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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님의 고향은 전북 순창이시다. 조혼을 하셨는데 부인이 부끄러워 얼굴을 들어 쳐다보지도 못하고 3년간 남매같이 지냈다. 이런 아들을 보는 아버지는 너무 답답하게 생각되어 객지로 내보내기로 했다. 때마침 부산에 사는 아들의 친구 삼촌이 와서 딸려 보냈다. 공책이나 연필살돈도 제대로 안주시던 아버지가 그때 돈 300원을 주워 사람 되어오라고 객지로 내몰았다. 장로님은 그때 19세 때였다. 친구 삼촌은 리어카를 사서 숯장사를 하게했다. 참숯 2섬을 사서 3섬으로 만들어 주면서 팔아오라고 했다. 농촌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자라온 순진한 장로님은 타향 부산에서 낯 설은 골목길을 누비며 ‘숯 사시요’를 외쳤다. 간혹 일본여자가 나와 숯섬을 들어보고는 근이 부족하다고 하면서 조선사람 나쁘다고 핀잔을 주면서 사주지를 않았다. 그때마다 숯장사는 부끄럽고 괴로웠다. 아버지는 사람 되라고 그 큰돈까지 주워서 내보냈는데 언제나 사람이 될 것인가 땅이 꺼지도록 한숨만 나오고 리어카를 끄는 발걸음은 천근이나 되게 무거웠다. 그렇게 떠돌이 생활을 하던 어느 날 아는 사람소개로 일본 목수 밑에서 목수 일을 배우게 되었다. 바보 아닌 바보는 식모살이를 하면서도 기쁘고 즐거웠다. 밤 12시가 넘도록 충성을 다해 열심히 배워서 3년 만에 졸업장을 받았다.
“사라지면 살아진다.” 오북환의 말이다. “내가 사라지면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진다.”는 뜻이다. 오북환은 믿음을 갈라디아서 2;20절 말씀으로 요약하였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고 계시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여 나를 위해 그 몸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은 덕분에 지금 내가 참 생명을 얻었습니다.” 오북환의 삶은 철저한 자기부인(自己否認)이었다. 철저한 자기부인의 정신은 그리스도를 사랑하며 그리스도를 사는 삶으로 이어졌다.
오북환의 아버지는 전라북도 순창군의 초기 기독교인 가운데 한 명으로 자신의 집을 예배당으로 사용할 정도로 믿음이 있는 사람이었다. 오북환은 1953년 광주 금동에서 ‘동옥가구점’을 동생 오동옥과 같이 운영하였다. 동생 오동옥은 훗날 목사가 되었으며 지금도 생존해있다. 1940년 9월 신사첨배 거부로 동생과 함께 수감되었으며 5개월 후 풀려나 광주 생활을 접고 남원으로 이주 하여 서재선, 배영진과 함께 남원 천 거리에 삼일목공소를 차렸다.
오북환은 자신의 목공소에서 비밀리에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면서 1943년 이현필을 초청해 성경 강해와 하나님 말씀을 들었다. 1944년부터 1946년 초까지 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 도구밖골에서 말씀 탐독과 기도에 전념하면서 영적 수련을 쌓고, 이는 후일 동광원 지도자로서 일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 그는 가족을 대동하였지만 이미 출가한 상태였다. 오북환은 사회복지법인 귀일원이 태동될 때 초대 이사장을 맡아 귀일원이 뿌리를 내리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경기도 일동에서 ‘그 나라 공동체’를 이끌고 있으면서 한때 동광원 계명산 분원에서 주일 예배를 인도했던 윤공부목사는 오북환을 이렇게 말한다. “제가 장로님을 처음 뵈었을 때 한 방에서 며칠을 지냈습니다. 그런데 조금도 불편하지가 않았습니다. 누어있다가도 ‘윤목사’하고 부르시면서 저에게 질문을 하셨습니다. 제가 대답을 못하면 ‘목사가 그것도 몰라’하시지만 그냥 포근했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성경공부를 했습니다. 저도 목사여서 성경공부 많이 시켜봤지만 한 사람을 위해 이렇게 낮밤 가리지 않으시고 열성으로 가르치심에 저는 그저 감탄할 따름이었습니다. 그리고 장로님의 가르침이 저에게는 그대로 피와 살이 되었습니다.”
귀일원 가족들은 오북환이 성경을 통달했다고 말한다. 그는 성경 공부를 할 때 스스로 성경을 찾지 않고 어디 어디를 찾아 읽으라고 하였다. 공부하는 사람들이 신기해서 어떻게 그렇게 성경을 다 외울 수가 있냐고 질문하면 “은혜를 받으니 외워진다.”고 대답하였다. 그는 정인세, 김준호와 더불어 동광원의 3대 기둥의 하나였다. 현재 귀일원의 오세휘 이사장이 그의 둘째아들이다.
오북환 장로는 남원일대에 이현필 선생의 감화로 선풍이 일어났을 때 맨 먼저 이선생께 심취한 인물이다. 평생 이 선생의 친구이자 제자로서 살고 있다. 그는 남원 광한루 뒤에서 목공소를 하다가 이선생을 모시고 자기 목공소(삼일목공소)를 내놓아 집회소로 삼았다. 지금도 남원 동광원에 유하면서 경건의 생활에 힘쓰며, 손수 산간을 개간하여 농사를 짓고 있다. 또한 분원의 건물을 수리하고 짓는데 직접 일을 한다. 이 선생보다 나이가 몇 해 위이지만(2000년 현재 92세) 자신은 항상 15세(철이 들기 시작한지 15년)라고 한다. 평소 머리를 삭발하고 다녀서 그의 외모는 승려과 같다.
열심히 돈을 벌어 세계 일주를 하는 것이 큰 꿈이었다. 목공소를 내기 위해 어머니를 모셔왔다. 고향에 남겨둔 부인은 시집과 친정집을 왕래하다가 결혼 한지 6년 만에 친정집에서 “에이 무정한 사람” 이 한마디를 남기고 세상을 떴다. 처녀의 몸으로 깨끗이 세상을 떴다. 하루는 친구와 함께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일어서는데 갑자기 무릎이 꾸뻑했다. 종기와 관절이 전신으로 퍼져 자리에 눕고 말았다. 세상은 캄캄해지고 아름답던 꿈들은 수포로 돌아갔다. 절망만 쌓이고 죽고만 싶었지만 어머니 앞에서 죽을 수도 없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지극한 정성으로 6개월 만에 겨우 일어나 출입을 할 수 있었다. 하루는 밖에 나갔다가 벽에 붙어 있는 광고를 보고 부산초한교회를 찾아가셨다. 부흥회가 열리고 강사는 김 인서 장로님이였다. 설교제목은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가였다. 장로님도 늘 궁금했던 문제였다. 인생의 제일 큰 목적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그날 밤 그 설교의 말씀이 옥토에 떨어진 씨가 되어 아버지의 은총으로 100배의 결실을 맺게 된 것이다. 그때 장로님은 25세 때였다. 그때부터 예수를 믿게 되어 26세 때 교인들의 지시에 따라 열심 한 처녀와 결혼을 했다. 그리고 6년간 교회에 충성을 다했다. 그러나 영혼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는 인생문제 즉 불안과 초조와 고독과 두려움은 날이 갈수록 더해만 가고 평화는 없었다.
처음에는 목사로부터 모든 교인들까지 깨끗한 천사로 보였는데 말씀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고멀게 보였다. 그래서 고민 끝에 교회 나가는 종교 생활을 그만 두고 집에서 말씀보고 기도하시면서 살기로 했다. 그동안 삼남매를 낳아 기르면서 대외 적으로는 행복한 생활이었다. 3.1목공소라는 간판을 붙이고 배 장로님 서 집사님 세 사람이 함께 목공소 일을 했다. 그러나 영혼의 문제는 계속되었다. 영혼의 평화와 기쁨은 없었다. 교회에 나가나 안 나가나 마찬가지였다. 목구멍에 붙어있는 가래와 같이 불안과 허무는 여전했다. 그렇게 방황하던 어느 날 이 현필 선생의 거룩한 순결의 향기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목이 탄 영혼에게 큰 기쁨의 복음적 희소식이었다. 며칠 후 뵙고 싶다는 연락을 받으신 하나님의 종은 남원 3.1목공소를 찾으셨다. 하나님의 크신 은총과 섭리가 함께 역사하셨다. 두 분의 맛남은 천재일우의 만남이었다. 장로님은 하나님의 종을 뵙자 지금까지 입에만 물고 있던 큰 질문을 무겁게 던지셨다.
“어떻게 믿어야 예수를 바로 믿을수 있을까요”했다. 하나님의 종은 망설이지 않으시고 간단하게 대답하셨다.“오장치 져야지요!” (깡통 차야지요.) 하셨다. 이 말씀을 듣는 순간 지금까지 답답하게 막혀있던 생수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두 생수는 합류되어 성령의 은총으로 힘차게 흐르기 시작했다.
“오장치 져야지요.” 이 말씀을 듣는 순간 목에 붙어있던 가래가 뚝 떨어지고 감격의 눈물이 흘렀다. 10년 전 인생의 목적을 알았을 때 얼마나 기쁘고 감격했던가. 그러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드리는 진리의 길에서는 빗나간 길에서 방황하는 자신을 발견하신 것이다. [롬10: 2 - 공동번역]제 나름의 복음은 극악 극선이 하나 되는 것이다.
이제야 인생의 목적이 바로 보이고 말씀이 바로 보이고 십자가의 길이 진리요 생명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장로님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예’ 하고 순종하신 아브라함과 같이 고향과 친척 그리고 목공소를 뒤로하고 거지가 된 지도자를 따라 삼남매와 부인 5식구는 오장치를 지고 하늘가는 밝은 길, 거룩한 길, 구원의 길로 나선 것이다. 아멘.
1942년 장로님 34세 때 출가하셔서 60년을 한길만을 걸어오셨다. 부인이 시험에 들어 방황하다 나가도 하나님이 주신 진리의 사명의 길에서 충성을 다하셨다. 그리고 천지가 진동하는 큰 깨달음을 외치셨다.
“복음은 극악 극선이 하나 되는 것이다.”라고 극선이신 예수님을 만나는 길은 내가 극악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과 막달라 마리아.
사부님 생존 시 경기도 계명산 분원에 계신 장로님을 몇 달 후 방문하셨다.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냐고 물으시자 ‘저는 독사같이 살았습니다. 저는 독사입니다’ 하시자 사부님은 ‘나는 독사의 왕이요’라고 하셨다. 거룩한 화답이었다. 동광원의 믿음의 두 뿌리는 두 분 두 독사인 것이다. 극악이 되셔서 극선이신 예수님을 만나 하나가 되셨다.
☉심판과 구원이 긍정과 부정이 동시에 성취된 것이다. -아멘-
사순절은 부활절 40일 전, 재의 수요일에서 시작해 성토요일에 끝난다. 약 4세기경부터 시작되었는데, 예수가 세례를 받은 뒤 40일 동안 황야에서 금식을 하고 사탄의 유혹을 받으며 보낸 기간을 기념해 생긴 관습이다. 금식의 규칙은 매우 엄격하다. 예를 들어 동방정교회는 하루에 해가 진 다음에 한 끼 식사만 허용하며, 육식은 물론 생선과 달걀도 40일 내내 금한다. 하지만 다른 그리스도교 교회에서는 그 규칙이 점차 느슨해졌다.
그래서 요즘은 사순절 기간 동안 특정한 음식, 즉 좋아하는 음식을 피하고 작게나마 개인적 희생을 치르도록 하는 정도로 바뀌었다. 사순절의 주된 정신은 참된 자아를 추구하고 영적인 준비를 갖춘 뒤에 부활절을 맞아 예수의 부활을 축하하려는 데 있다. 사순절에는 엄격한 단식을 해야 하기 때문에 사순절 이전의 화요일은 대대적으로 잔치를 벌이는 날이 되었다. 지금도 미국의 뉴올리언스 같은 지방에서는 마르디 그라(Mardi Gras), 즉 '기름진 화요일'에 잔치를 벌인다.
사순절이라는 말은 사실 성서에 없다. 사순절을 뜻하는 영어 단어 'Lent'는 '봄날'이라는 뜻의 영어 고어인 '렌크텐(lencten)'에서 나왔다. 초기 그리스도교도들은 그 기간을 테사라코스테(Tessarakoste)라는 그리스어, 혹은 쿠아드라게시마(Quadragesima)라는 라틴어로 불렀는데, 둘 다 '40번째'라는 뜻이다.
그래서 요즘은 사순절 기간 동안 특정한 음식, 즉 좋아하는 음식을 피하고 작게나마 개인적 희생을 치르도록 하는 정도로 바뀌었다. 사순절의 주된 정신은 참된 자아를 추구하고 영적인 준비를 갖춘 뒤에 부활절을 맞아 예수의 부활을 축하하려는 데 있다. 사순절에는 엄격한 단식을 해야 하기 때문에 사순절 이전의 화요일은 대대적으로 잔치를 벌이는 날이 되었다. 지금도 미국의 뉴올리언스 같은 지방에서는 마르디 그라(Mardi Gras), 즉 '기름진 화요일'에 잔치를 벌인다.
사순절이라는 말은 사실 성서에 없다. 사순절을 뜻하는 영어 단어 'Lent'는 '봄날'이라는 뜻의 영어 고어인 '렌크텐(lencten)'에서 나왔다. 초기 그리스도교도들은 그 기간을 테사라코스테(Tessarakoste)라는 그리스어, 혹은 쿠아드라게시마(Quadragesima)라는 라틴어로 불렀는데, 둘 다 '40번째'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