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입력 2020.11.28 03:00
일러스트=김영석 초였다. 지방 강연을 위해 김포공항에 갔다. 탑승권을 받는데 일행 중 내 표만 오류가 생겼다.
매니저는 컴퓨터를 두들겨 보고 내 얼굴을 쳐다보면서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주민등록증 사진과 대조해 보기도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 물었다. 백한 살이라고 답했다. “컴퓨터에는 한 살로 되어 있다”며 비시시 웃는다. 그 컴퓨터에는 세 자리 숫자인 100이 입력되지 않는 모양이다.
세브란스병원 원목 장모는 106세가 되었을 때 주민 센터에서 ‘초등학교에 입학시키라’는 통지를 받았다. 그 얘기가 생각났다. 어쨌든 내 이름이 찍힌 탑승권을 받았다. 공항 라운지에서 그 탑승권을 살펴보았다. 나는 지금까지 930회 비행기를 탔다. 82만6000마일 이상 비행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대한항공 직원이 이상하게 여길 만도 했다. 한 살짜리 어린애가 930회 탑승한 것으로 되어 있었으니 말이다.
다른 항공사 비행기도 많이 탔을 것이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 많은 여행을 했다. 세계 일주 여행을 두 차례, 미국과 캐나다 여행이 스무 번쯤 된다. 유럽에도 몇 번 다녀왔다. 러시아를 제외하고는 가보고 싶은 곳은 거의 다녀 본 셈이다. 공산 치하일 땐 가지 못했고, 소련이 붕괴된 뒤에는 다녀온 가족과 친지들 얘기를 듣곤 찾아보고 싶은 의욕이 사라졌다. 러시아 문학이 좋아서 많이 읽었다. 그런데 현실을 들어 보니 그 인상이 사라져 정신적 향수를 찾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많은 여행으로 얻은 결론이 있다. 조국에 대한 애정이 하나, 서울이 사랑받기에 충분한 수도(고향)라는 생각이 다른 하나다. 자연 풍토와 기후는 말할 게 없고 일교차도 적절하다. 어디를 가나 살고 싶어지는 수려한 산수는 한국과 비교할 곳이 없었다. 노르웨이는 원시 자연이 아름답고 착한 민심은 비교할 데가 없다.
그러나 백야에는 밤이 없는 20여 시간이 낮이라 상상 외로 피곤했다. 1년 내내 여름인 곳이나, 더위를 모르는 도회지들은 변화가 없는 지루함을 안겨 준다. 영하 30도 추위를 참아야 하는 겨울 지역도 있다. 내 딸이 사는 미국 휴스턴에서는 영상 3도 추위에 초등학교가 휴교를 하기도 한다.
세계 대부분의 도시들은 넓은 평야에 강줄기를 따라 형성되었다. 서울처럼 산과 들, 강물이 함께 조화를 갖춘 아름다운 도시는 드물다. 남해안 다도해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휴양지로 개발할 수도 있다. 세계를 다녀보기 전엔 한국과 서울의 가치를 모르고 살았다.
문제는 누가 어떻게 사느냐에 달려 있다. 100의 자연 혜택을 받으면서 50의 가치를 누리는 사회가 있고, 50의 혜택을 갖고 100의 삶의 가치를 향유하는 나라가 있다. 우리는 자연의 축복은 받으면서 생활 가치는 충분히 누리지 못하는 것 같다. 문화와 정신적 후진성, 인간관계의 윤리성이 부족하기 때문 아닐까.
김형석의 100세 일기
"김 선생은 잘못을 저지르고 부인한테 사과한 적이 없소?"
A교수의 느닷없는 질문이었다. "있기는 하지만 나는 절대로 공처가는 아닙니다"라고 대답했다. 내가 이야기를 먼저 해야 A교수의 고백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아 옛날얘기를 했다.
1960년대 초에 내가 미국에 가 머물고 있을 때였다.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 대통령이 화폐개혁을 단행했다. '환'화를 '원'화로 바꾸면서 옛날 돈을 모두 무효화시켰던 것이다. 그때 한국에 있던 아내는 내가 몰래 숨겨둔 돈이 있지 않을까 의심이 들었다고 한다. 큰딸과 아들에게 "너희들 나와 함께 아버지 서재에 올라가 책갈피를 들춰보자"고 했다. 책 케이스 속에서 지폐 뭉치를 찾아냈다.
미국에 있는 내게는 "귀국하면 가족회의를 열어 따져보아야 할 사건이 발생했다"고만 했을 뿐 그 내용을 알려주지는 않았다. 집에 돌아와 며칠이 지난 뒤였다. 하루는 아내가 발설하고 애들이 합세해 항의를 하는 것이었다. 궁지에 몰린 나는 "너희들도 이다음에 나 같은 처지를 당해봐라. 내 친구 교수들은 사모님 몰래 비자금을 만드는 게 보통이란다. 그래도 나는 책 케이스에 넣어 두었으니 정직한 편이다" 말하고는 용서를 받았다.
내 얘기를 들은 A교수는 "그 당시에야 누구나 다 그랬는걸. 큰 잘못이 아니지"라면서 웃었다. 그의 얘기는 내용이 좀 달랐다.
어디서 강연을 하면서 "여러분,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사실을 아시지요. 부자간이나 형제 사이는 혈연관계입니다. 한번 인연이 맺어지면 죽을 때까지 그 운명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더 큰 피로 맺어진 하나의 민족입니다. 고통과 슬픔을 함께하더라도 공동체 운명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호소했다. 그것으로 끝났으면 좋았다. 그 뜻을 강조하기 위해 "젊은 여러분이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해도 싸우거나 이혼을 하면 그 후부터는 남남으로 돌아가 버립니다. 그래서 피는 물과 다르다는 예로부터의 가르침이 있습니다"라고 덧붙였다.
그 강연을 들은 사람이 A교수의 부인과 가까운 지인이었다. 그날 강연 내용을 부인에게 알려주면서, 그것이 남자들의 공통된 생각이라고까지 과장했던 모양이다. 그 얘기를 전해 들은 A교수의 부인이 "그래, 우리는 헤어지기만 하면 그뿐이지요? 몇십 년의 애정은 아무것도 아니고요"라고 따져 들었다는 것이다. 내가 "그래서 어떻게 했어요?" 물었더니 "내가 잘못했다 했지요. 그렇게 화를 낼 줄은 몰랐거든요"라면서 멋쩍어했다. A교수의 성격과 표정으로 보아 진심 으로 용서를 빌었을 것 같았다.
내가 "그렇게 쉽게 사과하면 되나. 나 같으면 '당신은 사랑이 피보다도 진하다는 사실을 모르는구먼' 하고 응수했겠다"고 했더니, A교수도 "아차, 그걸 내가 몰랐구나"라면서 아쉬워했다.
오늘은 강원도 양구에 갔다가 A교수의 무덤 앞에 서서 그 지나간 얘기를 되살려 보면서 웃었다. 그러면서도 눈물을 닦았다. 정말 좋은 친구였는데.
[김형석의 100세 일기]
"선생님 용돈으로 써주세요" 제자가 찔러준 봉투…
세뱃돈으로 시작한 인생… 용돈으로 마무리되는 듯
교육자는 씨를 뿌리거나 나무를 심는 일을 한다. 열매는 사회가 거둔다. 백세를 헤아리게 되니까, 내가 뿌린 씨앗의 열매를 내가 찾아보는 때가 있다. 제자들이 성공해서 나보다 훌륭하게 되었을 때가 그렇다. 지난해 가을 제자와 함께 인촌상을 받았을 때는 정말로 자랑스러웠다. 그런 일은 매우 드물기 때문이다.
몇 해 전에는 내 제자가 사회적인 공로상을 받게 되었다. 저녁 시간이었으나 식장으로 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곧 시작할 시간에 들어섰는데, 수상자 자리에 앉아 있던 제자가 찾아와 내 코트를 받아 걸어 주면서 안내해 주었다. 주빈은 제자였다. 상을 받은 그가 답사를 했다. 본래 말이 적고 앞장서기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오늘까지 살아오면서도 그러했으나 앞으로도 은사이신 김 선생님의 뜻을 기리면서 살게 될 것"이라는 답사를 했다. 나에게는 그 마음이 분에 넘치는 고마움이었다.
시상식을 마칠 때 제자는 내 옆까지 왔다. 귀에 가까이 얼굴을 대면서 "선생님 제 얘기가 들리세요?"라고 묻더니 "제가 선생님 코트에 봉투를 하나 넣었는데요. 용돈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허물 마시고 써주세요"라면서 돌아갔다.
여러 사람과 인사를 나누고 좀 늦게 집에 돌아왔다. 코트 주머니에는 두툼한 봉투가 들어 있었다. 왜 그런지 어렸을 때 기억이 떠올랐다. 설날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이 집 저 집을 찾아다니면서 세뱃돈을 받던 옛날이 생각났다. 그 세뱃돈으로 딱지도 사고 장난감도 사서 놀던 어렸을 때 친구가 그리워졌다. 일 년에 한 번씩 기다려지는 경사스러운 행사였다.
그로부터 90년 세월이 흘렀다. 요사이는 내 동료나 후배 교수들이 늙어서 수입이 없으니까 용돈 타령하는 얘기들을 듣는다. 설날이 가까워지면 아들딸들에게 "손주들에게 줄 세뱃돈이 떨어졌다"고 미리 말해두면 자녀들이 용돈으로 쓰시라면서 현금을 미리 보내온다. 그중에서 일부는 세뱃돈으로 주고 나머지는 용돈으로 쓴다는 얘기다. 또 어떤 친구는 생일이 되면 자녀들에게 "선물은 필요 없으니까 알아서 하라"고 말해 두면 현금 봉투가 온다는 방법을 알려주기도 한다.
생각해 보면 인생은 세뱃돈으로 시작했다가 용돈으로 마무리되는 것 같다. 세뱃돈은 즐거움의 시작이었으나 용돈은 인생을 마무리 하는 절차인지 모른다. 내 인생도 세뱃돈의 즐거움으로 시작했으나 용돈으로 채워지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오늘의 용돈은 성격이 다르다. 생각해보면 내가 내 제자를 사랑한 것보다 제자가 나를 더 사랑했던 것이다. 용돈이 아니라도 좋다. 많은 제자가 나를 그렇게 기억하며 살아간다면 나는 누구보다도 행복한 일생을 살아온 것이다. 사랑이 최선의 행복이기 때문이다.
찌고이네르바이젠 / 사라사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