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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스크랩 日帝의 쇠말뚝 [김두규 교수의 國運風水(국운풍수)]
잠실/맥(조문희) 추천 0 조회 90 14.09.24 10:1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

 

 

 

Why][김두규 교수의 國運風水(국운풍수)]

조선의 精氣 끊으려던 日帝 쇠말뚝의 또 다른 진실

 

日帝의 쇠말뚝

"조선침략 위한 측량…山 숭배하는 韓·中·日자연 함부로 훼손 안 해"

 

이여송도 조선에 박았다?"

임진왜란 때 조선 구한恩人으로 칭송 받아…40개 넘는 地脈 끊었다고?그는 가본 적도 없는 곳"

 

'일본놈들'은 정말로 쇠말뚝을 박았을까?

오랫동안 필자는 전국의 '쇠말뚝' 현장을 답사하였다. '이여송이 맥을 잘랐다'는 것과 '일본놈들의 쇠말뚝' 이야기가 많았다.

 왜 쇠말뚝을 박을까? '산의 파괴는 인간의 비극(山破人悲·산파인비)'이라는 풍수설 때문이다.

 

'쇠말뚝(鐵?·철익)'이란 말을 맨 처음 꺼낸 이는 조선의 학자군주 정조임금이었다. 사연은 고려 공민왕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공민왕은 기울어져 가는 원나라를 버리고 새로이 개국한 명나라 주원장과 관계를 튼다. 이에 주원장은 1370년(공민왕 19년) 도사 서사호(徐師昊)를 고려에 파견하여 명산대천의 신령들에게 제사를 지내게 한다. 이유는 간단하였다. '고려가 명에 복속된 만큼 천자가 산천에 제사를 지냄에 고려의 산천 또한 빼놓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주원장은 원나라를 북쪽으로 몰아내고 새로운 나라를 세웠지만, 천하를 완전히 평정한 것이 아니었다. 원의 사위국인 고려를 함부로 할 수 없어 주원장은 초기에 고려와 공민왕에게 매우 호의적이었다. 제후국의 산천에 제사를 지내는 것은 나라를 세운 천자로서 관례였다. 쇠말뚝을 박을 상황이 아니었다.

그러나 공민왕은 도사 파견에 '압승술(壓勝術·주술을 쓰거나 주문을 외어 음양설에서 말하는 화복을 누르는 일)'을 쓰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경기도 안양 삼막사에서 발견된 일제 혈침 추정 쇠말뚝 2개'라는 제목으로 보도된 2009년 12월 10일 사진

'경기도 안양 삼막사에서 발견된 일제 혈침 추정 쇠말뚝 2개'라는 제목으로 보도된 2009년 12월 10일 사진 / 뉴시스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1385년(우왕 11년)의 일이다. 이때는 공민왕의 피살, 고려와 원의 관계 복원 움직임 등으로 명나라와는 매끄럽지가 못했다. 명나라가 사신 장보(張溥)를 보내 서사호가 세운 비(개경 남쪽 陽陵井·양릉정에 위치)를 확인하게 한다. 비석이 세워진 뒤 병란, 수재, 한발 등이 잇따르자 고려 조정은 비를 넘어뜨려 버렸다. '압승비(碑)'때문이라고 의심한 것이다. 이 소문이 명나라까지 전해지자 장보로 하여금 확인케 한 사건이다. 그로부터 400여년이 지난 1797년 정조 임금은 "서사호가 단천 현덕산에 다섯 개의 쇠말뚝을 박고 떠난 이후 북관(北關)에 인재가 나오지 않는다"는 '쇠말뚝 단맥설'을 꺼낸 것이다. 그러나 서사호는 맥을 자르지 않았다.

 

물론 실제로 지맥을 자른 크고 작은 사건들이 있었다. 전주시 금상동에는 회안대군 이방간의 무덤이 있다. 회안대군은 2차 왕자의 난에서 동생이자 훗날 태종이 된 이방원에게 패한 인물이다. 그는 전주에서 유배 생활을 하다가 이곳에 묻힌다. 문제는 그 자리가 '늙은 쥐가 밭으로 내려오는 형국(老鼠下田形·노서하전형)'의 길지였다는 점이다. 나중에 이를 안 이방원은 산에 뜸을 놓고 맥을 자르게 하였다. 지금도 그 흔적 일부를 확인할 수 있다. 이후 회안대군 후손들은 자신들이 '호미 자루를 쥐고 살 수밖에 없었다'고 믿게 된다. 맥이 잘린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길지 자체가 파괴되지는 않았다. 지금도 호남의 길지로 소문이 나서 찾는 이들이 끊이지 않는다.

 

조선 땅에 또 쇠말뚝을 박은 이들은 누구일까? 이여송(李如松)과 일본인들이 '주범(主犯)'으로 알려져 있다. 이여송은 누구인가? 조선의 후예로서 명나라의 명문가였다. 아버지 이성량은 명나라를 지켜주는 동북(요동)지방의 최대 군벌이었다. 아들 이여송이 조선에 출병할 때 "조상의 고향이니 구원에 힘쓰라"고 할 정도였다.

 

그는 1593년 1월 평양성을 탈환하였다. 하지만 벽제관 전투에서 패하여 평양으로 후퇴하였다가 그 해 9월에 귀국한다(이상은 '明史·명사'의 기록이다). 반면 '조선왕조실록'은 이여송이 1593년 5월 문경까지 내려갔다가 9월에 귀국한 것으로 기록한다(이여송이 직접 출전하지 않고 그 휘하 부대가 문경까지 갔을까?).

확실한 것은 그가 조선에 머문 것은 1년이 채 안 된 짧은 기간이었다는 점이다. 이여송에 대한 조선 조정의 태도는 어떠했을까. 조선을 재건시켜 준 '재조조선(再造朝鮮)'의 은인이었다. 심지어 평양에 생사당을 세워 그를 기렸고,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그 후손을 챙겼다(이여송은 조선에서 琴·금씨 여인을 취해 후손을 남겼다). 그러한 이여송이 조선의 맥을 잘랐다는 것이다.

서길수(서경대) 교수는 '이여송이 강원, 충청, 전라, 경상도 등에서 40개 이상의 지맥을 자른 것'으로 조사하였다('풍수침략사 연구시론'). 이여송이 밟지 않은 지역들이다.

 

 


	조선의 후예로 명나라의 요동지방 군벌에 올라 임진왜란에 참전한 장군 이여송의 초상화

조선의 후예로 명나라의 요동지방 군벌에 올라 임진왜란에 참전한 장군 이여송의 초상화 / 일본 덴리대학교 제공

 

 


	전라북도 전주시 덕진구 금상동에 있는 회안대군 이방간의 묘.

전라북도 전주시 덕진구 금상동에 있는 회안대군 이방간의 묘. 이방간은‘2차 왕자의 난’때 태종 이방원에게 패배한 뒤 유배 생활을 하다 여기에 묻혔다. 이 묏자리 가 길지임을 안 태종은 산에 뜸을 놓아 맥을 자르게 했다고 한다. /안전행정부 한국지역진흥재단 제공

 

 

'일본놈들의 쇠말뚝'설은 또한 어떠한가? 곳곳에 그러한 전설이 전해진다. 부분적으로 개연성이 있는 곳도 있다. 그런데 쇠말뚝의 입지나 유형들이 너무 다르다. 일제가 전국적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저질렀다고 보기 어렵다. 다음 두 가지 이유에서이다.

 

첫째, 19세기 후반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 주변 열강들이 가장 먼저 한 것이 측량이다. 1875년 운요호사건(雲揚號事件)도 일본의 조선 연안 측량에서 비롯된다. 1895년에는 일본은 200명 이상의 측량사를 보내 전국을 측량한다. 이에 대한 반발로 많은 조선인이 희생된다. 1912년 일제가 삼각측량 실시에 즈음하여 시달한 주의사항 가운데 "삼각점 표석 밑에 마귀를 묻었기 때문에 재액이 닥쳐올 것이라는 유언비어에 속지 말 것"이라는 내용이 눈에 띈다.

 

이후 측량사업은 식민지 건설(도로·철도·신도시 등)로 더욱더 빈번해질 수밖에 없었고 나라를 빼앗긴 이들의 입장에서 '마귀를 묻었다'고 오인하였다. 특히 조상 산소 뒷산에 삼각점이 박힐 경우 '쇠말뚝'으로 여겨 분노를 자아내기에 충분하였다.

 

둘째, 한·중·일 삼국 모두 산악숭배사상이 지대하여 명산대천을 함부로 하지 않았다. 벼슬을 내리고 제사를 지냈다. 800만 이상의 신을 상정(想定)하는 일본도 마찬가지다. 신이 계시고(神の坐す), 신이 강림하고(神が降り立つ), 혼이 소생하는(魂が蘇る) 곳이 바로 산이다. 명나라가 고려를 속국으로 할 때 그 산천에 제사를 모셨듯, 이미 일본 땅이 되어버린 조선의 산천을 함부로 하지 않았다. 영산으로 알려진 곳에 그들의 신사를 지어 신성시하였다.

 

결국, 쇠말뚝 이야기는 나라를 빼앗긴 자의 '주인 의식 결여와 피해 의식'의 산물이다. 지금은 어떠한가?

전국의 영산 정상마다 수십 미터 높이의 육중한 송수신 탑이 무수하다. 더 큰 쇠말뚝이다. 굴착기를 동원하여 산을 평지로 만드는 것은 식전 해장거리도 안 된다. 더 큰 맥 자르기이다. 흐르는 강물을 막고, 산줄기를 무 자르듯 하여 생태계를 교란시킨다. '이여송·일본놈 쇠말뚝'에 분노하는 이들 가운데 정작 이것을 우려하는 이는 드물다. 이 또한 자기 땅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주인 의식의 결여 아닌가?

 

 

 

 

[김두규 교수의 國運風水(국운풍수)]

이성계와 이방원, 누가 승자일까… 해답은 조선 동구릉 '권력 풍수'에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경기 구리시 인창동 동구릉 내 태조 건원릉. / 조선일보DB

 

 

2009년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한 조선왕릉, 그 가운데에서도 구리시 동구릉은 왕릉 중의 왕릉이다. 수려한 경관과 호젓한 산책로, 그 사이사이에 조성된 왕릉들의 아름다움에 외국인들도 찬탄해 마지않는다. 우리가 세계에 자랑할 만한 '신들의 정원'이다.

 

동구릉이란 '한양(서울) 동쪽에 조성된 아홉 개의 능'이란 뜻이다. 이렇게 세계적인 '신들의 정원'이 될 수 있었던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이곳에는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의 무덤인 건원릉이 있다.

둘째, 동구릉은 500년에 걸쳐 조성된 왕릉이기에 다른 왕릉보다 완성도가 높다. 동구릉은 1408년 태조 이성계 안장 이후 1890년 신정왕후(조대비)가 안장되면서 마무리됐다.

셋째, '조선왕릉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요인 가운데 하나가 풍수였다'는 유네스코 심사단의 평에서 알 수 있듯 천하의 명당에 자리했다. 산과 물은 곱고도 맑은 데다 그 사이로 살랑대는 바람 또한 쾌적하여 이곳을 방문했던 유네스코 심사단으로 하여금 '풍수가 바로 이런 것'이란 점을 실감케 했다.

 

조선조 500년 내내 왕릉 입지 선정에서 풍수지리는 절대 원칙이었다. 동구릉 매표소에서 표를 건네고 조금 걷다 보면 가장 먼저 만나는 수릉(綏陵) 안내판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보인다.

 

'(수릉은) 처음 의릉(懿陵) 왼쪽 언덕에 장사했다가 풍수 논의가 있어 1855년 철종 때 이곳으로 옮겼다.'

그런데 안내판에 한 가지 내용이 빠졌다. 수릉의 주인 익종이 죽어 처음 묻힌 곳은 풍수상 '구천을 날아오르는 호랑이 형국(구천비호·九天飛虎)'의 길지로 알려진 곳으로 지금의 의릉(서울 석관동 한국예술종합학교) 옆이었다. 그러나 얼마 후 '국세가 산만하여 마음이 불안하다'는 이유로 용마산으로 옮겼다(1846년). 그러다가 다시 이곳으로 옮긴다. 모두 풍수적 이유이다.

 

그렇다면 건원릉은 풍수상 어떤 땅일까?

태조가 죽어 안장된 직후 이곳을 찾은 명나라 사신 기보(祁保)는 이곳 산세를 보고 "어찌 이와 같이 하늘이 만든 땅이 있을까"라고 찬탄했다. 훗날 영의정 이항복이나 대학자 송시열도 길지임을 칭찬했다.

모든 물건이 그러하듯 땅에도 미추(美醜)가 있기 마련이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태조 이후 여러 왕이 길지를 찾다가 더 좋은 길지를 찾지 못해 건원릉 부근으로 속속 몰려들어 지금의 동구릉이 이루어졌음이 이를 방증한다.

 

왕릉에서 풍수를 따진 것은 중국·일본·베트남도 마찬가지였지만, 이들과 다른 조선만의 특징이 있었다. 왕릉은 권력을 쟁탈하거나 권력을 강화하는 도구로 활용됐다. 태조의 건원릉에서 마지막 임금인 순종의 유릉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왕릉 풍수는 정치적이었다. 일종의 권력 풍수였다. 이러한 권력 풍수의 전통은 조선 개국 직후 태조 이성계와 아들 이방원 사이의 풍수 싸움에서 시작된다.

그 첫 번째는 계룡산 천도를 둘러싼 이성계·무학대사 측과 이방원·하륜 측과의 권력 쟁탈전이었다. 이것은 건원릉 조성에서 정점에 이른다. 명분은 과연 그곳이 풍수상 길지인가에 대한 논쟁이었다. 이러한 풍수 논쟁으로 인해 조선의 국운이 달라진다. 계룡산에서 건원릉에 이르기까지 이를 둘러싼 풍수 싸움이란 무엇일까? 이 과정을 보면 조선이 태조의 나라인지 태종의 나라인지 알 수 있다.

 

 

 

[김두규 교수의 國運風水(국운풍수)]

개국은 이성계, 건국은 이방원… 정동과 정릉에 녹아든 '하륜의 정치 풍수'

 

 

서울 성북구‘정릉’.

 

 

건원릉(구리시), 정릉(서울 성북구 정릉동), 조선일보 사옥(서울 중구 정동), 계룡산(계룡시 계룡대).

이 네 곳은 전혀 서로 관련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조선건국 직후인 1393년부터 1409년까지 17년 동안 이 네 곳을 둘러싼 명당싸움이 치열했다. 이 명당싸움은 권력투쟁의 수단이었다.

1392년 7월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는 이듬해인 1393년 2월 계룡산으로 직접 행차한다. 왕사 무학대사와 측근들을 동행시킨 그는 이곳 현장에서 새로운 도읍지를 직접 설계한다. 계룡산 도읍지 건설공사는 이후 10개월 동안 진행되어 기초공사(주춧돌)가 마무리된다. 그러나 태조는 그해 12월 계룡산 도읍지 공사를 갑자기 중단시킨다. 아들 이방원(훗날 태종)의 측근 하륜이 올린 한 장의 상소 때문이었다.

 

계룡산 도읍지는 새로 나온 풍수서 '지리신법'에 따르면 망해나갈 터라는 것이 하륜의 주장이었다. 이를 어떻게 검증해볼 수 있단 말인가? 이전 왕조인 고려 왕족의 무덤들을 '지리신법'으로 따져보면 그 정확성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태조는 고려 왕족 무덤과 그 후손들의 길흉관계를 따져보라고 했다. 곧바로 보고서가 올라왔다. '지리신법' 내용에 그대로 부합된다는 결론이었다.

이 대목에서 의심이 간다. 너무 신속하게 보고서가 올라온 것도 그렇고, 또 '지리신법'에 완전히 부합된다는 말도 의심스럽다. 풍수서 한 권으로 어느 무덤의 길흉을 100%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의도적으로 조작되지 않았을까? 당시 태조의 측근 정도전은 풍수에 관심이 없었고, 무학대사는 풍수에 능했으나 다투려 들지 않았다. 하륜이 근거로 든 '지리신법'을 조금만 주의했더라면, 하륜이 주장하는 계룡산 불가론에도 문제가 있었음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이렇게 이방원과 하륜은 태조의 계룡산 천도론을 풍수서 한 권으로 무력화시킨다. 이방원과 하륜의 첫 번째이자 결정적 승리였다.

그로부터 3년 후인 1396년 태조의 둘째 부인 신덕왕후가 죽었다. 태조는 신덕왕후 무덤을 현재의 영국대사관과 조선일보 사옥 일대를 능역으로 잡았다. 훗날 자신도 죽으면 그곳에 묻힐 요량이었다. 그렇게 해서 생겨난 이름이 정릉이고 그 일대는 정릉동(정동)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정릉은 태조의 수릉(壽陵)이기도 한 셈이었다. 이후 왕자의 난을 일으킨 이방원이 임금(태종)이 된다. 임금이 되자 태종은 계모 신덕왕후가 묻힌 정릉 영역을 대폭 축소시켜버렸다. 능역이 너무 넓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를 기회로 능역 주변의 좋은 땅들을 세력가들이 다투어 차지한다. 이때 하륜과 그 사위들이 가장 좋은 땅들을 선점(先占)한다. 능역축소를 하륜이 주도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태조가 태상왕으로서 아직 살아 있을 때였다(1406년). 그는 살아생전에 자신의 수릉이 침탈당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1408년 태조는 쓸쓸히 죽었다. 그러나 그는 사랑했던 신덕왕후의 무덤이자 자신의 수릉이기도 한 정릉에 묻히지 못했다. 그렇다고 첫 번째 부인이자 태종의 친모인 신의왕후 무덤(개경) 옆에도, 또 고향인 함흥에도 묻히지 못했다. 하륜이 모든 것을 틀어버렸다. 하륜은 태조의 무덤을 구리 건원릉으로 결정했다. 물론 풍수설에 따른 최고의 길지를 잡은 것만은 분명하였다. 조금은 미안하였던지 태조의 무덤 위에 고향 함흥의 억새를 가져다 심어주었다. 그 억새는 지금까지 자라고 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태조가 죽은 지 1년 후인 1409년 정릉을 현재의 성북구 정릉동으로 옮겨버린다. 서울에 정릉이란 지명이 두 개가 된 연유이다. 처음부터 태종과 하륜의 일관된 작품이었다. 도선과 묘청의 풍수학맥을 이어받았던 무학대사와 서운관 소속의 풍수(고려 풍수)가 하륜에 의해 단절되면서 새로운 조선풍수가 규정된다. 개국은 태조가 하였으나 조선을 건국한 것은 태종이며 이때 활용한 도구가 하륜의 풍수였다.

 

 

 

 

 

[김두규 교수의 國運風水(국운풍수)]

풍수를 거슬러 라이벌 쳐내는 '逆風水'… 세조는 알고 있었다

 

 

 

 

'역풍수(逆風水)'. '풍수를 거슬러 뜻을 이룬다'는 의미로서 서유정 PD(SBS)가 수년 전 다큐를 제작하면서 만들어낸 조어다. 역풍수를 통해 라이벌을 불행하게 해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룬다는 뜻이다. 풍수에 정통하지 않으면 이러한 역풍수 행위를 시도할 수조차 없다. 지난번 글에서 조선통치에 유학뿐만 아니라 풍수 등 잡학을 써야 한다는 세조에게 잡학을 배제시키라는 주장을 편 김종직이 파직당한 사건을 소개했다. 세조가 훗날 사림파의 종장이 될 김종직을 경박한 사람이라고 화를 내며 내친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세조에게 풍수는 단순한 잡학이 아니었다. 서열상 왕이 될 수 없었던 그가 대군시절부터 오랜 기간의 은밀한 '역풍수'를 통해 드디어 임금 자리에 올랐다고 믿었기에 풍수를 폐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둘째, 세조가 젊은 김종직에게서 큰 학자로서 대성할 싹수를 보았다고 할지라도 정치가로서는 '트러블 메이커'가 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김기현(전북대·퇴계학) 교수는 다음과 같이 흐름을 정리한다.

 

"세조가 통치했던 때를 포함해 조선 중기 이전은 비교적 학문의 자유가 있었다. 흔히 훈구파로 일컬어지는 문신들은 부국강병, 유연한 외교 등을 주장하여 학문 풍토가 그리 경직되지 않았다. 이에 반해 훈구파를 밀어내고 등장하는 김종직과 그 학파(사람파)는 성리학 말고는 그 어떤 것도 용인하려 들지 않았다. 이러한 학문의 경직화는 사문난적(斯文亂賊)이란 이름 하에 생각이 다른 자들을 처형하기까지 이르렀다."

 

가톨릭이 중세를, 마르크스주의가 동구유럽과 소련을 옭아매었듯, 김종직의 성리학은 조선 후기를 질식시켰다. 이러한 풍토 속에서 '터잡기와 공간배치 및 국토조경의 예술'로서 풍수도 점차 변방으로 밀려나게 된다. 겨우 살아남은 풍수는 묘지풍수였다. 조선 중기 이전과 고려의 풍수는 묘지풍수로 한정되지 않고 다양하게 활용된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 세조의 역풍수가 가능하게 된 것이다.

세조의 역풍수는 무엇인가?

1455년, 조카 단종을 내쫓고 임금이 된 세조는 많은 정적들을 죽인다. 이 가운데 목효지란 사람이 교수형을 당한다. 그런데 그는 특별히 죄를 지은 것이 없었다. 사헌부에서도 그 부당함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릴 정도였다. 노비인 데다 애꾸눈인 목효지, 세조 입장에선 하찮은 존재에 지나지 않았을 그가 무엇 때문에 죽임을 당했을까? 세조의 비밀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보다 15년 전인 1441년(세종 2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목효지가 세종에게 '얼마 전에 돌아가신 세자빈이 묻힐 무덤자리는 장자·장손이 일찍 죽을 자리'라는 풍수 상소를 올린다. 세종의 맏며느리이자 훗날 문종의 부인으로 알려진 권씨가 아들(훗날 단종)을 낳은 지 하루 만에 산후병으로 죽는 사건이 발생한다. 세종 입장에서는 원손(元孫)을 안겨주고 죽은 며느리가 어찌 애틋하지 않겠는가?

세종은 지관들을 동원하여 길지를 물색하게 한다. 한 달 후 경기도 안산시(현재 목내동 산 47번지)로 장지가 결정된다. 그런데 이 터에 대해 일개 노비가 상소를 올려 '장자·장손이 일찍 죽을 자리'라는 극언을 한 것이다(훗날 그 예언은 현실화된다). 당연히 종친과 대신들은 그러한 망언을 한 자를 벌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세종은 상소를 올린 지 3일 만에 노비에서 풀어주고 풍수공부에 전념케 하는 파격적 은전을 베푼다. 그러나 이 사건은 훗날 세조가 되는 수양대군에게는 역풍수의 크나큰 걸림돌의 시작이었다.

 

 

 

[김두규 교수의 國運風水(국운풍수)]

서울·경기 출신 대통령 없는 이유, 알고 보니

 

 

 

 

해방 이후 배출된 10명의 대통령 가운데 6명이 영남출신이다. 이번 12월 대선에 예상되는 후보들 가운데 현재 지지율이 높은 이들이 대부분 영남출신이다. 인걸지령(人傑地靈)이라면 장차 자녀를 대통령으로 만들고 싶은 '맹모(孟母)'들은 강남이 아니라 영남으로 가서 자녀를 낳거나 교육을 시켜야 하지 않을까?

해방 이후 영남에서 대통령이 많이 배출된 것도, 이번 12월 대선후보들이 압도적으로 영남출신이 많은 것도 풍수학인의 입장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실학자 이익(1681~1763)의 입장에서는 너무 당연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는 영남이 '버들가지(楊柳枝)'에 해당되어 조선의 기둥이 되기에 인물이 많다는 주장을 편다.

'백두산에서 시작하는 지맥이 태백산과 소백산에 이르러서 하늘에 닿도록 높이 솟았는데 이것이 본줄기이다. 그 중간의 여러 갈래들은 모두 서쪽으로 갈려 갔다. 이러한 조선의 지맥 흐름을 전체적으로 보면 버들가지 형국이다. 풍수사들은 버들가지 끝에 알맹이가 맺는다고 하였다. 바로 그 알맹이 자리가 영남이다. 버들가지라고 이름한 것도 적절하며, 인물이 배출되는 것을 보아도 영남이 인물의 창고라 할 수 있다. 나라가 의존할 수 있는 힘은 영남 말고 다른 데서 찾을 수 없다.'(성호사설)

지극히 주관적이고 편협한 '남인' 실학파―이익과 그의 재종손이자 '택리지'의 저자인 이중환이 대표적이다―의 국토관이다. 그러한 국토관은 주로 정치권력관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예컨대 고려 태조 왕건은 '훈요십조'에서 금강이 반궁수(反弓水·하천의 공격사면)라서 금강 이남 사람들이 배역할 수 있으니 조정에 등용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지도를 펴 놓고 보면 금강보다도 낙동강이 더 큰 반궁수이다. 그 논리대로 따르자면 낙동강 동쪽에서 더 큰 배역의 인물들이 나와야 한다. 그런데 해방 이후 영남에서 가장 많은 대통령이 나왔고, 이번 유력후보들도 대부분 영남출신이라는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필자가 관심을 갖는 것은 그것이 아니다. 교육과 문화 그리고 경제의 중심지인 서울·경기에서 지금까지 대통령을 한 명도 배출하지 않은 것이 궁금하다. 훌륭한 인물들이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대통령을 배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통령을 배출하기에는 무슨 여건이 맞지 않았을까? '대통령학'을 전공하는 학자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할까? 진지하게 생각해 볼 일이다.

흥미로운 것은 일찍이 정조 임금이 이에 대해 깊은 관심을 표명했다는 점이다. 우선 그는 함경도에 인물이 나지 않는 것은 고려 공민왕 때 우리나라를 찾아와 쇠말뚝을 박은 명나라 도사 서사호(徐師昊) 때문이라고 단정한다. 이어서 한양에 인물이 나지 않는 것은 북한산성 아래에 수십 년 전에 소금을 쌓아 태워 뜸을 뜨고 염산(鹽山)을 만들어 놓는 바람에 지맥이 끊긴 것 때문이 아닌가 의심한다.

오죽 답답했으면 한양의 인물난이 주산인 북한산 아래 누군가가 소금불을 지른 탓이라고 생각하였을까?

정조 임금이 심심해서 그냥 해본 말이 아니다. 정조는 이론뿐만 아니라 실무에 대해서도 당대의 그 어떤 지관보다 풍수에 능했다. 당대의 최고 풍수술사들을 모두 만나 보았다.

훗날 그는 풍수에 대한 저술을 한 권의 문집으로 남겼다('홍재전서' 제57권). 그는 궁금해했다. 왜 한양에서 큰 인물이 나오지 않을까? 이후 아무도 이 문제를 고민하지 않았다. 정조를 이야기하고 싶은 까닭이다.

정조는 풍수를 통해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화성의 융릉). 동시에 그는 풍수 때문에 집권 초기부터 국정운영을 힘들게 하고 말았다(동구릉의 원릉). 어떻게 융릉을 통해 정조의 운명을 바꾸었는지부터 다음에 이야기하자.

 

 

 

 

/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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