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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에 (용수보살龍樹菩薩의) 십주비바사론十住毘婆沙論 십주비바사론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 가운데는 특히 염불念佛하는 사람들은 한 번씩 꼭 더듬어 볼만한 것입니다. 어째 그런고 하면,
용수보살은 십주비바사론에서 난행문難行門 이행문易行門이라, 난행문難行門 어렵게 수행하는 문門과 쉬울 이易자 이행문易行門 이라, 이행문 이것은 쉽게 수행하는 문門이란 말입니다.
이렇게 저렇게 이론도 그렇게 복잡하게 많이 세우고 또 아주 애쓰고 용맹정진도 하고 말입니다. 이런 법이 이른바 난행문이라고 하면 이행문은 이것은 그냥 믿음으로 해서 믿음으로 해서 (염불에 의해서) 막(쉽게) 나간다 말입니다.
다 그렇지는 않다 하더라도 대개 논리적으로 따지는 분별 지혜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순수하게 믿음을 좋아하고, (또는 어떤 분은) 화두만 참구하고, 그렇게 되는 것이 보통 아니겠습니까. 근기根器가 차이가 있어놔서 우리가 무엇이 옳고 그르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마땅히 어려운 문만 있고 쉬운 문이 없어 놓으면 그때는 불교가 그마만치 옹색하단 말입니다. 그런데서 용수보살은 자비심에서, 노파심에서 (염불문인) 이행도易行道를 냈다고 볼 수가 있겠지요.
부처님 법문 가운데는 다 들어있고 또 모든 법을 다 알고 (있는) 도인들이 해설은 미처 못 했다 하더라도 다 통달무애通達無碍한 분들이지만 그때 상황 따라서 너무 치우치거나 딱딱하기만 하면 그때는 그야말로 참, 아까 말씀드린 이행문이라 쉬울 이易자, 행할 행行자 이행문易行門을 내놓고서, 믿음을 주로 하는 그런 법을 그때는 필연적으로 응당 제시를 했야 하겠지요.
믿음을 주로 하는 것이 굉장히 필요합니다. 지성知性적으로는 그냥 잘난척도 하고, 무엇을 많이 알기를 한다 하더라도 특히 우리는 감성感性을 무시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정말로 부처님은 바로 생명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생명인데, 자기를 비롯한 일체생명의 근원인 (부처님이) 생명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은 다만 논리나 또는 지성적인 것이 아니라 생명이기 때문에 생명을 생명으로 순순히 받아들여야 한단 말입니다. 생명을 생명으로 순수히 받아들이는 것이고, 또 우리 마음은 무엇인가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항시 있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은 어떤 누구나가 다 정도의 차이 뿐이지, 어딘가 가고 싶어하는 어딘가에 이르고 싶어하는 향수를 도저히 지울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본래적으로 바로 부처이기 때문에 부처가 못 되는 한에는 항시 불안스럽고 어떠한 것도 우리 마음을 못 메웁니다. 물질적인, 상대 유한적인 것은 어느 것도 우리 마음을 못 메웁니다. 따라서 우리 중생이 불안한 것은 필연적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지금 서구의 실존철학實存哲學이나 그런 철학들은 주로 불안 의식이 기초가 되어서 이른바 첩첩히 나왔단 말입니다.
불안한 마음을 해탈하는, '그런 계박繫縛을, 그런 구속을 풀고 싶다, 뭣인가 벗어나고 싶다' 그런데서 이른바 '실존이 무엇인가' 말입니다. '나'라는 것은 원래 어떠한 것이고 우주는 어떤 것인가, 우주실상은 무엇인가?' 이런 것을 탐구하지 않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실존철학을 한 사람들은 대체로 불경을 참고를 많이 했습니다. 키에르케고르(Kerkegaard 1813~1855)나 하이데거(Heidegger Martin 1889~1976)나 또는 야스퍼스(Jaspers Karl 1883~1969)나 모두가 다 불경佛經을 참고를 많이 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실존주의 철학자들) 글을 보면 불경적인 그런 내용이 상당히 많이 들어있단 말입니다. 따라서 불안한 사람들은 법화경을 봐도 불안하고 다 불안스럽단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저것, 경이고 무엇이고 다 던져 버리고서, 마음으로, 생명의 본바탕인 생명의 본고향인 부처님 자리를 생각한다 말입니다. 사실 우리네 할머니나 어머니들이나 그분들이 불경을 거의 다 전혀 모른다 하더라도 하루에 천 번 만 번 염주만 헤아리는 그런 태도, 그리고 그분들의 행동이나 그 얼굴이나 어디를 보나 자비심이 흘러 있고 말입니다. 학자보다도 누구보다도 (얼굴을) 보면 자비심이 흘러 있습니다. 그런 것은 모두가 다 순수의 그런 심성이 그만치 불성佛性 쪽으로 가까워지고 정화가 되어 있단 말입니다. 따라서 그분들은 이치로는 모른다 하더라도 남을 미워할 수가 없고 남한테 듣기 싫은 말을 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에 대한) 그리운 마음, 부처님을 흠모 추구하는 갈앙심 갈앙심渴仰心 이것은 우리 마음을 비약적으로 정화를 시키는 것입니다 (갈앙심은) 굉장히 필요한 것입니다. 누구한테 무엇을 베푼다 하더라도 '주 하나님의 이름으로 해서 베풀어라' '주 하나님의 이름으로 아멘' 이란 말입니다. 그런 태도 같은 것도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기독교의 말이기 때문에 모두가 다 미신 같다고 할 것이 아니라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처님 사상에서 본다면 우리가 참 좋게 이해가 됩니다. 순간 찰나도 부처님(하나님이라 이해할 때)이란 생명자리를 안 떠나기 위해서 그런다 말입니다.
염불念佛이란 본뜻도 불이불不二佛이라, 아니 불不자 두 이二자 부처와 '나'와 둘이 아니라는 뜻으로 해서 염불한다 말입니다. 부처가 무슨 저 밖에 있다고 그래서 염불하는 것입니까. 다만 중생이 모르니까 극락세계를 시설示說하는 것이지, 천지우주가 이대로, 사바세계가 바로 적광토寂光土라, 바로 극락세계란 말입니다.(극락세계의 2가지 차원 참고) 다만 우리 중생이 어두워서 못 본다 말입니다.
따라서 염불도 불이불不二佛이라, 부처와 ('나'와) 둘이 아니다, 또는 불리불不離佛이라, 아니 불不자, 떠날 리離자 부처와 떠나지 않기 위해서 염불한다 말입니다. 화두나 똑같습니다. 그런데 가서, 이른바 아까 말씀드린 이행문, 쉽게 (닦아)나가는 문, 그리움이라는 것은 갈앙심渴仰心은 이것은 우리 마음을 논리를 다 배제하고 순수 직관적인 것이지만 우리 마음을 비약시킵니다. 어떤 때나 삼매三昧란 것은 비약이 그렇게 들어가야 삼매가 되는 것이지, 비약이 안 들어가면 삼매가 못되는 것입니다.
심회연모心懷戀慕 갈앙어불渴仰於佛하면 즉종선근卽種善根(편종선근便種善根)이라, (법화경法華經 여래수량품如來壽量品) 저는 말씀드리다가 밑천이 동나면 이 법문을 보통 말씀을 많이 합니다. 마음으로 부처님에 대해서 연모戀慕하고 갈앙渴仰을 하면 즉종선근 이라,바로 그것이 우리 선근의 종자가 된다 말입니다. 선근을 심습니다. 이것은 법화경法華經 수량품(여래수량품如來壽量品)에 있습니다. (심회연모心懷戀慕 갈앙어불渴仰於佛 편종선근便種善根)
우리가 부처님을 그리워하고 우리 자성自性을 그리워하기 위해서 극락세계極樂世界의 그런 찬란스러운 모양(장엄莊嚴)도 우리한테 말씀하신 것 아니겠습니까? 화장세계華藏世界도 그런 것이고 말입니다.
우리가 신앙을 하는데 있어서 결정신심決定信心, 결정신심이 없으면 갈앙심渴仰心이 잘 안 나옵니다. 따라서 결정신심決定信心을 두기 위해서 노력을 하고 정진을 해야 할 것입니다.
이 결정신심決定信心을 내는데 있어서 경을 보면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심불상속고心不相續故로 부득결정신不得決定信이라' 가사, 화두면 화두, 염불이면 염불 그러한 공부가 상속하지 않기 때문에 심불상속고心不相續故 그 공부가 상속되지 않기 때문에 부득결정신不得決定信이라, 결정적인 꼭 옳다는 확신을 못 갖는다는 말입니다. 어떤 공부나 우리가 신信만 있고서 해解가 없으면 또 안 되는 것이지만 설사 해解가 있다 하더라도 신信이 없으면 그냥 퇴타退墮하고 맙니다. 마땅히 믿음이라는 하는 것은 인간관계에 있어서나 특히 우리 생명을 바치고 하는 신앙에 있어서는 더욱 그럽니다.
따라서 염불상속고念不相續故 부처를 생각念하는 그런 것이(마음이) 상속되지 않으면 결정신심이 안 나오니깐(부득결정신不得決定信) 우리로써는 마땅히 결정신심을 얻기 위해서는 참선을 하든 또는 염불을 하든 기도를 모시든 간에 결정신심決定信心을 얻어 버려야 갈앙심渴仰心이 생깁니다.
다 대체로 아시는 바와 같이 이른바 종교 일반적인 의미에서도 순명順命이라, 순할 순順자 목숨 명命자 말입니다. 우리 신앙 대상에 대해서 순수하니 그야말로 환희심으로 따라가는 그런 마음이 없으면 신앙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순명이 있다고 생각할 때는 필연적으로 정결淨潔이란 말입니다. 정결이라. 부처님의 명령에 우리가 순순히 따라야 하겠지요. 따르면 응당 그때는 정결이 되는 것이고 따라서 삼세제불三世諸佛이 모두가 다 검소한 생활을 하셨기 때문에 우리 생활이란 것은 청빈淸貧하게 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맑은 청淸자, 가난할 빈貧자. 청빈 이것은 우리 수행자의 하나의 무기입니다. 우리가 신앙 대상에 대한 순명이 없고 또는 정결하지 못하고 또는 청빈한 그런 생활을 안 한다고 생각할 때는 이런 것은 사실은 출가사문이라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땅히 우리는 사명감과 자랑과 긍지를 느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번 시간에 말씀드리다만 심회연모心懷戀慕라, 우리 마음으로 심회연모心懷戀慕 갈앙어불渴仰於佛이라, (우리 마음으로) 부처에 대해서 연모戀慕하고 갈앙渴仰하는 그 마음 이런 마음이란 것이 참 굉장히 중요합니다.
부처님 당시 파사익왕波斯匿王(prasenajit)의 딸이 있었는데, 이것은 팔상록八相錄에 나오는 법문 아닙니까만, 추녀개용醜女改容이라, 아주 못 생긴 여인이 얼굴이 바꿔졌단 말입니다. 이것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이것은 세존에 대한 갈앙심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다. 갈앙심 때문에 부처님의 광명을 스스로 감견感見했단 말입니다.
불교 말로 감견感見이라, 느낄 감感자, 볼 견見자 감견이라는 말을 씁니다. 이것은 무엇인고 하면, 신앙에 사무치면 그때는 (부처님의 광명을) 우리가 느끼고 스스로 현전에서 본다 말입니다. 부처님 광명은 무량광명이기 때문에 또 천지우주가 바로 순수의 적광寂光, 정광淨光, 청정한 광명淨光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마음만 청정해지면 꼭 광명을 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런 것은 역시 간절한 마음, 어떻게 되나 우리 마음이 일념一念이 되겠지만, 일념一念이 되는 공부가 쉽지가 않습니다. 쉽지가 않은데, 그 (간절히) 그리워하는 연모하는 그 마음은 (갈앙심渴仰心은) 우리 마음을 비약을 시킵니다.
따라서 마땅히 부처님께 대해서 연모하고 갈앙하는 그 마음은 우리 인간 존재가 필연적으로 가져야 할 것이지만 번뇌에 복귀하지(극복하지) 않으면 참 어렵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맑아지면 맑아질수록 차근차근 더 갈앙심이 생긴다 말입니다. 그래서 공부할 때 삼매과정에서 우리가 삼매에 들어갈 때는 몸도 마음도 정화가 되면 그때는 정화된 만치 유연선심柔軟善心이라, 마음도 더 부드러워지고 또 차근차근 더 선심善心이 깊어진다 말입니다. 세상사람 모든 사람이 다 그리워지고 풀포기 하나라도 그 자비심慈悲心으로 해서 함부로 할 수 없는 그런 마음이 됩니다. 이것은 무엇인고 하면 이른바 동체대비同體大悲가 차근차근 가까워지는 셈이지요. 마땅히 이와 같이 우리 마음으로 부처님한테 대해서, 우리 자성한테 대해서 연모 갈앙한다고 생각할 때는 즉종선근卽種善根이라, 바로 우리 선근을 더 증장시키고 (마음에) 심는다 말입니다.
경을 보면 첨앙존안瞻仰尊顔이라, 저사불의 존안을 이렇게 우러러 뵈면서 목불잠사目不暫捨라, 잠깐 동안도 눈을 뗄 수가 없단 말입니다. 어떻게 황홀했는고, 그래서 한 발을 든 채로 칠 주야七晝夜 밤낮으로 이레 동안 찬탄을 했단 말입니다.
(부처님을) 찬탄하는 게송을 보통 아는 바와 같이, 천상천하무여불天上天下無如佛 시방세계역무비十方世界亦無比 세간소유아진견世間所有我盡見 일체무유여불자一切無有如佛者라 그런 게송입니다. 이 게송은 그때 나온 것이란 말입니다.
그렇게 찬탄한 칠일칠야, 한 발을 들고서 그것보고 한문투로 하면 교족칠일翹足七日이라, 교족이라, 발돋움 교翹자하고 발 족足자. 이레 동안 발을 한 발을 들고서 부처님(저사불底沙佛)을 찬탄했단 말입니다. 그런 공덕으로 (석가행자는) 미륵행자 보다도 구겁九劫을 초월해서 성불했단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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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본정거사님께서 정리작업을 하시었던 큰스님 법문(원통불법의 요체)을 구어체로 녹취한 것입니다.
영상은 아침에 업로드 예정입니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갈앙심 염불수행에 가장 중요한 덕목입니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