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방울의 은총을 입어
감정문제과 경제문제가 우리의 삶을 괴롭힙니다. 감정을 잘 다룰 줄 알고 경제문제를 잘 다룰 줄 안다면 불편하고 어렵고 짜증난 일들이 많이 사라질 것입니다. 어릴 때 주의력을 집중할 줄 모르다가 공사다망한 어른이 되어 가까운 사람들을 평생 괴롭히는 인간이 됩니다. 핏줄로 이어지는 성질로 인해 자신을 괴롭히고 사랑하는 사람까지 괴롭히는 여정이 끝나질 않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사는 모습입니다. 자아존중감이 무너지고 감정의 깊은 유대가 끊어지는 수없이 부서지는 일상이 일어난다는 것도 신기합니다. 힘든 시간이 지나갔다고 하면 다시 힘든 시간이 옵니다. 일어나는 모든 일들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인다면 마음을 다해서 사랑하는 길에 접어들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을 믿고 예수님을 본받아 성령의 인도를 받아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사생활을 다 이야기하는 것이 친구인 줄 알고 자신 안의 삶을 지니지 못하고 사는 경험만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고 자랑하는 것이 거만한 삶이 된다는 것을 깨달아 알게 되면서부터는 홀로 깊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아픈 사람을 만나면 따뜻하게 위로를 주는 것이 인간의 기본기라는 것조차 모르고 살은 자신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아픈 이가 아프지 않게 되는 것이 인간이 가져야 할 양심이라는 것조차 생각하지 못하고 산게 아닌가 하는 자신을 보게 된 것입니다. 남태평양의 펜트크로스섬에서 성연이 될 때 번지점프를 하는 전통이 있습니다. 아마도 저는 번지점프를 통과한 의례를 지니지 못하고 성연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담대한 용기가 필요하고 도전이 필요하고 넓게 세상을 품을 담대함도 필요하다는 자각없이 어른이 된 제 모습이라는 생각이 엄습했습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어른이 돼서 아이들을 돌보아야 한다는 책임의식을 지녀야 한다는 뜻을 이제야 깨닫게 됩니다. “The older will serve the younger(창세 25:23). 어른이 젊은이를 섬겨야 한다.”는 하느님이 이사악의 부인 리브가에게 한 말씀입니다. 임신 전과 임신 후가 갈라지는 시점에 하느님의 말씀이 이 말씀입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어른이 아닌 젊은 사람들을 섬기는 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담긴 목적이 인간에게 담겨지는 순간입니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세상에서 하느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새로운 질서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인간은 있는 것에서 있는 것을 만들지만 (Yachar), 하느님은 없는 것에서 있는 것을 만드시는(Barah) 분이십니다. 세상의 시작은 하느님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라는 결론부터 이야기가 전개 됩니다. 결론부터 시작되는 것은 미음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인생길을 두 번 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처음 가는 인생이기에 믿음으로 가는 것입니다. 만약 그곳에 두 번째 간다하면 그 두 번째가는 것은 알았기에 가는 것입니다.
갈릴리호수는 헤르몬산의 수많은 이슬 방울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헤르몬산에서 시온산 줄기를 타고 굽이굽이 내리는 이슬같구나. 그곳은 야훼께서 복을 내린 곳, 그복은 영생이로다(시편 133:3).” 헤로몬산의 이슬방울들이 모여 갈리리호수가 된 것처럼 우리의 마음이 하느님이 주신 이슬방울의 은총을 받아 갈리리호수의 물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수없이 광야를 적셔주어 옥토를 만들어 주는 성교회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물이 있어야 마음이 맑아지고 마음이 맑아야 눈물이 흐른다. 감동없는 삶이 되지 않도록 마음의 건조주의보 싸이랜이 울린다. (이해인 시에서 “외딴 마을의 빈집이 되고 싶다”에서).”
물처럼 흘러 자신의 모난 돌을 수없이 사라지게 하여 흙이 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돌이 흙이 되는 과정이 신앙생활입니다. 64년 로마대화재를 일으킨 네로황제가 그리스도교를 박해하고 68년 네로가 죽게 됩니다. 짐승같은 사람의 이름을 가진 수인 666(묵시 13:18)이 네로황제 Nero Caesar입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느냐 안 믿느냐를 판가름하는 문제로 대두시킵니다. 구원은 짐승같은 사람을 통과해야만 다가오는 것입니다. 돌이 흙이 그냥 되질 않습니다. 속이 부서지고 외풍을 맞아야 돌이 되듯이 우리 인간도 속이 부서지고 외풍을 맞아야 흙이 됩니다. 하느님의 뜻을 이제야 깨닫습니다. “살아있다면 누구라도 자신을 키우려 하고 자신을 빛내려 하고 쓸모 있게 맞춰가지만 나, 돌은 아니다. / 돌은 키우지 않는다. 채우지도 꾸미지도 않는다. 서서히 갈라주고 나눠주며 날마다 은미하게 작아진다. / 모래가 되고 흙이 되고 그리하여 산 것들의 품이 되고 가루가루 비우고 사라지는 게 나, 돌의 소명이다. (박노해의 “돌의 고백”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