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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일년백권
2008년에도 연초에 목표로로 했던 일년백권의 목표를 간신히 달성했다.
책읽기에 목표를 둔다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에 한명이다.
하지만, 무료하고 단순한 반복의 일상을 살고 있는 직장인에 있어
무엇인가 목표를 설정하고, 그 목표를 성취했을 때 주는 쾌감은 적지 않다.
그로 인해, 일년백권이라는 목표를 연초에 습관처럼 마음속에 새긴다.
그리고 연말에 지난 일년동안 읽은 책목록을 보면서 스스로 뿌듯해한다.
그리고, 일년백권의 목표를 달성하고 나면,
나머지 시간에는 예전에 읽은 책을 다시 읽기로 마음먹었다.
작년에는 꽤 이른 시간에 목표를 달성해서
태백산맥 10권을 다시 읽었다.
올해는 백권을 읽고 났더니 3일만이 남았다.
무슨 책을 읽을까?
약간 고민을 했다.
그리고 집어 든 책이 유시민이 쓴 <거꾸로 읽는 세계사>였다.
유시민의 책은 나에게 있어 향수와 같다.
지금은 가고 싶지만 갈 수 없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언제가는 다시 갈 수 있을거라 확신하는 고향.
그런 고향 같은 느낌을 주는 책이 바로 유시민의 책들이다.
그런 유시민의 책들 중에 가장 감명깊게 읽은 책이 바로 <거꾸로 읽는 세계사>이다.
이 책을 처음 읽은 것을 보니 2004년 3월 31일이다.
참여정부의 젊은 시절이었다.
실수가 있지만, 성숙한 모습으로 자라고 있던 참여정부의 젊은 시절.
그 시절이 너무 그립다.
이 책은 1980년대 유시민이 감옥생활을 하면서 적은 글을 출간한 것인데,
20년이 넘은 오늘날까지 계속 개정판이 나오면서 스테디셀러이다.
1. 드레퓌스 사건
이 책에서는 드레퓌스 사건을 필두로 총 14개의 굵직한 현대 세계사의 중요한 사건을 다루었다.
그 사건들을 일일히 다 정리를 하고 싶지만,
많은 분량을 전부 정리하는 것은 나의 게으름이 용서하질 않아서,
메모로 적어 놓은 것을 몇 가지만 적어보겠다.
1894년 9월 프랑스에는 스파이 활동에 이용된 것으로 보이는 명세서를 발견하였다.
그리고 글씨체를 추적한 결과, 드레퓌스 대위를 검거하였다.
그는 무죄를 주장하였지만, 프랑스 재판부는 그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하였고,
적도 부근의 섬에 있는 감옥에 가두었다.
그에게 뒤집어 씌운 이유 중에 하나가 유태인이었다는 것도 작용한 듯싶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1896년 3월 피카르 중령이라는 사람은 간첩 사건을 수사하던 중
드레퓌스가 아닌 에스테라지 소령이 진짜 범인이란 것을 알게 되고 재심을 요구하였지만,
군부는 이를 묵살하였다.
그리고 드레퓌스의 형과 아내가 계속된 항소하면 다시 많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고,
에스테라지를 고발하였다.
물론 언론과 프랑스 군부는 이를 음로를 치부하였고,
에스테라지 소령은 무죄 판결을 받고, 도리어 피카르 중령이 체포되었다.
그런 와중에 하나둘 용기있는 언론과 지식인들이 행동을 시작하였다.
언론으로 처음으로 <피가로>가 처음으로 에스테라지를 범인으로 지목하였고,
위대한 작가 에밀 졸라가 '나는 고발한다'로 시작하는 유명한 사설을 투고하였다.
에밀 졸라의 파워는 대단했다.
전세계의 지식인들이 에밀 졸라를 지지하기 시작하였고, 많은 프랑스 백성들도 그를 지지하였다.
점점 프랑스는 재심요구파와 재심반대파 둘로 갈라져 국가 분열의 위기까지 치닫게 되었다.
프랑스 정부는 에밀 졸라를 중상모략으로 징역형을 주었고,
에밀 졸라는 영국으로 망명을 갔다.
이쯤에서 프랑스 정부가 잘못을 시인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지 못하고, 건너지 말아야 할 강을 건너 버렸다.
사태가 커지면서, 군부에 있었던 한 사람이 양심 고백 후 자살을 하였고,
에스테라지 소령이 영국으로 도망간 후 진실을 밝혔다.
더이상 프랑스는 재심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아직도 자존심을 버리지 못한 프랑스 재판부는 형을 줄인 후
사면하는 방식으로 택하였다.
피카르 중령도 석방되고, 에밀 졸라도 귀국하였다.
그리고 시간이 또 흘러 1906년이 되어서야 드레퓌스는 무죄판결을 받고 복권되었다.
이 사건은 행동하는 지식인이 무엇인가 절실히 보여준 사건이었고,
진실과 그 진실을 지지한 시민들이 반드시 승리함을 보여주었다.
오늘날 아직도 왜곡과 거짓에 맞써 싸우는 진실이 있다.
그리고 그 진실이 감옥에 있는 경우도 허다하다.
아직도 드레퓌스 사건은 진행 중이다.
2. 피의 일요일과 러시아 혁명
1905년 1월 20만 러시아 노동자들이 평화로운 행진을 하였다.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단지 자신들의 배고픔과 가난을 호소하고 싶었다.
아직까지 전제주의 국가였던 러시아였지만,
러시아 노동자들은 차르 정부가 자신들의 요구를 들어줄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총격이었고, 그로 인해 수백명이 죽었다.
이것이 바로 피의 일요일이었다.
당시 러시아 내에서는 마르크스에게 영향을 많아 혁명을 꿈꾸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피의 일요일 사건은 백성들이 그런 혁명가들을 지지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혁명가들은 꿈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리고 12년 뒤 1917년,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그 시절,
처음으로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하였다.
러시아 혁명에 있어 중요한 인물로는 레닌과 트로츠키가 있다.
레닌은 철저한 마르크스주의자였다.
얼마나 철저하냐면, 같은 사회주의 노선을 걷더라도,
마르크스와 사상과 의견을 달리하면 심한 갈등을 보였다.
그가 이끄는 볼셰비키가 또다른 사회주의당인 맨셰비키와 갈등도 그런 이유였다.
그는 사회주의 혁명 운동으로 수차례 감옥을 다녀왔고, 해외로 도피했었다.
192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났을 때도 그는 스위스에 있다가 귀국하였다.
그리고 1차 세계대전의 참전을 반대하였고,
당시 혁명을 이끈 케렌스키의 임시정부뿐만 아니라 맨셰비키와 갈등을 보였다.
그런 그는 다시 간첩 협의를 받고 핀란드로 도피하였다.
레닌이 러시아에 없을 때 볼셰비키를 이끈 이가 바로 트로츠키였다.
그도 레닌보다 융통성이 있었고, 달변가라서 많은 사람의 지지를 받았고,
소수당으로 전락한 볼셰비키는 원래 뜻의 다수당으로 만들기도 하였다.
러시아 혁명 성공 뒤 차르 정부로 회귀하려는 쿠데타가 발생하기도 하였는데,
트로츠키는 이 쿠데타를 진압하면서 영웅이 되었고, 소비에트 의장이 되었다.
후에 레닌이 귀국하여 레닌의 뜻대로 독일과 휴전을 하고,
사회주의 국가 건설에 집중하게 된다.
갑자기 전쟁에서 발을 빼게 되자,
이를 괘심히 여긴 연합국 소속 영국, 프랑스, 일본 등은 반혁명군을 지원하였다.
레닌이 이끈 볼셰비키는 이 반혁명군과 싸움에서 승리하고,
붉은 깃발을 휘날리게 된다.
1924년, 레닌이 54세의 많지 않은 나이에 죽고, 스탈린이 정권을 잡게 된다.
스탈린은 일당독재체제를 구축하고,
마르크스와 레닌이 주장했던 사상을 다르게 해석하여 개인의 자유도 말살해 버렸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일당독재를 강화하기 위해 반대파를 숙청하게 되는데,
이때 트로츠키는 파면된 후 남미에서 스탈린이 보낸 자객에 의해 죽었다.
이후, 사회주의는 계획 경제의 실패, 지나친 군수 산업의 치중으로 추락의 길을 걷는다.
뒤늦게 고프바초프의 개혁 시도가 이어지고, 소비에트 연방과 그의 영향권에 있었던
동유럽의 사회주의는 무너지고 만다.
자본주의에는 빈부의 격차 등 많은 모순을 가지고 있다.
그를 대체하기 위해 나타난 이 사회주의는 테스트 단계에서 접고 말았다.
그렇다고 자본주의가 정답은 아니다.
오늘날 많은 국가들이 자본주의를 숭배하고 있지만,
그에 대한 피해와 악영향이 여기저기에서 나타나고 있다.
아직 이 수많은 인구들이 모두 행복해질 수 있는 사회 시스템의 정답을 찾지 못한 것이다.
과연 정답은 무엇일까?
3. 세계 대전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가
보스니아 수도 사라예보에서 피격당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범인은 세르비아 청년 프린시프로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그의 행동은 오스트리아아 세르비아를 침략한 것에 대한 투쟁의 행동이었다.
이는 안중근의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 사건도 같은 맥락이다.
그런데, 이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 피격 사건의 파장은 일파만파 퍼지게 된다.
오스트리아는 이 사건의 배후를 범슬라브계를 지목하고, 세르비아를 공격하게 된다.
범슬라브계와 러시아는 동조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는 세르비아를 돕기 위해 이 전쟁에 참여하게 된다.
이 전쟁의 참여는 러시아에게 있어 국내의 혼란한 정세를 잠재우기 위한 방법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유럽의 주변국은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이 전쟁에 참여하면서,
전쟁의 범위가 전유럽으로 확산되었다.
독일과, 터키, 불가리아는 오스트리아를 지원하게 되고,
영국과 프랑스, 이탈리아는 러시아를 지원하였다.
영국은 터키에게 지배를 받고 있는 아라비아의 독립을 약속하고,
아라비아의 지원을 받기도 한다.
그리고 영국과 동맹 관계를 가지고 있던 일본도 러시아 진영에 동참하게 된다.
중립 노선을 지키고 있던 미국.
영국은 유태인에게 나라를 약속하면서 미국의 참전을 독촉하였다.
당시 미국은 유태인이 많은 권력과 부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설득이 가능했고,
미국은 이런 영국의 약속을 믿고, 이 전쟁에 참여하게 된다.
이런 세계전쟁의 발발은 사회주의 혁명을 준비하고 있는 이들에게 호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도리어 백성들에게는 사상보다 민족, 나라가 우선이었다.
전쟁이 일어나자, 사회주의 혁명 운동이 잠잠하고,
민족주의가 대두되었다.
이 전쟁이 한참 중에 러시아는 혁명이 일어나서, 독일과 강화를 맺은 후 전쟁에서 발뺌을 하기도 한다.
1918년 독일 연합군이 패배하고,
독일에서 혁명이 일어나 독일공화국이 세워지면서, 전쟁이 끝이 났다.
전쟁이 끝난 후 강대국들의 제국주의는 더욱 강력해졌고,
후에 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지게 된다.
어찌 보면 1차 세계대전이 세르비아 청년의 총 한발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팽배해진 제국주의의 폭발이라고 지은이 유시민은 이야기하고 있다.
그 총 한발이 아니어도, 언제 어디선가 터졌을 거라는 이야기다.
오늘도 세계 여기저기에서는 전쟁이 멈추지 않고 있다.
슬프다.
4. 대공황
1차 세계대전이후 미국과 유럽의 강국들에서는 호경기가 이어졌다.
주식투자로 하루아침에 졸부가 발생하기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주식투자에 몰리게 되었다.
하늘높은 줄 모르던 주식은 어느날 주식이 떨어지면 어쩌나 하는 걱정과 함께 폭락하게 된다.
그것이 1929년 10월 24일이었다.
불경기가 오기 전에 주식이 먼저 폭락하였다.
한번 떨어진 주식은 날개없는 추락이었다.
주가는 금방 1/8 정도로 떨어졌고, 그로 인해 발생한 불경기는
전세계를 강타하고, 이를 세계대공황이라고 불렀다.
이것의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인가?
바로 자본주의의 '자유방임주의'였다.
이때까지 애덤 스미스가 이야기한 보이지 않는 손이
자본주의를 순항하게 할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 보이지 않는 손이 모든 이를 행복하게 할 수는 없었다.
그럼 이 자본주의의 자유방임주의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이 해답을 케인즈라는 사람이 내놓았다.
바로 정부의 의도적인 개입이다.
정보가 경제활동에 개입하여 경제지표를 관리하고 규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또한 완벽한 정답은 아니지만, 오늘날까지 형태가 변하여 많은 나라에서 적용하고 있다.
이 당시 대공황은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탈출하게 된다.
...
요즘 전세계적인 불경기라고들 한다.
이를 세계대공황과 비교하기도 한다.
그럼, 요즘의 원인은 무엇인가?
미국 서브프라임에서 시작되었다고들 하는데,
이것은 미국을 비롯한 '신자유주의'의 영향이 아닐까 생각된다.
지금 불고 있는 불경기의 바람의 끝이 어떻게 끝날지 궁금하다.
5. 중국 대장정
중국 청나라 말, 제국주의의 몰려들면서, 청나라는 이름뿐인 나라가 되어버렸다.
그로 인해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손문이 이끈 신해혁명이 1911년 일어났다.
이후, 중국은 손문이 이끄는 국민당 혁명군과
원세계가 이끄는 북부군으로 두 진영으로 나뉘게 된다.
손문은 소련공산당과 손잡고,
당시 새로운 세력으로 대두되고 있는 중국공산당과 손을 잡고, 원세계의 북부군 공격을 제안한다.
이것이 1922년 1차 국공합작이다.
1차 국공합작은 청나라 잔존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합작으로 성공을 거두게 된다.
그런데, 손문이 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그의 뒤를 이어 국민당을 이끈 철저한 반공주의자 장개석이 쿠데타를 일으키고,
공산당원에 대해 대량 학살의 만행을 저지른다.
이에 공산당은 이립삼을 중심으로 지하 조직을 결성하게 된다.
한편, 모택동은 국민당 반란군을 결성하고,
군사를 모으게 되는데, 이들을 홍군이라고 불렀다.
모택동의 특유의 지도력으로 인해 주덕, 팽덕회, 주은래 등의 인물들이 합류하면서,
그 세력이 커져 국민당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장개석의 국민당군을 백군이라 불렀는데,
장개석은 백군을 이끌고 홍군을 공격하였다.
계속되는 홍군과 백군의 내전에서 이득을 보는 이는 따로 있었으니 일본이었다.
일본은 홍군과 백군의 내전을 틈 타 만주를 점령하고 만주국이라는 괴뢰국을 건설하였다.
홍군의 게릴라 공격에 많은 피해를 입은 장개석은
막강한 물량과 인력을 바탕으로 조금씩 목을 조이듯 공격을 하였다.
그리고 초토화작전을 써서 그들이 지나간 곳은 폐허가 되었다.
이런 작전에 모택동이 이끈 홍군은 도망을 하게 되는데,
홍군을 지지하는 백성들도 동참을 하였다.
이들의 도망은 단순한 도망이 아니고 국가 전체가 이동하는 것과 비유되었고,
이 엄청난 행진은 368일간 이어졌고, 이를 두고 대장정이라 하였다.
그 거리는 1만 킬로미터나 되었다고 하니, 쉽게 상상이 되지 않는다.
모택동은 서북지역에 소비에트정부를 건설하게 되는데,
그는 위민정책과 교육을 통해 민심을 얻게 되는 반면,
장개석은 양민들의 고통을 외면하고, 심지어 폭력과 억압을 일삼아 민심을 잃게 된다.
모택동에 있어 걱정이 하나 더 있으니, 일본의 계속된 대륙 잠식이었다.
그래서 그가 이끄는 홍군은 항일 투쟁을 하기로 하고, 백군에도 제안하였다.
하지만, 장개석이 이에 동의할 리가 없었다.
한동안 백군은 홍군을 공격하고, 홍군은 그저 피하기만 하고 일본군 공격에 힘쓰고 있었다,
그러다가 장개석의 휘하에 있던 사령관 장학량이 홍군과 밀약을 하고,
무장해제하고 있던 장개석을 총으로 협박하고,
홍군과 협력하여 항일 투쟁하기로 하였다.
이때 장학량과 홍군이 장개석을 처단했다면,
중국은 더 빨리 안정되고, 오늘날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을 테지만,
그들은 장개석을 국민당 리더로 대우를 해주었다.
아무튼 어렵게 2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지고, 그들은 일본을 상대로 투쟁을 벌여서
중일전쟁까지 일어났다.
이 2차 국공합작은 1940년 장개석이 홍군을 공격하면서 끝났고,
1945년이 일본 패망 이후에도 국민당과 홍군의 싸움은 이어졌다.
일본 패망 후 미국은 사회주의 확산을 우려한 미국은 국민당을 막강 지원했지만,
전쟁은 물량만으로 하는 것이 아니었다.
모택동이 이끈 홍군의 의지와 정신력을 이길 수 없었다.
전쟁에서 패한 장개석은 국민당 무리를 이끌고 대만으로 도망을 가게 된다.
6. 진행중
이 책에서 언급한 이야기가 대부분 과거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 과거가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 있는데,
바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어이없는 분쟁이다.
며칠 전에도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격으로 수백명이 죽었다는 뉴스를 들었다.
오늘도 뉴스와 신문의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있는 이스라엘 공습.
1차 세계 대전인 한창일 때, 터키가 독일편을 들게 되자,
영국은 터키의 지배를 받고 있는 아라비아의 독립을 약속하고,
아라비아의 지원을 받게 된다.
그리고 미국의 지원을 받기 위해,
미국의 권력과 부를 잡고 있는 유태인에게 국가 건설을 약속하게 되고,
미국은 이에 1차 세계 대전에 합류하게 된다.
그런데, 이때 유태인에게 제안한 땅이 바로 아라비아들이 살고 있던 곳의 일부이니,
영국이 이 책임없는 이중 약속으로 인해,
오늘날까지 죄없는 이들이 계속 죽고 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남과 동시에
돈으로 무장한 유태인들인 미국의 지원을 받아,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이주오게 된다.
그 이주하는 인원이 엄청나게 되고,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지원을 받아 그곳에 살던 팔레스타인들을 내쫓고,
나라를 세웠으니, 이스라엘이다.
하루아침에 나라를 잃어버린 팔레스타인들은 주변국가에 난민촌을 만들고,
해방운동에 힘쓰게 된다.
중동의 여러 나라도 이해관계에 얽혀 이 싸움에 휘말리게 되어
계속된 중동전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도 공존하고자 하는 노력을 하기도 했지만,
그런 평화협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지금 이시간에도, 그곳에는 총성이 멈추고 있지 않다.
7. 베트남 독립전쟁
베트남 역시 제국주의 열풍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들은 프랑스의 점령을 시작으로, 일본의 점령을 받다가
다른 아시아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일본의 패망과 함께 독립하였다.
그런데, 이게 왠일인가.
프랑스가 다시 베트남을 점령하였다.
베트남에 매장된 많은 지하자원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베트남에서는 북쪽지역의 호지명(호치민)이 이끈 부대가 프랑스에 항전을 하였으니,
이것이 1차 베트남 전쟁이다.
프랑스 사이와 휴전을 하게 되었는데,
이때 아무 이유없이 미국이 개입하였다.
미국은 남베트남에 괴뢰 정부를 수립하였다.
미국은 사회주의 확산에 대한 두려움과 베트남 자원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베트남에 진출을 하게 된 것이다.
그들이 말한 전쟁의 원인은 그저 핑계일 뿐이지,
이는 엄연한 미국의 침략전쟁이었다.
이로 인해 한국전쟁에서 참전했던 국제연합도
미국의 잘못된 태도를 비난하고 참전하지 않기로 하였다.
우리나라, 호주를 비롯한 몇몇 미국의 원조국들만 참전하게 되었다.
그렇게 명분없는 전쟁이었다.
명분있는 전쟁이 몇이나 될런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알다시피 이 베트남 전쟁은 지루하고, 많은 희생자를 내고 미국이 패하고 말았다.
베트남 역시 미국을 몰아내고 자신의 나라를 지켜냈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나라는 폐허가 되었다.
이렇듯 전쟁은 승자가 없는 것이다.
이런 전쟁이 왜 안없어지는지...
...
8. 그밖에
그밖에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
우리나라의 미완의 혁명인 419혁명,
미국 말콤 X의 인종분리투쟁,
일본의 반성할 줄 모르는 역사왜곡,
핵무기에 관한 이야기,
독일 통일 과정과 그 후유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책제목 : 거꾸로 읽는 세계사
지은이 : 유시민
펴낸곳 : 푸른나무
펴낸날 : 1995년 02월 개정판
정가 : 10,000 원
독서기간: 2008.12.29 - 2008.12.31
페이지: 400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