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생명 말씀(2020.12.27.) 말씀/ 요한복음 9:1-3
운명이기는 믿음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어느새 2020년 한 해 마지막 주일이 되었습니다. 해마다 하나님 은혜로운 사건을 증거하며 12월이면 중국 학생들 캐롤도 준비하고, 세례도 베풀며 성탄 예배를 드렸는데 올해는 조용한 성탄을 보냈습니다. 모든 원인이 코로나 때문입니다. 전에 메르스도 있고 사스도 있었지만 이렇게 끈질긴 코로나는 처음입니다. 서울은 5섯 명이상 거리두기 제안을 하고 있습니다. “결국 올 것이 왔다". 5인이상 모임 금지에 무너지는 자영업자” 기사가 떴습니다. 모든 모임이 스톱이는 되는 상황입니다. 여러분 코로나가 왜 생겼고 어떤 뜻이 있을까요? 코로나는 어쩔 수 없는 문제인가요? 성경을 보면 앞으로 종말이 가까울 때 이런 현상들이 일어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또 이르시되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큰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부터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눅 21:1-11) 어떤 일이던 우리가 이해하던 이해하지 못하던 그곳에는 하나님의 간섭과 섭리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힘들지만 그 뜻을 알고 극복해 나간다면 하나님 안에서는 의미 없고 가치 없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살아가면서 힘든지 힘들지 않는가 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삶 자체가 고통이요 기쁨이고, 아픔이고 건강이고, 죽임이고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삶의 가치와 의미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코로나 시대를 맞이해서 힘들과 어려움을 격지만 여기서도 우리는 주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오히려 절망의 때에 인간의 나약함을 깨닫고 능하신 하나님 앞에 돌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무리 힘들어도 하나님 안에 운명은 없습니다. 역사를 보면 이런 일들이 일어났었고 또 앞으로도 계속 일어날 것입니다.
요즘 코로나 때문에 까뮈의 페스트가 다시 조명을 받고 있습니다. 저도 한번 읽어보려고 주문 했습니다. 부조리 철학을 추구하였던 프랑스 작가 까뮤는 페스트가 창궐(猖獗)한 세상을 그 소설로 그렸습니다. 한 때 기자였고 레지스탕스로 나치와 싸우기도 했던 그는 페스트의 사실과 그 의미 뿐 아니라 인간의 심성이 페스트 장막속 지옥에서 어떻게 작동하고 서로 소통하는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냈습니다. 단지 페스트라는 질병의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라 그 곳에서 들어나고 있는 페스트의 장막 안에서 벌어지는 반(反)인간적, 반사회적 (범죄) 행위를 들어내고, 인간 향한 감수성(感受性)이 어떻게 다르게 나타나는가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그 범죄 행위에 우리는 공법이 되기도하고, 절망 속에서 인간을 긍정하게 하는 아름다운 장면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허나 인간의 노력으로 그 난관이 극복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시간이 하나하나 매듭을 풀어 모순을 해결합니다. 흑사병(黑死病) 페스트는 그렇게 천천히 끝났습니다. 흑사병을 일으킨 쥐들을 잡아 죽였습니다. 그리고 다시 건강한 희망의 쥐들이 돌아옴으로서 인간은 희망을 갖게 됩니다. 여기서 인간은 무엇을 배웠는지 작품은 질문을 합니다. 지식과 신앙은 어떤 역할을 했을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인간의 자각과 희생, 가치를 향한 불굴의 의지는 ‘사랑’이라는 작가의 믿음으로 나타냅니다. 우리도 사스(2003년·중국 발생)와 메르스(2012년·중동 발생)에 이어 아시아가 또 맞닥뜨린 우한 폐렴 코로나 ‘온역의 장막’이 우리에게 주는 뜻은 무엇일까? 우리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의문을 던지며 생각해보는 시간이 필요 합니다.
저는 코로나로 인해서 운명의 문제를 생각해보았습니다. 운명이란 인간의 노력하지만 근본 어쩔 수 없는 문제를 말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운명의 지배를 받고 살아갑니다. 힘들고 어려우면 운명이라고 생각 합니다. 인간의 모든 것의 주인이고 모든 것의 책임자라고 한다면 운명이 있겠지만 하나님의 통치와 주관 속에 있는 이 세상에는 운명이 없습니다. 운명같이 보이는 것도 굴복하면 운명이 되지만 긍정으로 받아들이면 더 이상 운명이 아닙니다. 그런 것을 무엇이라고 하는가하면 하나님의 섭리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9:2~3 을 보면 소경거지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제자들이 길을 가다가 태어날 때부터 소경인 거지를 보았습니다. 마음이 어두워졌습니다. 운명적인 생각을 한 것입니다. 불행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를 믿고 따르면서도 제자들이 저런 생각을 했다는 것은 우리도 마찬가지로 그런 생각이 있다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장님으로 태어난 것은 도대체 누구의 죄 때문일까?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예수님게서 대답하십니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예수님 말씀은 한마디로 운명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불행을 부모나 본인 사람에게서 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편에서 보셨습니다. 하나님 편에서 보니 태어날 때부터 소경이었던 그 거지도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낼 섭리의 인생 이었습니다. 그럼 운명이란 무엇입니까? 불가능 앞에서 굴복하는 것입니다. 섭리란 불가능을 띄어 넘어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삶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아들로 세상에 오셨지만 유대베들레헴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방도 없이 말구유간에 누이셨습니다. 태어나자마자 헤롯을 피해 애굽으로 피난을 가셔야하셨습니다. 머리 둘 곳도 없이 사셨습니다. 30세 공생애로 3년을 사셨지만 젊은 날에 제자에게 배신을 당하여 은 30에 팔리고, 자기 백성들의 모함 속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이 인간 편에서 본다면 얼마나 운명적입니까?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보면 예수님의 모든 삶의 발자취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시는 삶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장사한지 3일 만에 운명같은 죽음에서 일어나 사망권세를 파하시고 부활하시고 마침내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인생의 구주가 되셨습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로 운명을 끝이 났습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의 삶에도 더 이상 운명은 없습니다. 아멘!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불멸의 음악가 베토벤. 그의 운명 교향곡을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는 17세 때 어머니를 잃었습니다. 그리고 28살 어느 날 가혹한 운명의 그림자가 그의 곁에 서서히 다가왔습니다. 왼쪽 귓속이 찡 울리면서 귀가 이상해 옴을 느꼈습니다. 그로부터 며칠 뒤 오른쪽 귀마저 울리기 시작했습니다 “혹시 귀머거리가 되는 것은 아닐까?” 베에토벤은 몹시 걱정스러웠습니다. “만약 귀에 이상이 생기면 어쩌지? 음악가에게는 귀만큼 중요한 것이 없는데 만약에 귀가 들리지 않게 된다면 귀머거리 음악가라고 모두들 비웃을 것이다.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될 뿐만 아니라. 피아노도 칠수 없고 내가 작곡한 곡을 내 귀로 들을 수도 없게 된다. 그렇게 되면 나의 모든 것은 끝장이다.”베에토벤의 걱정과 근심에도 불구하고 귓병은 더욱 더 악화되어갔고 결국에는 아무 것도 들을 수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겨우 세상의 명예와 부귀를 손에 쥔 베에토벤은 다시 찾아온 새로운 고통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음악을 전공하는 사람으로서 결코 없어서는 안 될 청력을 잃어버린 베에토벤은 32세 때 상상조차 할수 없었던 시련으로 절망에 빠져 자살까지 결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다만 음악. 그것이 나를 붙들었다. 아! 나에게 부과되어 있다고 느끼고 있는 모든 것을 완성하지 않고 이 세상을 떠난다는 것은 나에게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기에 이 비참한 인생을 지금까지 연장해 왔다] 라고 훗날 고백했습니다. 베에토벤은 절망대신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그의 모진 운명과 맞서 싸워 나갔습니다. 그는 느닷없이 찾아온 불행 속에 주저앉아 있기에는 너무도 음악을 사랑하고 그의 인생을 사랑했습니다. 절망적인 인생까지도 ‘이것이 나에게 주어진 운명이라면 깨끗이 받아들이자. 그리고 귀가 들리지 않는 음악가로써 힘써 노력해 보자’ 이렇게 자신을 위로하며 운명과 맞서 싸웠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교향곡 하나가 탄생되었습니다. 그것이 유명한 <운명교향곡> 이었습니다.이 교향곡은 “다다다다” 하는 4음표로 시작하는 힘차고 웅장한 곡인데 어떤 사람이 “선생님 저 ‘다다다다’ 하는 것은 무엇을 나타내는 겁니까?” 라고 물었더니 “운명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지.”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때부터 이 다섯 번째 교향곡을 <운명>이라 부르며 지금까지 불후의 명곡으로 수없이 연주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베에토벤은 귀가 들리지 않게 되면서부터 지금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그의 대표곡들을 작곡하기 시작했습니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베에토벤은 젊어서 남의 집 2층에 세들어 산 적이 있었습니다. 어느날 1층 주인집 천장에 물이 새서 떨어졌습니다. 주인은 참다못해 위층을 향해서 물이 샌다고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물방울은 그치지 않았습니다. 주인은 화가 나서 하인을 올려보냈습니다. 따지러 올라간 하녀는 눈앞에 벌어진 장면 때문에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베에토벤은 누가 들어오는 줄도 모르고 정신없이 피아노를 치고 있었는데, 거의 손가락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베에토벤의 피아노 옆에는 양동이가 하나 놓여 있었습니다. 그는 피아노를 치다 손가락이 아프면 양동이에 손을 담갔다가 통증을 식히고, 어느 정도 가라앉으면 얼른 물을 털어버리고 피아노를 치고 있었습니다. 그가 털어버린 물이 바닥에 고여 아래층으로 스며든 것이었습니다. 이런 그였기에 청각의 장애를 딛고 일어서, 사람들의 영혼을 울리는 음악을 남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음악에 대한 사랑이 결국 베에토벤을 독일을 대표하는 낭만파 음악의 선구자로 만들었습니다. 또 베에토벤은 음악의 신동 모짜르트로부터 극찬을 들을만큼 타고난 천재였지만 지독하게 노력하는 집념의 음악가이기도 했습니다. 그의 운명을 극복하는 비결은 곧 운명을 사랑하는 것 이었습니다.
신은 죽었다고 외쳤던 철학자 니체도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사물을 아름답게 하는 사람 중 한 사람이 되고싶다. 이것은 '운명애' (Amor tat)! 나는 추한 것과 전쟁하고 싶지 않다. 나는 비난하지 않겠다. 그런 것들에게서 시선을 돌리는 것이 내가 유일하게 부정하는 것이 될 것이다. 궁극적으로 나는 '긍정하는 사람' 그 이상은 되지 않을 것이다" (Niethsche 즐거운 학문) 그는비관과 절망 굴복이 아닌 '운명'(運命)을 사랑을 하라고 하였습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운명은 선택이 아닌 어쩔 수 없는 아픔이요 고통이 아닌가! 누군들 아프게 태어나고 싶었는가! 누군들 가난하게 부모 없이 버림받은 삶으로 태어나 고 싶었는가! 누군들 날 때부터 소경거지로 태어나고 싶었는가! 누군들 희망 속에 안았던 아이가 지적 정신적 장애를 안고 태어나기를 바랬겠는가! 운명은 평생의 고통이며 짐이 아니던가! 그런데... 그런 운명을 사랑할 수 있는가! 운명애는 있는 그대로 자신의 운명을 긍정하는 마음의 태도입니다. 현재에 존재하는 것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특별히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기를 바라지 않고, 나에게 벌어진 필연적 사실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이처럼 그대로 자기 삶 자체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운명애를 이룬 사람이라고 말 합니다. 세상에는 이렇게 하나님을 믿건 믿지 않건 운명과 싸워서 이긴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물며 죄와 사망의 운명에서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안에서 우리는 어떠해야겠습니까?
운명이란 어쩔 수 없는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거부 하면 그것은 평생의 불행한 덫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대로 그 운명을 긍정하고 있는 그대로 삶을 받아들이면(체념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운명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실 저도 예수를 믿었지만 처음에는 나의 운명적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나의 가난도, 나의 무능력함도, 나의 배경 없는 학벌과 가문도, 세상보다 잘 나지 못한 자녀들의 장애와 학습 능력도, 특히 아들 누가 문제, 모두가 운명적이었습니다. 내가 원하던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나는 “왜 나는?” 풀리지 않는 의문을 품었습니다. 나의 초라한 개척사역 시골 사역도 심지어 못난 것만 가득한 내 존재마저 나는 거부했습니다. 나는 인정하고 싶지 않고 싫었습니다. 피하고 싶었습니다. 인정할 경우 나는 불행한 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운명을 부정하면 할수록 거대한 산이 되고 나는 언제나 그 앞에 패배자가 되었습니다. 아이들도 곁을 떠나고 의지하였던 사모마저 곁을 떠났습니다. 사역지도 떠냐야하는가 생각했습니다. 모든 것이 절망의 순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 하나님은 내 마음에 현실을 그대로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어쩔 수 없는 문제들은 하나님께 내려놓고 긍정하고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자 운명은 섭리의 출발점이 되었고, 가시 방석은 꽃자리가 되었고, 구걸하는 마음의 손은 베푸는 손길로 바뀌어갔습니다. 없는 것에 연연하지 않고 있는 것을 감사 하다 보니 온 세상이 다 내 것이고, 내가 세상에 가장 부요한 자가 되었습니다. 운명은 섭리로 바뀌었습니다. 삶속에 깨달음의 글을 써서 2,000편 이상 나누고, 음치인자가 십년이 넘게 색소폰을 연주하고, 사역을 내려놔야할 자가 10년이 넘게 중국유학생들을 섬기고, 스펙도 없는 자가 우즈알 한 사람과 2년이 넘게 영어 성경공부를 했습니다. 우리교회 집사님들 몇 분 되지 않지만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며 함께 살아감이 너무 좋습니다. 허물없이 동역자들과 함께 책을 읽고, 은혜의 글을 나누고, 여행하고 등산하고 행복합니다. 이제는 누가도 더 사랑해주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장애인 복지 일자리 합격해서 좋아하길레 칭찬하고 축하 해주었습니다. 기분이 너무 좋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세상에 크고 잘 난 것들이 부럽지 않습니다. 돌아보면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습니다.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운명 같은 문제들이 아직도 있지만 그것도 끌어안고 사랑해야할 대상입니다.
결론적으로 코로나 여기에도 하나님의 선한 뜻이 있는 줄 믿습니다. 2021년도 우리 힘차게 운명의 문을 두드립시다. 믿음으로 운명 같은 어둡고 두렵고 슬픈 문들을 힘차게 열고 희망의 세계로 전진해 나아갑시다. 아멘! 대한민국도 전진, 우리 교회도 전진, 저와 여러분들도 전진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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