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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대관식
대관식의 아침이 밝았다. 아니. 실은 해조차도 뜨지 않았다. 해도 뜨지 않은 새벽부터 시녀들이 나를 깨웠다. 전날 잠을
설치다가 막 잠이 들었는데…
“레이아 님, 일어나셔야 합니다.”
다나엔의 뒤를 이어 시녀장이 된 브리엘이 나를 조심스레 깨웠다. 비몽사몽 하는 나에게 브리엘은 물컵을 건네 주었다.
투명한 물이지만 약간 달콤한 냄새와 톡 쏘는 시트러스 향이 나는 걸로 보아 강장효과가 있는 마법의 약물 중 하나일
것이다. 평소와 달리 의심스러운 눈초리나 물음 없이 나는 단숨에 그것을 마셨고 곧 약효가 돌기 시작했다. 흐릿하던 눈
앞이 맑아지고 띵하게 울리던 머리도 가라앉기 시작했다.
“이쪽으로…”
브리엘이 평소보다 훨씬 더 조심스러운 몸짓으로 나를 안내했고 나 또한 평소와 달리 아무런 말 없이 그들을 따라갔다.
그리고 향초로 우려낸 목욕물이 무럭무럭 김을 내고 있는 커다란 욕조가 기다리고 있는 욕실에 들어 가기 전 나는 잠시
멈추어섰다.
이 욕실에 들어서는 그 순간.. 그 순간부터 대관식 준비가 시작되고 나는 여왕이 되는 것이다.
“레이아 님.”
브리엘이 재촉을 했고 나는 다시 발걸음을 옮겨 욕실로 들어갔다.
몸단장이 끝나고 나자 대례복을 들고 있는 시녀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금실과 은실로 화려하게 자수를 놓은 약간
푸른색이 도는 하얀 드레스를 몇 벌이나 껴입고 그 위에 또 천을 대고 조끼 같은 블라우스를 입자 대례복을 겨우 다
입었다. 대례복을 입은 후에는 시녀들이 와서 머리를 만져 주었다. 거의 세 달 만에 두 배의 길이로 자라 (역시 마법약의
힘이다) 엉덩이까지의 길이로 내려오게 된 머리를 시녀들은 바르고 틀어 올리고 비녀로 쪽을 지고 또 거기에다가 여러
장식의 꽃과 보석을 달았다.
“무, 무거워”
“참으셔야 합니다”
갖가지 비녀와 장식으로 머리자체만도 무거운데 이 위에 거의 백과사전 무게에 달하는 왕관을?
과연 내가 오늘 제대로 걸을 수나 있을지!
머리 장식이 끝나자 이번엔 얼굴 화장이 이어졌다. 화장법은 제 4세계와 별로 틀리지가 않았다.
먼저 얼굴에 반투명한 밤(balm) 같은 것을 전체적으로 펴 바르고 그 위에 흰 천으로 만든 뭉치로 가루분을 펴 바른다.
가루분의 종류는 여러 가지였는데 밀가루 같이 흰 것에서부터 살색, 분홍색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푸른 색의
가루분까지 몇 종류를 얼굴에 꼼꼼하게 펴 바른다. 그리고 옅은 분홍색의 크림을 뺨과 얼굴 가장자리 그리고 눈썹 사이에
얇게 펴 바른다. 그렇게 종류와 정체를 알 수 없는 여러 가지 크림과 고체타입, 액체 타입 다양한 타입의 화장품이 얼굴에
덧씌워지고 (거의 덧씌워진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이것저것 많이 발라댔다) 엉덩이가 욱씬거리기 시작할 무렵
“이제 다 되었사옵니다.”
시녀들이 작은 손거울을 보여주었다. 하도 많이 발라서 아마도 얼굴이 1cm 는 두꺼워 보이지 않을까 내심 걱정을 하며
나는 거울을 들여다 보았다.
“흐억!!!”
거울 안에는… 긁어내면 한 숟가락일 화장을 떡칠을 한 여자가 아닌 마치 살아있는 밀랍인형 같은 흠집 하나 없는
크림같이 희고 부드러운 피부에 은은한 분홍색 뺨과 꽃잎처럼 붉고 아름다운 입술을 가진 그야말로 정말 여왕이라면
이렇게 생겨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 아름답고 우아한 여자가 있었다.
“누구세요?”
라고 나도 모르게 물었다.
시녀들이 작은 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레이아 님이세요. 오늘 레이아 님은 엘렌시아 뿐만 아니라 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분이시랍니다. 자, 이제 그만
나가셔야 해요. 카무엘 님이 벌써 도착해서 기다리고 계신답니다.”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거울을 내려놓은 나는 시녀들의 부축을 받으며 (치렁치렁한 치마와 무거운 머리장식 때문에 자꾸만
고개가 뒤로 쏠렸기 때문에) 나는 욕실을 나서 방문객을 맞는 접대의 방으로 들어섰다.
그곳엔 카무엘이 뒷짐을 지고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나를 보고 눈이 동그래지는 그를 보며 나는 혼자 자기만족을
느끼기 시작했다.
카무엘은 평소에 입고 있던 옷과는 다른 남색에 은실로 자수가 놓아진 멋진 제복 같은 것을 입고 옆에는 검을 차고
있었다.
“아름다우십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듣는 아름답다는 말. 닭살스럽기는 한데 기분 나쁘지는 않은데?
“너도 멋지다”
카무엘은 나한테 예의상 말한 것일 수도 있으나 나는 정말 진심으로 그가 멋져 보인다고 생각했다.
평소의 모습이 그냥 반짝반짝이라면 오늘의 카무엘은 가히 태양처럼 강렬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슬쩍 보니 브리엘 뒤의 어린 시녀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모두 얼굴이 새빨개 진 채 킥킥거리며 소곤거리고 있었다.
왠지 모를 슬픔과 짜증이 밀려왔다.
내가 얼마나 일찍 일어나서 때를 빼고 광을 냈든 카무엘 옆에 서 있으면 나는 어떻게든 우아한 학 옆에 서있는 닭처럼
보일것이다.
“그만 가지?”
이런 생각이 들자 괜히 심술이 마구마구 솟아난다.
“가기 전에 잠시..”
카무엘이 손짓을 하자 시녀들이 커다란 망토를 들고 왔다. 푸른빛의 드레스와 선명히 대조를 이루는 붉은 빛의 두꺼운
망토를 카무엘은 직접 내 어깨에 둘러주었다. 그리고 커다란 브로치를 달아주었다.
“그럼 이제 갈까?”
내가 걸음을 옮기자 주위에 있던 시녀와 시종들이 모두 내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어, 왜, 왜들 그래요?”
카무엘이 한 쪽 무릎을 세우고 무릎을 꿇은 채 말했다.
“레이아 님을 가장 측근에서 모시는 당신의 신하들을 대표하여 수호기사 히우투네스의 카무엘이 우리의 여왕이신
당신께 충성을 맹세합니다.”
“여..여왕? 잠깐, 아직 대관식도 올리지 않았는데..”
카무엘이 다시 말했다.
“당신을 가장 가까이서 모시게 될 우리는 앞으로 당신에게 우리의 목숨과 영혼을 바치어 당신을 지킬 것입니다. 부디
저희의 충성을 받아주십시오”
카무엘의 태도에서는 평소의 비웃음이라던 지 상대방을 깔보는 그런 태도는 전혀 보이지 않는 엄숙함 만이 느껴졌다.
나는 방을 한 번 둘러보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낯설게만 느껴지던 이 낯선 세상의 화려하고 거대한 방이 오늘을 지나면
진짜로 내 방이 되는 것이고 이 낯선 세상이 나의 세상이 되는 것이다.
화사한 아침햇살이 방의 커다란 창문을 통하여 비치는 구름 한 점 없는 아름다운 아침,
그 햇살 속에 서 있는 나와 내 앞에 무릎 꿇고 충성을 맹세하는 사람들.
가장 나를 가까이서 지켜주고 내가 가장 믿게 되는, 또 그래야 하는 이 사람들, 나에게
가장 먼저 충성을 맹세하는 나의 사람들. 어제까지만 해도 그저 낯선 사람들뿐이었던 이 사람들이 오늘, 이 시점을
지나면 더 이상 낯설지 않은 사람들이 될 것이다.
그리고 나 또한… 더 이상 이 세상에서 낯선 이방인이 아니게 된다.
대관식이 거행되는 신전으로 가기 위해서 방을 나서는데 카무엘이 손을 내밀었다.
조금 망설이던 끝에 조심스레 나의 손이 그의 손 위에 올려졌고 그의 손의 따스한 온기가 전해졌다.
항상 얼음처럼 차갑고 냉정해서 손도 차가울 줄 알았는데.. 따뜻하다.. 그리고 부드러워....
안심이 돼..
카무엘은 내 손을 살며시 쥐었다. 마치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나는 놀라서 그를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은 평소와 다름없이 감정이 전혀 보이지 않는 얼음 같은 얼굴이었다.
평소 같으면 아, 이 애는 정말 얼음처럼 냉정하고 차가운 사람이구나, 하고 생각하고 혼자서 상처받았던
그 얼굴이었지만 오늘은 이 따뜻한 손 때문일까? 그의 얼음 같은 얼굴도
오늘은 차갑게 느껴지지가 않는다.
신전으로 가는 길. 거대한 기둥 사이로 늘어선 수많은 시녀들과 시종들이 두 손을 맞잡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신전으로 가까워 질수록 높디 높은 천장 어디엔가로 스며드는 빛도, 그 곳을 향해 걸어가는 내 발소리도, 나를 따라오는
사람들의 발소리도, 저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모든 이들의 소리도 점차 사라지고 희미해져 갔다.
모든 게 슬로우 모션처럼 느려지고 뿌옇게 변해갔다.
하아- 천천히 나는 숨을 내뱉고 눈을 감았다…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레 저 곳을 향해 딛는 이 걸음..
꿈을 꾸듯 사라져 가는 내 자신을 문득 깨운 것은 카무엘의 따뜻한 손이었다.
“레이아 님.”
그는 내 손을 다시 조금 더 세게, 마치 내게 힘을 주려는 듯이 쥐었다.
“이제 다 왔습니다.”
처음인가? 그의 짙은 파란 눈동자를 이렇게 오래, 그리고 깊은 저 너머까지 바라본 것은. 그 파란 눈동자는 더 이상
냉정하고 차갑지 않았다. 바다처럼 고요하고 아름다웠다.
바다.. 모든 걸 다 품어주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부드러이 어루만져 주는..
그 눈동자를 바라보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나… 잘 해낼게”
그리고 문이 열리며 강렬하지만 낯설지 않은, 오히려 잃어버린 내 자신 한 조각 같은 익숙하게 느껴지는 빛이 쏟아졌다.
조심스레
한 걸음을 내딛는다.
강렬히 빛을 발하는. 애처로이 빛나는. 그 끝을 알 수 없는 이 긴 미래로의 여정에...
첫댓글 우와~~ 오늘 여러편을 올려주시다니 감사^^...
늘 읽어주셔서 감사할 따름이에요ㅠㅠ
강렬히 빛을 발하는. 애처로이 빛나는. 그 끝을 알 수 없는 이 긴 미래로의 여정에... 멋있어요.
허접한 글귄데 멋있다고 해주시다늬-_-// 감사할 따름이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