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겨울에 보내는 그림엽서 몇 장
정 호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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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나 이웃의 혼인식이나 장례식 등 경조사에의 참석 여부는 사정에 따라 불참하는 경우도 있지만, 금액의 많고 적음은 상관없이 금일봉의 봉투는 어김없이 전달된다. 이는 상호부조의 사회적 인습에 따른 우리나라의 미풍양속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요즘에는 이웃 간의 이런, 따뜻한 마음이 높은 벼슬아치에의 공공연한 뇌물로 변질되거나 혹은 시기꾼들의 지능적인 농락에 한 가정의 경조사는 순식간에 하늘이 노랗게 무너져 내리는 허탈감에 주저앉고 만다. 그건 그렇다 치고 그런 혼인이나 장례 행사에 보내는, 봉투에 쓰는 문구를 물어오는 사람을 더러 만난다. 그래서인지 요즘 문방구나 마트에서 파는 편지봉투에는 애당초에 ‘축 결혼(祝 結婚)’ 이나 ‘부의(賻儀)’라는 문구를 한자로 크게 박아서 파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학문적인 지식이라기보다 일상의 예의범절에 관한 가정의 상식인데도 예나 이제나 학교 수업의 어느 과목에서도 배운 기억이 없다. 내가 옛날 교직에 있을 때 어느 날의 수업시간에 한 학생이 불쑥 이런 질문을 했다. 친구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쓰는 전보 문구였다. 광복 이후 6·25를 전후한 그 당시만 해도 급한 일의 전달은 가정전화가 널리 보급되지 않았던 때라 우체국에 가서 전보를 이용했으니 하는 말이다. 내가 답하기도 전에 어느 학생이 앞질러 이렇게 말했다. “‘축 사망’이라고 쓰면 안 됩니까?” 물론 우스갯말이었지만, 그 당시 전보에는 회갑연이나 돌잔치 등에 보내는 축하전보가 대부분이었기에 전보문이라면 으레 앞머리에 ‘축(祝)’ 자를 붙여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번 언젠가 고등학교 1학년생인 손녀가 학교에서 급한 일이 생겨 그의 친구한테서 1만 원을 빌려 쓴 며칠 뒤에 갚아주면서 그때의 고마웠던 마음도 함께 봉투에 담아주고 싶은데, 이런 경우 봉투 표면에 뭣이라고 쓰면 좋겠느냐는 것이다. 그런 경우의 봉투 표면에는 모두들 ‘축(祝)’자를 앞세우는 것이 그 당시의 엄연한 공식으로 알고 있었으니 시대는 변했지만, 나도 그에 따라 서슴지 않고 ‘축 빌린 돈’이라고 쓰라 했더니 손녀는 기절을 하여 한참 동안 허리를 꺾은 채 숨을 쉬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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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나 이제나 무슨 일을 하기 전후에 자기도 모르게 어떤 행위를 습관적으로 행함으로써 쾌감을 느끼고 있는 것을 본다. 예컨대 친구들과 식당에 앉아 밥을 먹을 때나 혹은 가족과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눌 때에도 한쪽 다리를 달달달달 떨고 있는 친구를 본다. 이는 예로부터 우리 부모님들은 복 나가는 짓이라고 대뜸 자식들의 다리를 손바닥으로 찰싹 때려 주의시키곤 했다. 그러나 이는 자신도 모르게 하는, 몸에 밴 버릇으로 어떤 자리에 앉든지 상대방과 하는 대화의 내용이나 속도와는 상관없이 달달달달 경쾌한 리듬을 타고 자기만의 쾌감을 만끽하고 있다. 이는 어느 한두 사람의 예일 뿐, 그 외에도 많은 사람들은 각자 나름의 야릇하고 병적인 버릇을 가지고 있다. 어떤 친구는 자리에 앉았다 하면, 한쪽 눈을 반쯤 감고는 콧수염을 뽑는 버릇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조금이라도 긴장을 했다 하면, 연방 화장실을 들락거리는 사람도 있다. 어느 날 여러 친구들과 함께 시내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난 뒤에 한 친구가 밥상머리에 앉은 채 그 무섭게 생긴 틀니를 뽑아 쥐고는 상하좌우로 돌려가며 물수건으로 닦고 있었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말이 요즘 텔레비전을 통해 한창 유행을 하고 있더니 그 친구의 그런 장면을 마주앉아 감상하고 난 뒤부터 나는 위에서 말한 유행어 문구를 ‘사람이 꽃보다 절대로 아름답지 않다.’로 한마디를 첨가해 고쳐주고 싶었다. 이 험하고 고달픈 인생의 몇 고비를 넘긴 친구들 중 틀니를 안 박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식후 틀니 소제는 집에 가서 하라고 내가 농담조로 말했더니 집에서는 식후에 곧장 화장실로 직행해서 물로 깨끗이 씻어버리니까 입속이 개운해서 좋은데, 오늘 같은 경우는 식당에서 부득이하니 이해해 달라며, 이것도 고칠 수 없는 내 병이라며 자책까지 했다. 나는 그 순간 그 친구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어 퍼뜩 머리에 떠오른 가짜 병명을 만들어 사과를 겸해 그 친구에게 말해주었다. 심리학에서는 그런 증상을 ‘습관성 카타르시스’라 한다고 정색을 하여 유식하게 말해주었더니 나의 그 별난 병명에, 친구들은 모두 천장을 쳐다보고 말처럼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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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생활을 하다보면 단독주택에서는 맛볼 수 없는 별난 재미를 맛보기도 한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는 층수 높이는 12층인데, 나는 낮은 3층에 살고 있다. 요즘 아파트에선 층간(層間)에 생긴 이런저런 일로 종종 시비가 붙어 서로 고함을 지르다가 결국에는 주먹싸움으로까지 번지기도 하는데, 그렇다면 가장 좋은 층은 어디이겠는가. 하늘이 손에 잡힐 것 같은 아파트 꼭대기 층도 아니요, 그렇다고 관리비 고지서에 엘리베이터 사용료가 붙지 않는 1층이나 2층도 아니다. 그렇다면 어디일까. 노랑색깔의 승합차 타고 학원에 가서 배운 태권도의 복습을 집에 와서 하느라고 아파트 거실에서 쿵쿵 뛰고 구르는 유치원 다니는 아이들이 없는 가정의 그 아래층이다. 좋은 층의 이해를 돕기 위해 다시 예를 들어 말한다면, 종일 거실에 앉아서 옛날의 『장끼전』이나 읽으면서 한적하게 소일하는, 80대 노부부가 사는, 바로 그런 가정의 아래층이라는 말이다. 가다가는 귀뚜라미도 잠든, 깊은 밤에 부부간의 싸움 끝에 애잔하게 흐느끼는 젊은 여인의 울음소리는 어느 층에서 들려오는 한밤의 엘레지인지는 알 수 없지만, 친구들이 사주는 공짜 커피라고 과음한 탓으로 머리가 초롱초롱하여 잠 못 드는 밤을 위하여 가끔은 들을 만한 ‘애수의 소야곡’이다. 지난번 언젠가는 아파트 구내방송에서 ‘꼬리 없는 개’를 찾고 있었다. 하고많은 구내방송 중에 이런 방송은 난생 처음이다. 얼른 들어 ‘꼬리 없는 개’란 말이 우습기도 하고 한편 불쌍하기도 했지만, 개의 매력 포인트는 뭐니 해도 반가운 사람을 만나면, 꼬리가 빠지도록 흔들고 돌려대는 그 꼬리에 있거늘, 그런 꼬리도 없는 개를 누가 좋아할 것이라고 주인 집 아줌마는 아파트 구내방송까지 부탁을 했을까 싶었다. 거기에다 ‘보호하고 계시는 분은 135동 1201호로 연락해 주시면 후사하겠다.’는, 속에도 없는 빈말까지 첨부했다. 그 꼬리 없는 개는 12층의 높은 공간에서 고공공포증(高空恐怖症)에 시달리다 못해 무단가출을 했을지도 모른다. 오늘은 또 무슨 별난 구내방송이 나를 즐겁게 만들어줄까 하고 귀를 세워 기다리고 있었으나 해가 저물도록 목소리 걸걸한 중년 남자직원의 구내방송은 없고, 아파트 뒷산에서 독거노인 산비둘기가 언제나 같은 곡조로 구슬피 울고 있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2015 <에세이문학> 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