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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I Love NBA 원문보기 글쓴이: shooting
Dime지 번역입니다. 대화체로 되어 있고, 미국 스포츠 잡지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구성으로 되어 있습니다.
웨이드의 겸손함에 대해서 다시 한번 경외를 올리며, 히트 팸 여러분께 이 허접한 글을 바칩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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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크가 뭐라고 말했죠?”
드웨인 웨이드가 방금 들은 말을 확인하고자 몸을 기울여 이 쪽을 향한다.
이봐, 드웨인, 이거 왜이래. ABC방송국에서 동부 컨퍼런스 파이널 3차전 후에 실시한 인터뷰를 못 들은 건가? 당신은 디트로이트를 상대로 36득점을 쏟아 부었고, 샤크는 모두 있는 자리에서 이렇게 선포했지.
“난 드웨인 웨이드라고 불리는 세계 최고의 선수와 같이 뛰고 있다!”
당신, 진짜 이 말을 들어본 적 이 없는 건가?
“난 맹세코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는데요.” 웨이드가 말한다. “난 지금 진지합니다. 아무도 나에게 그런 말이 있었다고 귀뜸해준 적은 없었거든요.”
웨이드는 샤크의 말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하고, 그 말을 그냥 단순한 가망성을 언급한 것 정도로 여기기로 결심한다. “ 와~ 하지만, 샤크는 언제나, 어떠한 형태로든 칭찬을 해주거든요. 그리고, 그 횟수는 무지하게 많아요.” 그의 말은 이어진다. “ 샤크가 그동안 누구누구와 뛰어왔는지 생각해 보세요. 전성기에 올랐던 페니라던가, 몇 년 이상 코비와 함께해왔죠. 저는 샤크의 칭찬이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뜻은 그냥 ‘잘했어!’ 그 정도로 보시면 됩니다. 제 말, 아시겠죠?”
그와 함께하는 선수가 진실어린 칭찬을 던졌음에도, 이 웨이드라는 선수의 대응이, 정말 최고로 Cool하다.
웨이드는, 샤크의 칭찬에 대해서 그 자신은 실상 세계 최고의 선수가 되는 것은 꿈도 꿔본 적이 없다는 식의 겸손한 자세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몇 년 전, Dime지에 웨이드가 출연한 적이 있었다. 그것은 웨이드가 처음으로 잡지 커버에 등장한 때였다. 그가 우리에게 말하길, “더 큰 선수를 향해 간 다는 것은 정말 끝내주는 기분인 것 같아요. 이건 마치 폭풍속의 고요와 같다고나 할 까요.” 사실, 그 때에도 웨이드는 이미 최고를 향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어느 누구도, 심지어는 웨이드 본인조차 농구 코트 안과 밖에서 이런 훌륭한 성취를 이렇게 빠르게 이뤄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게다가 그의 발전은 끝난 것이 아니며, 끝나 가는 것도 아니다. 우리 Dime매거진의 스텝들은 운이 좋게도 웨이드의 프로 데뷔 초기부터 그와 충분히 접촉하고 있는 주된 언론의 통로이다. 그로인해 우리는 정말 동화같이 슈퍼스타 반열에 오른 웨이드의 기록을 남길 수 있었다. 그는 부끄럼 많은 루키 에서, 그의 이름을 딴 신발을 가진 슈퍼스타로, 큰 건의 계약을 보장받는 보장된 위치로, 샤크의 말을 따르자면, 전 세계에서 농구를 제일 잘 하는 선수의 타이틀을 가진 선수로 도약했다.
웨이드에 관한 이런 저런 화제들로 인해, 우리는 그를 마이애미의 한 운동장에서 만날 수 있었다. 그의 엄청난 스케쥴의 강한 압박을 받으면서 말이다. 마이애미 근처에 있는 Overtown의 깔끔한 농구 코트로 그의 검은색 Escalade차량이 들어온다. 그의 차의 스테레오 베이스 소리가 살짝 울린다. 코트에는 덩크를 하지 못하는 두 명의 고등학생이 계속 림을 향해 덩크를 시도하고 있다. 그들 이외에 코트는 썰렁하다. 그 학생들은 그냥 대충 농구를 하고 있으며, 그들 주변을 둘러싼 사진기들이나, 장비들에 대해서 특별한 감흥을 얻지는 못하는 것 같다. 그들은 우리에게 말하길, 우리가 그들이 쓰는 농구 장비를 좀 쓰겠다는 말에 "Cool" 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사실은 그들이 우리에게 던지는 트래쉬 토킹이 너무 심해서 그들 둘끼리 나누는 대화가 우리에게 들릴 정도였다.
드웨인 웨이드가 그의 Escalade차량에서 등장한다. 그는 손과 손목엔 얼음찜질을 하고 있으며, 그의 눈은 마이애미의 내리쬐는 태양을 피하고자 선글라스가 씌워져 있다. 트래쉬 토킹은 멈추고, 드웨인 웨이드가 코트 안으로 서서히 걸어 들어온다. 갑자기 둘 중 한 아이가 우리에게 물어 본다. “당신, 우리 농구공을 가져다가 드웨인 웨이드와 사진을 찍겠다는 거 였어요?” 갑자기 그들 둘은 펄쩍펄쩍 뛰고, 서로 이게 사실인가 때려보기에 여념이 없다.
이건 완전히 락 스타가 등장했을 때와 똑같은 반응이다. 이것은 요즘 드웨인 웨이드가 등장할 때 마다 나오는 공통적인 반응이다. 그러나 웨이드가 등장할 때 항상 이랬던 것은 아니었다. 2003년 웨이드가 5번픽으로 마이애미 히트에 지명되기 전날 밤으로 되돌아 가보자. 그는 타임 스퀘어에 그의 아들 Zaire와 같이 서 있었다. 그 때 그의 아들은 3살이었다. 드웨인 웨이드는 친근하고, 조용했지만, 동시에 매우 부끄럼을 탔다. 드래프트 신청자들이 사진을 찍을 때, 그는 그의 아들 Zaire를 팔에 안고 사진을 찍었다. 그는 아직 대학생이었지만, 너무나 어른스러웠다. 아버지로서 그는 22살에 불과했는데 말이다. 그날 밤 늦게 계획된 파티를 위해 다른 선수들이 뿔뿔히 흩어지는 동안(그것은 우리 회사의 “Dime Pre-Draft Party" 였다.) 드웨인은 우리를 찾아와 조용히 말했다. 그는 호텔에서 조용히 그의 가족과 쉬고 싶다고 말이다. 왜냐하면 그는 가서 좀 쉬는 것을 원했기 때문이다. 그는 그래서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선수들이 묶는 호텔 밖에 구름같이 모인 팬들도, 드웨인이 지나가는데 단지 몇 명만 그를 알아보고 사인을 요청할 뿐이었다.
그로부터 약 1년이 지나, 드웨인 웨이드는 우리와 다시 한번 뉴욕 시에 오게 되었다. 이번엔 Dime지의 13번째 커버 이자, 웨이드 자신의 첫 번째 잡지 커버 등장을 위해 말이다. 그는 그의 생애 첫 플레이오프 데뷔에서 엄청난 활약을 했다. 8번 시드로 올라온 그의 팀 히트가 그나마 힘겹게 동부 컨퍼런스 결승 언저리까지 올라 간 것은 순전히 그의 맹활약 덕이었다. 그의 동료 루키 르브론 제임스와 카멜로 앤소니에게 가렸던 한 시즌을 풀타임으로 보내고 나서, 그는 NBA스타로서 향후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 가 배우고 있었다. “이건 마치 50Cent의 노래 가사 같은 일이군요.” 웨이드가 말한다. "더 이상 구멍가게에서도 나는 걸어 다닐 수가 없네~.” 웨이드의 주변을 둘러싼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자신도 그 변화를 느낄 수 있었다. 그 1년 동안 르브론 제임스와 그의 추종자들이 NBA를 휩쓸었음에도 불구하고, 리그의 초점은 웨이드에게 맞춰졌다. 그리고 마이애미는 비로소 그들이 얼마나 대단한 선수를 보유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모든 것은 웨이드에 맞게 바뀌어 졌다. 시애틀 슈퍼 소닉스의 관계자는 웨이드의 루키시즌이 끝난 여름, 우리에게 이렇게 얘기 한다. “우리는 사실 웨이드를 얻기 위해 레이 앨런을 주려고 했어요. 그래서 팻 라일리에게 전화를 걸었죠. 그런데 라일리는 단호하게 말하더군요. ‘고맙습니다. 하지만, 웨이드는 절대 안됩니다.’ 라고 말이죠.”
올림픽에서 실망스런 모습을 보이고 웨이드는 그리스에서 돌아왔다. 하지만 무언가 계기를 얻어가지고 돌아온 듯 보였다. “그게 말이죠. 올림픽 이후 바로 시즌에 돌입하는 바람에 투쟁심을 그대로 간직한 채 시즌에 들어가서 그런거 같아요” 웨이드가 말한다. “사실, 올림픽이 끝나고 나서 미칠 것 같았어요. 솔직히 말하자면, 올림픽에서 전 뭐라 말할 것 없이 실망스러웠거든요. 그래서 그런지 다시 게임을 하고 싶다는 욕망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그는 올림픽 이후 남은 여름을 마이클 조던의 개인 트레이닝 스승인 팀 글로버와 시카고의 체육관에서 보냈다. 그리고 그에게 나타난 몇 개의 단점을 메우는데 주력했다. 그러고 나서 히트의 트레이닝 캠프에 등장한 웨이드는 몸이 더 좋아지고, 더욱 강력해 졌다. 그리고 드리블 없이 던지는 새로운 풀-업 점퍼를 선보였으며, 더욱더 타이트한 볼 핸들링을 선보였다. 그 결과는 새롭게 시작된 NBA 정규 시즌에서 게임당 평균 24득점과 7개의 어시스트, 5개의 리바운드를 기록하는 것으로 돌아왔다.
아까 우리가 말한 코트에서 웨이드를 만난 때는 올해 4월이었다. 그 날은 위저즈와 플레이오프를 시작하기 며칠 전이었다. 그는 카메라 앞에서 그의 수준이 대단하다는 것을 몸소 증명했다. 카메라 렌즈 앞에서 웨이드는 너무나 편안해 보였으며, 우리는 그에게 몇가지 지시할 것도 없었다. 마이애미 지역 TV방송국에서 그를 취재하러 와서 우리가 찍은 그의 모습을 조금 쓸 수 있겠냐고 물어보고 있었다. 드웨인은 방송국의 비디오카메라나 마이크도 별로 신경쓰는 것 같지 않았다. 그 순간 웨이드는 카메라를 정면으로 쳐다보며 그의 첫 Dime지 커버였던 포즈를 취했다. “Dime은 제가 표지 모델로 등장한 저의 첫 번째 잡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Dime은 항상 저에게 특별할 수밖에 없어요.” 웨이드가 말했다.
드웨인은 이제 완전히 “뜬” 스타다. 동시에 그는 타겟이 되고 있다. 시카고에서 자란 드웨인 웨이드가 불스전을 위해 시카고에 도착했을 때, 그의 적수는 역시 시카고에 있는 안드레스 노시오니였다. 웨이드는 그의 상대를 계속해서 놀렸고, 이것은 그가 신중하고, “나이스 가이” 라는 이미지에 손상이 가는 행위였다. 그 때 웨이드는 우리에게 말했다. “그거 아세요? 저는 나이스 가이 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저는 시카고에서 태어나고 자랐죠. 시카고는 절대 애송이 같은 녀석을 키워내지 않습니다.”
몇 주 후, 웨이드는 그의 농구인생에 있어 가장 큰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그것은 이제껏 경험해 보지 못한 것 이었다. 그는 속에서 불길이 끓어오르는 듯 한 고통을 느껴야 했다. 그가 걸을 때 마다, 숨쉴 때 마다 엄청난 고통의 그의 온 몸 전체로 퍼졌다. 그의 흉부 근육 부상은 디트로이트 피스톤스와 동부 컨퍼런스 파이널 6차전을 그냥 앉아서 지켜보게 만들었으며, 7차전은 절뚝거리면서 뛰게 만들었다. 그로 인해 마이애미의 농구엔 제동이 걸렸다. 웨이드의 상태는 그 누가 알고 있는 것 보다 나쁜 상태였다. 시즌이 끝난 후 웨이드는 말문을 열었다. “오직 제 팀 동료들만이 제가 그 때 얼마나 않 좋은 상황 이었나 알고 있죠. 하지만, 상황 자체는 너무 감동적이었어요. 그들이 저에게 그러더군요. ‘이봐, 니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고 우리에게 넘겨라. 우리가 어떻게든 팀을 이끌어 보겠다’ 그렇게 7차전 3쿼터, 우리가 1점차 지고 있고, 타임아웃 시간이 되었어요. 제가 다쳤던 지점에서 제가 그들에게 말했어요.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너희들에게 줄께. 이게 나의 마지막 도움이 될 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렇게 했어요. 결국엔, 내가 아무것도 못해준 게 되어 버렸지만요.” 그의 말은 이어진다.
“이제야 말하지만, 그땐 너무나 고통이 심했어요. 운동신경으로 운동하는 선수들은 고통을 달고 다닌다고 하지만, 전 숨쉬기도 힘들었는걸요.”
디트로이트와의 5차전 경기 후반전에 발생한 그의 정말 운 없었던 갈비뼈 부상은 NBA플레이오프 사상 최고로 지배력 있던 선수들 중 한명을 궤도에서 이탈시키는데 성공했다. 그의 지배력은 위저즈와의 2라운드 때부터 본격적으로 발휘되어, 위저즈에게 엄청나게 가혹한 폭격을 가했다. 그는 게임당 평균 31점을 득점했고, 4차전엔 무려 42점을 득점했다. 하지만, 최고로 위력적이었던 것은 2차전이었다. 2차전에서 그는 31점에 15개의 어시스트, 5개의 리바운드를 기록했다. 플레이오프에서 30득점 15어시스트 5리바운드를 건진 선수는 웨이드가 사상 5번째이다. 다른 선수들은 누가 있냐고? 매직, 제리 웨스트, 월트 프레지어, 오스카 로버트슨이 그들이다.
디트로이트와의 경기에서 부상당하기 전까지, 이런 페이스는 유지되었다. 다소 느린 템포로 전개되었던 1차전에 16득점을 빼고, 2차전에 40득점으로 용트림을 한 후, 계속 36득점, 28득점을 기록했다. 정말 대단하다. 3차전이 끝나고 샤크의 “웨이드는 세계 최고의 선수이다” 라는 선언이, 게임 후에 이어졌다. 웨이드가 건강할 때-웨이드는 샤크만큼이나 도미넌트한 선수였다. 게다가 드웨인은 인터뷰에서 그자신이 그 이상 활약 할 수도 있다고 밝혔다.
“만약 당신이 선수로 나온다면, 당신은 수많은 선택을 해야만 합니다. 팀에 득점력 있는 두 명의 선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누구를 고를지 힘들게 결정해야만 합니다. 전 매 플레이 마다 공을 요구할 수도 있고, 매일밤 40득점을 올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샤크 역시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는 우리 팀이 가야할 방향을 정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에게 공격을 시키는 것이 우리 팀이 더 쉽게 가는 방법입니다.”
Dime이 알고 있는 이 이야기가 언론에 퍼지기 전 부터, 잡지의 모든 스텝은 2년 전 그가 타임 스퀘어 가든에서 미래의 NBA스타를 꿈꾸기 시작할 때부터 그에게 매료되어 있었다. 그의 갈비뼈 부상은 치료되고 있고, 그는 시카고로 돌아가 팀 글로버와 함께 또다시 시즌 시작을 준비하며 맹훈련에 돌입했다. “전 기분이 지금 매우 좋아요.” 웨이드가 계속 말한다. “플레이오프의 경험은 저에게 매우 유익한 것 이었습니다. 당신이 살아가면서 사람들의 기대치를 딱 그 수준, 아니면 그 이상 충족할 수 있다는 거- 이거 정말 좋은 것 같습니다.”
드웨인 웨이드는 요즘 그의 새로운 신발에 얘기하는 것에 푹 빠져있다. 드웨인은 “THE WADE"라는 컨버스의 신발을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것을 다해 왔다. 그리고 그는 그의 신발의 과학과 기술이 어떻게 그의 열정과 결합했는지 설명하고 다닌다. 그래서 만약 누군가 그 말을 듣는다면, 웨이드가 그 자신을 위해 그 자신의 연구실에서 그 신발을 만들은 건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이것이 지금 그가 하고 있는 일중 하나다. 이것은 그의 직업의 일부인 것이다. -마케팅과 상품판매- 이것 말이다. 그의 이름을 딴 신발을 팔고, 의류업체 Sean John은 드웨인 웨이드의 모든 것을 치장한다. (지난 시즌 Sean John은 9번을 달고 있는 그의 저지를 팔았다.)
“매일매일 나와 나의 팀을 발전시키는데 관심을 쏟습니다.” 그의 말은 이어진다. “동시에, 혼자서 너무 오버하지 않으려고 해요. 어떨 땐 지금 나의 삶이 내가 상상해 왔던 것 보다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내가 새로 얻게된 명성과 함께 즐거움을 누리고 싶을 따름이예요.”
그는 그의 오른손에 항상 고무 밴드를(rubber band) 차고 다닌다. 이유는, 그가 단순히 부와 명예에 치중해, 거기에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함이라고 한다. 거기엔, 그의 번호, 3번과, 그의 아들의 이름과, 종교적인 교훈 글귀가 적혀있다고 한다.
“나를 믿어요. 나는 행운아니까요.” 드웨인이 다시 말한다. “언젠가, 어떻게든, 내가 선택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기다리는 자에게 복이온다고 생각했고, 신은 저에게 믿을 수 없을 만큼의 기회를 주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행운이 지나가 버린다고 해도, 나는 항상 똑같은 자세로 똑같이 기다릴 겁니다. 나에게 변하는 것은 시간밖에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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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I Love NBA 원문보기 글쓴이: shooting
첫댓글 글은 좀 길지만 히트팸에서 꼭 필독해야할 글 같아서 퍼왔습니다. 웨이드가 디트와의 7차전에서 이런 고통 가운데서 뛰었다니 몰랐네요. 암튼 현재보다 앞으로가 기대되는 선수입니다.
신앙생활은 사람을 성실하고 정직하게 만들어 주는것 같네요
(난입)디트와의 시리즈,특히 후반부에는 마이애미의 스타팅 멤버중에 100%컨디션으로 뛴 선수는 없었죠..다들 작은 부상 한두개는 안고 뛰었고..
히트팸에 꼭 필요한 글이죠...ㅎㅎㅎ 다른게시판에서는 못나눌수있는 팸원들간의 의견과 생각을 들어볼수도 있구요^^
정말 .. 이번에 파이널 같었으면 했는데..
보잔글 님 말씀이 맞습니다 ㅠ ,, 그때 당시 제가 -_- 어떤분 댓글에. 마이애미는 핵심선수들이 부상을 달고뛰었다.. 라고.. 나름대로의 변명을 해보았건만 -_-a 다른분들은 모두 그러더군요.. 핑계다.. 어차피 동부우승은 디펜딩챔피언인 디트꺼였다 -_-;;
정말 좋아요 이런글 정말 고맙습니다^^ 디트 시리즈 샼 허벅지, 웨이드 갈비뼈, EJ발목, 하슬렘 손가락, DJ 발뒤꿈치부상이었죠 아마?? 그래도 7차전까지 가다니 T.T
이번 시즌엔, 반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