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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등포 교도소로 이감되어 미징역 생활을 하며
가장 고민하게 되는것이
나는 어느 징역으로 나가게 될까? 하는 고민이다..
양재(옷만드는곳),목공(목공예,가구만드는곳),미화(청소),직리(직원이발하는곳),구매(영치품및구매품의 입출고담당),소지(사동에서청소하고 배식하고하는일)원예 ,,,,등등 형제들이 가는곳은 다양한 직업군속으로 갈수있는 확률이 있었다..
제일 좋았다고 하는곳은
육체적인 노동이 적고 시간이 많이 곳이었다..원예 등 (시간이 오래되서 잘 기억나지 않는다.)
반면에 제일 안좋은 곳이 있기 마련이다..
그곳은 바로
취..사..장 이었다..
나는 제발 취사장만 안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생각은 보기좋게 나를 배신하고 나는 취사장으로 징역을 나가게 되었다..
이런 젠장..
처음으로 출역을 나가는날..
미징역 형들과 인사하고 취사장으로 향했다..
00아 걱정하지말어 사람사는곳이야..
넌 잘해낼거야..
건강해라..
얼마 안돼는 시간이지만 그곳 형들과도 정이 들었었나보다..
헤어짐의 아쉬움을 뒤로 하고..
취사장으로 들어섰을때 난 깜짝놀랬다..
영화속 에서 보았던..차갑고 살벌한 기운........
앞이 안보일정도로 수증기가 꽉차있고 .. 바닥은 물기가 흥건하며..
식깡 부딪히는 소리...사다리타고 올라가서 커다란 솥 (왼만한 자동차보다 큼)에서 삽같은걸로 휘젖는 모습들..
사람들의 웅성웅성 하는 울림의 소음들...
그와중에 들리는 나를 부르는 소리..
00아..00아...
그곳에 나의 영창 동기 두명이 일하고 있었다..
한명은 밥조(밥을 짓는조)
한명은 국조(국을 짓는조)
반갑기도 했고...처음 들어서는데 이름을 불러대니 정신도 없었다..
그렇게 취사장으로 배정되었다..나는 찬조 (반찬을 짓는조)
한조당 평균 대여섯명으로 이루어져 있다..
찬조로 배정되고
나는 조장에게 수감옷을 새로 받았다..
사타구니쪽이 다 찢어진 바지에...
빨간 고무장갑...
장화..
이걸 받자마자....
찬조의 일이 시작되었다....커다란 식깡(반찬을 담는 그릇)을 둘둘 돌려가며 씻는 설겆이부터 ...
각조마다 고참들은 숙련된(?) ,찬조의 경우 칼질을 하는것 같은 서서 편안히 기술력을 요하는 일..
신참들은 많은 노동력을 요하는 설겆이..반찬무치기.(무치는일이 보통이 아니다..영등포 교도소 2400명의 반찬을 무쳐야한다..
1식 3찬 (국포함) 이니 두가지의 찬을 허리를 숙여 고추가루와 갖은 양념으로 무쳐야한다...
콩나물무침이 특히 힘들다.. 삶고 식히고 무치고...)와같은 일들을 한다..
그렇게 정신없이 일이 주어졌고 정신없이 일을 하였다..
다찢어진 바지에 고무장갑 위쪽까지(거의 어깨까지 )고추가루가 묻은 옷을 입고 생활했다..
여긴...지옥이었다..처음엔 정말 지옥같았다...........
이런생활속에서..그나마 위안은 하루에 30분씩 주어졌던 운동시간이다...
2월 살을 에는 추위속에 다른 사람들은 저마다 운동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는데..
먼저온 동기 두명과 나 셋은 쪼그려앉아 하늘만 쳐다 보았다...
높은 담장과 살을 에는 추위에 한없이 한숨만 나오는 처량한 신세였다..
이런힘든 생활을 얼마나 더해야하는가......
하루하루가 너무 힘들었었던것 같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면서
내밑으로 후임도 오고 하면서 조금 아주조금 편해졌다..
20여일이 지났을까..
1996년 2월 24일 취장 반장 (과거 조양은이파 행동대장이었던..11년 징역형을 살던 형이다.)
이 점심시간중 조금 한가한 시간에 찬조 (내가 속했던조) 로 와서 나에게 말을 건다..
야 증인..너 밖에서 뭐하다 왔어?
네 전 간판 제작일을 했었습니다..
(난 방송통신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정규파이오니아를 하면서 간판 제작일을 했었다.)
그래, 내가보니 니가 좀 꼼꼼한거 같은데..
내일부터
막간으로 출근해...............................
막간? 이곳은 소위 왈왈이들이 있는곳이다..(사회로 말하면 땡보직 , 임원급이다.)
반장/작업반장/기록 (취사장으로 들어오는 모든 식료품들의 입출고 관리 및 하루 식단배식 30분전 의무과장/보안과장/소장등에게 먼저 시식할 1식 3찬을 준비 방문하여 시식토록하는 일을 하는 사람 )/문방 (출입구쪽으로 높은 교도관이 오는지 않오는지 살피는 문지기), 물차 ( 취장에서 그냥 놀다가 시간되면 뜨거운물만 수레에 받아 배식해주면 돼는 땡보직 ) 등 높은 사람들이 있는곳으로 오란다...
왜나를? 그곳으로?
따까리(왈왈이들의 식사를 차리거나 빨래를 해주는사람 , 3명이 있었음)를 시키려고하나?
했는데...기록형( 선배 증인이었음)이 외통(영등포교도소는 외부통근제도가 있어 모범수가 되면구로공단으로 출퇴근하며
의류 공장에 다녔음 - 돈도벌고,버스창으로 사회도 볼수있어서 참좋은곳) 으로 간단다.
그럼 난 기록이다...
기록이 된것이다..
24일만에..지옥같은 찬조일에서 벗어나서 더는 음식을 만들고 설겆이등 힘든일을 안해도 되는것이다..
동기들이 부러워했다..
추후 동기들은 각조의 조장이 되어 힘든 취사장이라고들 하지만 나름 편하게 지냈다.
(이중 동기한명은 정식형제가 아니구 관심자로서 중립을 지키는 경우였는데..
훗날 취장생활을 하던중 너무 많은 구타와 기합으로 인해..
이형제가 실수를 많이 하긴했다..
제일 중요한 칼도 잃어버리고 했었다..
공주교도소 (정신병자 수용소가 있다고 했음) 로 이감된다..
슬펐던 일이었다.)
좋았다.
옷이 바뀌었다..세탁에서 줄이 쫙쫙 세워진 옷으로 가져다 갈아입으란다..
탈의실 에 있던 책상이 나의 책상이 되었다..
난 고무장갑을 끼고 물과 채소를 더이상 안만져도 되었고.
힘들게 수레를 끌지 않아도 되었다..
단지..서류와 팬을 가지고 그 힘든 취사장이란곳에서 편안하게 생활만 하면 되게 된것이다..
좋았다..
그렇게 생활하게 되면서 ..
아 교도소도 생활할만 하구나 하고 느끼게 된다..
30분씩 주어지는 운동시간에 농구도 하고 달리기도 하고 근육운동도 하고 재미있게 보냈다.
그렇게 3~4개월이 지나면서 나는
취사장에 완벽히 적응했고..짬밥도 생기면서..조금씩 나의 세력이 강화되었다..
하늘같이 보였던 왈왈이 들이 더이상 하늘같이 안보이기 시작한것이다.
하루는 영치품과 구매물품을 가져오는일을 하는데..
물차를 했던 영식이라는 형이 자기가 간다고 했다..(나보다 취장을 몇개월이나 일찍 들어왔던 고참이다.)
나는 내가 할일이니 내가 간다고 했다..
- 이 일은 참 할일없는 사람들이 둘이 심심하니 서로 하겠다고하는 격이다. -
그러다..
다툼이 일어났다..
교도소에서 처음으로 양아치와 싸움이 붙었다..
선방을 날렸다 그형배에 두방을 ...
우당탕 쿵쾅..
난리가 났다..
주변에서 내가 먼저 때렸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나보고 참으라고 난리고..
경교대는 나를 끌고 취사장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취사장안에서 그 영식이라는 사람은 난리가 났다..
상욕에...방방뛰고...
난 다시 취사장으로 뛰어들어가 2차전을 벌였다..
비상벨이 울리고 반장이 소리치고...난리가 났다..
그소란중에 4명이서 나를 잡고 말리고 있는데...영식이형이 훅을 내 뺨에 적중시켰다..
퍽소리와 핏덩이 가 떨어지면서
나도 상욕을 하고 이제 앞이 안보이는 지경이됐다..
그렇게 얼마가 흘렀을까 우리둘은 둘다 제압당했고
반장이 중재를 한다..
무릎을 꿇는다..그 양아치가...
(이때 무릎꿇고 눈물을 흘리며 나에게 미안하다고 함..지금생각해보면 나에게 큰 상처 (안쪽뺨이 많이찢어짐,폭력고소를 취하한점 때문이 아닐까 싶다..)
관구주임에게 불려가 사건개요에대해 설명하고
어떻게 처리할건지 묻는다..
보고되면 둘다 추가건이란다.
없던일로 해주세요..
이일로 며칠 독방에 가게되었다.
그렇게 일단락 되며..
난 볼안쪽에 24방이나 바늘로 꿰메는 영광의 상처를 않고
(의무과에도 형제가 있었는데..그냥 살아도 힘든 징역 왜 힘들게 싸우며 지내냐는 말을 하면서 마취도 안한상태로
꿰메주었다..몰트모트의 쥐처럼 실험대상이었다 나는..그형제는 처음 꿰메본다고했다..현재는 잘아물었지만..) 취장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나마 편했던 취장이 더 편해졌다...
신기하게도
반장 - 작업반장 - 기록 -문방 -물차 - 각조조장 - 조원 (약 30명) 요렇게재구성이 되었다.
좋았다..
후임 증인형제들도 내가 있었던 시기에 최대한 공정하게 편하게 해주도록 신경써줬던것으로 기억하고있다.
소위 난 취사장에서 왈왈이로 살게됬다..
내힘으로 사회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있게된 최초의 상황(물론 교도소 사회이긴 하지만 )이었다.
그렇게 난 취사장에서 편하게 살게되어 정말 만족했었다..
취장에서 생활하면서 독방을 두세번정도 다녀온것같다..
기타의 이유로..
그와중에 서적집회도 형제들과 함께 보았고. 주의만찬 기념식도 진행했었다.
개인연구도 틈틈히 했었다..
취사장에서 기록으로 생활하다 시간이 지나 나도 1급수(모범수)가 된다..
나도 이제 외통(외부통근)으로 가야할때가 온것이다..
당시 작업반장 형이 나하고 같이 취장을 이끌어가자고 했다..
내가 나가면 너가 나갈때까지 반장하면 되지 않냐면서...고민도 많이 하고 했지만 ..
사회를 구경하고 싶었다..
외통에 가면 다시금 설겆이부터 밑바닥부터 힘들게 생활해야 한다는점이 무척이나 맘에 걸렸던 시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외통으로 가는 길을 택했다..
취장을 버리고
1996년 12월 27일 외부통근으로 향한다 (영등포교도소 12사 )
---------교도소는 사회와 같이 약육강식에 의한 지배구조를 가지고 있다..돈이 많거나..힘이 세거나..똑똑하거나...-------
그렇다고 내가 똑똑해서 , 싸움을 잘해서 취장에서 편하게 살았던건 아니다..
어쩌다 시기와 우연이 잘 맞았기 때문이리라..
이때당시 취사장인원이 평균 30명 정도였는데..
인원파악할때 순서대로 앉아서 인원수를 이야기 해야한다.
정석은 고참이 경례번호!를 외치면 갱 ~ 생 ~~!! 인사후
제일 앞에서 빠르게 하나..둘..이렇게 진행해야하지만..
경례번호 하면 다음순서가 ....생(갱이생략됨)둘,셋 , 넷 이렇게 빠르게 뒤로번호가 진행되어 하나를 세는 경우는 없었다.
이때 번호순을 잘못하거나 버벅거리면 바로 징계(구타)로 이어졌다 실수하면 처음부터 다시 해야하므로 시간이 자꾸 딜레이 된다..
신입들은 그것을 초기에 의아하게 생각하는 경우가 있었으나 그것은
인원점검 시간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빨리 이불을 깔고 누우려는 전략의 하나였다.
나는그때 경례번호 (교도관 인원점검시 제일고참이 하는 구호)를 참 많이 했었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갱~생 이라는 구호는 중립기간에 맞지않는 구호이다..다시태어나겠다는 인사인데..
씁쓸하다.
무엇에 대한 중립이었는지...
--- 가장 추억이 남는 취사장 생활을 뒤로하며...
첫댓글
취사장 힘든 걸로 악명 높았는데...
네 정말 문자그대로 개고생하는 곳입니다..
정말 중립을 아주 힘들게 보내셨네요. ㅠㅠ
96년 여름부터 는 참 재미있게 보냈습니다. 혼자 독보도 하고...사방 교도관이 하도 대파를 (자기 라면끓일때 넣으려고) 달라고 해서 몇번주다보니 자꾸 달라고해서 귀찮아서 안줬더니 교도소내에 혼자 독보하는 놈이라고 나만보이면 잡으려고 혈안이되서 그 교도관 만나면 달려서 취사장으로 도망가고 하던 재미있는 경험들도 많고요... 교도대 데리고 가고싶은곳 맘대로 가고 그랬던 시절도 있었네요..
천안 개방교도소는 가셨나요?
아니요^^
삭제된 댓글 입니다.
재밌고 시원시원한 글 잘 읽었습니다 ~^^
삭제된 댓글 입니다.
저번달 모임에서 서로 자기가 교도소 있을때의 직책이 좋았다고 우기던 기억이 나네요. ㅎㅎ
기회가 되면 나도 써봐야겠습니다.
징역 용어들이 나오니 추억이 돋네요.
쓰다보면 기억이 새롭습니다^^
아이쿠 고생하셨습니다.
나중에 소주나 한잔 적시죠...ㅎㅎㅎ
아주 멀리 계시는걸로 아는데 가능하실런지요? ㅎㅎ
삭제된 댓글 입니다.
네^^ 감사합니다^^
프리즌 영화한편 보는듯....가슴아픈 추억
지금의 모습이 너무.
좋게 보여요~~이젠 프리즈너에서
완전 해방
더 행복 가득 하시길~
굿모닝 이네요 ^^ 아침 촣은인사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