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이입처설 - 존재와 법
불교의 이해와 실천-이중표 / 미주현대불교제공
지난 시간에는 부처님이 존재의 문제를 ‘무엇이 있는가’의 문제에서 ‘어떻게 그러한 존재로 인식하게 되었는가’의 문제라는 새로운 차원으로 전환하셨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오늘은 어제 살펴 본, “나는 세간과 다투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잡아함 37경]의 내용을 중심으로 ‘어떻게’의 문제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를 이야기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부처님은 “세간의 지혜 있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는 것은 나도 있다고 말한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우리는 눈이나 귀, 코, 혀, 몸 등으로 보이거나 만져지면 그것을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보는 눈, 귀, 코, 혀, 몸 등도 또한 있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을 불교에서는 색色이라고 부릅니다.
세상에는 이런 것만 있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꽃을 보면 아름답게 느끼고, 쓰레기를 보면 더럽게 느낍니다. 이렇게 느끼게 되면 아름다운 것과 더러운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아름다움과 더러움을 느끼는 것도 있다고 말합니다. 불교에서는 이렇게 느끼고 느껴지는 것을 수受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어떤 일은 옳다고 생각하고 그르다고 생각하고, 하고 싶다고 생각하고 하기 싫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생각하게 되면 우리는 옳은일, 그린일, 하고 싶은일, 하기 싫은 일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런 것을 생각하는 것도 있다고 말합니다. 불교에서는 이렇게 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과 하고 싶은 일 등을 행行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이렇게 보이고, 느껴지고, 생각되고, 하고 싶은 것들을 인식합니다. 이렇게 인식하게 되면 인식되는 것이 있다고 말하고, 인식하는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불교에서는 이렇게 인식하는 것과 인식되는 것을 식識이라고 부릅니다.
이밖에 우리가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색, 수, 상, 행, 식을 오온이라고 부르면서 오온五蘊은 일체법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같은 오온을 ‘있다’고 말합니다. 어떤 불교교리 해설을 보니까 “오온은 세계와 인간을 구성하는 요소다”라고 하면서 “인간은 오온이 일시적으로 화합해 있는 존재다”라고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아비달마 불교의 해석에 바탕을 둔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나는 오온을 이렇게 설명하는 것은 크게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오온을 그렇게 이해한다면 불교는 외도들의 요소설, 즉 적취설積聚說과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부처님도 오온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부처님이 있다고 하신 것은 그냥 “오온이라는 존재가 우리의 인식과는 상관없이 외부에 실재하고 있다”는 생각에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은 “오온은 무상하고, 괴롭고, 변하는 것으로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오온이 외부에 실재하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오온은 우리에게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모습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인식되고 있는 오온은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인식되는 오온은 항상 이런 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온과 같은 존재가 우리의 외부에 실재한다고 믿습니다. 세계와 자아가 외부에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되도들은 모두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영원한가 무상한가, 자아는 영원한가 일시적인 존재인가, 여래는 죽은 후에도 영원히 존재하는가 죽으면 우리와 마찬가지로 그만인가 등의 의문을 중요한 문제로 생각하고 저마다 각기 다른 견해로 대립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일시적으로라도 변화하지 않고 외부에 머물고 있는 오온은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세간의 지혜 있는 사람은 변화하지 않고 머물고 있는 오온은 없다고 말하고 나도 그런 오온은 없다고 말한다.”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부처님이 깨달은 것은 바로 이렇게 ‘세계와 자아’가 우리에게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이것이 세간이며, 이것을 부처님은 오온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오온이 바로 세간이며 세간법인 것입니다.
모든 존재는 우리에게 인식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인식되고 있는 것을 불교에서는 ‘법(法)고 부릅니다. 우리가 존재라고 부르는 것을 부처님은 법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제법개공諸法皆空, 만법귀일萬法歸一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제법개공은 ‘모든 존재는 비어있다’고 해석하고, 만법귀일은 ‘모든 존재는 하나로 돌아간다’고 해석합니다. 이러한 해석은 ‘법’을 ‘존재’의 의미로 이해한 것입니다. 그러나 법을 이런 의미로 이해하면 불교는 많은 오해를 받게 됩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부처님은 세상이 없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모든 존재는 비어 있다고 말하면 불교는 세상을 허무하게 보는 허무주의라고 오해를 받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법을 존재라고 해석하는 것을 반대합니다.
물론 법은 우리가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에 대한 부처님의 표현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이 존재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법이라는 말을 사용하신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존재를 산스크리트어로는 ‘bhava’라고 합니다. 그리고 법은 산스크리트어로 ‘dharma' 라고 합니다. 존재를 의미하는 bhava라는 말이 있는데 굳이 dharma라는 말을 사용하시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요? 존재라는 말은 우리와는 상관없이 외부에 있는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연기법에 의해서 본다면 우리와 상관없이 외부에 존재하는 것은 인정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존재라는 말을 사용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있는 것’을 dharma라는 말로 표현했을까요? dharma라는 말의 본래 의미는 법칙. 진리이지만, 인도의 여러 사상가들은 이 말을 각기 특수한 의미로 사용했기 때문에 그 의미가 매우 많습니다. 예를 들어 자이나교에서는 dharma를 ‘운동의 원리’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불교에서도 dharma는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됩니다. 가장 큰 의미는 ‘불교의 진리’를 의미합니다. 여법하다, 정법이다라고 말할 때의 의미는 진리의 의미입니다. 그런가 하면 불교의 계율을 dharma라고도 합니다. ‘부처님 법대로 살아가자’ ‘불법에 어긋난다’라고 할 때의 법은 계율을 의미합니다.
마지막으로 어떤 사물이나 사실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십이입처, 십팔계, 오온, 사대, 등을 모두 법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입니다.
이렇게 사물을 부처님이 존재라고 하지 않고 법이라고 한 이유를 알기위해서는 육근의 의와 육경의 법의 관계를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법은 의의 대상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법’이라는 말은 일차적으로 ‘의’의 대상이라는 의미를 갖기 때문입니다.
육근은 우리의 인식기관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육경은 우리의 인식기관을 통해 인식되는 대상을 의미합니다. 육근 가운데 안.이.비.설.신 오근을 우리는 감각기관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들 오근은 각기 그 인식의 대상이 다릅니다. 눈은 색을 보고, 귀는 소리를 듣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사과를 인식한다고 합시다. 눈은 사과의 빛깔과 모양을 인식하고, 코는 향기를 인식하고, 혀는 맛을 인식하고, 몸은 단단한 것을 인식합니다. 이렇게 우리의 감각기관은 각기 다른 경계를 대상으로 활동하면서 각기 다른 내용을 인식합니다. 그렇다면 붉은 빛의 둥글고 단단한, 향기롭고, 달콤새콤한 맛의 사과를 인식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눈은 색만을 인식하기 때문에 눈이 이 같은 사과를 인식한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눈을 감고도 사과를 먹어보면 그것이 사과라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혀가 사과를 인식한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먹어보지 않고 보기만 해도 우리는 그것이 사과라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오근은 각기 자신의 경계만을 인식하고 있을 뿐, 다른 경계는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색과 향과 맛을 가지고 있는 사과’라고 존재를 오근의 어떤 것도 인식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과를 인식하는 것은 오근 이외의 다른 것이라고 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중아함 [대구치라경]을 보면 사리불은 구치라에게 이런 문제에 대하여 묻고 있습니다.
"현자 구치라여, 오근은 각기 다른 경계를 상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안근과 이비설신근은 각각 자신의 경계만을 인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오근은 각각 다른 경계를 상대로 활동하여 안근과 이비설신근은 각각 다른 자신의 경계만을 이식하는데, 오근이 개별적으로 인식한 것을 모두 다 경계로 인식하는 것은 어떤 것이며 그 경계가 의지하고 있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구치라가 대답했다. "오근이 개별적으로 인식한 내용을 모두 다 경계로 인식하는 것도 의 이며 그 경계가 의지하고 있는 것은 의이다."
사리불이 눈으로 본 색과, 귀로 들은 소리와, 코로 맡은 향기 등을 종합하여 하나로 통일시켜 인식하는 기능은 무엇인가를 묻자 구치라는 그것이 바로 의근이라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 경이 매우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함경]에서 육입처에 대한 설법은 많지만 육근의 문제를 다루는 경은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경에서는 육근을 매우 구체적으로 거론하고 있을 뿐 아니라 육근과 육경의 관계를 보여주고 있고, 또 의와 법의 의미를 알아볼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경의 마지막에 오근이 개별적으로 인식한 내용을 종합하여 대상으로 취하고 있는 것이 의이고, 그렇게 종합된 내용으로서의 법이 의지하고 있는 것이 의라고 하는 말은 육근과 육경의 관계가 어떤 것이며, 의와 법이 어떤 것인지를 알려주는 매우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우리가 이 경에서 이런 점에 주목한다면 부처님이 '있는 것'을 존재라고 하지 않고 '법'이 라고 하는 이유를 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결을 통해서 우리가 육근과 육경의 관계, 그리고 의와 법의 의미를 바르게 알게 되면 육근과 육입처의 관계와 차이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이해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육입처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설명하면서도 육근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육근과의 관계를 설명할 적당한 계기가 없어서 미루어왔던 것인데, 이제 그 계기가 마련되었기 때문에 법의 의미를 살펴보는 가운데 육근과 육입처의 관계와 그 차이에 대해서도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법의 의미를 알고, 육근과 육입처의 관계를 아는 것은 불교의 모든 교리를 이해하는데 기초가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말씀은 이런 것에 대한 이해의 바탕 위에서만 우리에게 바르게 전달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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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랑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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