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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9월 5일 연중 제22주간 목요일
제1독서 : 1코린 3,18-23
복 음 : 루카 5,1-11
1 예수님께서 겐네사렛 호숫가에 서 계시고, 군중은 그분께 몰려들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있을 때였다.
2 그분께서는 호숫가에 대어 놓은 배 두 척을 보셨다. 어부들은 거기에서 내려 그물을 씻고 있었다.
3 예수님께서는 그 두 배 가운데 시몬의 배에 오르시어
그에게 뭍에서 조금 저어 나가 달라고 부탁하신 다음, 그 배에 앉으시어 군중을 가르치셨다.
4 예수님께서 말씀을 마치시고 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5 시몬이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6 그렇게 하자 그들은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다.
7 그래서 다른 배에 있는 동료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고 하였다.
동료들이 와서 고기를 두 배에 가득 채우니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 되었다.
8 시몬 베드로가 그것을 보고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말하였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9 사실 베드로도, 그와 함께 있던 이들도 모두 자기들이 잡은 그 많은 고기를 보고 몹시 놀랐던 것이다.
10 시몬의 동업자인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도 그러하였다.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11 그들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오늘의 묵상>
안소근 실비아 수녀
베드로가 예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를 선택하셨음이 오늘 복음의 여러 부분에서 눈에 띕니다.
첫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호숫가에 계시고 군중은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어부들이 그물을 씻고 있었다면,
이 어부들은 예수님 말씀을 듣고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 주변에 모여 있는 것이 멀리서도 보였을 터인데,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은 듯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배 두 척 가운데 시몬의 배에 타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물을 내려 고기를 많이 잡은 이는 시몬이었고,
다른 배의 동료들은 아마도 고기를 잡지 않고 있었기에
그물을 올릴 때 시몬을 도와주고 시몬이 잡은 고기를 두 배에 나누어 싣습니다.
마지막에는 시몬의 동료들인 야고보와 요한도 예수님을 따라나서지만,
예수님께서 먼저 다가가신 이는 시몬이었습니다.
그 많은 고기를 보고 베드로는 놀라고 두려워 예수님께서 떠나 주시기를 청합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떠나가시지 않고 베드로를 당신 곁에 있도록 부르십니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루카 5,8).
“두려워하지 마라”(5,10). 어쩌면 이 말씀이 열쇠일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부르실 때마다 “두려워하지 마라.”라고 하시지만,
사실은 늘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부르시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자신이 부르심을 받기에 합당하지 않음을 아는 사람이라야
부르심에 따라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죄 많은 인간은 두려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자신의 부당함이 아니라
그를 부르시는 분의 힘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신학생 때의 일 하나가 생각납니다.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고,
그 밖에도 못 하는 것이 거의 없어 보이는 동기 신학생이 있었습니다.
기도도 열심히 해서 기도 시간에 제일 나중에 성당 문을 나오는 친구였습니다.
아무튼 모든 점에 있어서 다른 이의 모범이 되는 친구였지요.
그런데 이 친구가 여름 방학 끝나고 개학 때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른 친구에게 물어보니, 방학 때 학교를 그만두었다고 합니다.
신학교 생활하면서 우울증으로 힘들었다면서 말입니다.
당시만 해도 우울증을 정신력이 약한 사람이 겪는 것으로 여겼었습니다.
그래서 다들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친구 정신력이 강해 보였는데 아닌가 보네.”
정신 질환은 나약한 사람이 앓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본인이 의지를 세우면 얼마든지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 친구는 결코 나약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본인이 의지를 세우려 그토록 노력했지만 결국 무너지고 만 것입니다.
지금은 우울증을 마음의 감기라고 할 정도로 흔하기도 하고
또 치료받아야 할 병으로 여깁니다. 아주 특별한 사람만 이 병에 걸릴까요?
2020년 OECD 국가별 우울증 통계를 보면,
우리나라의 우울증 유병률은 36.8%로 전체 1위를 차지했습니다.
2.5명 당 1명꼴로 우울증을 앓고 있는 것입니다.
이만큼 우리 인간은 계속해서 보호받아야 할 대상입니다.
완벽해 보이는 사람 역시 보호가 필요할 정도로 나약함과 부족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완벽한 사람을 뽑지 않습니다.
당신의 보호를 받아야 할 사람을 당신 제자로 뽑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부인 시몬을 뽑습니다.
그런데 어부로서 그렇게 능력이 뛰어났던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밤새도록 애써도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자기 직업에 대한 자부심도 없는지
목수인 예수님 말씀을 듣고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립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그물을 내리자,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됩니다.
이때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자기 기술이나 능력을 초월한 어떤 힘에 사로잡혀 두려워졌던 것입니다.
그때 깨닫게 되는 것이 자기 죄악입니다. 그래서 죄 많은 사람임을 고백합니다.
주님께서는 죄가 많다고 해서 내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죄 많은 부족함을 보시고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라고 부르십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보살핌이 필요한 존재입니다.
더욱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부르심에 곧바로 응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예수님께서는 겐네사렛 호숫가에서 시몬의 배에 타시어
군중을 가르치시고 난 다음, 시몬에게 이르셨습니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루카 5,4)
그러자 시몬이 말하였습니다.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루카 5,5)
일이 다 끝났는데도 굳이 다시 그물을 치는 일은 귀찮기도 한 일이었지만,
더 깊은 의미로, 그물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어부로서의 자신의 앎을 내려놓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고기가 없다는 것을 이미 밤새도록 확인한 그곳에 다시 그물을 친다는 것은
이미 경험을 통하여 확인한 앎을 내려놓는 일이었습니다.
고기 잡는 일에 있어서 프로였던 베드로는
그렇게 자신의 ‘앎’을 내려놓고 ‘말씀대로’을 따랐습니다.
이를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혜롭게 되기 위해서는 어리석은 이가 되어야 합니다.”(1코린 3,18)
그렇습니다.
자신이 아는 것,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맞지 않다고 여기는 것을 받아들이는 일에서 주님을 만나는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끌어올린 그물에서 많은 고기와 함께 자신의 앎에 대한 한계도 깨달았고,
무엇보다도 많은 죄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백합니다.
“주님, ~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루카 5,8)
참으로 아름다운 고백입니다.
주님 앞에서 자신이 죄 많은 사람임을 고백합니다.
그는 그물을 치기 전에는 예수님을 어떤 한 분 ‘스승’(5,5)을 만났을 뿐이었지만,
그물을 치고 난 다음에는 오직 한 분 ‘주님’(5,8)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는 그에게 진정한 인격적인 변화가 생겼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베드로의 ‘변화’는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앎’을 버릴 때 찾아들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변화는 자신이 변화의 주체가 아니라 변화되는 객체가 될 때에 오게 됩니다.
곧 변화하는 존재가 아니라 변화되는 존재가 될 때 찾아들게 됩니다.
‘변화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를 변화시키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응답을 통해서 말입니다.
그러기에 변화는 ‘하는 것’이 아니라 ‘되는 것’이요, 회개 역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에 대한 수락에 의해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앎’을 버리고 말씀을 수용할 때 생겨나는 은총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정 변화를 원한다면, 우리의 ‘앎’을 내려놓고 예수님의 말씀을 수락해야 할 일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미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더 이상 ‘나의 배’가 필요하지 않은 것입니다.
내가 이미 ‘주님의 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뜻에 따라 항해하는 주님의 배’일 뿐인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루카 5,5)
주님!
제가 민낯으로 당신을 뵙고, 진정 죄인임을 깨닫게 하소서!
제 생각을 내려놓고 제 경험을 내려놓고, 당신의 말씀을 따르게 하소서.
제 앎을 내려놓고 제 옳음을 내려놓고, 당신 말씀을 따라 그물을 내리게 하소서!
제가 변화의 주체가 아니라 변화의 대상임을 알게 하시고,
스스로 변화하는 존재가 아니라 당신으로 하여 변화되는 존재가 되게 하소서. 아멘
버리고 떠나기
반영억 라파엘 신부
어디로 떠난다는 것은 두려움인 동시에 희망입니다.
미지의 세계를 향한다는 것은 새로운 것에 적응하는 어려움이 있지만,
더 좋은 것을 기대하면 희망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길을 떠났던 아브라함,
주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길 바랐던 성모님의 모습에서
“절망 속에서도 희망”(로마4,18) 해야 한다는 믿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많은 수고와 땀을 통해 일구어 자리를 잡은 삶의 터전을 떠난다는 것은
많은 미련과 아쉬움이 있게 마련이지만,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명을 받았으면 후회가 없어야 합니다.
성직자나 수도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임지에서 더 있고 싶은데 떠나라는 명을 받고,
빨리 떠났으면 좋겠는데, 더 있으라는 명을 받기도 합니다.
영원히 살 것처럼, 그러면서도 내일 당장 떠날 것처럼 살아야 하는 것이
성직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때가 되면 자기가 움켜잡고 있던 모든 것을 내려놓을 줄 알아야 하고
떠났으면 미련을 두지 말아야 합니다.
안주하면 더 이상 성장할 수 없습니다. 가장 좋을 때 떠나야 합니다.
영광까지 누리려 한다면 욕심입니다.
엉뚱한 생각을 해 봤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아르헨티나의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료 추기경으로서
교황으로 선출되리라고 생각하셨을까?
교황으로 선출되면 다시 그리로 돌아가지 못하는데 짐 정리는 다 해놓고 오셨을까?
소지품들은 어떻게 처리하실까?
아니 추기경 관저에서 살지 않으시고 방 한 칸의 아주 검소한 아파트를 임대하여
간단한 저녁식사를 직접 해 드셨고, 버스로 출퇴근을 하며,
근검한 선교사들에게 추기경 관사를 내놓으셨다 하니
아예 정리할 것도 버릴 것도 없이 사신 것은 아닐까?
세상의 권력은 다 버리고 주님의 권위와 겸손으로 만족하셨음에 존경과 사랑을 드립니다.
시몬 베드로는 고기 잡는 어부였습니다.
어부가 고기를 잡는 이유는 생계를 유지하고 더 나은 윤택함을 누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밤새 고기를 잡으려 애썼지만 잡지 못했습니다.
실망 속에 그물을 정리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시몬은 말씀대로 그물을 내렸고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했더니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말씀대로 했더니 차고 넘쳤습니다.
순명이 기적을 낳았습니다. 믿음은 순명을 낳고 순명은 기적을 가져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기쁨보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어부가 많은 고기를 보고 두려워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지만 현실입니다.
전에는 고기만 봤는데 이제는 능력의 예수님을 볼 수 있는 눈이 뜨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하고 고백합니다.
그는 주님을 가까이 모시기에는 너무도 부족한 자신의 모습을 또한 보았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하시며
죄 많은 자의 고백을 기쁘게 받아들이셨습니다.
마침내 주님의 능력과 자비를 체험한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자기의 어부로서의 지식과 경험, 상식, 그야말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어부가 배를 놓고, 고기를 놓고 떠난다는 것은 두려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두려움을 없애주시고 사람을 낚을 사명을 주시니
절망 속에서 새로운 희망을 간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고기 잡는 어부가 아니었습니다.
인생의 목적과 의미가 바뀌는 제자로서의 길을 걸어가게 되었습니다.
이제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는 사도로 살게 된 것입니다.
떠난다는 것은 단순히 몸이 떠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내가 잡고있는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합니다.
지식이나 경험, 업적, 애착...
인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주님을 만나는 데 걸림돌이 되는 하나를 버리는 가운데 새로움을 만나길 바랍니다.
거듭나고 싶은 만큼 버려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예전에 선배들은 ‘판단력’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사제에게 필요한 덕목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거룩하시니, 사제도 거룩함을 지향하며 성덕(聖德)을 쌓아야 합니다.
복음을 선포해야 하니 지덕(知德)을 쌓아야 합니다.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하는 체덕(體德)을 쌓아야 합니다.
라틴어로 이 3가지 덕은 모두 S로 시작합니다. 그래서 선배들은 3S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덕목이 있는데 그것이 ‘판단력(判斷力)’입니다.
판단력은 ‘내비게이션’과 같습니다. 내비게이션은 우리가 원하는 목적지를 알려줍니다.
잘못된 길을 가면 다시 새로운 방향을 알려줍니다.
예전에 냉장고 광고 문구에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합니다.’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예전에 성탄 선물로 ‘목도리’를 하기로 했습니다. 총구역장님과 백화점엘 갔습니다.
저는 원하는 가격이 있으면 대충 사면 좋겠다고 여겼습니다.
총구역장님은 좀 더 저렴한 가격에 좀 더 좋은 목도리를 찾았습니다.
한 시간 정도 백화점을 돌아보았습니다.
그렇게 발품을 팔아서 구역장과 반장들에게 드릴 성탄 선물을 골랐습니다.
신학생 때의 기억입니다. 주일학교 교사들과 천마산으로 답사를 갔습니다.
우리는 물이 있는 곳에서 자리를 잡았습니다.
저녁을 먹고 있는데 비가 조금씩 내렸습니다. 교사들의 의견이 둘로 나뉘었습니다.
하나는 비가 곧 그칠 것 같으니 그냥 물가에서 지내자는 의견이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비가 더 내리면 위험하니 안전한 곳으로 이동하자는 의견이었습니다.
교사들은 신학생인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모두 저의 결정을 따르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냥 있으면 편하기는 한데, 비가 많이 내리면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동하면 물을 구하기 어렵고, 짐을 다시 정리하는 불편함이 있었습니다.
자리를 옮겼는데 비가 오지 않으면 ‘왜 이동했느냐’고 할 것 같았습니다.
자리를 옮기지 않았는데 비가 많이 내리면 ‘왜 이동하지 않았느냐’고 할 것 같았습니다.
자리를 옮기자고 하였고, 다행히 모두 저의 이야기를 따라 주었습니다.
비는 내리지 않았지만, 자리를 이동한 것에 대해서
모두 기쁘게 받아들였고, 다음 날, 답사를 잘 마칠 수 있었습니다.
본당 사제가 되면서 ‘판단력’이라는 선배들의 이야기를 더 깊이 생각합니다.
저의 결정과 저의 판단이 최종 결정과 판단이 되는 때가 많습니다.
제 뒤에 수정하거나, 번복해 줄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것은 비교적 판단하기 쉽습니다.
차 축성, 가게 축성, 봉성체에 대한 부탁은 시간을 정해서 약속을 잡으면 됩니다.
선거 때가 되면 후보들이 찾아와서 홍보를 부탁하기도 합니다.
성당 안에서 홍보하기는 어렵다고 이야기합니다.
다만 성당 밖에서 명함을 돌리는 건 가능하다고 이야기합니다.
며칠 전입니다. 가정 미사를 해줄 수 있는지 문자가 왔습니다.
작년에 남편이 하느님의 품으로 갔고, 1년이 되는 날이라고 합니다.
이야기를 충분히 들었고, 형제님을 위한 기일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형제님의 안타까운 죽음을 애도하는 교우들이 함께했습니다.
뉴욕에 사는 부모님이 함께했습니다.
뉴욕에서 온 부모님은 브루클린 교우들의 영상 인사를 스마트폰에 담아 왔습니다.
덕분에 반가운 얼굴을 볼 수 있었습니다.
신중한 판단이 필요한 때도 있습니다.
성전 신축이나, 성전 이전과 같은 문제는 비용도 많이 소요되고,
공동체의 의견이 나뉘어 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판단의 기준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바오로도 아폴로도 케파도, 세상도 생명도 죽음도, 현재도 미래도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판단의 기준은 하느님의 뜻입니다.
판단의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판단의 기준은 내가 원하는 만큼 상대방에게 해주는 것입니다.
오늘 갈릴래아의 어부들도 판단의 기준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물을 깊은 곳으로 치라고 하셨고, 어부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따랐습니다.
어부들은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부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 이제부터 너희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어부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겟세마니 동산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치워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예수님의 판단 기준도 ‘아버지의 뜻’이었습니다.
9월은 순교자의 성월입니다.
순교자들은 모두 신앙의 눈으로 세상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천국에서 빛나는 별이 되었습니다.
우리들 또한 신앙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좋겠습니다.
그 신앙의 눈으로 순교자들이 걸어간 길을 따라가면 좋겠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그들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쳐라.
조욱현 토마 신부
회당에서 배척당하신 예수님은 겐네사렛 호숫가에서 배에 앉으시어 가르치신다.
예수께서는 시몬 베드로의 배를 빌어
육지에서 배를 조금 떼어 그 배에서 군중들을 가르치신다.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4절) 베드로는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5절)
베드로는 자기 일생을 고기 잡는 일로 잔뼈가 굵었고,
고기 잡는 일에는 이골이 난 사람이었지만
예수님의 말씀 앞에 모든 오만을 버리고 자신을 낮출 줄 알았다.
“스승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그물을 내리겠습니다.”(5절)
베드로는 전능하신 분의 말씀을 따랐다. 그 결과 그물이 찢어질 정도였다고 하였다.
고기 잡는 일에 그렇게 경력이 있고 능력 있던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대로 따른 결과는
지금까지 자기 생애에 보지 못했던 엄청난 것으로 나타났다.
그래서 예수께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8절)
베드로는 자신의 모습이 주님 앞에 아무것도 아님을 느낀다.
자신의 죄를 생각할 때, 불결한 인간으로서
순결한 분을 감히 모실 수 없다고 생각하여 두려워한다.
그래서 그렇게 말했다. 예수님은 그에게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10절) 하셨을 때,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갔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새로운 임무를 주신다.
베드로가 자신의 오랜 경험 등에 대한 모든 미련을 버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따랐을 때,
커다란 체험을 하였듯이, 때로는 우리도 우리 자신의 고집을 버려야 할 때가 많다.
더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이 우리 자신을 비워야 하는지
오늘 복음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진정으로 우리 안에 살아있는 하느님의 말씀,
생명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살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그래서 우리의 삶 속에서도 항상 말씀이 강생하는 삶이 되도록 하여야 한다.
말씀을 강생시키는 삶, 여기에서 근본적인 우리의 변화를 가질 수 있다.
베드로와 같이 자기 생각이나, 고집, 고정관념을
주님의 말씀 앞에 모두 버렸을 때, 기적을 체험했듯이,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하느님을 체험케 하고
하느님 안에 자녀로서의 기쁨과 구원을 체험하게 해줄 것이다.
우리 안에 강생하시는 말씀이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삶을 열심히 노력하여야 한다.
사실은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형제 여러분, 아무도 자신을 속여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가운데 자기가 이 세상에서 지혜로운 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가 지혜롭게 되기 위해서는 어리석은 이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자신을 속이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는 흔히 남을 속이는 것만 반성하는데
어쩌면 남을 속이기에 앞서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이기보다 자기를 속이는 경우가 더 많기에,
이것을 먼저 그리고 더욱더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자신을 속입니까?
자기를 잘못 생각하는 것과 더 나아가 자기를 잘못 믿는 것입니다.
그 한 예로 오늘 바오로 사도는 자기가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가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기를 속이는 거라고 지적하는 것입니다.
사실 자기를 속이는 사람이 많아서 소크라테스도 ‘너 자신을 알라’고 했지요.
자기가 그리 지혜롭지 않다는 것을 알라는 것이요,
모르는 것이 얼마나 많은 사람인지를 알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자신을 그렇게 아는 것에서 더 나아가 믿기까지 합니다.
이것을 일컬어 자신감(自信感)이라고 하는데
그런데 이 자신감이라는 것을 요즘 말을 빌려서 평하면 근자감,
곧 근거 없는 자신감입니다.
이 자신감이 어떤 때 하느님을 믿지 않고 자기를 믿게 하고,
자기가 어리석은 줄을 모르고 지혜롭다고 믿게 하고,
심지어 불행한 줄을 모르고 행복하다고 믿게 합니다.
그런데 오늘 바오로 사도는 더 심각한 자기 속임에 관해서 얘기합니다.
자기가 모든 것의 주인이라거나 자기가 최고라고 생각한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이렇게 곧 묘하게 얘기합니다.
“사실 모든 것이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바오로도 아폴로도 케파도, 세상도 생명도 죽음도,
현재도 미래도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것입니다.”
왜 이렇게 얘기합니까?
사실 프란치스코의 말대로 우리 것이란 하나도 없지 않습니까?
모든 것이 다 하느님 것이고 내 것이란 하나도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는 코린토 공동체가 바오로파니 아폴로파니 하고 갈라졌는데
사실 바오로 자기도 그리고 아폴로나 케파도 다 하느님 도구일 뿐이고,
자기들은 코린토 공동체를 하느님 공동체가 되도록 파견된 도구들이니
자기들은 코린도 신자들 여러분의 것이라고 얘기하는 겁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알아야 할 것이 있다고도 얘기하는데
모든 것이 여러분 것이지만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느님 것이라는 점도 알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사실 모든 것이 내 것이지만
더 엄중한 사실은 모든 것이 하느님 것이고,
나를 포함하여 모든 것이 다 하느님 것입니다.
사실 여러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나 없으면 아무것도 없는 것이니
내가 세상에서 제일 중요하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리고 내가 사라져도 세상은 그대로 있으니
나라는 인생이 허무한 것도 또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은 하느님을 위해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이니
모든 것이 다 하느님 것이라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니 내가 소유한 것 내 것이지만 실은 하느님 것이고,
내 생명도 지금 내 것이지만 실은 하느님 것이라는 것도
사실임을 우리는 알아야 하고 또 믿어야 할 것입니다.
성소(聖召)의 여정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우연(偶然)은 없다, 모두가 은총(恩寵)이다”
우연은 없습니다. 모두가 은총입니다.
모두가 성소의 여정 중에, 섭리 은총중에 살아갑니다.
이를 깨달아 아는 것이 지혜요 겸손입니다.
이런 깨달음에서 저절로 샘솟는 하느님 찬미와 감사입니다.
인간 무지와 허무에 대한 답도 이런 깨달음입니다. 성소의 여정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살아있는 그날까지, 죽는 그날까지
성소의 여정, 부르심과 응답의 여정에 충실해야 합니다.
결코 삶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넘어지면 일어나 다시 새롭게 시작하는 파스카의 삶이 답입니다.
넘어지는 것이 죄가 아니라 자포자기 절망으로 일어나지 않는 것이 큰 죄입니다.
다음 옛 현자의 말씀이 성소의 여정에 도움이 됩니다.
“바르지 않은 길에서 멈출 줄 아는 사람이 헤매지 않고 길을 걸을 수 있다.”<다산>
“만족할 줄 알면 욕됨이 없고, 멈출 줄 알면 위태롭지 않아서 오래 갈 수 있다.”
삶이 바쁘고 힘들 때, 멈춤 줄 아는 것도 참 중요한 삶의 지혜입니다.
오늘 복음이 영적 상징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주님의 고기잡이 기적과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시는 과정 중에서 많은 깨달음을 얻습니다.
주님께서 고기잡이 기적을 일으키시고
제자들을 부르시는 과정이 우연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섭리 안에 이미 자리 잡고 있음을 봅니다.
주님의 은총이 선행하고 있음을 봅니다.
예수님께서 어부 시몬의 배에 오르실 때
이미 예수님은 시몬을 점찍어 뒀음이 분명히 감지됩니다.
우리보다 언제나 한발 앞서 가시는 주님입니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오늘 지금 여기 내 삶의 자리가 삶의 의미와 기쁨을 잡아 끌어올릴 깊은 데입니다.
시몬의 즉각적인 대답입니다.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 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밤새 노력 했지만, 허무와 무의미만 가득 길어 올렸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공허의 텅 빈 가슴을 무엇으로 채울 수 있을런지요!
코헬렛 고백처럼 평생을 살아도 헛되고 헛된 삶일 수 있습니다.
더불어 떠오르는 시편입니다.
“주께서 집을 아니 지어 주시면, 그 짓는 자들 수고가 헛되리로다.
주께서 도성을 아니 지켜주시면, 그 지키는 자들 파수가 헛되리로다.
이른 새벽 일어나 늦게 자리에 드는 것도,
수고의 빵을 먹는 것도 너희에게 헛되리니,
주님은 사랑하시는 자에게, 그 잘 때에 은혜를 베푸심이로다.”(시편127,1-2)
주님이 빠진 삶은 헛된 삶이요,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자에게 주시는 단잠의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무지와 허무에 대한 답도 주님뿐임을 깨닫습니다.
시몬은 겸손하고 지혜롭게도 순종을 택했고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았고
두 배에 가득 채우니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 됩니다.
놀라운 은총, 충만한 행복입니다.
시몬 베드로의 즉각적인 고백이 평생 묵상할 내용으로 참 깊은 의미를 지닙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주님 거울에 환히 드러난 죄로 얼룩진 내면을 본 시몬입니다.
'스승'이자 '주님'인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주님을 만났을 때, 성인들의 공통적 반응이 죄인이라는 자각입니다.
아브라함(창18,27), 욥(42,6), 이사야(이6,5)의 체험도 이와 흡사합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날 때 죄로 얼룩진 참나의 얼굴을 보고
즉각적인 회개와 더불어 겸손한 마음에 참나의 얼굴을 회복합니다.
시몬뿐 아니라 모두가 놀랐고 주님의 위로와 격려가 뒤따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그들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성소의 여정이라 했습니다.
부르심과 응답은 단번에 끝난 듯하지만, 평생 하루하루 날마다 계속됐을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와 쌍벽을 이루는 사도 바오로는 가톨릭교회의 양대 기둥입니다.
오늘 제1독서 코린토 전서 말씀은 주님을 만난 바오로의 고백입니다.
인간의 지혜가 어리석음이며 참으로 지혜롭기 위해서는
자기를 텅 비운 어리석은 이가 되어야 한다는 체험적 고백에 공감합니다.
지혜롭다는 자들의 허황됨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주님입니다.
대우(大愚)이자 동시에 대지(大智)의 역설적인 바오로 사도임을 깨닫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주님을 만난 깨달음의 절정을 나눠줍니다.
“아무도 인간을 두고 자랑해서는 안 됩니다. 사실 모든 것이 여러분의 것입니다.
바오로도 아폴로도 케파도, 세상도 생명도 죽음도, 현재도 미래도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것입니다.”
대우이자 대지의 사도 바오로는 우리 모두가 목표하는 영적 최고봉의 경지입니다.
이런 깨달음이 날로 주님을 닮아 우리 모두 성소의 여정중 참으로,
지혜롭고 겸손한 삶,
너그럽고 자비로운 삶,
자유롭고 부요하고 행복한 삶,
하느님으로 가득한 참 삶을 살게 합니다.
날마다의 거룩한 미사 은총이 성소의 여정 중인 우리 모두를
대우(大愚)의 사람이자 대지(大智)의 역설적 참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아멘.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