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년 9월 4일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제1독서 : 1코린 3,1-9
복 음 : 루카 4,38-44
38 예수님께서는 회당을 떠나 시몬의 집으로 가셨다.
그때에 시몬의 장모가 심한 열에 시달리고 있어서, 사람들이 그를 위해 예수님께 청하였다.
39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가까이 가시어 열을 꾸짖으시니 열이 가셨다.
그러자 부인은 즉시 일어나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
40 해 질 무렵에 사람들이 갖가지 질병을 앓는 이들을 있는 대로 모두 예수님께 데리고 왔다.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들을 고쳐주셨다.
41 마귀들도 많은 사람에게서 나가며,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꾸짖으시며 그들이 말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다.
당신이 그리스도임을 그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42 날이 새자 예수님께서는 밖으로 나가시어 외딴곳으로 가셨다.
군중은 예수님을 찾아다니다가 그분께서 계시는 곳까지 가서,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주십사고 붙들었다.
43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44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여러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셨다.
<오늘의 묵상>
안소근 실비아 수녀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교회의 여러 문제를 알고 있었고
또 코린토 교회 신자들이 바오로 사도에게 물은 내용들도 있기 때문에,
코린토 1서와 2서에는 다양한 주제들이 나옵니다.
그 가운데 무엇보다도 먼저 나오는 문제가 공동체의 일치입니다.
서간 뒷부분에서 성령의 은사나 전례에 대하여 말할 때도
공동체의 일치는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그런데 오늘 독서에서는, 코린토 신자들이 어떤 문제로 갈라졌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겉보기에 이들은 바오로를 추종하거나 아폴로를 추종하고 있으니,
그들 나름대로는 교회 안에서 열심히 활동하는 사람들이었을 것이고,
어쩌면 저마다 분명한 소신도 있었을 것입니다.
바오로와 아폴로는 하느님의 밭인 교회의 신자들을
돌보며 심고 물을 주는 일을 한 이들이었습니다.
그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의 무리도 어쩌면
교회라는 밭을 열심히 가꾸려고 하는 사람들이었겠지요.
그런데 바로 그 일이 그들을 영적인 사람이 되지 못하게 가로막습니다.
사람들의 이름이 그들에게 중요하였기 때문입니다.
탐욕에 사로잡히거나 쾌락에 몰두하여야 육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를 위하여 열심히 일하고 있으면서도
그 안에서 하느님이 아닌 인간에게 눈길이 머물러 있을 때,
인간의 업적만 생각하고 “자라게 하신 분은 하느님”(1코린 3,6)이심을 알아보지 못할 때,
쉽게 육적인 사람이 됩니다.
내 이름을 지우고 내가 하는 모든 일이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일임을 알아볼 때,
다른 모든 사람 안에서도 이를 알아볼 수 있을 때,
“시기와 싸움”(3,3)이 사라지고 우리는 영적인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전에 갑곶성지에 있을 때의 겨울이 생각납니다.
갑곶성지는 바닷가에 자리 잡고 있어서 너무 추웠습니다.
그래서 숙소의 어딘가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아서 꼼꼼하게 살펴보니
문틈으로 또 창문 틈을 통해 차가운 겨울바람이 들어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문풍지를 붙이고 비어있는 틈들을 모두 막았습니다. 그런데도 추위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방법을 쓰자 집이 따뜻해지고 아늑해졌습니다. 무엇일까요?
보일러 온도를 높이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난방비 걱정에 얼지 않을 정도로만 온도를 낮춰서 살았거든요. 그래서 그토록 추웠던 것입니다.
보일러 온도 높이는 것이 최고의 방법이었습니다.
다른 방법들도 나쁜 것은 아니지만, 이른 시일 안에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못했습니다.
인간관계가 어렵다고 말씀하시는 분이 많습니다.
관계 회복을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이지만,
사랑이 없다면 근본적인 회복은 있을 수 없습니다.
계속해서 어려움을 겪을 뿐입니다.
이 사랑이 바로 보일러 온도를 높이는 것과 동일해 보입니다.
뜨거운 사랑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랑 실천을 괜히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관계 회복을 위해, 또 각종 문제를 풀 수 있는 직접적 방법은 사랑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병든 장모를 고쳐주시고, 질병을 앓는 이들도 모두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장모를 고쳐주시기 위해서는 시몬의 집에 가서 장모에게 직접 가까이 가셨습니다.
또 다른 질병을 앓는 이들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전지전능하신 분께서 왜 이렇게 불편하게 행동하셨을까요?
그냥 말씀만으로도 편하게 고쳐주실 수 있지 않을까요?
사랑 때문입니다. 사랑은 말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냥 입으로만 “사랑해”라고 말한다고 사랑을 느낄 수 없습니다.
그 사랑의 말에 따른 행동이 있을 때, 그 사랑에 비로소 공감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장모와 병자들이 모두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는 사람만이 사랑을 세상에 실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삶 안에서 당신의 따뜻한 사랑을 계속 주고 계십니다.
나의 이웃들과의 관계 안에서 우리는 충분히 주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을 바라보면서, 우리 역시 사랑의 온도를 높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불평불만을 줄이고 만족의 삶, 기쁨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어제 복음에 이어지는 오늘 복음 말씀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부분은 안식일에 회당에서 더러운 영을 쫒아내신 다음,
'시몬의 집'(루카 4,38)에 가시어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치유하시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앞 장면에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실 때와
뒤 장면에서 소리치는 마귀를 쫓아내실 때와 같이,
마치 마귀에게 하듯이 열을 '꾸짖으시어' 몰아내십니다.
둘째 부분은 '해질 무렵에'(루카 4,40), 곧 안식일이 지나자마자
몰려든 많은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고쳐주시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병을 고쳐주실 때는 '손을 얹으시고'(루카 4,40),
마귀를 쫓아내실 때는 '꾸짖으셨다'(루카 4,41)고 전하고 있습니다.
곧 병자들에게는 측은히 여기시지만,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루카 4,41)이라고 소리 지르는 마귀들은 꾸짖으시고
그들이 말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마귀들이 말하는 것을 막은 이유를 루카 복음사가는 이렇게 전합니다.
'당신이 그리스도임을 그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루카 4,41)
우리는 여기서, ‘아는 것’과 ‘믿는 것’은 같지 않다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여 봅니다.
마귀들은 예수님을 알고는 있었지만, 결코 믿지는 않았습니다.
오늘 복음의 앞 장면에서도 마귀는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루카 4,34)라고 고백하면서도
자신과는 상관이 없으니 간섭하지 말아 달라고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알고 고백은 할지라도, 믿고 받아들이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오히려 알기에 배척하였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아는 것에 앞서, 믿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사실 진정 믿을 때라야 진정 알게 됩니다.
곧 그 아는 바를 믿고, 그 믿는 바를 실천할 때 진정 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 부분은 '날이 새자'(루카 4,42), 곧 안식일 다음 날에
예수님께서 외딴곳에서 기도하시고 나서,
'복음 선포'를 위해 다른 이웃 고을들로 찾아가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른 새벽 외딴곳에서 기도하시고,
당신이 파견되어 오신 이유를 밝히십니다.
“나는 하늘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루카 4,43)
예수님께서 당신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를
‘하늘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일’임을 밝히십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의 이 사명을 바로 우리의 사명으로 받은 이들입니다.
그러니 ‘복음을 선포하는 일’은 사도 바오로의 고백처럼,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1고린 9,16)인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루카 4,43)
주님!
제가 태어난 이유, 지금 여기에 있는 이유를 알게 하소서!
그 모든 것이 주어지고 베풀어진 선물임을 알게 하소서!
오늘, 제 뼛속에 새긴 당신 뜻이 제 심장에서 솟아오르게 하시고,
당신이 주신 사명이 제 삶에서 불타오르게 하소서.
당신 뜻을 증거하는 일, 그 일을 하도록 제가 파견된 까닭입니다. 아멘.
언제나 깨어있어야 합니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사랑을 받게 되면 버림받을 때를 생각하고
편안하게 있을 때는 위태로움을 생각하라"(명심보감)는 말이 있습니다.
사랑은 영원해야 하지만 현실은 녹녹지 않습니다.
사랑과 좋아하는 감정을 착각하고 살 때가 많습니다.
우리의 사랑이 영원하지 않기에 항상 자기의 때를 알고 준비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연연해하고 집착하면 결국은 버림을 받게 됩니다.
버림을 받기 전에 떠나면 그를 기리고 아쉬움도 남는 법인데
그때를 못 맞춰서 결국 명예도 잃고 추하게 됩니다.
아쉬움이 남을 때 그때야말로 떠나야 할 때입니다.
칭찬을 받을 때, 그때가 떠나야 할 때입니다.
칭찬은 좋은 것이기도 하지만 독이 되기 쉽습니다.
영국 속담에는 “바보를 칭찬해 보라. 그러면 훌륭하게 쓸 수 있다”는 말이 있는데,
칭찬을 받은 사람은 하나같이 바보처럼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정치권에서는 떠나야 할 사람은 안 떠나고 떠나지 않아야 할 사람이 떠나서 희망이 없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다니다가 그분께서 계시는 곳까지 가서,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주십사고 붙들었습니다”(루카4,42).
치유와 말씀에 사로잡혀 예수님과 오래도록 머물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쉬움을 남긴 채 떠나십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루카4,33).하시며
현실에 안주하지 않으시고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찾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아버지의 뜻 안에 계셨습니다.
밥을 드실 시간이 없이 바쁘신 가운데에서도 한적한 곳을 찾고,
이른 아침 고요한 곳을 찾아 기도한 덕분입니다.
“성인은 언제나 깨어있어서, 하늘이 명하는 바를 알고 그것을 따르는 사람이다”(이현주).
‘네가 아니면 안 된다’고 할 때, ‘네가 꼭 필요하다고 할 때’
우리는 주님께서 무엇을 바라시는지를 헤아려야 합니다.
그 얘기가 진심으로 하는 얘기인지, 아니면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인지를 잘 파악해야 합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는 사람은 그가 떠난 자리가 빛나고 아름답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세상을 즐기고 싶은 유혹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어디에든 연연해하지 말고 단순하게 훌훌 털어버릴 수 있는 지혜를 주시길 기도합니다.
요한 세례자를 기억해 봅니다. 그는 인기가 참으로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제자들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말합니다.
‘나는 작아져야 하고 그분은 점점 커지셔야 한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다.’
요한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주제 파악을 잘하고 있었습니다.
분수를 알고 뒤에 오실 분을 위해 자리를 뜨게 됩니다.
바로 우리가 드러내야 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말재주로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서 증거됩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삶의 모범과 표양을 통해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십자가 없는 신앙은 없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자동차에는 많은 기능이 있습니다.
비가 오면 유리창을 닦아주는 와이퍼가 있고,
유리창의 먼지를 벗겨주는 워셔액 분사기가 있습니다.
냉난방을 조절하는 에어컨도 있고, 시트의 온도를 조절하는 열선도 있습니다.
내비게이션도 있고, 속도를 조절하는 쿠르즈 컨트롤도 있습니다.
방향을 유지하는 자율 주행 장치도 있고, 차량의 상태를 알려주는 계기판도 있습니다.
차선을 변경하는 깜빡이가 있습니다.
다른 것들은 대부분 운전자의 편의를 위한 기능입니다.
그런데 깜빡이는 운전자는 물론 주위에 있는 차를 위한 기능입니다.
옆 차선의 차가 나의 차선으로 오겠다고 신호하면
나는 속도를 줄여서 올 수 있도록 배려합니다.
내가 옆 차선으로 가고 싶을 때 신호하면 뒤에 오는 차도 속도를 줄여서 배려해 줍니다.
비상등도 있습니다. 양쪽 깜빡이가 모두 켜지는 상황입니다.
앞의 차가 비상등을 켜고 있으면 속도를 줄이고,
뒤에 오는 차를 위해서 똑같이 비상등을 켭니다.
그렇게 하면 큰 사고를 예방할 수 있습니다.
뒤에 차가 있든, 없던, 상관없이 방향을 바꾸려면 깜빡이를 켜는 습관을 익히면 좋습니다.
깜빡이를 켜지 않고, 갑자기 끼어들면 위험하기도 하고, 짜증이 납니다.
인간관계에서도 깜빡이는 중요합니다.
깜빡이가 필요한데 지켜지지 않는 곳이 있습니다.
어디일까요? 저는 국회에서 그런 모습을 종종 봅니다.
증인을 불러놓고 질문하면서 증인의 답변을 잘 듣지 않으려고 합니다.
증인이 답변하는데 큰 소리로 윽박지르기도 하고, 야단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의원이 질의 하는데, 상대 당의 의원이 끼어들기도 합니다.
차가 엉켜서 교통의 흐름이 엉망이 되는 것처럼
국회의 운영이 난장판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초등학교 학급회의 보다 못하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합니다.
회의할 때도 가끔 깜빡이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목소리가 큰 분들이 있습니다. 오랜 경험과 연륜이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회의 중에 가끔 안타까운 때가 있습니다. 그분들은 이런 이야기를 하곤 합니다.
“예전에 해 보았는데 안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도 변하지 않습니다. 힘만 들고 효과가 없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분위기가 가라앉기 마련입니다.
왼쪽 깜빡이를 켜고, 오른쪽으로 방향을 돌리는 것 같습니다.
그럴 때면 진행자는 방향을 정해주면 좋습니다.
먼저 충분히 이야기를 듣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면 좋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인들에게 방향을 정해주고 있습니다.
코린토인들 사이에 차가 엉켜서 오도 갈 수 없는 것처럼 분란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이야기를 이렇게 합니다.
“나는 심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자라게 하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니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자라게 하시는 하느님만이 중요합니다.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나 같은 일을 하여,
저마다 수고한 만큼 자기 삯을 받을 뿐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협력자고, 여러분은 하느님의 밭이며 하느님의 건물입니다.”
이보다 확실한 방향 설정은 없습니다.
이런 방향을 망각하면 공동체에 갈등과 분열이 생기곤 합니다.
성직자는 파수꾼이 되어야 합니다.
성직자는 등대지기가 되어야 합니다.
파수꾼은 악의 세력이 들어오지 못 하도록 말씀의 등불을 높이 들어야 합니다.
성직자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수도자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어야 합니다.
수도자는 이 세상에서 천상의 삶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수도자의 침묵과 기도에서 믿음의 향기, 희망의 향기, 사랑의 향기가 나와야 합니다.
교우들은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교우들은 말과 행동으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공동체를 키우는 분은 하느님이심을 늘 명심하면 좋겠습니다.
윤동주 시인의 ‘서시’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시몬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심
조욱현 토마 신부
복음에서 병의 치유는 하늘나라의 삶을
이 지상에서 이미 조금 체험하게 하여 주시고,
당신이 참된 구원을 주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분임을 알려주시는 행위이다.
예수께서는 시몬의 집에 가셔서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있는 것을 보셨다.
예수께서는 가까이 가셔서 열을 꾸짖으시자, 열이 가셨다고 한다.
이것은 예수께서 하느님으로서 모든 것을 주재하시고 다스리신다는 증거이다.
우리도 모두 죄의 열병을 앓고 있다.
성내는 열, 죄악과 불륜이라는 열병의 종류도 많다.
이러한 열병들을 주님을 가까이하면서 치유 받을 수 있다.
예수님을 모시고 우리의 손을 잡아 주십사고 간청하자.
그러면 우리의 열병이 곧 가실 것이다.
우리가 머리와 가슴으로 그분을 모시면
그분은 우리 안에 있는 쾌락의 열을 식혀주실 것이다.
그런 다음 우리를 일으켜 세우시고, 당신을 기쁘게 해드릴 일을 할 수 있도록
영적인 것들도 강하게 만들어 주실 것이다.
예수님의 손을 잡도록 하자.
그분 손이 우리를 마음의 병과 마귀의 사나운 공격에서 해방해 주시기를 청하자.
베드로의 장모는 예수님의 명으로 병이 완치되었다.
“그러자 부인은 즉시 일어나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39절)
자신의 병이 예수께서 베푸신 은혜로 낫게 되자,
즉시 일어나 예수님과 주위 사람들에게 봉사했다.
하느님께 은혜를 입는다는 것은 우리가 더욱 봉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부인은 건강의 회복이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일에
자신이 쓰이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았다.
부인은 즉시 실행에 옮겼다.
부인의 행동은 깊이 새겨들어야 할 것임을 명심하여야 한다.
오늘의 복음에서 이것을 배울 수 있다.
자신이 역경을 딛고 지난날보다 더 나은 생활의 처지, 학식이나 재능, 지위에 있어
더 나은 상태가 되었다면 그것은 세상에서 자기 자신이 편안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과 다른 사람들에게 더 크게 봉사하기 위해서 주어진 은혜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베드로의 장모에게서 우리는 그 표양을 본받아야 한다.
이것이 우리 신앙인의 모습이며 신앙이다.
우리의 삶이 이웃을 생각하고 더 나은 처지가 되었을 때 진심으로 봉사하며,
이 세상을 더 아름답게 만들어 가는 신앙인,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가 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가파르나움에서의 하루
박상대 마르코 신부
세례와 광야유혹 이후, 어느 안식일에 나자렛의 회당에서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여 자기 公生活의 목적과 방향을
논리적으로 선포하신 예수께서는
또 다시 안식일에 가파르나움의 회당에서
첫 공생활의 행적으로 마귀 들린 사람을 치유해 주셨다.
회당을 나선 예수께서 오늘은(아직 제자로 불림을 받지 않은) 시몬의 집으로 가셔서
열병을 앓고 있던 시몬의 장모뿐 아니라, 해질 녘에 사람들이 데려온
수많은 병자들과 마귀 들린 사람들을 모두 고쳐주신다.
오늘 복음을 어제 복음에 연결시켜 살펴보면 구마 기적과 병자치유는
모두 같은 날, 바로 안식일에 이루어진다.
이것을 두고 예수님의 ‘가파르나움에서의 하루’(4,31-41)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구약의 율법에 의하면 안식일에 ‘일’을 한다는 것은 엄연히 불법이다.
아직은 더 두고 보아야 하겠지만,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분명히 이 ‘일’을 두고 트집을 잡을 것이다.(6,2.7)
앞으로도 자주 접하게 될 예수님의 구마기적사화나 병자치유사화는
그 서술상 일관된 구조를 보이고 있는바,
① 마귀와 병자의 고백 및 상황묘사, ② 예수님의 기적적 구마 및 치유,
③ 구마 및 치유 實證, ④ 당사자와 목격자의 증언과 반응 등의 순서를 따르고 있다.
우리는 마귀 들린 사람과 질병으로 앓는 사람을 분명히 구별할 수도 있지만
사실상 같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
예수님 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갖가지 질병은 물론
천재지변까지도 마귀(악)의 다양한 작업이라 보았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열병을 앓고 있는 시몬의 장모를 향하여
마치 ‘구마예식’을 행하시듯이 ‘열이 떨어져라.’(39절)고 명령하셨던 것이다.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치유의 은혜는 그 자리에 머물지 않고
곧 이웃에 대한 ‘봉사’로 이어짐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예수님의 ‘가파르나움에서의 하루’는 마지막 날까지 연일 계속될 그분의 일상을 보여준다.
하늘나라에 대한 가르침과 구마와 병자치유가 예수님 일상의 스케줄인 셈이다.
그런데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날이 밝자 예수께서는 어디론가 따로 가셨다고 한다.
바로 ‘한적한 곳’으로 가신 것이다.(42절)
왜 그곳으로 가셨을까? 이 부분에 대하여 오늘 복음의 언급은 없지만
그분은 기도를 하시기 위하여 한적한 곳으로 물러가신 것이다.(6,16 참조)
祈禱는 루카가 특별히 선호하는 복음의 테마이다.
루카는 공관복음 작가 가운데 기도에 관한 말씀과 이야기를 가장 많이 수록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친히 기도하셨고,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셨고, 끊임없이 기도하기를 권장하셨다.
많은 부분이 루카의 고유 사료이다.
그러나 루카는 신자들의 믿음을 보존하고(22,32), 유혹을 이기며(22,40. 46),
장차 재림하실 인자를 맞이하는(21,36) 방법으로 늘 기도해야 함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놀라운 가르침을 받고 치유와 구마 기적의 은혜를 입은
동네의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늘 그들 곁에 두려고 붙잡았다.(42절)
그러나 예수님은 마냥 그들 곁에 머무를 수 없으시다.
세상의 만백성을 위한 자신의 길을 가셔야 한다.
이것이 아버지가 아들에게 원하시는 길이다.
예수님은 사람에게 속할 수 없고 오직 하느님께만 속하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입은 은혜는 하느님의 선물이요, 예수님은 하느님의 사람이신 것이다.
오늘 예수님의 가파르나움에서의 하루를 묵상하면서
나의 하루는 과연 어떤지 생각해 본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미사 끝나고 갈 때의 기분은 어때야 할까?
전삼용 요셉 신부
며칠 전에 노숙자를 위한 성남 안나의 집, 김하종 신부와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제가 김하종 신부님을 만나게 된 것은 지인의 소개를 통해서였는데,
저 자신이 가난한 사람들을 만나 봉사할 기회가 없었기에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봉사를 몇 번 하고 그만두었습니다.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노숙자들에게 밥을 준다고 그들과 대화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분들이 다 고마워하는 것도 아닙니다.
저는 사제로서 봉사하면서 영광을 추구했는지도 모릅니다.
같이 봉사하는 분들이 오래되었다고
자기 자리에서 텃세를 부리는 것처럼 느끼기도 하였습니다.
숙달되지 못한 저는 약간 도움이 안 되는 것처럼 행동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봉사가 금방 지쳐버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김하종 신부는 어떻게 40년 가까이 그런 봉사를 이어가며
“나는 봉사할 때 가장 행복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며칠 전에도 노숙자들이 싸워서 말리다가 주먹으로 가슴을 한 대 맞았다고 합니다.
얼마 전에는 노숙자에게 손을 물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일주일에 여덟 번 그들의 신고로 경찰서에 가기도 하였습니다.
마음이 더 아프다고 합니다.
‘내가 몇 년 동안 먹을 것을 주었는데….’
저와 김하종 신부님의 차이는 이것입니다.
저는 봉사하는 목적을 제가 정한 것이었지만,
김하종 신부님은 사명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기도로 그 사명을 되새기고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은 많은 병자를 고쳐주시고
악령을 쫓아내시다가 새벽에는 혼자 기도하셨습니다.
군중이 찾아와서 떠나지 말고 더 머물러달라고 청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기다렸다는 듯이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파견’입니다. 기도는 파견받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파견받으면 봉사와 사랑에 지치지 않습니다. 자기 영광을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프리카에서 일하던 한 선교사가 여러 해 동안 수많은 열정을 쏟았음에도
아무 선교의 열매를 거두지 못하였습니다.
그가 고향으로 돌아오는 배에는, 휴가를 얻어
아프리카에서 사냥하고 돌아오는 미국의 대통령이 타고 있었습니다.
배가 샌프란시스코항에 도착하였을 때 은은하게 울리는 군악대들의 예포 소리와 함께
대통령을 맞이하기 위하여 수많은 사람이 부둣가에 나와 있었습니다.
배에서 대통령이 내려올 때 거기에는 붉은 주단이 깔렸고 많은 사람이 대통령을 맞이하였습니다.
대통령이 지나가자 붉은 주단은 걷히고 군악대의 나팔 소리도 멎었습니다.
그 뒤를 선교사 홀로 고독하게 내려왔습니다.
‘사냥을 갔다 오는 대통령은 저렇게 환영받는데,
큰아들과 둘째 아들 그리고 부인마저 잃고 선교하다가 돌아오는 나를
맞이하는 환영객은 아무도 없구나!’하는 생각으로,
고독감과 실패감을 동시에 느끼면서 거리를 걷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때 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내 아들아! 네가 아직 고향에 돌아온 것이 아니다.
네가 고향에 돌아오는 날 군악대의 나팔 소리가 문제가 아니라
하늘의 천군 천사의 나팔 소리와 함께 내가 맞이해 주마.
붉은 주단이 문제가 아니라 황금의 유리길을 깔고
내가 친히 너를 마중 나오마. 사랑하는 아들아 끝까지 충성하라!”
이 말씀을 들은 선교사는 크게 뉘우치고 다시 아프리카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충성을 다하였습니다.
미사 끝나고 성당 밖으로 나갈 때의 기분은 이래야 합니다.
최후의 만찬 후에 “자 일어나, 가자!”라고 하신 예수님의 모습과도 같아야 합니다.
미사 후에 ‘오늘은 무엇을 하도록 주님께서 파견하실까?’를 생각해야 합니다.
미사는 천국에서 우리가 받을 영광의 상징입니다.
모든 기도는 그렇게 끝맺어야 합니다. 그래야 기도가 휴식이 됩니다.
병고를 통해서도 하느님께 영광과 찬미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병고가 찾아와
힘겹게 하루하루를 보내시는 분들, 얼마나 고통이 크십니까? 얼마나 답답하십니까?
때로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하는 소리가 저절로 나올 것입니다.
저도 언젠가 크게 한번 아파봐서 아프다는 것이
얼마나 서러운 일인지를 뼈저리게 체험했습니다.
우선 내가 예전 같지 않다는 것, 내가 약해졌다는 것으로 인해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는지 모릅니다.
몸이 아프다 보니 평범하고 정상적인 생활도 힘들어지고 자연스럽게 열외가 잦아집니다.
기력이 떨어지고 자주 위급상황에 빠지다 보니 자주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종국에 가서는 병고를 하루하루 상해가는 내 몰골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만 봐야 합니다.
투병하느라 내가 계획했던 그 모든 것이 올 스톱 됩니다.
가장 괴로운 일은 아무래도 세상과 인간으로부터의 점점 소외되는 것입니다.
이런 환우들에게 있어 가장 간절한 바람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치유일 것입니다.
죽어가는 환자들, 불치병 환자들에게 치유란 단어처럼 반가운 단어가 또 있을까요?
이런 이유로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
가장 신경 쓰셨던 부분이 바로 치유 활동이었습니다.
우리 인간의 가장 시급한 필요성에 우선적으로 응답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루는 수제자 시몬의 집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때 마침 시몬의 장모가 심한 열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시몬의 장모! 그 둘 사이의 관계가 참으로 특별합니다.
시몬의 장모 입장에서 예수님은 미운 사람이었습니다.
사위 시몬을 빼앗아 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멀쩡한 딸을 생과부가 되게 한 원인 제공자가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이 사위 시몬과 자신을 찾아온다는 소식을 들으니
장모입장에서 열 불나게 생겼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몬의 장모에게 가까이 다가가시어 특별한 작업을 하십니다.
열을 꾸짖으십니다. 참으로 기이한 모습입니다.
그러자 즉시 열이 가셨습니다. 시몬의 장모는 즉시 일어났습니다.
그 누구도 어떻게 하지 못하던 펄펄 끓는 열까지 호통치시고 다스리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메시아 그리스도의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시몬의 장모는 조금 전까지 꼴 보기조차 싫은 예수님이었는데 즉시 태도가 바뀝니다.
정성껏 예수님의 시중을 들기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장모의 열병뿐만 아니라 억울했던 마음까지 한꺼번에 치유하신 것입니다.
시몬의 장모 열병 치유 소식이 전해지자 수 많은 환자들이 예수님께로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누구도 제외 시키지 않고
정성껏 그들의 머리에 손을 얹으시고 그들을 오랜 병고로부터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있어 가장 시급한 필요성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계시는 주님께
우리의 아픈 환부를 가감 없이 보여드리면 좋겠습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오랜 병고를 치유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기에
기쁜 마음으로 예수님께로 아가면 좋겠습니다.
끔찍한 병고 한가운데에서 매일 부르짖고 견뎌내면서,
개인적으로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병고를 통해서도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을 너그럽게 만들고, 단단한 각오를 하고,
죽기 살기로 병고와 맞서 싸워 이겨내면서,
그 병고를 통해 하느님의 승리와 영광을 드러낼 수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반대로 더 이상 어찌할 바 없는 상황 앞에서는,
그런 힘겨운 상황 앞에서도 그런 끔찍한 현실조차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끔찍한 고통 속에서도 부단히 주님 자비와 섭리의 손길에 하루하루를 맡기는 것,
그것 역시 하느님을 증거하는 일임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