘 모르고 있는데
이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악을 없애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분임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어떤 타협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예수님의 말씀은 악을 멸망시키고, 사람을 살리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따르는 우리는 어떤 말을 해야 할까요?
사람을 살리는 말을 해야 합니다.
악을 따르면 사람에게 아픔과 상처를 주는 죽이는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희년 선포'에 이어지는 오늘 복음은
마르코복음과 루카복음이 전하는 갈릴래아 호수 북쪽에 있는
어촌 ‘카파르나움에서의 하루’라 일컬어지는 시작 부분입니다.
그것은 안식일에 성전에서 마귀를 쫓아내는 일이었는데,
루카복음에 나오는 21개의 이적 중 첫 번째의 이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가르침’과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의 ‘치유’를 통해서
‘메시아로서의 당신의 권위’를 드러내십니다.
사실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은 이미 앞에서
‘예수님 탄생 예고 장면’(1,32.35)과 ‘세례 방면’(3,22)에서 선포되었는데,
여기서는 마귀들의 입을 통해 선포됩니다(4,34.41).
그런데 목격자들이 놀란 것은 구마치유가 아니라, 그분의 ‘가르침’이었습니다.
곧 그분의 말씀의 권위였습니다.
권위 있는 한마디 말씀,
곧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루카 4,35)라는 말씀에
마귀는 그를 사람들 한가운데 내동댕이쳤지만,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하고 그에게서 나갔습니다(루카 4,35).
사실 인간은 악마의 혀에 속아 범죄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 악의 지배 아래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와를 속였던
악마의 그 혀 놀림을 중지시키시고, 그에게서 쫓아내십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첫 번째 기적인 ‘더러운 영을 쫓아내는 치유’는
악마의 지배로부터 인간에게 자유를 되찾아 주는 구원의 표징이 됩니다.
곧 희년 선포와 마찬가지로 원죄 이전의 에덴으로의 복귀를 보여줍니다.
사실 악마를 쫓아내는 일은 전혀 새로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히브리 구마자들도 그러한 일은 해왔습니다.
사람들이 놀라워했던 것은 단지 악마를 쫓아내는 데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몹시 놀랐던 것은 '말씀'이었습니다.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곧 말씀이 이루어지는 권능과 힘을 지니고 있었기에 '권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말합니다.
“이게 대체 어떤 말씀인가?
저이가 권위와 힘을 가지고 명령하니 더러운 영들이 나가지 않는가?”(루카 4,36)
'권위(exusia)'란 ‘힘’이란 뜻으로, 발설된 말씀이, 말씀한 대로 이루어지는 힘을 말합니다.
곧 예수님의 말씀에는 ‘하느님의 힘’이 실려 있어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지게 됨을 말합니다.
그러니 말씀이 예수님의 신적 권능, 곧 당신이 하느님이심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다른 구마자들과는 달리,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면서
당신 스스로의 '말씀'으로 명령하실 뿐, 다른 누구의 이름을 빌리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이 바로 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 안에서 우리를 교란시키고 분열시키는
온갖 거짓의 혀 놀림을 멈추고, 어둠을 몰아내야 할 일입니다.
그것을 다름 아닌, 우리 주님의 '권위 있는 말씀'의 힘으로 말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루카 4,34)
주님!
진리를 받아들이고 믿는 자 되게 하소서.
진리를 따르며 받드는 제자가 되게 하소서.
진리이신 당신으로 새로 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소서.
하여, 관계 맺는 모든 것 안에서 당신의 거룩한 이름이 빛나게 하소서! 아멘.
빛이 있으면 걱정할 것이 없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어느 날 ‘방이 어둡다’ 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왜 이리 어둡지? 안 그랬는데… 그리고는 그만이었습니다.
전구 두 개가 켜져야 하는데 한 개가 켜지지 않았습니다.
전구가 하나였다면 어둠이 짙어서 금방 전구를 바꾸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희미하게나마 준비할 수 있었으니 곧 잊어버렸습니다.
이제라도 얼른 전구를 바꿔야 하겠습니다.
“등불 하나가 천년 어둠을 물리친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빛을 가지고 있으면 어둠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능력을 지니고 있으면 악의 세력을 무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빛을 지니지 못하였으니 문제입니다.
물론 희미한 빛을 지니고 있어서 더 문제이기도 합니다.
아주 큰 어둠이라면 빨리 손을 쓸 텐데 희미한 빛이 기회를 놓치게 합니다.
빛을 선택하면 어둠이 물러나고 어둠을 선택하면 빛이 물러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습니다.
어두울수록 더 큰 빛을 발하게 됩니다.
더러운 영은 예수님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며 대항을 시도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루카4,34. 35). 명령하시며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에게서 마귀를 쫓아내셨습니다.
그리고 분명 그 능력을 사도들을 비롯한 우리에게도 주셨습니다.
루카10장 17 이하에 보면 제자들이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하고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주신 능력을 잘 관리하고 키워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 돌아가시기까지 악마의 괴롭힘을 받으셨지만
절대로 휘말려 들어가지도 않으셨고 패배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우리도 말씀으로 무장하여 악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하느님께 복종하고 악마에게 대항하십시오.
그러면 악마가 여러분에게서 달아날 것입니다.
하느님께 가까이 가십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가까이 오실 것입니다”(야고4,7-8) 하고 말합니다.
알게 모르게 다가오는 어둠의 세력,
곧 하느님보다는 인간의 욕심을 부추기는 마음에서 자유롭기를 희망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기억합시다.
“무릇 육을 따르는 자들은 육에 속한 것을 생각하고,
성령을 따르는 이들은 성령에 속한 것을 생각합니다.
육의 관심사는 죽음이고 성령의 관심사는 생명과 평화입니다.
육의 관심사는 하느님을 적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로마,6-8).
예수님께서 악령을 꾸짖으시니 사람을 내동댕이치고 떠나갔습니다.
더러운 마귀는 나갈 때도 못된 짓을 하고 나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권위와 힘을 가지고 명령하여 더러운 영들을 쫓아냈듯이
우리도 주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악의 세력을 물리칠 수 있길 기원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로 간다.
내가 아버지께로 가면 너희에게 ‘협조자’이신 진리의 영이 함께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로 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다.”
말씀과 표징으로 복음을 전하시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신 예수님께는 새로운 계획이 있었습니다.
시간과 공간의 ‘틀’에서 ‘육체’의 옷을 입으셨던 예수님께서는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자유로운 영인 ‘협조자’이신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것이 제자들에게 더욱 유익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행전은 성령강림의 생생한 현장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갑자기 하늘에서 거센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 안을 가득 채웠다.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나타나 갈라지면서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성령께서 표현의 능력을 주시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성령과 함께 하면서 제자들은 두려움 없이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성령과 함께 하면서 제자들은 굳셈의 은사를 받았습니다.
성령과 함께 하면서 제자들은 지혜의 은사를 받았습니다.
성령과 함께 하면서 제자들은 말씀의 은사를 받았습니다.
저도 성령의 은사를 느낀 적이 있습니다.
1992년입니다. 새벽에 전화를 받았습니다. 교우분이 아프다는 전화였습니다.
저는 병자성사를 준비해서 병원으로 갔습니다.
자매님은 하혈을 많이 하셨고, 의사 선생님은 힘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병자성사를 드리면서 주님께서 이끌어 주시기를 청했습니다.
가족들과 함께 기도하면서 뜨거운 기운을 느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끌어 주셔서, 자매님은 사랑하는 딸의 첫영성체를 볼 수 있었습니다.
32년이 지났지만, 저는 그날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1994년입니다. 패혈증으로 입원한 형제님을 만났습니다.
병자성사를 드리기 전에 저는 형제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형제님의 가슴에는 패혈증보다 더 심각한 원망과 분노가 있었습니다.
형제님은 모든 것을 내려놓았고, 원망과 분노도 사라졌습니다.
용서와 사랑이 들어왔습니다. 저는 병자성사를 드리면서 뜨거운 기운을 느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끌어 주셔서, 형제님은 사랑하는 딸들과 함께 주일 미사에 참례하였습니다.
부족한 제가 이렇게 지낼 수 있는 것도, 허물 많은 제가 이렇게 지낼 수 있는 것도
모두 성령께서 저를 이끌어 주시고, 보살펴 주셨기 때문임을 믿습니다.
주변을 보면 성령과 함께 지내는 분들이 있습니다.
마음이 깨끗하고, 생각이 바른 분들이 있습니다.
마음이 아픈 사람과 함께 아파하고, 기뻐하는 사람과 함께 기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봉성체를 하려고 나서는데 자매님 두 분이 제게 부탁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신장 투석하는 어르신이 있는데 함께 가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분이 생일이라, 간단한 음식을 준비했다고 하였습니다.
이야기를 들으니, 제가 봉성체 가는 어르신과 같은 분이었습니다.
마음이 통하니, 뜻도 통하였습니다. 우리는 어르신에게 같이 갔습니다.
저는 성체를 모셔 드렸고, 자매님들은 어르신의 생일 잔치를 해 드렸습니다.
불의의 사고로 병원에 있는 아버지와 아들이 있었습니다.
안타까운 소식을 접한 교우들이 따뜻한 마음을 모았습니다.
남편과 아들을 간병하는 자매님을 위해서 음식을 준비해서 드리는 분이 있습니다.
병원비를 돕고 싶다는 분들이 있습니다. 작은 정성을 모아서 전달해 드렸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시간과 공간의 틀을 뛰어넘는 협조자이신 성령은
따듯한 사람들의 마음에 함께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자비를 베풀고 있다면, 내가 양심의 부끄러움을 알고 뉘우치고 있다면,
욕심을 버리고 겸손하게 살고 있다면, 사람의 일보다 하느님의 뜻을 먼저 찾는다면
성령께서 함께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영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오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현세적 인간은 하느님의 영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한 사람에게는 그것이 어리석음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주님의 마음을 알아 그분을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정말 그 말씀은 신기하구나.
조욱현 토마 신부
나자렛에서 설교하신 다음 예수님은 카파르나움 회당에서
마귀를 쫓아내 주심으로 당신의 말씀에 권위가 있음을 나타내셨다.
마귀들이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34절) 말하지만,
예수께서는 조용히 하라고 꾸짖으신다.
그것은 마귀가 진실을 말해도 거기에 귀 기울이지 말라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더러운 마귀가 들린 사람을 치유해 주신다.
마귀들은 예수님의 정체를 즉시 알아본다.
예수께서 거기에 함께 계신다는 것을 견디지를 못한다.
예수께서 가지신 능력은 인간뿐 아니라 마귀의 힘을 능가하였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하느님을 거역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멀리하려는 그 악의 세력은 하느님의 권능을 견디어낼 수 없다.
하느님 나라 앞에 마귀들도 예수님의 명령에 꼼짝 못 하고 떨어져 나갔다.
이것을 본 군중들은 그것을 새로운 가르침,
지금까지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새로운 가르침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놀란 것은 조용하고 간단한 말 한마디로
귀신 들린 사람을 고쳐주셨다는 것이다.
그들이 생각하는 지도자들과 다른 크나큰 차이가 있음을 보았고 놀랐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은 그런 면에서도 새로운 권위 있는 가르침으로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예수님은 여기서 볼 때, 하느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보내신
당신의 아들임을 이러한 권능을 보여 주심으로서 계시하신다.
그러나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
마귀들이 그분을 알아보는데도 말이다.
그러면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로서 그분을 올바로 믿고 따르고 있는가?
주님의 권능을 참으로 믿고 우리의 구세주로 고백하고 있는가?
우리의 생각과 행동이 신앙인이면서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는 그들과 같이 되지 않도록 살아야 한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느님의 은총은 항상 우리에게 베풀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을 알아보는 것은 우리의 깨어있는 신앙의 눈이다.
우리의 모든 삶 속에서 하느님의 은총을 느끼기 위해서는
우리가 항상 하느님 안에 있는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즉 깨어있는 삶이 될 때 언제나 느낄 수 있다.
이러한 삶이 될 때 우리는 하느님 안에 한 형제자매인 우리의 이웃들을 제대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자세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면서,
우리가 다른 사람들이 하느님을 만나게 되는 장이 되고,
우리 자신도 이웃 안에서 주님을 알아 뵙고
사랑해 드릴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삶으로 우리의 말과 행동이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참된 가르침이 되고 권위 있는 말씀이 될 것이다.
이것이 주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하느님 자녀의 삶이 아닐까?
루카가 보도하는 예수님의 첫 번째 기적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오늘 복음으로 이어지는 루카복음 4,16-30에서 보았듯이
나자렛 회당에서 예수께서는 자신을 통하여
하느님의 절대적인 인류구원 계획과 그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선포하셨다.
예수께서는 이사야 예언서를 그 증거로 봉독하셨고,
이것으로 공생활의 목적과 방향을 설정하셨다.
그러나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를 너무 잘 안다는 근거로 한 발짝 물러난다.
예수께서는 “사실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24절)는
말씀으로 자신을 위로하시지만, 엘리야와 엘리사 시대(기원전 850년경)에
하느님께서 이방인들에게 베푸신 축복을 언급하시면서(1열왕 17,7-16; 2열왕 5,1-14),
하느님의 손길이 이스라엘을 떠났음을 지적하셨다.
화가 치밀어 오른 고향 사람들이 들고 일어나
예수를 벼랑으로 끌고 가서 죽이려 했으나, 글쎄 아직은 時機尙早이다.
예수께서는 사람들 한 가운데를 지나 가야할 길을 계속 가신다.(30절)
마르코복음(1,21-28)에서와 마찬가지로 루카복음은
예수님의 공생활 시작의 첫 번째 행적으로
‘마귀 들린 사람의 치유’, 즉 구마기적을 보도한다.
나자렛을 떠나 가파르나움으로 오신 예수께서
가르침을 내리신 후 마귀들린 사람을 치유해 주신 것이다.
왜 예수님의 첫 번째 행적이 구마기적인가?
왜 마르코와 루카는 예수님 공생활의 첫 번째 행적으로
마귀 들린 사람의 치유를 보도하는 것일까?
오늘날 마귀나 귀신에 관하여 얘기하면 사람들은 웃는다.
요즘에 그런 것이 어디 있느냐고 비웃다가
엑소시스트 영화의 제목이나 소재로나 쓰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음행,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증상, 교만, 어리석음’(마르 7,21-22) 등 사람 안에서 나오는
온갖 악에 관하여 얘기한다면, 아마 웃는 입을 다물게 될 것이다.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은 마귀나 악의 기운을 實存하는 세력으로 간주하였고,
사람과 결탁된 이런 기운을 몰아내는 일이 예수님의 일상적 所關만은 아니었다.
마귀나 악은 비인격적으로 존재하는 독자적인 세력일 수도 있고,
인격적으로 사람에게 속한 개성일 수도 있다.
우리가 ‘나쁜 사람’ 또는 ‘악한 사람’이라고 할 때,
그 사람은 이런 나쁘고 악한 기운과 세력에 습관화된 사람을 말한다.
이 습관이 행동으로 성취되면 罪가 되는 것이다.
聖書는 마귀에 대한 어떤 정확한 정의도 내리지 않고 있다.
다만 마귀가 사람과 결탁하였을 때의 현상을 보여준다.
마귀들린 사람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병든 사람보다
더 이상한 현상을 보이는 것에 주목하여야 한다.
마귀 들린 사람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이 아닌 셈이다.
모든 가치와 규칙과 기준이 고유한 자신의 의도를 벗어나 버리는 것이다.
필자는 사도 바울로가 로마서간에서 훌륭하게 풀어가는
‘마음의 법칙과 육체의 법칙’의 관계에 참으로 공감한다.
바울로는
“나는 내가 하는 일을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
나는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善은 행하지 않고,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惡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런 일을 하면서도 그것을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결국 그런 일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들어있는 罪입니다.”(로마 7,15. 19-20) 라고 하였다.
여기서 바오로가 罪라고 하는 것은 분명 자신과는 별개인 하나의 對象이다.
그것도 자기 속에 들어 있는 자신이 아닌 대상인 셈이다.
그런데 이 죄라고 하는 대상이 사람 안에서 활동한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善이 모자라면 惡이요, 惡이 행동하면 罪가 되고,
惡이 될 수 있는 생각은 이미 사람의 마음 안에 들어있다.
그런 생각을 태도로 보이거나 행동으로 옮기고 나면 후회해도 소용없다.
마음에 들어있는 악한 생각을 쫓아낼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뿐이다.
예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그 말씀을 마음에 새길 때,
우리는 조금씩 치유될 수 있을 것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누가 가장 마귀 같은 사람인가?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을 치유해 주십니다.
예수님을 보자 마귀가 이렇게 소리 지릅니다.
“아!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오늘은 마귀의 정체를 알아보려 합니다.
마귀는 일단 예수님이 누구인지 압니다.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자신들에게 신경 쓰지 말라고 말합니다.
자신들이 하느님의 능력에 휘둘리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때 그들이 느끼는 기쁨이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을 이기는 쾌감’입니다.
이는 모든 죄에 다 들어있고 모든 죄의 밑바탕입니다.
하느님이 계신다는 것은 자연을 보고 일어나는 사건을 보고
양심을 보고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 핑계로 믿지 않습니다. 벌써 여기에는 하느님을 이기는 즐거움이 스며있습니다.
그런데 더 마귀와 같은 존재들이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이 계신다는 것을 믿으면서도 이기려는 존재들입니다.
그 대표적인 존재가 가리옷 유다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수많은 기적과 가르침을 보았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을 팔아넘겨 죽게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얻어지는 쾌감은 얼마나 클까요?
물론 그 쾌감이 자기를 마귀로 만든다는 것을 모릅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당신 자신과 동일시하셨습니다. 진짜 마귀는 교회 안에 있습니다.
교회를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믿으면서 교회를 이기기를 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교회의 정통 가르침인 지옥과 연옥 등을 부정합니다.
하느님이 자녀를 만들고 불지옥에 보낼 수는 없다고 말합니다.
교회가 2,000년 동안 믿어오던 것보다 자기 혼자의 생각이 더 옳다고 여깁니다.
여기서 느끼는 승리의 쾌감은 매우 클 것입니다.
그러나 마르틴 루터처럼 결국엔 교회 전체를 분열시키는 악마와 같은 사람입니다.
신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이 계심을 알면서 하느님의 뜻에 자신이 변하기를 원하기보다는
자신이 하느님을 변화시키려 합니다.
마치 내 뜻이 하느님의 뜻보다 더 나를 위해 옳다고 믿는 것처럼.
춘천교구 겟세마니 피정의 집 원장이신 김학배 안젤로 신부가
PBC 강의에서 이런 일화를 이야기하였습니다.
사제가 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한 임신한 자매가 기도해 달라고 오셨다고 합니다.
무슨 기도를 해 드려야 하느냐고 묻자 자기가 딸이 여섯인데
꼭 아들을 낳게 해 달라고 청하더라는 것이었습니다.
시댁 식구들이 안 믿는 사람들인데 이번에도 딸이면
자신까지 아예 성당에 못 나오게 될 판이라는 것입니다.
생명과 성별을 결정하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어쨌건 신부님은 기도해 주었는데 다행히 아들을 출산해서,
온 시댁 식구들도 아기의 세례식 때 나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약 20년이 지나 신부님이 피정의 집에 있을 때,
그 자매님이 순례자들과 함께 오셔서 너무 반가웠는데,
그 자매님은 슬픈 표정으로 면담을 요청하였고,
이야기를 들어보니 신부님이 기도해서 낳은 아들 때문에
집안이 풍비박산이 났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너무 큰 사고들을 많이 쳐서
이제는 그 아이가 온 집안의 걱정거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럼, 아무것도 청하지 말라는 말인가요? 청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녀의 특권입니다. 그러나 결정은 부모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까지 바꾸려 해서는 안 됩니다.
악마가 아니라 천사가 되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얼마 전 한 자매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제가 얼마 전부터 매일 미사를 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면 무언가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안 좋은 일만 계속 일어났습니다.
정말 신기한 것은 이전에 그런 일이 있었으면 뚜껑이 열렸을텐데 참아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심하게 걱정해야 할 상황에서도 담담할 수 있었습니다.
기도는 내가 주님께서 뜻을 바꾸기를 원해서 하는 게 아니라
주님의 힘에 내가 변화되기 위해 하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악마의 성향에서 천사의 성향으로 변화되는 것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자궁에서는 그분 뜻에 의해 내가 변화되고 성장하는 것이지
부모가 내 뜻대로 변하게 되는 것이 아님을 아는 일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