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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 얼마나 움직였을까. 사방으로 흩어졌다 순식간에 한 점으로 뭉치는 군인들의 사열처럼 이리저리 움직이던 여러 장추삼들이 한순간에 하나의 그로 합쳐졌다. 뚜둑! 운동의 마지막은 역시 목을 소리 나게 꺾는 것으로 장식하니 이로 미루어 수미쌍관(首尾雙關)을 좋아하는 놈이라 하겠다. “아, 이제야 찌뿌둥한 게 좀 풀리네. 역시 사람은 움직여야 녹슬지 않는 법이라니까.” “가만히 계셔도 녹슬 일이 없어 보이는데요.” 정화진의 감탄성 대답에 씨익 웃으며 장추삼이 거들먹거렸다. “뭔 소리냐? 아까 팔파공동인지 뭐시긴지가 조금만 더 앵알거려 주었다면 굳어있던 몸이 팍팍 풀렸을 거다. 이거야 원, 들이키다 만 술도 아니고...” 이런 광오한 소리를 들으면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낄 법도 한데 정화진은 반짝이는 눈으로 그의 오만하게 쳐들려진 턱을 응시했다. 세상 어디에 서 있어도 거칠 것이 없을 듯한 사람. 머리가 깨져도 하고 싶 은 말은 반드시 토해내야 직성이 풀릴 것만 같은 사람. 그래야 어울리는 사람. 그렇게 사는 것이 제격인 사람. “혹시 무서운 거... 있어요?” 장추삼의 눈이 번뜩였다. “무서운 거? 내게? 크하하하! 이 장추삼이에게 무서운 거라니! 그딴 건! 그딴 건... 에... 또...” 점점 수그러드는 음성. “... 있지, 있어... 좀 있지... 아니...” 그가 한숨을 팍 내쉬었다. “하여간 있어.” “우와, 무서운 것도 있으세요?” “......” 대꾸를 하지 않는 편이 나았다. 정화진의 눈엔 장추삼이 무슨 괴물 같은 것 으로 비쳐지고 있었으니까. 그의 침묵에 정화진도 화답하듯 입을 닫았다. 괴물이든, 귀신이든 간에 생 각하는 시간은 일을 법도 하고 소년의 입장에서 그걸 방해할 이유 따윈 없 었다. 사실 장추삼은 나름대로 머리가 아팠다. 무당으로의 잠입만 해도 골머리 썩 을 일인데 두고 갈 아이의 안위 역시 신경 쓰이니. ‘그러게 객방에서 두 다리 쭉 뻗고 유과나 오물거리면서 기다리라니까...’ “괜히... 따라 왔나 봐요. 성가시게 굴 생각은 없었는데... 정말 죄송해요.” 겉 치례로 괜찮다는 말을 해주고 싶었는데 입술에 아교라도 쳐 발랐는지 말 이 나오지 않았다. 솔직히 짜증이 나는 건 어쩔 도리가 없었다. 고개를 수그린 정화진이 머리를 벅벅 긁다가 그 나이에 맞지 않는 탄식을 터트렸다. “저란 놈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잘해본답시고 노력해 봐도 늘 상 다 른 분들에게 폐만 끼치게 되네요. 하하하.” 소년의 허탈한 웃음이 비수처럼 장추삼의 가슴에 꽂혔다. “네가 잘 모르는 것 같아 이번은 그냥 넘어가겠는데...” “ ? ” 딱딱하게 굳은 장추삼의 음성은 소년의 주위를 환기시키기에 충분했다. 그 만큼 그의 목소리에는 특별한 무엇이 담겨 있었다. “난 말이야, 사내자식이 술 먹고 주사를 부라거나 별 것도 아닌데 청승 떠는 꼴은 죽어도 못 봐! 물론 주사 부리면서 청승까지 떨면 그 즉시로 박살내 버리지. 왜냐고? 싫으니까. 왜 싫으냐고? 그냥 싫어. 하여간 죽어도 싫어.” 지금처럼 그냥이라는 말이 효과적으로 쓰이는 경우가 있을까. 무언의 긍정인지 그를 올려다보던 정화진이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래도 장추삼의 냉엄한 눈빛은 거두어지지 않았다. 아직 아이다. 본 것보다 봐야할 것이 많고, 받아들인 것보다 받아들일 것이 많은 나이다. 가능성이 무한하면서도 충분히 어그러질 나이란 말이다. 이끌 수는 있지만 대신할 수는 없다. 선택은 그의 몫이다. 그렇게 굳은 듯 서있던 장추삼이 입김을 한번 훅, 토해내고 낮게 말했다. “다녀오마.” 뭐라 덧붙이려던 그가 오른손을 쳐들고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는 정화진의 미소에 말 없는 웃음으로 걱정을 대신하기로 했다. “근데 요...” 몸을 돌린 그의 발목을 잡아채는 음성. “왜 저를 데리고 오신 거예요. 공통점이니 하는 얘기는 정말 웃기잖아요. ” “웃겼나?” 웃겼다. 세상 천지에 그런 공통점으로 동행을 만든다면 지금 장추삼은 중소 문파 하나쯤은 너끈히 세우고도 남았을 판이니까. “그냥...” 또 그냥이다. 그런데 이번의 그냥은 아까의 그것과 달리 전혀 설득력이 없 었고 그래서 아이의 입술이 또 삐져나왔다. “그냥... 널 데려오고 싶었어.” “에이. 그게 말이 되요.” “가끔 말이 안 되는 게 말이 될 때도 있다.”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있다니까.” 입씨름을 하며 실실 웃던 그들의 눈이 한 순간 허공에서 얽혔다. 잔잔한 미 소 속에 묵시(?示)의 신의(信義)가 둘을 감쌌고 장추삼이 비죽이 웃었다.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이거든... *** 예상은 했지만... 죽어도 못 찾겠다! 넓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지만 이다지도 넓을 줄이야! 그의 머릿속에 그려져 있던 무당파의 크기는 실제의 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기본적인 상식으로 조사전과 자소궁, 그리고 진무관이란 세 개의 커다란 전각이 있다고 들었는데 뭔 놈의 전각들이 이렇게들 다 커다랗다는 건가. 거기다... 전각의 숫자들이 너무 많다! 문제는 그 어디에도 장문도장이 기거한다는 징표 따윈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는 거다. ‘치사하게...’ 그래도 검으로는 천하를 다툰다는 무당인데 설마 장문도장이 암습을 저어해 서 그랬을까 만은 무려 반 시진을 넘게 헤매고 다닌 장추삼에겐 모든 것이 불만투성이였다. 어차피 무당이라면 별로 인식이 좋지 않은데다 이런 일까지 겹치니 아주 인 상이 더러워졌다. 사실 어느 문파가 장문방장이나 장문도장, 혹은 문파의 수뇌가 기거하는 곳 에 ‘나 여깄소’하고 현판을 걸어 놓겠는가. ‘차라리 그냥 기별이라도 넣어볼걸...’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이다. 불과 반 시진 전에 자신이 뱉은 말을 몸소 실천하며 조심조심 은신술을 - 그래봐야 기껏 해서 달이 만들어내는 그림자에 의지해서 몸을 묻는 수준이 지만 - 펼치던 장추삼의 볼이 점점 부풀어 올랐다. ‘아, 씨... 못해먹겠네!’ 자고로 사람은 생겨먹은 대로 살아야 하는 법이다. 그래서 평소에 안 하던 짓을 하면 죽을 때가 다된 거라고들 하지 않던가. 서성이는 무당의 도사들을 피하는 것도 이젠 지쳐갈 무렵 본의인지 아닌지 는 몰라도 그의 발에 마른 나무뿌리가 하나 기세 좋게 밟혔다. 뿌드득. 얼마나 기운차게 밟았는지 지나가던 도사들의 귀에 선명한 울림을 안겨주었 겠는가. 촹! 촹! 일체의 말없이 검을 뽑아드는 무당인들의 기세는 자못 범상치 않은 것이었 다. 그들은 눈을 빛내며 장추삼이 은신해있는 수풀을 헤집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발각될 상황. 순간적으로 그의 머리에 오만가지 상념들이 교차 했다. ‘고양이 소리를 내 볼까...’ 갈등에 갈등을 거듭하던 장추삼이 새의 날개짓 소리라든가 기타 여러 가지 자연의 음향들을 떠올려 보았지만 곧 혀를 빼물었다. 재주도 부려본 사람이 부린다고, 천하의 얼간이에 바보천치가 될 판이니 차 라리 깨지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차라리 잘됐지, 뭐.’ 세 명의 도사들이 거의 면전에 이르렀을 때 천천히 일어선 그가 두 손을 쳐 들며 나름대로 최대한 목소리를 가다듬고 점잖게 입을 열었다. “초행이라 그런데 장문도장이 어디 계시오?” 촤촥! 장추삼의 움직임에 따라 비호같이 산개하는 도사들의 움직임은 과연 무당이 왜 구파에서도 대접을 받는 가를 잘 알려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뭐, 뭐요?” “지금 뭐라는 거야?” 너무 황당해서일까. 세 명의 도사들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얼마나 기가 막혔으면 꼬리처럼 따라붙는 도호까지 잊어먹었겠는가. 더욱 가관인 것은 침입자의 다음 반응이었다. “아, 참... 젊은 도사들이 말귀를 못 알아먹네. 장문도장이 어디 계시냐고 묻지 않소?” 도사들은 자신의 뺨을 힘껏 꼬집어보고 싶었지만 차마 그런 얼빵한 행동은 보일 수 없어서 다른 이를 돌아봄으로서 자신의 현재상태를 확인하려했다. 여섯 가닥의 눈길이 어우러지고 곧 그들은 환청을 듣지 않았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두 명이라면 몰라도 세 사람이 동시에 환각증세를 보일 리는 없으 니까. 내방(內房)에서 묵고 있는 방문객이 아닐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현재 무당의 내빈(內賓)이라면 단 네 명에 불과하기에 그들이 모를 리가 없었다. 또한 그분들은 이런 야심한 시각에 쥐새끼처럼 풀숲에서 엄한 짓거리를 할 리도 없단 말이다. 장문도장을 만나고 싶으면 밝은 날에 청하면 될 일이다. 그렇다면 무당의 심장부에 버젓이 침입해서 당당하게 헛소리를 늘어놓는 저 자는 누구란 말인가. 하지만 무당은 무당. 비록 미친놈이라고 해도 세 명의 도사들은 곧 정신을 수습하고 사람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를 포권으로 대신했다. “본인은 무당의 사대제자인 청오자(聽悟子)라 하오. 귀하는 지금 대무당의 땅을 허락도 받지 않고 밟고 게시니 일단 명호부터 알려 주시오. 무량수불 ...” 정중한 물음에 잠깐 고민하던 그도 곧 포권으로 화답했다. 어쨌든 싸우려고 온 것은 아니니까. “장추삼이라고 하오.” “장추삼? 장추삼이라면...” 어딘가에서 들어본 것도 같은 이름이기에 포권을 푼 도인이 고개를 갸웃거 리는데 뒤쪽의 도인 하나가 귓속말로 뭐라뭐라 소곤거렸다. “음? 정말이오? 정말로 귀하께서 강호삼성 가운데 괴성으로 불리는 장추삼 소협이 맞소?” 가면은 무슨... “남들이 그럽디다.” 따분한 음성으로 하품처럼 대답한 그가 주위를 슬슬 둘러보았다. 잘만하면 큰 충돌 없이도 목적한 바를 이룰 것도 같았다. 사람 나고 명예 난다는데 이제 보니 명예 나고 사람 나나보다. “좋습니다. 그런데 장소협은 장문도장께 무슨 볼일이 있으신지요?” 아까보다 한결 누그러진 눈빛들, 기회다! “긴히 도장께 알려야 할 일이 생겨서 그러니 기별이나 좀 넣어주시오. 내 얼마나 급했으면 야밤에 담을 넘었겠소?” “그래도 절차라는 것이 있는데...” “이보시오, 도장!” 장추삼의 음성이 굵어졌다. “내가 뭐 득 볼 일이 있다고 예까지 허겁지겁 뛰어왔겠소. 정말 중요한 사 안이 아니라면 밝은 날에 정중히 기별을 넣었을 거요. 하지만 그럴 계제가 아니란 말이오. 만약 이런 식으로 시간을 보내다 일이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그 책임은 누가 질 거요? 도장이요? 아니면 도장이요?” 장추삼이 손가락으로 하나씩 가리키자 움찔움찔 놀라 한걸음씩 뒤로 물러서 던 젊은 도인들의 얼굴에 고뇌의 빛이 흘렀다. 곧 세 도인은 그를 뜯어보더니 자기들끼리 뭐라고 소곤거리기 시작했다. 명 호를 무시하자니 껄끄럽고, 부탁을 들어주자니 너무 황당해서일 터였다. 허나 역시 강호삼성의 위명은 이제 태청검법(太淸劍法)을 지나 양의검(兩儀 劍)의 초입으로 들어가는 젊은 도인들에게 그냥 지나치지 못할 힘으로 다가 왔다. “무량수불... 조, 좋습니다. 일단 장문도장께 기별을 넣어 드리도록 하겠 습니다. 하지만 장소협은 여기서 두 도우들과 함께 기다리고 계시오. 단 한 발자국도 움직여서는 안 되오!”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장추삼을 몇 번이고 돌아보며 한 발 나서서 포권으 로 예를 갖추던 도인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222 '이거... 잘만 하면 손 안대고 코 풀겠는걸?'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희희낙락 벌어지는 입가를 가까스로 통제하며 가늘어 지는 눈을 억지로 크게 뜬 장추삼이 뒷 목을 손으로 툭툭 쳤다. 표정관리처럼 힘든 것도 없다. 별로 할 말도 없는지라 두 도인과 장추삼은 서로를 멀거니 보다 눈이 마주 치자 괜히 하늘가의 별들과 눈싸움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쓸데없는 일로 시간을 허비하는 세 사람에게 지금 이 순간 하고픈 말을 토하라고 한다면 거짓말처럼 한 목소리로 외쳤을 거다. 제발 빨리 좀 오란 말이야! 하지만 이곳은 무당의 중지다. 아무리 제멋대로인 장추삼이라도 마음대로 나대기 어려운 무엇이 있다. 소림에서의 그를 생각한다면 다소 의외일수 있으나 그때는 열이 받을 대로 받은 상태에서의 방문 - 이라기보다 거의 침입 - 이라 지금과는 상황이 많 이 다른 경우였다. 오늘은 어디까지나 대화를 하러 온 입장. 차분하고 또 차분해도 모자라다. 남들은 오인하고 있지만 장추삼처럼 비폭력주의자가 또 어디 있을까. 정말, 정말로 개 같은 인간이 아니라면 절대로 남의 얼굴에 손을 대지 않는 그다. 그리고... 세상엔 개 같은 것들이 너무 많다. 그냥 개면 또 모르나 이건 아 예 미친 개 같다는 거다. 비폭력주의자에게 폭력을 강요하는 현실. 괜히 슬퍼져서 장추삼이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문제라도..." "그렇게 심각한 사안인 겁니까!" 두 도인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이럴 땐 모른 체 해주어도 되는데. "그냥 요." 그냥 일리 없다! 강호삼성 가운데에서도 괴팍하고 특이한 인물로 정평이 나 있는 괴성 장추삼이 그냥 한숨을 쉴 리가 있겠는가! 하지만 도인들은 조심스레 그의 눈치를 살폈다. 감히 뭐라고 나설 엄두가 나지 않았고, 얼떨결에 헛소리라도 한다면 그 또한 무슨 망신이겠는가. 가만히 있으면 그래도 둘째는 간다는 속설대로 도인들은 합죽이가 되었다. 그때 여기저기서 횃불이 보였다. "아... 저기 오고 있습니다, 무량수불..."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일군의 도사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조용히 처리하고 싶었는데 뭔 놈의 인간들이 저리도 많이 기어 나오는 거야.' 숨길 수 없는 불만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지만 입방아는 찧지 않았다. 똥 개도 제 집에서는 오십 먹고 들어가는데 무당이라면 말 할 나위 없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빈도를 따라오시지요. 무량수불..." "아니, 뭐, 별로..." 그답지 않은 겸양의 대꾸를 던졌음에도 청오자는 장추삼의 대답을 무시하듯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몸을 돌려 앞장서기 시작했다. '얼레, 뭐야...' 심각하기는 뒤따라온 도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누가 봐도 한눈에 알아볼 만 큼 굳은 표정과 경직된 입 꼬리. 표출하지는 않았으나 장추삼으로는 은은한 경계심마저 엿볼 수 있었다. '뭔가 재미없게 돌아가는 것 같은데...' 하지만 내친 김이다. 뭐가 어떻게 흘러가든 일단은 확인을 해야겠다. 부딪 쳐보면 뭐든 나올 터였다. 그게 의도한 바든 아니든 말이다. 도사들이 이끈 곳은 너른 공터였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해 일반적으로 무 당인들이 무술을 수련하는 연무전 정도로 보였다. 여기저기 비치되어 있는 병장기류들과. 보법이나 기타 인위적인 힘에 의해 깊이 파여 있는 바닥에서 장추삼의 추측은 힘을 얻었다. 근데 왜? 일렬로 늘어서 있는 몇 십 개의 횃불들에 가뜩이나 가는 장추삼의 눈자위가 더욱 좁아졌다. "난 조용히 말하고 싶었는데?" 앞서서 걷던 청오자의 얼굴에 미미한 경련이 일었다. "장소협..."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지만 청오자는 장추삼을 한번 돌아보고는 고개를 애 써 돌렸다. '어라?' 그냥 잘못된 것도 아니고 뭔가 크게 틀어진 것이 분명하다. "장추삼 소협을 데리고왔습니다!" "뭐?" 청오자의 낭랑한 외침이 연무전을 가득 메웠다. 하지만 장추삼으로는 무슨2005-05-11 6:00오후 말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설마 무당의 장교가 나와 있다는 건가? 스르륵. 연무전의 북쪽에 위치한 대전에서 다섯 명의 노인들이 천천히 걸어나왔다. '얼씨구?' 크게 힘을 들인 것도 아닌데 몇 발자국 옮기는 것만으로 삼 장 이상 떨어져 있던 청오자와의 거리를 단숨에 축약하는 보법을 선보이는 노인들. 그들의 가슴엔 각기 목(木), 화(火), 토(土), 금(金), 수(水)의 다섯 글자 가 굵게 수놓아져 있었는데 글자들이 마치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만 같이 선명했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장추삼을 칼날 같은 눈으로 쏘아보던 금의 글자를 지닌 노인이 표정만큼이나 차가운 어투로 씹어 뱉듯 물었다. "네가 장추삼이냐?" 대저 호의라면 몰라도 적의는 단번에 알아 체는 게 인간이다. 심상치 않은 첫마디에 장추삼의 입술이 실룩거렸지만 노인들은 그의 반응을 별반 개의치 않았다. 아니, 철저히 무시하는 쪽이었다. "인하무인에 광오하기가 하늘을 찌른다고들 해서 어떤 놈인가 기대했건만 이제 보니 그저 천둥벌거숭이가 아닌가?" 토자를 지닌 노인이 고개를 저었다. "그냥 하룻강아지 같은걸?" 그들 중 가장 온화한 얼굴을 하고 있는 수자 노인이 착잡한 얼굴이 되어 하 늘가로 눈을 가져갈 때 장추삼이 느릿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여기가 무당파요?" 노인들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그는 자신이 던진 질문을 무시하고 다음 말을 뱉았다. "청정하고 도의 기상이 하늘을 찌른다고들 해서 어떤 문파인가 기대했건만 이제 보니 그저 사람 무시하기 좋아하는 노인네들의 집합소가 아닌가?" 꿈틀. 다섯 노인의 눈썹이 일제히 역 팔자를 그렸다. 강호에 몸담고 있는 자들 가 운데 그들의 신분을 아는 이라면 누가 감히 이런 망발을 지껄이겠는가. 그리고 모든 무당인의 얼굴이 바뀌었다. 조금 전만 해도 장추삼에 대한 호 기심 정도는 기자고 있었으나 그의 말 한마디가 이런 생각을 깨끗이 지웠던 것이다. 일생 일대의 수치스러운 일을 겪는다고 해도 이런 표정을 지을까. '뭐냐, 이 분위기?' 눈치를 보아하니 장난이 아닌데 그가 한 일이라곤 그저 평범한 빈정거림 이 상도 이하도 아니었지 않은가. 엄밀하게 말해서 먼저 시비 건 쪽은 노인네 들인데. '이 노인들이 무슨 장문 방장쯤 된다는 거야?' 세상에 다섯 명이 장문하는 문파가 어디 있겠는가, 돌아가면서 하루에 한번 씩? 가슴에 글자까지 새겨놓고? 바보 같은 상상을 하던 장추삼이 곧 정신을 수습했다. 지금 이런 공상을 할 때는 아닌 것 같다. "말을 제법 잘 하는 소형제로구먼, 무량수불..." 수자 노인이 빙긋 웃었다. "초면에 실례가 많았네. 우리는 무당의 오송이라 불리는 노인이라네." 순간 장추삼의 눈에 가벼운 놀라움의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아무리 무림사 (武林史)에 어두운 그라고 해도 수자 노인이 입에 담은 명호 정도는 알고 있었으니까. 그 의미까지도 말이다. '어쩐지... 그런데 나 같은 강호초출의 방문에 웬 오송의 영접인 거야?' 무당오송(武當五松). 당금 무림에서 매화삼로를 제외한다면 최고의 배분을 지닌 사람들일지도 모 른다. 무당의 현 장문인 죽선자(竹仙子) 오동명의 사숙들로서 무당의 진신 절기라는 양의검법을 거의 극성까지 깨우쳤다는 사람들. 무당 최고의 절기이자 이제는 전설이 되어버린 무극시생태극변의 초입이라 는 태극혜검에 도달한지 벌써 십 수년이 지났으니 그들의 공부가 어디까지 이르렀는지는 아무도 추측하지 못할 터였다. 워낙 배분이 높은 탓에 서열을 올리는 것조차 죄스럽다는 - 그도 그럴 것이 절대오존의 항렬은 무리로 평가되나 그렇다고 검정오존의 이름이라면 또한 그들의 위명에 손색이 있었으니까 - 무당의 전설적 노고수들. 어쩌면 무당 최고 배분의 고인들일진대 무슨 일로 이 늦은 시간에 장추삼을 상대한다는 건가. '분명한 건 하나.' 그들의 신분이 어쨌든 간에 무당은 결코 장추삼을 호의적으로 맞이하는 분 위기가 아니라는 거다. 담을 넘어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말이다. 문득 그가 청오자를 돌아보았다. 횃불을 들고 무당오송의 뒤에 시립해 있던 젊은 도사는 장추삼의 눈길에 묵묵히 고개를 떨궜다. "내가 왜 이곳까지 왔는지는 알 거고... 그래서 어쩌겠다는 거요?" "뭘 말이냐?" 토자 노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잘 알면서 딴청은...' 늙은 생강이 맵다는 것쯤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무림에 출도해서 정말 톡톡 히 맛보고 있는 그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에휴..." 한숨이 다 터져 나왔지만 아쉬운 쪽은 그라 어쩔 도리가 없다. "장문인하고 말 좀 하려고 왔다니까요! 듣자하니 며칠 후에 폐관한다면서요 ! 사주나 궁합 봐달라는 얘기 안 할 테니 안심하라고요!" 다섯 노인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장문은 왜 만나려 하느냐?" 수자 노인이 싱글거렸다. 천성이 유쾌한 건지, 원래 표정이 그런 건지는 몰 라도 그의 얼굴에서 웃음기를 거둘 일은 없어 보였다. "할 말이 있다니까!" "그 할 말이 뭐냐고 묻지 않느냐!" 칼날 같은 음성, 금자의 노인이 냉엄하게 물었다. 표정과 목소리만으로도 웬만한 사람들이라면 뱃속의 얘기까지 모조리 토설할 판이다. 허나... "노인장이 무당의 대표요?" "음?" 장추삼의 돌연한 질문에 금자 노인도 움찔 콧등에 주름을 잡았다. "만약 노인장이 무당을 대표할 수 있다면 말을 하겠지만 그럴 수 없다면 그 냥 빠지시오." "이, 이놈..." 배분이야 물론 현 장문인보다 높다. 하지만 그들이 무당을 대표할 수는 없다. 금자 노인이 부들부들 떨고 있는데 여태까지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있던 목자의 노인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소림사에 갔었다고 들었다." 주위를 환기시킬 만큼 또렷하면서도 나직한 음성. 여타의 노인들도 그가 나 서자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십팔나한진을 격파했다고 들었다. 혜광사제에게 연대구품을 깨우쳐주었다 는 것도." "혜광사제... 아, 소림방장?" 구파에서는 배분이 같은 타 문파의 사람들끼리도 서로 사형제라 부른다. 허 나 이를 알리 없는 장추삼은 목자 노인의 호칭에 머리를 벅벅 긁었다. "사제라니, 이거 적응이 안 되네. 아무튼 그건 넘어가고... 그래서 뭐 어쨌 다는 거요?" "지금 너를 보자니 혜광사제의 말을 의심할 수밖에 없구나. 과연 네가 무림 삼성 가운데 괴성이라 불리는 장추삼 본인이 맞느냐?" 멀뚱. 장추삼이 목자 노인을 빤히 쳐다보았다. "뭘 말하고 싶은 거요?" 목자 노인이 다시 뒤로 빠졌다. "야밤에 무림의 성지라고 할 수 있는 우리 무당을 무단침입 한 것도 모자라 존장에 대한 예까지 무시하는 행동을 일삼으니 어찌 후기지수 가운데 으뜸 이라는 강호삼성의 일원이라 믿겠느냐? 거기다 본인의 말 이외엔 믿을만한 근거조차 없거늘." "난 또 뭐라고..." 피식 웃고는 장추삼이 목을 좌우로 소리나게 꺾었다. 보기에 따라 무척이나 불량스런 몸짓이지만 그걸 탓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까 요지는 한번 붙어보자는 거 아니요. 쉽게 말하면 되지 뭘 그리 빙빙 돌리는 거야? 아무튼 노인네들이란 괜히 어려운 척 하려고 든다니까." 투덜거리던 그가 주변의 인물들을 쓱 훑어보았다. "자자, 나서라고. 누가 상대할 건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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