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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9월 7일 연중 제22주간 토요일
제1독서 : 1코린 4,6ㄴ-15
복 음 : 루카 6,1-5
1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가로질러 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었다.
2 바리사이 몇 사람이 말하였다.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
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한 일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4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아무도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집어서 먹고
자기 일행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5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오늘의 묵상>
안소근 실비아 수녀
코린토 신자들은 바오로 편과 아폴로 편으로 갈라졌지만,
바오로와 아폴로는 편을 가르고 세력을 모으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어떤 집단의 우두머리로서 힘과 영예를 가진 이들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사도들을 교회의 기초라고 생각하지만,
바오로 자신은 하느님께서 사도들을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으로”(1코린 4,9) 세우셨다고 말합니다.
사도가 내세울 수 있는 것이라면 오직 그가 멸시와 박해를 받았던 것,
중상을 받아도 그것을 반박하며 스스로 정당함을 밝혔던 것이 아니라
모욕을 견디었던 것, 쓰레기 취급을 받았던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것이 무슨 자랑거리일까요?
사도는 스스로 어리석은 사람이 되었다고, 자신이 약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어리석음과 약함은,
코린토 1서 1장에서 하느님의 속성으로 일컬어졌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힘으로 사람들을 굴복시키시거나 지혜로 사람들을 논박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하셨다면 인간은 자신의 힘과 하느님의 힘,
자신의 지혜와 하느님의 지혜를 겨루어 보고,
자신의 힘과 지혜를 다 써 보고 나서야 하느님 앞에서 패배를 인정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힘과 지혜가 아니라
십자가의 약함과 어리석음으로 인간에게 도전하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느님께서 자신들과는 완전히 다른 분이심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하느님을 선포하는 사도는 약하고 어리석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세상 사람들과 경쟁하지 않습니다. 아니, 어리석음과 약함으로 경쟁합니다.
누구보다 약하고 누구보다 어리석어질 수 있는 것, 그것이 사도의 힘입니다.
그런 사도에게서, 사람이 되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예언자’라는 책의 작가로 유명한 칼릴 지브란은
‘우리의 불안은 미래에 대해서 생각하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통제하는 데서 시작된다’라고 말했습니다. 크게 공감되는 말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심하다 싶을 정도로 통제하는 모습을 볼 때가 있습니다.
공부만이 아니라 취미 등의 일상생활까지 통제합니다.
자녀의 미래를 위한다고 말씀하시지만,
사실은 아이가 ‘잘못되지 않을까?’라는 불안 때문입니다.
하지만 통제할수록 더 불안해집니다.
그래서 자기의 통제로 아이가 잘못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더 엄격하게 통제하는 것입니다.
현대의 큰 질병 중 하나가 마음의 병입니다.
이 마음의 병 한 가운데에는 늘 불안이 있습니다.
단순히 미래에 관한 생각, 걱정 때문이 아니라,
나와 가족과 또 만나는 이웃을 통제하려는 욕심에서 마음의 병이 더 커지고 있었습니다.
저 역시 미래에 대한 불안이 많이 있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남보다 잠도 줄이는 등 더 나 자신을 채찍질했었습니다.
미래를 통제하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음을 이제야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미래는 나의 시간이 아닌 하느님의 섭리에 따라 움직이는 시간입니다.
결국 지금이 중요합니다. 지금을 더 의미 있게 사는 데 집중하다 보니
저절로 미래의 ‘나’가 바뀌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미래를 통제하려고 해서 굳이 불안 속에 빠질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통제가 필요한 유일한 시간은 지금. 바로 ‘현재’뿐입니다.
바리사이 몇이 예수님께 항의합니다.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
그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을 통제하려는 것입니다.
사실 바리사이를 비롯한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불안했습니다.
군중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미래가 불안해집니다.
왜냐하면 당시는 로마의 지배를 받는 상황이었고, 군중이 모이는 것을 싫어했던 로마는
군대를 보내서 예루살렘 성전을 무너뜨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 불안에 예수님과 제자들을 통제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바라봐야 할 것은 ‘지금’이었습니다.
지금 자기들과 함께하는 예수님을 알아야 했고,
지금 예수님 뜻에 맞춰서 생활해야 했습니다.
우리도 불안으로 통제를 계속해서 합니다.
자기를 통제하고, 가족을 통제하고, 이웃을 통제하고….
이렇게 불안으로 통제하려고 할 때, 지금 자기가 해야 할 것을 떠올려야 합니다.
분명히 안식일의 주인이신 주님께서는 지금에 충실한 우리와 함께해 주십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예수님께서는 앞 장면에서는 단식 논쟁을 통해 새로운 시대인 ‘당신의 때’를 알리시고,
오늘 복음의 안식일 노동을 통해서는 당신이 누구신지,
곧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루카 6,5)라고 말씀하시면서,
당신이 누구신지를 밝히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이라는 ‘밀밭’을 가로질러 가시고,
제자들은 '밀 이삭'을 뜯어 비벼 먹습니다.
이는 그들을 교회의 사도적 활동에 참여시킴을 암시해 줍니다.
그들이 바로 ‘하느님 밀밭의 일꾼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바리사이들이 트집을 잡습니다.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루카 6,2)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에서
안식일에 소경을 고치신 후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요한 5,17)
사실 그들이 트집 잡은 것은 밭의 이삭을 뜯어 먹은 윤리적인 문제가 아니라,
그날이 ‘안식일’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비는 ‘노동’을 했다고 해서 트집을 잡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안식일의 정신을 일깨우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제사 빵을 먹었던 일’을 말씀하십니다.
곧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그런 일들을 '해서는 안 되는 일'로 알았지만,
다윗이 제사 빵을 주었던 것처럼 이제 당신께서는 배고픈 제자들에게
아직 빵이 되지 않은 ‘밀’을 먹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안식일의 본질이 율법의 규범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사랑’에 있음을 밝히십니다.
사실 <탈출기>의 ‘계약의 책’에서도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음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 이레째 되는 날에는 쉬어라.
~ 그래야 계집종의 자식과 몸 붙여 사는 사람도 숨을 돌릴 것이 아니냐?”(탈출 23,12)
이처럼 ‘안식일’은 인간을 위해 주어진 날입니다.
하느님을 위하여 쉬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하여’ 쉬는 것이며, 인간에게 주어진 은총인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말하는 '해서는 안 되는 일'은 오히려 '해야만 되는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혹 '해야만 되는 일'을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하고 있지는 않는지 잘 보아야 할 일입니다.
마태복음의 병렬 구문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 않았을 것이다.”(마태 12,7)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제물을 바치는 사람’입니다.
‘사람에게 자비로운 일’,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일’이
바로 안식일 계명의 근본정신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마르코복음의 병렬 구문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마르 2,27)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루카 6,5)
주님!
이날을 새롭게 하시고, 저희를 새롭게 하소서.
거룩함을 입었으니, 거룩한 일을 행하게 하소서.
자비를 입었으니, 자비를 베푸는 이가 되게 하소서!
이날은 저희를 위하여 마련하신 날,
새 마음, 새살이 돋게 하고, 당신이 주 하느님임을 알게 하소서! 아멘.
사랑을 막을 수는 없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간혹 신자 분들이 ‘미사 참례를 어디부터 해야 영성체를 할 수 있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글쎄요? 병자 봉성체를 하게 되면 전례문은 짧지만, 참회와 복음 말씀 듣기,
그리고 주님의 기도 후 영성체 예식을 합니다.
준비된 마음으로 영성체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요.
주님을 모시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미사 참례를 하러 왔는데 시간을 잘못 알고 온 거예요.
벌써 신부님 강론도 끝나고… 주님은 모시고 싶고… 어쩌면 좋을까?
주님과 온전히 하나가 되고 싶어서 준비하고 왔건만, 주님과의 일치를 갈망하는가?
성체를 모셨다는 나의 만족을 위해서 영성체하는가?
무슨 답을 원하십니까? 여러분 가슴에 답이 있습니다.
법은 함부로 어겨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의 법은 반드시 지켜야 하고 인간이 만든 실정법도 존중해야 합니다.
법은 “공동선을 지향하면서 반포한 이성의 명령”(성 토마스 아퀴나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의 존엄성을 해하거나 억압할 때는 어길 수 있습니다.
그래야 법의 의미를 지킬 수 있고 사람도 살기 때문입니다.
법의 자구에 매여 있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법의 해석방법을, 안식일의 참된 의미를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루카6,5). 하시며 확실하게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으로부터 모든 권한을 받은 “사람의 아들”이십니다.
안식일의 휴식 규정과 해석에 관한 결정권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입니다(마태12,5-7).
자비를 거스르는 법은 어길 수밖에 없습니다.
안식일에 생명을 구해야 하는가? 아니면 파괴해야 하는가?
그 누구도 사람을 살리는 것보다 죽이는 것을 선택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법의 자구에 매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헤아려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결코 사람을 못살게 구는 법을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웃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이 규정을 지키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사실
“우리는 율법에 따른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의롭게 되려고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갈라2,16). 그리고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로마13,8).
그 어떤 법도 사랑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법을 무시해서도 안 되겠지만 법규에 얽매여 사랑하기를 멈춰서도 안 됩니다.
미사 참례를 하시면 정성껏 준비하여 성체를 믿음으로 모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바둑에서 중요한 부분은 ‘형세판단’입니다.
형세판단을 잘 하는 사람은 국면을 유리하게 끌고 갈 수 있습니다.
신문의 사설을 읽을 때 중요한 부분은 ‘맥락’입니다.
맥락을 잘 아는 사람은 시대의 징표를 정확하게 읽어낼 수 있습니다.
형세판단과 맥락의 중요성을 강조한 사자성어로 “견지망월(見指忘月)”이 있습니다.
견지망월의 유래는 이렇습니다.
“혜능은 글을 모르는 스님이었습니다. 까막눈임에도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혜능은 어느 날 한 비구니로부터 질문을 받습니다.
‘글을 모르면서 어떻게 진리를 안다는 말씀인지요?’ 그러자 혜능은
‘진리는 저 하늘의 달과 같고, 문자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다.’고 답했습니다.”
깨달음은 능력의 순서대로 오는 것이 아닙니다.
깨달음은 배움의 순서대로 오는 것도 아닙니다.
깨달음은 직책에 따라서 오는 것도 아닙니다.
깨달음은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비가 내리는 것도, 햇빛이 비추는 것도 인간의 뜻이 아니라
하늘의 뜻에 따라서 주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오시는 것도
인간의 지혜로는 도저히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세상의 눈으로 보면 어리석어 보일 수 있습니다.
세상은 자본과 물질의 원리로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자본과 물질이 추구하는 목표는 이익과 풍요입니다.
자본과 물질이 충돌하는 지점에서 폭력과 전쟁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자본과 물질이 충돌하는 지점에서 생태계의 파괴와 난민이 생기기도 합니다.
3년째 이어지고 있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이 있습니다.
1년 가까이 이어지고 있는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이 있습니다.
자본과 물질의 원리에는 인간의 생명과 인류가 쌓아온 문화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풍요의 나라, 세계 최고의 강대국인 미국에서
매년 총기사고로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치고 있습니다.
깨끗하고, 부유한 나라 일본은 후쿠시마 원전의 오염된 물을 바다로 방출하고 있습니다.
한강의 기적을 이룬 한국에서 많은 아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낙태되고 있습니다.
어제 예수님은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새 포도주는 물질과 자본이 아닙니다.
새 포도주는 자비와 사랑입니다.
새 부대는 욕망과 탐욕이 아닙니다.
새 부대는 십자가와 나눔입니다.
안치환의 노래 중에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가 있습니다.
가사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꿈을 꾸다 밤이 깊을수록 말없이 서로를 쓰다듬으며
부둥켜안은 채 느긋하게 정들어 가는지를
지독한 외로움에 쩔쩔매본 사람은 알게 되지
그 슬픔에 굴하지 않고 비켜서지 않으며
어느결에 반짝이는 꽃눈을 닫고
우렁우렁 잎들을 키우는 사랑이야말로
짙푸른 숲이 되고 산이 되어 메아리로 남는다는 것을
누가 뭐래도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이 모든 외로움 이겨낸 바로 그 사람
누가 뭐래도 그대는 꽃보다 아름다워”
시인 박노해는 ‘사람만이 희망이다.’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시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사람만이 희망이다
희망찬 사람은 그 자신이 희망이다.
길 찾는 사람은 그 자신이 샛길이다
참 좋은 사람은 그 자신이 이미 좋은 세상이다
사람 속에 들어 있다
사람에서 시작 된다
다시 사람만이 희망이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사람만이 희망인 것은 어째서일까요?
저는 사람은 하느님을 닮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시면서 ‘숨’을 넣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숨을 받아서 바른길을 갈 수 있는 종교를 만들었습니다.
아름다운 꽃을 그리며,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며,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우리는 가련한 이를 측은하게 여깁니다.
잘못한 것을 부끄러워합니다. 옳고 그른 것을 식별합니다.
겸손하게 고개를 숙입니다. 하느님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벗어나 잘못된 길을 갈지라도 뉘우치고 하느님께 돌아가면
하느님께서는 사랑으로 받아주신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다윗의 잘못을 용서하셨습니다. 다윗이 뉘우쳤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니네베 사람들을 용서하셨습니다. 그들이 회개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회개의 눈물을 흘린 베드로를 용서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닮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뉘우치는 우리를
사랑으로 받아주시기에 비록 허물이 있을지라도,
비록 잘못하였을지라도 사람은 꽃보다 아름답습니다.
우리에게 벌어진 일들이 우리들의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를 규정하는 법과 질서가 우리들의 주인이 아닙니다.
시간과 공간 그리고 역사가 우리들의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들 모두는 하느님을 닮은 소중한 존재들이고,
결국 이 모든 것들은 내가 마음먹기에 달린 것입니다.
“여러분은 믿음에 기초를 두고 꿋꿋하게 견디어 내며
여러분이 들은 복음의 희망을 저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 복음은 하늘 아래 모든 피조물에게 선포되었고,
나 바오로는 그 복음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다.
조욱현 토마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안식일을 잘못 알고 있음을 지적하신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밀밭을 지날 때 일어난 일을 전하고 있다.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었다.”(1절)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2절)
주님께서는 율법이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라는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셨고 또 그렇게 훈련을 시키셨다.
그래서 제자들은 주님께서 율법을 어기셔도 놀라지 않았다.
안식일에도 사람을 구원하시는 일에는 서슴없이 하시는 것을 늘 보았기 때문이다.
그분은 안식일에도 병자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고쳐주셨다.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데리고 가셨다는 것은
그들을 풍성하게 익은 곡식들 사이로 데리고 가신 것이다.
안식일과 풍성한 결실을 본 이삭은 큰 신비를 의미한다.
땅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았고, 하늘 씨가 뿌려진 밭은 풍성한 결실을 보았다.
인간 구원에 굶주린 제자들이 놀라운 활동으로 밀 껍질을 벗기고 알곡을 거두듯이,
그 몸에서 믿음의 빛을 향한 마음의 열매를 거둔 것이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그런 일을 해서는 안 되는 줄 알았지만,
예수께서는 새로운 은총의 선물을 주셔서 율법의 나태를 은총의 수고로 바꾸셨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1사무 21,1-6을 인용하여 이에 대해 응답을 하신다.
그 내용은 다윗과 그 일행이 보통 사람들은 먹을 수 없는
지성소의 떡을 먹었지만, 죄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죄가 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다윗과 그 일행의 배고픈 상황은 율법의 제한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며,
그 관례에 매지 않는다는 것이다.
율법의 준수보다도 현실적으로 더 절박한 인간적 요구를 채워주는 것이 우선이다.
인간이 있고 나서의 율법이지,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율법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율법 때문에 정상적인 인간의 필요가 희생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율법 그 자체를 지키는 것보다, 율법에 담겨있는 근본정신을 잘 깨달아야 한다.
율법의 근본정신은 우선 인간을 위한 사랑이 담겨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에게 양 한 마리가 있는데 그 양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다고 하자.
그러면 그것을 잡아 끌어내지 않겠느냐?”(마태 12,11)라고 책망하시면서
인간을 무시한 율법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지키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법을 위해서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해 안식일이 있고 율법이 있다고 하시면서
당신 자신이 이미 “안식일의 주인이다.”(5절) 하신다.
율법의 근본정신을 올바로 실천하는 우리 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고행과 단식은 기쁜 얼굴로 행해야만 합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가난하고 고통받는 백성들에게는
한없이 자비롭고 따뜻한 아버지로 다가가신 예수님이었지만,
율법 지상주의에 깊이 함몰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는
눈엣가시 같은 분이 또한 예수님이셨습니다.
위선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질타는 언제 들어도 유쾌, 상쾌, 통쾌합니다.
그들은 특히 안식일 규정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안식일에 해서는 안되는 규정들을 셀 수도 없이 많이 만들고 나서는,
누가 규정을 어기는지 매의 눈으로 바라봤습니다.
조금이라도 어기만 가차 없이 잣대들 들이대며 단죄하고 처벌했습니다.
그들의 과도한 가르침에 따르면 안식일에는 극히 사소한 일도 절대 금지였습니다.
미쉬나(Mishnah)에는 안식일에 금지된 39개의 주요 노동이 열거되어 있습니다.
밭갈이, 파종, 수확, 단 묶기, 타작, 키질, 선별, 분쇄,
체질, 반죽, 굽기, 글쓰기, 건축, 이사, 점등, 소등 등등.
너무나 웃기는 부분도 수두룩합니다.
안식일에 촛불을 켜는 것은 금지되지만, 촛불을 켜기 위해 이방인을 고용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손수건을 사용하는 것은 금지되지만, 손수건을 옷에 달고 사용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땅에 침을 뱉는 것도 금지요, 벽에 고정된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도 금지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얼마나 웃기는 짬뽕 같은 규정입니까?
안식일에는 약 1킬로 미터 정도까지 걷는 것은 가능하나 그 이상 걷은 것은 금지되었습니다.
엿새간 열심히 일했으니 하루 편안한 몸과 마음을 쉬라는 의미에서 제정된 안식일 규정입니다.
안식일 날 편안한 복장으로 호젓한 산길 3~4킬로 천천히 걸으면 그 얼마나 편안한 휴식이겠습니까?
그런데 안식일 규정에 따르면 큰일 날 일이었습니다.
밀 이삭을 추수하는 규정도 꽤나 까다로웠습니다.
사실 신명기에 따르면 이웃집 밀밭에 심어져 있는 밀 이삭을
그 자리에서 잘라 먹는 것은 허용되었습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낫을 대는 것을 금지되었습니다.
“너희가 이웃의 곡식밭에 들어갈 경우, 손으로 이삭을 자를 수는 있지만,
이웃의 곡식에 낫을 대서는 안 된다.”(신명기 23장 26절)
그러나 율법학자들의 잣대는 점점 수위가 높아져만 갔습니다.
그들은 배배 꼬인 시선으로 예수님과 제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현미경처럼 관찰하였습니다.
제자들이 신명기의 가르침을 위배한 것도 아닌데, 마구잡이로 들이대기 시작했습니다.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마태 12,2)
고지식한 율법주의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질타는 날카롭습니다.
“안식일에 사제들이 성전에서 안식일을 어겨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율법에서 읽어본 적이 없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마태 12, 5-8)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실수는 참으로 치명적인 것이었습니다.
고생하는 인간의 휴식을 위해 제정한 안식일 규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안식일 규정이 인간을 속박하는 규정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 만든 안식일 규정이
사람을 괴롭히고 죽음으로 몰고 가는 규정이 되고만 것입니다.
사랑과 자비, 근본정신이 사라진 법과 강제력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모릅니다.
기쁨 없는 봉사 역시 위험합니다. 자비 없는 선행의 실천 역시 부담입니다.
고행과 단식은 기쁜 얼굴로 행해야만 합니다.
공동체를 위한 희생과 헌신 역시 행복한 얼굴로 행해야 마땅합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6,5)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
우리 말 속담에 팔은 안으로 굽는다, 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 속담의 뜻은, 팔은 안으로는 굽혀도 팔꿈치 있는 바깥쪽으로는 굽히지 못하는 것처럼
사람은 누구나 자기와 가까운 사람을 편들게 마련이고 정이 쏠림은 인지상정이다, 라는 뜻입니다.
이 속담의 의미처럼 자신과 관계의 거리에 의해서 안팎을 구분 짓고,
가까운 사람들만이 곧, 끼리끼리 교류하고 관계하고 살아간다면
집단이기주의나 특정 집단의 해괴한 문화로 변질되어 버릴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제자들을 지적하는 율법 학자들 앞에서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도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은 제자들을 보고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6,2)라고
바리사이파 사람 중 몇 사람이 지적하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야단치시기보다는
오히려 제자들을 두둔하시고 감싸시며 바리사이파들을 오히려 야단치셨습니다.
혼란스러운데, 왜 예수님은 잘못한 제자들을 나무라시거나 교정시키시기보다 두둔하신 걸까요?
아무튼 이런 계기를 통해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예수님 사이에
오래도록 걸린 안식일에 대한 논쟁이 시작됩니다.
이 안식일 논쟁은 예수님의 공생활 내내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지속된 갈등이자 논쟁의 쟁점이었으며
급기야 죽음에까지 이를 수밖에 없었던 중요한 담론입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생각하는 안식일과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가르치시고자 했던 안식일은
관점의 차이뿐만 아니라 그 실행에 있어서도 엄청난 차이가 있어서
그토록 집요하고 극단적인 대립으로 치닫게 되었었죠.
이런 배경에서 성서에는 안식일 법에 얽힌
예수님과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대립이 여러 군데 묘사되어 있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안식일 법을 약자들에게만 혹독하게 적용하였고
그 결과 사람을 살리는 법이 아니라 사람을 죽이는 법으로 안식일 법을 악용하였습니다.
그에 비해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 법의 본래 의도를 회복해서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고 살리는 법으로 해석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차단된 관계를
허물고 소통하시기 위해서 그 장벽을 치우려 했던 것입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마르2,27)라는 말씀에서
예수님의 안식일 법에 대한 의도와 의지가 잘 드러나 있고,
상대적으로 이 말씀은 그 시대 종교 지도자들을 향한 도전이기도 했었습니다.
물론 그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이었지만도.
결국 예수님의 의도는 안식일 법을 포함한 어떤 법도
인생의 목적과 같이 절대화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곧 안식일 법을 포함한 율법이 아니라,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 중요하기에,
함께 계시는 하느님께 나아갈 수 없게 만드는 안식일 법을 포함한 율법에다
구멍을 뚫고 벽을 허물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점이 바로 예수님의 본질적인 사명이 아닐까, 라고 저는 믿습니다.
편안하게 숨을 쉬는 날인 안식일을 회복하기 위해선,
“이 마음은 고스란히 가라앉아 어미 품에 안겨 있는 어린아이인 듯
내 영혼은 젖 떨어진 아기와 같나이다.”(시130,2)라는 시편이 제시한 그림처럼,
하느님의 따뜻한 품에 안기어 쉬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편안하게 숨을 쉬기 위해서는 모든 것에서 벗어나
자신의 전부를 내어 맡길 수 있는 따스하고 부드러운 하느님의 품으로 나가야 하고,
그 품에 안겨서 자신이 했던 것을 즐기고 만끽하며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이 곧 안식일이라 봅니다.
주일 미사에 참석하지 않으면 죄가 된다는 소극적인 차원 보다
하느님의 품에 편안하게 숨을 쉬고 머물며,
하느님의 마음을 느끼고 체험하면서 살아왔고 살아가야 할 인생의 진정한 목적이 무엇이며,
지금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일깨워 주는 거룩한 날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 안식일의 참된 의미를 깨닫고 주일을 귀하게 여기고 지켜나갑시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6,5),
“너희는 멈추고 내가 하느님임을 알아라.” (시46,11)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