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강공원의 문화유산들 (임진동래의총, 금정사)
▲ 임진동래의총 정문인 외삼문(外三門) |
외삼문은 오른쪽 문만
반 정도 열려 있었다. 태극마크가 요동치는 가운데
문과 왼쪽 문은 제
향이 있는 날에만 주로 열리므로 평소에는 굳게 입을 봉하고 있다.
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20기의 늙은 비석들이 1열로 늘어서 조촐하게 비석거리를 이루고
있다. 이들 비석은 조선 후기에 지어진 것들로 동래 시가지 정비로 이곳으로 강제 집합된 것
인데, 대부분 동래부사의 선정비(善政碑)와 불망비(不忘碑)이다.
지붕돌을 지닌 비석과 대머리처럼 허전한 비석, 푸른 피부의 비석까지 부산 인구만큼이나 다
양한 모습들을 보이고 있는데, 저들 중
진정으로 선정비(불망비)를 받을 자격이 되는 목민관
(牧民官)이 얼마나 있을지 침묵으로 일관하는 비석들에게 묻고 싶다. 아마도 적지 않은 비석
들이 그와 상관없이 지어져 외람되게 선정비를 칭하고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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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삼문 안쪽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비석들 (모두 20기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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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동래의총으로 인도하는 길 ▲
외삼문에서 내삼문 구간 길바닥에는 박석이 꼼꼼히 입혀져 있다. 무덤 주위로
소나무가
삼삼하여 나도 모르게 옷깃을 여미게 하며, 길 왼쪽
담장 너머는 금정사이다.
▲ 소나무 그늘에 자리한 임진동래의총 내삼문(內三門)
내삼문도 오른쪽 문만 반 정도 열려있다.
▲ 임진동래의총 충혼각(忠魂閣)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임진동래의총이 이곳에 안착했던 1974년에
지어졌다.
충혼각 바로 뒤쪽 높은 곳에 임진동래의총이 있으며, 보통 오른쪽
계단으로 올라가서 무덤에 예를 표하고 왼쪽 계단으로 내려오면 된다.
▲ 임진동래의총(壬辰東萊義塚) - 부산 지방기념물 13호 |
임진동래의총은 임진왜란 때 동래성 전투에서 왜군에 맞서 싸우다가 전사한 동래 사람들이 안
장되어 있다. 1592년 4월 13일 부산진(釜山鎭)을 점령한 왜군은 동래부의 중심인 동래성을 공
격했는데, 성을 지키는 유리한 입장임에도 왜군의 압도적인 병력과 화력 앞에 금방 털리고 만
다.
이때 전사하거나 살해된 동래성 군사와 백성들의 시신은 대부분 남문 해자(垓子)와 그 부근에
버려졌는데, 오랫동안 잊혀져 있다가 1731년 동래부사 정언섭(鄭彦燮)이 동래읍성을 수축했을
때 옛 남문터에서 적지 않은 유골과 포환(砲丸), 화살촉이 발견되었다. 하여 그 시신을 거두
어
삼성대(三姓臺) 서쪽 구릉지(내성중학교 부근)에 6개의 무덤을 만들어 안장하고 '임진전망
유해지총(壬辰戰亡遺骸之塚)'이란 비석을 세웠다. 그것이 이 무덤의 첫 이름이다.
조선 조정에서 제사 비용을 위해 제전(祭田)을 내리고 동래향교에 제사를 맡겨 매년 한가위에
제를 지내게 했으며, 순절일(4월 15일)에는 관에서 장사(壯士)를 보내 제사를 지냈다.
왜정은 토지개간을 이유로 무덤을 영보단(永報壇, 복천박물관 자리) 부근으로 강제 이장시켰
는데, 이후 비석도 그곳으로 추방시켰다. 그러다가 1974년 복천동 개발로 다시 짐을 싸고 지
금의
자리에 안착했으며, 그때 '임진동래의총'으로 이름을 갈았다. 즉 임진왜란 때 동래성에
서 순절한 이름 없는 이들의 무덤이란 뜻으로 여기서 '총(塚)'이란 주인을 모르는 무덤에 붙
이는 이름이다.
제향은 동래성이 함락된 음력 4월 15일에 무덤 밑에 있는 충혼각에서 지내고 있으며, 동래구
청에서
직접 주관하고 있다. |
▲ 남쪽에서 바라본 임진동래의총 |
임진동래의총과 충혼각은 동래읍성이 있는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왜정에 의해 제자리를 떠났
던 망미루와 독진대아문, 이섭교비 등은 모두 제자리로 돌아가는 기쁨을 누렸지만 임진동래의
총은 제자리에 이미 건물이 들어찬 상태이다. 그렇다고 그 부근으로 옮기자니 무덤의 덩치도
크고 딸린 식솔(충혼각, 외삼문, 내삼문, 돌담)도 많아 그들을 수용할 자리가 여의치 않다.
하여
무덤만 제자리로 돌아가지 못한 채, 이곳에 눌러 살고 있다. 허나 소나무 숲에 둘러싸인
이곳도
자리가 괜찮아 계속 머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무덤 앞에는 제물을 올릴 수 있는 상석(床石) 1기가 누워 있으며, 무덤 밑도리에는 호석을 둘
렀는데,
무덤 정면 밑에는 제를 지내는 충혼각이 있고, 뒤쪽에는 담장을 둘러 성역의 경계를
구분 지었다. 이 담장은 외삼문에서 임진동래의총까지 빙 둘러져 있다.
* 임진동래의총 소재지 : 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동 산 17-7 |
▲ 충혼각 옆구리에 있는 '임진전망유해지총' 비석
1731년 동래부사 정언섭이 세운 것으로 비문은 그가 작성했다. 비석 높이는 103cm,
너비 45cm로 앞면에는 '임진전망유해지총' 8자를, 뒷면에는 10행 분량으로
무덤의 내력을 기록했다.
▲ 금정사 보제루(金井寺 普濟樓) |
임진동래의총을 둘러보고
바로 남쪽에 자리한 금정사로 넘어갔다. 비록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지만 서로를 이어주는 문이 닫혀져 있어 외삼문으로 나가 보제루로 빙 돌아가야 된다.
금정사 자리는 원래 동래부 사형장으로 죄인들의 목을 가차없이 썰었던 으시시한 곳이다. 바
로
그 현장에 1954년 승려 금우가 그 원혼을 달랜다며 인적도 거의 없던 이곳에 절을 세웠다.
석주가 중건하여 선학원(禪學院)에 등록했으며, 현재 대웅전과 보제루, 칠성각, 요사 등 5동
정도의 건물을 지니고 있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이 있는데 바로 그를 보고자 간만에 금정사에 발을 들였다.
* 금정사 소재지 : 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동 282 (우장춘로
157-59 ☎ 051-555-1208) |
▲ 소나무숲에 감싸인 고적한 금정사 경내 (정면 건물이 대웅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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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제루 부근에 자리한 5층석탑 |
▲ 대웅전 옆구리에 있는 칠성각(七星閣) |
▲ 대웅전 목조아미타여래좌상 - 부산 지방유형문화재 115호 |
금정사의 유일한
문화유산인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멀리 전북 완주군(完州郡)에서 넘어온 것
이다.
1677년 혜희(慧熙)를 중심으로 한 7명이 제작하여 고산현(완주군 북부) 대둔산(大芚山) 용문
사(龍門寺)에 봉안했던 것으로 그 절이 사라지자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이곳에 안착했다. 좌우
에 조그만 협시보살(夾侍菩薩)은 그의 허전한 옆구리를 채워주고자 근래 붙여놓은 것으로 서
로간의
덩치가 너무 차이가 나 마치 아비와 어린 자식들이 나란히 앉아 가족 사진을 찍는 것
같다.
머리는 나발(꼽슬)로 무견정상(無見頂相, 육계)이 두툼히 솟아있으며, 신체에 비해 머리와 얼
굴이 지나치게 크다. 고개는 앞으로 조금 내밀어 밑을 굽어보는 모습인데, 이는 조선 후기 불
상에서 많이 나타난다. 눈썹은 살짝 구부러져 있고, 눈은 지그시 정면 밑을 바라보고 있으며,
코와 붉은 입술은 조그맣다.
두꺼운 목에는 삼도(三道)가 획 그어져 있고, 몸통에는 법의(法衣)가 걸쳐져 있는데, 수인(手
印)은 하품중생인(下品中生印)을 취하고 있다. 무릎의 너비가 상반신보다 넓어 안정감이 있으
며, 법의가 발까지 모두 가리고 있다.
이 불상이 속세의 주목을 받은 것은 바로 그의 뱃속에서 복장유물(腹臟遺物)이 나왔기 때문이
다. 조성발원문과 후령통, 7종 8점의 경전류, 목판으로 찍어낸 수백 매의 다라니가 쏟아져 나
왔는데, 조성발원문을 통해 그의 탄생시기와 고향을 알게 되었다. 지금은 대웅전의 주인 역할
을 하고 있지만 원래는 석가여래상 옆을 지키던 협시상으로 다른 협시상은 전주(全州) 일출암
에
있다고 한다.
후령통에서는 조성발원문 외에 그 시절 흔치 않았던 동으로 만든 오보병(五寶甁)이 나왔고 경
전류에서는 당시 훈민정음(訓民正音) 표기법이 남아있어 국문학 연구에도 좋은 자료가 되어준
다. 게다가 판각 연대도 나와 있어 조선시대 만다라 연구에도 좋은 단서를 제공해준다. 바로
옛
사람들의 그런 배려가 불상의 과거는 물론 그 시절의 여러 상황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고
그것들이 이 아미타불을 더욱 돋보이게 한 것이다.
복장유물은 절에서 따로 관리하고 있어 관람은 거의 불가능하나 그들을 오랫동안 품었던 아미
타여래좌상은 이렇게 대웅전에서 중생들을 맞이하고 있다.
금정사를 둘러보니 벌써 17시가 넘었다. 어둠의 기운이 스르륵 내려와 밝은 기운을 잡아먹으
니
햇님도 그 등쌀에 떠밀려 서둘러 퇴근 준비를 한다. 비록 낮은 짧지만 그날 목적한 정처(
定處)를 싹 둘러보니 은근히 배가 부르다. 더 이상 욕심을 부릴 필요도 없고, 당일 일정으로
콩 볶듯 내려왔기 때문에 다시 나의 제자리로 돌아가야 된다. 아무리 부산에서 서울까지 고속
열차가 2시간대로 연결해준다고 하지만 여전히 먼 거리이기 때문이다.
온천장 부근에서 저녁으로 순대국밥을 섭취하고 지하철로 구포역(龜浦驛)으로 이동하여 서울
로 가는 무궁화호 열차에 고된 몸을 실었다. 부산으로 올 때는 고속열차(무료 쿠폰 사용)로
왔으나 제자리로 돌아갈 때는 느림의 미학도 느낄 겸, 그리고 천하에서 가장 빈약한 내 지갑
의 사정도 고려할 겸, 빨간색 무궁화호를 이용했다.
열차표를 판매하는 구포역 역무원이 은근히 고속열차를 권하며(무궁화호를 타면 지하철 막차
못탑니다. 이런 식으로) 나의 지갑을 자꾸 흥분시키려고 했지만, 빨리 가나 느리게 가나 서울
만 가면
되고 서울의 교통과 지리는 지구에서 본인을 능가할 사람이 없으므로 흔쾌히 거절했
다. <역무원의 지하철 막차 설교에
속으로 몇 번을 웃었는지 모름>
서울역까지는 5시간이 걸려 자정 너머에 도착했으며, 집으로 가는 시내버스를 타고 나의 제자
리로 돌아왔다. 그러고 문득 깨어보니 난 내 방에 있었다. 부산에 갔다온 것이 아리송할 정도
로 말이다. 그렇게 그날은 흩어져 나의 기억력까지 햇갈리게 만든다.
이렇게 하여 벌처럼 날라가 개미처럼 올라왔던 부산 연말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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