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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1장 22~34절/모든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아브라함
이삭이 태어난 이후에 아브라함은 모든 사람에게 축복과 사랑을 받는 삶을 살았습니다. 21장이 끝나면 22장에서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사건이 나옵니다. 과연 이때 이삭의 나이가 얼마나 되었을까요? 정확한 나이가 성경에 나오지 않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추측합니다. 나뭇짐을 지고 산을 올랐다는 말을 보아 아마 청소년쯤 되었을 것이라는 설도 있고 25세가량 되었을 것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또 어떤 분은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한 나이와 같은 서른 살이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어쨌든 이삭이 재물로 바쳐지는 나이가 어린아이 때가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아버지와 함께 나뭇짐을 지고 산을 오를 정도의 성인이었습니다. 그 기간이 되기까지 성경은 다른 기록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의 말씀에서 아브라함은 주변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는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12장 2절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믿음의 삶을 시작할 때 이렇게 축복해 주셨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되리라” 하나님은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는 신실한 분이십니다. 아브라함은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도 많은 복을 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여러분들도 이러한 복을 받아 복의 근원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브라함은 당시 주변국가의 사람들에게 알려졌고 그 국가의 왕들도 그의 이름을 알았던 사실을 22절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22절에 “그때에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 32절에 보면 “아비멜렉과 군대장관 비골은 브엘세바에서 언약을 세우고 블레셋으로 돌아갔습니다.” 이들은 아브라함보다 권력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비멜렉은 아브라함보다 훨씬 큰 사람이었습니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작은 사람이 큰 사람을 찾아 가는 것이 당연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아비멜렉은 큰 사람으로서 작은 아브라함에게 찾아왔습니다. 그것도 군대 장관까지 대동하고 찾아와 조약을 체결하자고 이야기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이 무엇 때문에 자기 지역에 찾아온 한 이민자에게 찾아 가서 조약을 맺자고 제안했을까요? 그것은 아비멜렉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아브라함이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단 하나의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인격이 훌륭하거나 권력이 있거나 군사력이 뛰어나서가 아니었습니다. 아비멜렉이 볼 때 아브라함이 하는 일마다 항상 하나님이 개입한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 이렇게 아브라함에게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창세기 20장에서 아브라함과 사라가 남방으로 이동하다가 아비멜렉을 만났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사라를 누이라고 속이는 비겁한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때 아비멜렉은 사라가 정말로 아브라함의 누이인 줄 알고 자기 아내로 삼았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아비멜렉의 꿈에 나타나 ‘그 여자를 범하지 말라. 그 여자를 돌려보내라. 그 여자를 범하는 날에는 내가 너를 죽일 것이다’ (7절)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깜짝 놀란 아비멜렉은 다음날 사라를 돌려보내면서 아브라함에게 네가 어찌 나를 속여서 나를 범죄하게 했느냐고 따져 물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거짓말 때문에 이런 수모를 겪게 되었지만 한편으로 아비멜렉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 때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꿈에 천사가 나타나 그 여자를 건드리지 말라는 계시를 받고 그는 아마도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창세기 20장 17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위해 기도하자 그 집안의 닫혔던 태가 모두 열렸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모든 일을 지켜본 아비멜렉은 크게 놀라며 이런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과연 아브라함이 누구이며 무엇을 하는 사람이기에 그가 기도하면 태가 열리는가? 그를 잘못 건드렸다 가는 큰 일 나겠구나.” 그래서 아비멜렉은 22절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당신이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당신과 함께 하는군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람의 특징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란 똑똑하고 유능한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의 특징은 그가 무슨 일을 하든지,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모든 사람들, 특히 불신자들이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교회에는 정말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구나” 라는 말을 듣는 교회가 진짜 교회입니다. 저는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표적이 보여 지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가족과 친족과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모두 보기를 축원합니다.
이삭도 하나님이 함께 한 사람이었습니다. 이삭은 우물파는 데 명수였습니다(창26장) 고대시대 우물을 판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우물을 판다고 해서 물이 나온다는 보장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그것은 모험이자 큰 투자였습니다. 그러나 이삭은 우물을 파는 대로 물이 솟아나왔습니다. 하지만 주변의 사람들이 이삭의 우물을 빼앗았습니다. 이삭은 그들과 싸우지 않고 다른 곳에 가서 다시 우물을 팠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또다시 물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이 또 다시 그 물을 뺏자 또 다시 다른 우물을 팠고 거기서도 어김없이 물이 나왔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두려워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람 잘못 건드렸다 가는 큰 일 당하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출애굽을 보십시오. 사실 모세라는 사람이 별 볼일 없는 사람입니다. 에굽의 왕자였지만 지금은 살인죄로 도망하는 신세였으며미디안의 목자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모세와 함께 하심으로 말미암아 애굽에 열 가지 재앙의 큰 기적을 행했습니다. 그리고 홍해를 가르고 하늘에서는 만나가 비처럼 쏟아졌고 바위에서 물이 솟아났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모세를 보고 두려워하기 시작했습니다. 모세는 바로에게 갈 때에 사람을 끌고 가지 않았습니다. 민중들을 이용한 여론정치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담대하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갔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다른 사람의 세력을 끌어들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여론을 이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을 의지할 뿐입니다. 모세만이 아니라 여호수아에게도 하나님이 함께 하셨습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점령할 때 여리고 성이 무너져 버렸습니다. 그가 가는 곳마다 승승장구했습니다. 이것은 그의 전략이 뛰어났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셨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세상 사람들이 존경하며 그를 찾아온다는 사실을 오늘의 본문을 통해 발견할 수 있습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별 볼 일 없는 사람들이었으며 외롭고 고독한 사람이었고 쫓겨 다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구약의 예언자들을 제일 두려워했던 사람들은 당대 유력한 왕들이었습니다. 아합 왕은 엘리야를 두려워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다니엘은 예언자 가운데 가장 인상 깊은 사람 중 한 사람입니다. 그는 이방국가로 포로가 되어 잡혀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이었기에 그 나라의 왕이 그를 택하여 자기 곁에 두는 복을 누렸습니다. 그는 느브갓네살 왕뿐만 아니라 다리오 왕까지 2대에 걸쳐 국가의 서열 3위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요셉은 이방국가에 팔려갔던 사람이었고 옥살이까지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나라의 총리대신까지 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교회이며 그리스도인 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분들입니다. 세상은 그들을 보고 감동하고 감격하는 것이 진짜 교회의 모습입니다.
23절에 “그런즉 너는 나와 내 아들과 내 손자에게 거짓되이 행치 않기를 이제 여기서 하나님을 가리켜 내게 맹세하라 내가 네게 후대한대로 너도 나와 네가 머무는 이 땅에 행할 것이니라”
도대체 아브라함이 이방인이고 나그네인데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남의 나라에 들어가 사는데 그 나라 주인이 와서 “내가 네게 잘 해준 것처럼 너도 내게 잘 해 달라” 하고 부탁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특권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기독교는 그렇지 못합니다. 최근에 많은 교회에서 이상한 사건들을 일으켜 그리스도인의 체면이 땅에 떨어지는 부끄러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저는 이런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한국의 기독교와 목회자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들어내는 증거를 통해 모든 사람들에게 감동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사람은 감동을 받아야 변합니다. 물리적인 힘이나 권세를 통해서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교회의 숫자가 많다고 세상이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돈의 힘도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우리나라는 교회도 많아졌고 교인들도 아주 많아졌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이 변하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사람들이 볼 수 있을 때입니다. 적은 무리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다면 세상이 변할 것입니다. 아비멜렉은 아브라함과 동맹을 맺지 않고 살기에는 무엇인가 불안했습니다. 자기 나라 땅에 들어와 사는 한 사람, 어쩌면 별 볼 일 없는 한 사람에게 그는 장군을 대동하고 찾아가서 자신과 동맹을 맺자고 제안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세상에 영향력을 주는 아브라함을 만납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세상에 영향력을 주고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24~26절에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맹세하리라 하고 아비멜렉의 종들이 아브라함의 우물을 빼앗은 일에 대하여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책망하매 아비멜렉이 이르되 누가 그리하였는지 내가 알지 못하노라 너도 내게 고하지 아니하였고 나도 듣지 못하였더니 오늘이야 들었노라”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찾아온 이유 중 하나는 어떤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자기의 종들이 아브라함의 우물을 약탈해 갔다는 사실을 알고 하나님이 두려워 아브라함에게 찾아왔던 것입니다. 우리는 24절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의 유연성을 발견합니다. 아비멜렉은 이방인이며 이방인의 왕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택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이방인과 계약을 체결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주저함 없이 계약을 합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후손들인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개로 취급했고 같이 음식조차 나누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방인과 같은 자리에 있는 것도 피하며 하나님의 선민임을 자부하면서 살았는데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라함은 이방인과 함께 계약을 체결하는 일을 거리낌 없이 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방인이었던 아비멜렉의 제안을 받아들여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그는 배타적이거나 유아독존적인 고집을 부리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과 더불어. 함께 사는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이것은 신앙의 타협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신앙의 유연성이 필요합니다. 예수 잘 믿는 사람이라고 하면 세상 사람들과 어울리지도 못하는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되고 자기만 구원받은 사람인 것처럼 보이도록 행동하는 비인격적인 사람으로 비추어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실상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이 만나기를 기피하던 창녀와 죄인들과 세리들, 귀신들린 자, 저주받은 자라고 생각되던 나병환자들을 가까이 만나 주셨고 그들을 고쳐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신앙의 오만함, 배타성이 없었습니다. 그분은 누구나 만났습니다. 우리는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너무나 많이 구분하고,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정죄하는 태도를 갖기 쉽습니다. 그리고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너무나 비인격적일 때도 많습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 믿지 않게 하는 방해 요인이 되곤 합니다. 아브라함도 이방인을 배척하지 않고 받아들임으로 말미암아 그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내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환상 중에 보자기를 보았습니다(행 11장) 거기에는 불결한 짐승이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먹으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하나님이 명하셨는데도 담대하게 먹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먹으라고 하셨고 베드로는 먹지 않겠다고 하는 이런 일이 세 번이나 반복되었습니다. 결국 마지막에는 하나님께서 “내가 깨끗하다고 한 것을 네가 속되다고 하지 말라(9절)”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종교의 이름으로, 인간적인 생각으로 하나님을 제한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대한민국의 하나님이시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전 우주와 온 세계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에서 선교를 하다 보면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도 봅니다. “목사님, 우리나라에도 가난한 사람, 불쌍한 사람들이 많고 할 일도 많은데 꼭 외국에 가서 선교를 해야 합니까? 좀 사치스러운 일이 아닙니까?” 설득력 있고 일리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왔던 선교사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그들의 사회에서 최고 지성인들이었습니다. 할 일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만약에 그들이 그와 같은 생각을 했다면 한국 땅에 오지 않을 것이며, 그들이 세웠던 병원도, 학교도 세워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비전과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이 땅에 왔기 때문에 우리 한국이 불과 1백년 만에 이런 기적과 같은 발전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들의 생각을 넓히길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갖기를 바랍니다.
아브라함은 25절에서 아비멜렉의 종들이 자신의 우물을 빼앗은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아비멜렉이 조약을 맺자고 제안하자 이 이야기를 툭 던진 것입니다. 분위기가 얼마나 어색하여 지겠습니까? 당황한 아비멜렉은 자기는 모르는 일이라고 오리발을 내밀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사실을 밝혀 줌으로서 조약을 맺은 다음에 조약이 쉽게 파괴되는 것을 방지하려는 의도와 더불어 우물의 소유권을 분명히 하고자 한 것입니다. 우리가 잘못을 분명히 지적해 주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단지 숨기고 감추려고 한다면 나중에 더 큰 분쟁이 일어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27절에 ”아브라함이 양과 소를 취하여 아비멜렉에게 주고 두 사람이 서로 언약을 세우니라”
아브라함은 우물 사건도 있었고 더구나 아비멜렉이 직접 찾아온 상황이기에 그 빼앗겼던 우물을 다시 돌려 달라고 할 수도 있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우물 이야기를 하고 나서 오히려 양과 소를 취하여 베푸는 모습을 봅니다. 우리는 대개 물리적인 힘에 의해 계약을 하곤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억지로 계약한 사람들은 언젠가 계약을 깨고 복수합니다. 할 수 없이 하는 계약은 반드시 깨어집니다. 계약할 때는 부드럽게 해야 오래 갑니다. 아브라함은 아비멜렉과 계약을 맺으면서 그가 우물을 빼앗겼지만 그것을 문제 삼지 않고 오히려 아비멜렉에게 양과 소를 주었습니다. 작은 것을 내어 주고 큰 것을 얻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이런 뛰어난 처세술이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현재를 생각하기보다 미래를 생각하는 사람이 지도자입니다.
28~31절에 “아브라함이 일곱 암 양 새끼를 따로 놓으니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일곱 암양 새끼를 따로 놓음은 어찜이뇨 아브라함이 가로되 너는 내 손에서 이 암 양 새끼 일곱을 받아 내가 이 우물 판 증거를 삼으라 하고 두 사람이 거기서 서로 맹세하였으므로 그곳을 브엘세바라 이름하였더라”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에게 양과 소를 주면서 암양 새끼 일곱을 따로 구분했습니다. 아비멜렉이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암 양 새끼 일곱 마리로 내가 이 우물을 팠다는 증거를 삼으라” 하고 자신의 의도를 밝힙니다. 암 양 새끼 일곱 마리를 취한 이유는 완전을 상징하는 수 ‘7’이란 수를 통하여 계약의 완전성과 불변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23절) 또한 아비멜렉의 종들이 아브라함의 우물을 강제로 빼앗은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 우물은 내가 판 것이라는 증거를 확실히 해두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런 아브라함의 지혜로운 행동에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이 하고자 하는 대로 계약을 맺습니다. 이 우물이 바로 “브엘세바”였습니다. 브엘세바는 “맹세의 우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 일로 끝내지 않았습니다.
32~34절에 ‘그들이 브엘세바에서 언약을 세우매 아비멜렉과 그 군대장관 비골은 떠나 블레셋 족속의 땅으로 돌아갔고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 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원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 그가 블레셋 족속의 땅에서 여러 날을 머물렀더라’
아비멜렉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고 블레셋 족속으로 돌아갔지만 아브라함은 그곳에 에셀 나무를 심었습니다. 에셀 나무는 ‘작은 숲’ 이란 뜻을 갖고 있는 나무로 주로 시내 광야에서 서식하는 나무로서 생명력이 왕성하여 사막이나 모래 언덕이나 염분이 많은 늪지대에서도 잘 자랍니다. 아브라함이 아비멜렉과 계약을 체결하고 난 후 단단하고 생명력이 긴 에셀 나무를 심은 것은 영원토록 변함없는 은혜를 베푸시며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기념하고 또한 아비멜렉과 맺은 언약이 오래 지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였습니다. 사람은 죽지만 나무는 계속 자랄 것입니다. 이 나무를 보는 자마다 ‘양 일곱 마리로 아브라함이 우물을 판 증거를 삼았던 것’ 을 떠올릴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기념식수에 그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영생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이 우물은 영원히 자기의 것이라는 선언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에셀 나무를 심어야 합니다. 무엇을 하든지 영원한 하나님이 여기 계신다고 선포해야 합니다. 장사를 하든지 정치를 하든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무엇을 하든지 에셀 나무를 심기를 바랍니다. 무슨 장사를 하든, 어디서 일을 하든 영원한 하나님이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이방인까지 받아들이는 신앙의 융통성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신앙을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모든 족속, 모든 열방, 모든 나라로 복음을 들고 나가야합니다. 대상을 제한하지 말고 민족을 제한하지 말고 가야합니다. 그리고 그곳에 에셀 나무를 심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가는 곳마다 여호와는 영원하시다는 사실을 선포하는 여러분이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