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생각’이라는 작은 잡지 한 구석에 “운이 따르는 사람들의 공통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써 있었습니다. 잘 들어 보십시오. 그리고 형통한 삶을 누리시길 기원합니다.
1. 두려움 속으로 기꺼이 들어간다. 2. 성공에 매달리지 않는다. 3. 바빠도 잘 쉰다. 4. 체면에 연연하지 않는다. 5. 묵묵히 기다린다. 6. 열린 자세로 받아들인다. 7. 항상 긍정적인 말을 한다. 8. 창피를 무릎 쓴다. 9. 화를 잘 다스린다. 10. 스스로 이끄는 삶을 산다. 11. 불운마저 행운으로 여긴다.
한결같이 타당한 말들입니다. 성공처세술에 관한 책들의 내용들도 다들 건전하고 머리가 끄덕여 지는 타당한 것들입니다. 성경 말씀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다른 점을 찾자면, 성경 말씀은 그 출처가 하나님이라는 점입니다.
요셉이 그렇게 살았고, 모세나 다윗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믿음으로 두려움을 극복하고 미래를 향하여 나아갔습니다. 성공에 연연하지 않았고, 창피나 체면 때문에 머뭇거리지 않았습니다.
“어, 잠깐! 10번 ‘스스로 이끄는 삶을 산다.’ 틀린 말이잖아요. 신앙인은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살아야 하잖아요.”
그렇게 말할 수도 있지만, 인생은 내가 사는 것입니다.
아빌라의 성 테레사가 이런 말을 합니다. “나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 달려 있다고 여기며 기도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나에게 달려 있다고 여기며 일합니다.”
신앙인의 삶은 ‘수동적 능동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분별하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지만 어디까진 ‘내’가 살고 어떤 어려움도 헤쳐 나가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결코 일상의 삶이나 상식과 동떨어진 기괴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온 천하만물에 은혜와 기적들을 가득히 채워 놓으셨습니다. 열심히 사는 사람들을 위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것들을,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전혀 예상치 못한 도움이나 좋은 일들을 ‘행운’이라고 부르고, 신앙인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이요 하나님의 ‘기적’이라고 부릅니다.
히스기야 왕이 유다를 통치한지 십 사년 되던 해에, 앗수르의 산헤립 왕이 십팔만 오천 명의 대군을 이끌고 유다의 여러 성을 치고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였습니다. 이집트에 구원을 요청한 남왕국 유다를 완전 제압하기 위해서입니다. 히스기야는 급히 엘리아 김과 셉나를 적군에게 파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가지고 온 말은 “무조건 항복하라 그리하면 살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히스기야 왕은 굵은 베옷을 입고 여호와의 전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보내 이사야 선지자를 모셔오도록 하였습니다.
그래도 히스기야 왕은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 아는 왕입니다. 하나님과의 독대. 언제나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입니다.
히스기야 왕이 여호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룹 사이에 계신 이스라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는 천하만국의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라. 주께서 천지를 조성하셨나이다. 여호와여 귀를 기울여 들으시옵소서. 여호와여 눈을 떠 보시옵소서. 산헤립이 사자로 사시는 하나님을 훼방한 모든 말을 들으시옵소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이제 우리를 그의 손에서 구원하사 천하 만국으로 주만 여호와이신 줄을 알게 하옵소서.”(사 37:16-20)
히스기야의 간절한 기도문을 읽으며 하나님의 심정을 헤아려 봅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이 순간을 기다리고 계셨을까요?
아버지의 재산을 모두 탕진하고 마지막 살 길은 오직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라 여기며,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는 둘째 아들. 그러나 아버지는 그 망나니 아들이 집을 떠난 날부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탕자의 비유만큼 하나님 아버지의 심정을 구구절절 그려낸 것이 없습니다.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중략)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시편 51:17)
가장 좋아하고 가장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다. 이만큼 기독교의 진수를 드러낸 말씀도 없습니다. 가난하고 희망이 없을수록 탄식은 깊어지고 심령은 상합니다. 그 누구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상한 심령에서 터져 나오는 탄식으로 드리는 기도만큼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것이 없습니다.
액운을 쫓겠다고 빚을 내어 굿을 합니다. 쌀 삼백 석에 자신의 몸을 팝니다. 기우는 가게를 살리고 싶다면 십일조를 하라고 합니다.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정말 하나님 외에는 없구나.” 하는 깨달음입니다. “하나님, 이 세상 그 누구도 나를 도울 수 없으며, 내 마음을 토로할 데가 없습니다.” 하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들었던 가장 감명 깊은 설교는, 신학교 시절 한 파출부 아주머니가 하신 간증입니다. 당시 가끔 목사나 교수가 아닌 일반인들을 초청하여 설교를 들었습니다.
버스 기사인 남편이 사고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 아주머니는 남겨진 아이 셋을 데리고 힘겹게 살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기 위해서는 교회에 나가야 한다는 말에 교회를 다녔습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십일조를 내야하고 새벽기도 철야기도를 해야 한다는 말에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 아주머니는 이렇게 열심히 하는 자신을 누군가 보고 온정의 손길이나 뜻하지 않는 도움을 받을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이제나 저제나 기다렸습니다. 네 식구 사는 것으로도 부족한데 십일조와 각종 헌금으로 삶은 점점 더 어려워졌고, 노동도 힘겨운데 새벽기도 철야기도는 몸을 더욱 힘들게 만들었습니다. 어느 날 밤 철야기도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세 아이들이 어질러진 방에 이리저리 널부러져 자고 있었습니다. 얼굴에는 얼룩으로 지저분하고, 입은 옷은 너무나 초라하고 더러웠습니다. 너무나 기가 막혔습니다. 꼬꾸라져 대성통곡을 하였습니다. 그녀의 입에서는 “하나님” 소리 밖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도와달라는 말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저 하나님, 하나님 소리만 대뇌이고 있는데 어디선가 한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 내 딸아, 힘들지” 하는 소리였습니다. 갑자기 온몸에 전기가 흐르는 것 같았고 정신이 퍼뜩 들었습니다. 얼른 몸을 세워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엄마 울음소리에 놀라 잠이 깬 세 아이들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들이 갑자기 달리 보였습니다.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하는 불쌍한 아이들이 아니라, 자신을 도우라고 보낸 하나님의 천사들로 보였습니다. 그 피곤하던 몸도 새 힘으로 가득 찬 것 같았습니다.
그 이후 이 아주머니는 어찌 되었을까요? 여전히 파출부 일을 하며 살지만 그 전과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더 이상 힘들어하지 않았고, 아이들에 대해서도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한 마디로, 사는 것이 전혀 힘들지도 무섭지도 않게 되었습니다.
벌써 이십 여 년 전 일입니다. 저는 그 세 아이들도 잘 커서 열심히 살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삶을 힘겨워 하며 허덕이는 엄마가 키운 것이 아니라,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키우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3-4) 예수님의 첫 강의의 첫 말씀입니다.
가난하고 애통하는 것은 결코 복이 아닙니다. 한사코 피하려 하는 불행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면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개입” 신앙인이라면 정말 간절히 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르는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삶에 개입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개입은 징계와 무서운 심판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를 때, 하나님의 개입을 원하는 몸부림이 있고, 자신이 원하는 것만 구하는 어리석음이 따릅니다.
이미 이스라엘의 시작부터 하나님께서 개입하고 계십니다. 아니 태초부터 모든 일에 하나님께서 개입하고 계십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그 사실을 모르거나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현재 유다가 처해있는 어려움은 하나님의 개입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뜻대로 행한 왕들과 자신들의 이익만을 구하는 어리석은 종교지도자들과 백성들의 몸부림의 결과들입니다.
하나님을 만난 파출부 아주머니의 객관적인 삶은 전혀 변동이 없습니다. 다만 달라진 것은 아주머니의 태도입니다. 시각입니다. 인생관과 신앙관입니다. 그 이후 사는 것이 두렵지 않게 되었습니다.
‘행운이 따르는 사람들의 공통점’을 상기하십시오.
두려움 속으로 기꺼이 들어간다. 성공에 매달리지 않는다. 바빠도 잘 쉰다. 체면에 연연하지 않는다. 묵묵히 기다린다. 열린 자세로 받아들인다. 항상 긍정적인 말을 한다. 창피를 무릎 쓴다. 화를 잘 다스린다. 스스로 이끄는 삶을 산다. 불운마저 행운으로 여긴다. 그렇게 된 것입니다. 매일 그렇게 살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그날 밤 자신을 찾아오신 하나님을 생각하며 곧 마음을 추스릴 것입니다. 당연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며 감사하며 살 것입니다.
히스기야 왕을 찾은 이사야가 말합니다.
“왕이여 이것이 왕에게 징조가 되리니, 금년에는 스스로 난 것을 먹을 것이요, 제 이년에는 또 거기서 난 것을 먹을 것이요, 제 삼년에는 심고 거두며 포도나무를 심고 그 열매를 먹을 것이니이다.”(사 37:30)
하나님의 구원의 징조를 말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부르짖으며 하나님의 구원의 징조를 구합니다. 하다못해 짜릿한 체험, 쏟아지는 눈물을 구합니다. 꿈을 꾸거나 방언이라도 터지면 이건 완전 대박입니다. 그러나 이사야가 전하는 하나님의 구원의 징조는 그저 일용할 양식입니다.
쌀독을 열어보십시오. 냉장고를 열어보십시오. 내일 먹을 것이 있습니까? 있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징조입니다.
세상이 달라졌다고요? 보험도 있어야 하고 모아놓은 재산도 있어야 한다고요? 집도 있고 차도 있어야 한다고요? 아닙니다.
쌀독과 냉장고에 먹을 것이 있고, 그것을 하나님의 구원의 징조로 알고 감사하며 미래를 향하여 나가는 사람들은 반드시 하나님의 기적을 볼 것입니다.
“유다 족속 중 피하여 남는 자는 다시 아래로 뿌리를 박고 위로 열매를 맺히리니, 이는 남는 자가 예루살렘에서 나오며 피하는 자가 시온에서 나올 것임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이다.”(사 37:32)
일용할 양식을 하나님의 징조로 아는 사람들의 미래에 관한 예언입니다. 그 사람들은 하나님께 뿌리를 박은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은 어떤 경우에도 어떤 방해가 있어도 반드시 열매를 맺습니다. 내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이 이룹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느니라.”(요 15:5)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고별 설교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경우에도 상황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내가 하나님께 뿌리를 박고 있느냐, 포도나무에 달려 있느냐를 묻고 계십니다.
기도를 마친 히스가야와 유다 백성들이 본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여호와의 사자가 나가서 앗수르 진중에서 십 팔만 오천 인을 쳤으므로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본즉 시체 뿐이라.”(사 37:36)
하루 밤 사이에 십팔만 오천 명이 죽어버린 것입니다. 사실일까? 네 사실입니다. 기원전 480년에 활동한 그리스 역사가 헤로토투스도 이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와는 100여년 남짓의 시차가 있을 뿐입니다. 헤로토투스는 앗수르 군대의 몰살을 페스트에 의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몰살의 원인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 중 하나는 괴상하게 흐르는 오늘날 기독교의 무속화를 멈추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와 관계하십니다. 당연히 우리들의 이성과 상식을 존중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읽을 수 있는 성경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셨고, 육신을 입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이상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따뜻하셨고 밝으셨고, 매력과 감성이 넘치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셨습니다.
한 해를 되돌아 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닌 게 무엇이며, 하나님의 기적이 아닌 게 무엇입니까? 꼭 내가 미워하는 사람이 없어져야 하고 북한군이 십팔만 오천 명이 죽어야 하고 내 일이 일사천리로 풀려야 기적입니까?
365일 중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행한 일이 얼마나 되며 몇 시간이나 됩니까? 언제나 머뭇거리며 불안해하며 걱정 근심으로 지새는 우리, 한편으로는 자기 자랑이나 늘어놓으며 생색으로 지새는 우리들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여전히 잘 먹고 잘 살고 있습니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 126:6) 감사는 기적을 부릅니다. 더 큰 감사는 더 큰 기적을 부릅니다.
첫댓글 신우인 목사님 말씀에 은혜 많이 받고 있습니다^^ 많이 올려 주십시요^^;;;
sahl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