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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26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사순절 첫째 주일)
광야와 은혜
창3:1~7; 롬5:15~19; 마4:1~11
예수님은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후에 광야로 가셨습니다. 오늘 마태복음은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은 더욱 강한 표현을 써서 성령이 예수님을 광야로 내몰았다(에크발로, 내쫓았다)고 합니다. 여기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겠지만, 세례를 받고,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영이 자신 위에 내려오면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그를 좋아한다”는 소리를 들은 분을 성령은 광야로 내모심으로써,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경험하게 하십니다. 여기서 광야는 분명 예수님의 그림자를 보게 한 곳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라는 빛을 경험하셨고, 이제는 그 그림자를 직면하셔야 했습니다. 그럼으로써 예수님의 경험은 균형이 맞추어졌습니다.
성경에서 광야는 그림자를 직면하는 곳입니다. 아브라함이 수십 년간 광야를 헤맸고, 모세는 40년을 광야 생활을 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40년간 광야로 이끕니다. 다윗이 사울을 피해 엔게디 광야에서 노숙을 한 것도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예언자 엘리야도 갈멜산의 승리를 맛본 후에 곧바로 사막을 거쳐 호렙산까지 쫓겨 갑니다. 이외에도 사막은 언제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의 그림자를 보게 하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광야는 자신이 이루어 놓은 것들,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것들, 그것으로써 자신이 누구인지를 내세울 수 있는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광야는 우리의 인간조건, 그러니까 우리의 현 상태, 우리의 민낯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평소 무엇을 걸치고 무엇을 가지고 자신을 포장했다고 해도, 우리의 있는 그대로를 가장 잘 드러내 주는 장소가 바로 광야라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광야에서 악마의 시험을 받았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사십 일을 금식하시고 몹시 굶주린 상태가 되었습니다. 악마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말해 보아라.”라며 시험했습니다. 그 다음에 악마는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뛰어 내려 보아라, 천사가 손으로 너를 떠받쳐서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세 번째 악마는 예수님을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세상의 모든 나라와 영광을 보여주며 “네게 엎드려 절을 하면, 이 모든 것을 주겠다”라고 유혹했습니다.
예수님이 받은 이 유혹을 토마스 키딩은 “안전과 생존의 욕구”, “애정과 인정의 욕구”, “힘과 통제의 욕구”에 대한 시험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받은 유혹은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욕구에 대한 시험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 가지 욕구에 대한 시험을 넘어 서셔서, 우리 인간이 이 시험을 넘어설 수 있음을, 우리가 이 욕구에 언제나 패배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은 우리 인류에게는 매우 소중한 의미를 갖습니다.
여기서 키팅이 말하는, 안전과 생존에 대한 욕구, 애정과 인정에 대한 욕구, 힘과 통제 대한 욕구는 우리가 태어나면서부터 매우 중요한 기본적인 욕구입니다. 존재하고 살아남기 위해서 이 욕구는 필요한 것이고 정상적인 것입니다. 단, 이런 욕구들이 성인이 된 우리에게 너무 과도하게 작동해서 우리의 모든 행동을/해동동기를 무의식적으로 끌고 간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우리 안에 프로그램된 이 욕구 프로그램이 비상등을 켜고 싸이렌을 울리는 소리를 자주 듣습니다. 그럴 때 우리의 혈액 속으로 아드레날린은 끝없이 분출됩니다. 우리 안에 염려와 불안, 두려움, 수치감, 분노와 질시가 우리를 불사릅니다.
우리가 우리의 욕구를 죄악시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모조리 없애버리려고 해서도 안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욕구에서 가능한 한 자유롭게 될 수는 있습니다. 자유롭게 된다는 말은, 우리가 언제나 그 욕구에 휘말리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그 욕구로 생긴 정서로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과 조건에 따라, 내가 의식적으로 선택하고 의지적으로 결정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선택과 결정에는, 나의 어릴 때의 결핍으로 인한 정서의 영향은 줄어들고, 지금 여기서 공공의 이익을 위한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선택이 영향을 끼치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이 어른이 된다는 것이고, 성숙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 삶의 가장 좋은 모델은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우리가 따라가야 할 삶의 모범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는 가장 좋은 길은 그분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 분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광야는 바로 이 일을 도와주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셨다는 것은, 광야가 우리에게도 이런 시험을 주고 있다는 것이지요. 이만하면 괜찮은 줄 알았고, 이만하면 잘 사는 것처럼 보였는데, 광야를 만나면 그것의 진위가 판가름 나는 것입니다.
나는 큰 문제없이 잘 살고 있어 하다가도, 우리가 어떤 광야를 만나게 되면 우리의 삶이 뒤죽박죽 되어 버리고 맙니다. 평소에는 그럴듯하게 살고 있던 사람이, 광야를 만나게 되면, 그 본성이 다 드러납니다. 키팅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 자신에 대한 진실은 피할 수 없다. 무엇이 거기에 있든지, 있는 것은 올라오게 되어 있다” 이 말은 있는 것이 올라오는 것이지 없는 것이 올라오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주로 우리가 만난 광야를 탓하지만(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지요), 실은 없던 것이 나오는 것은 아니고, 우리의 모습이 좀 더 분명하게, 더 깊이 묻혀 있던 것이 더 밝히 드러나는 것뿐입니다. 너 때문에 내 성격이 더러워졌다고 하는데, 실은 너 때문은 아니고, 원래 더러운 성격이던 것입니다. 너 때문에 내 인생이 망했다고 하는데, 실은 너 때문에 망한 것이 아니라, 자신 안에 있는 무언가가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이것은 언제든지, 무엇을 혹은 누구를 통해서든지, 올라올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만난 광야는 우리를 좀더 분명하게 드러냈을 뿐입니다. 그 무엇 혹은 누군가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광야는, 어떤 장소가 아니라, 우리를 힘들게 하는 사람일수도 있고, 사건일 수도 있고, 끙끙대는 과제일 수도 있고, 심지어는 이해되지 않는 그래서 던져버리고 싶은 말 한마디 일수도 있습니다.
이번 사순절 기간 동안이라도 이 광야를 피하지 말고 만나보십시오. 아마 예수님처럼 그 모든 유혹을 말씀으로 이겨내지는 못할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만나는 광야는 “내가 이것 밖에 안되는구나”, 우리의 민낯을 보게 할 것입니다. 이 말은 “나는 이것 밖에 안돼!” 라면서 자신을 비난하고 자학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냥, 우리의 민낯을 그냥 있는 그대로 보면서 “아, 내 모습이 바로 이렇구나”, 비난하거나 자학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그냥 자신을 보는 것입니다. “나는 이것 밖에 안되”라고 자학하면서 절망하는 것은, 실은 매우 교만한 태도입니다. 이것은 하나님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교만입니다. 그래서 절망의 다른 말은 교만이 됩니다.
“아, 내가 이것 밖에 안되는 사람이었구나!”라는 것을, 아무런 비난이나 절망 없이, 마치 과학자가 객관적 사실을 관찰하듯(!), 자신의 민낯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 은혜가 임합니다. 아마도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인가로 덕지덕지 가리고 하나님 앞에 나서는 것을 좋아하시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뭔가로 치장하고 우리가 이 땅에서 이룬 것들을 잔뜩 손에 들고 하나님 앞에서 나서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민낯을 보기를 바라시고, 우리의 민낯을 보기를 기뻐하시는 것 같습니다. 아니, 아마도 하나님은 우리의 꾸민 모습은 알아보지 못하시고, 우리의 민낯만을 알아보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그 증거가, 광야에서 우리가 민낯을 보고 “아, 내가 이것 밖에 안되는 사람이었구나”를 진정 깨닫게 되면, 우리는 자유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 맞아, 나한테 뭘 기대했어?” 속으로 자신을 향해 웃을 수도 있게 됩니다. (이것이 다른 사람에게 하듯, “그래, 나 이런 사람이다, 어쩔래?” 뻣딩기고 우기라는 말은 아닙니다!) 힘이 많이 빠진 겁니다. 많은 걸 기대했고, 그래서 많은 과제를 지우고, 그런데 그 목표에 닿지 않아 실망하고 질책하던 데서, 자신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보면서 받아들이는 것이지요. 이때 우리는 가벼워지게 됩니다. 자유롭게 되는 것이지요. 바로 이것이 겸손이지요. 그래서 겸손은 있는 그대로를 보고 받아들이고 인정해서 가벼워지고 자유롭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아들이시는 방법입니다.
토마스 머튼이 이런 말을 합니다.
“절망은 자기 사랑의 극치입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감추어진 절망의 뿌리가 있습니다. 자신의 능력에 만족하지 못하면 즉시 자기비하의 고약한 냄새를 피우는 꽃과 잡초를 키우는 자존심이 누구에게나 있기 때문입니다... 절망은 자존심이 극도로 발전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주 강하고 완고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도움으로부터 행복을 얻음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우리보다 높으신 분이시라는 것을 인정하고 우리가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우리의 운명을 완성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보다는 파멸이라는 절대적 불행을 선택합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겸손한 사람은 절망할 수 없습니다. 겸손한 사람에게는 자기비하 같은 것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광야는 가벼워지는 곳입니다. 덕지덕지 붙이고 칠하고 가렸던 것들로부터 있는 그대로 자신을 받아들이고 인정할 수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광야는 은혜의 장소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와 보살핌을 경험하는 장소입니다. 광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기억하는 곳입니다.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광야(미드바르)는 말씀(다바르)와 어근이 같습니다. 쫓겨난 곳, 길을 잘못 든 곳이라는 뜻의 미드바르(광야)에는 다바르(말씀)가 숨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곳에서 우리에게 꼭 필요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40년간 단련시키신 것처럼, 예수님을 성령으로 이끌어 광야로 데리고 가신 것처럼, 광야는 우리의 힘을 빼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자리입니다. 그리고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말씀을 주십니다.
예수님의 세례 경험,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오고,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그를 좋아한다”는 하늘의 소리를 들을 때, 그 경험이 얼마나 놀랍고 황홀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곧바로 동일한 성령에게 이끌려 광야로 가셨습니다. 아니, 성령이 예수님을 광야로 내모셨습니다. 왜요? 하늘에서 들은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그를 좋아한다”는 말씀을 진정 나의 것으로 만드는 자리가 바로 광야이기 때문입니다.
내 가진 것 다 내려놓고, 내 힘쓰는 것 다 내려놓고, 내 꾸미고 치장한 것들 다 내려놓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을 때, 비로소 내 삶이 얼마나 든든한지, 세상의 그 무엇도 내 삶을 훼손할 수 없다는 깊은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진정한 안전이시고, 우리를 조건 없이 사랑하시며, 우리의 진정한 힘이시라는 것을 우리가 깨닫게 됩니다. 그 이상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올해도 사순절이 돌아왔습니다. 사순절은 하나님에게서 오는 은총을 방해하는 우리 안에 있는 장애들을 돌아보고 그것들을 하나님께서 다루시도록 맡겨 드리는 시간입니다. 우리가몇 가지 결심을 하고 그 결심을 잘 지켰는가 지키지 못했는가를 첵크하고, 그래서 괜찮은 그리스도인이고 그렇지 않고를 결정하는 시간이 아니라, 우선 우리의 장애를 잘 보는 시간입니다. 우리의 장애는 주로 우리가 잘 될 때는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뭔가 일이 어그러질 때, 그래서 격한 감정이 올라오고 바로 머릿속에서 비난이 떠오를 때, 그때 우리는 우리의 광야를 만나는 시간입니다.
우리의 감정, 우리의 상투적인 말들을 잘 살펴보십시오. 여러분의 광야는 거기에 숨어 있습니다. 거슬리는 사람, 거슬리는 행동, 거슬리는 사건 속에도 우리의 광야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늘 하던 대로 반응하는 우리의 반응을 잘 살펴봅시다. 늘 하던 대로의 반응이 아니라 어떻게 다른 반응은 없는지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할 수 있으면, 잠시 머물러, 다른 반응으로 행동해 봅시다. 그러기 위해서는 톱니바퀴처럼 함께 돌아가던 데서 잠시 떨어져 관찰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떨어져 관찰한다는 것은 떨어져 판단을 잠시 유보하고 단순히 바라보는 것입니다.
가령 예를 들면, 여러분들이 사순절 묵상을 하면서 맘에 걸리는 부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겸손하라고 할 때 그 말이 자신을 작게 만들라는 의미처럼 들린다면 마음에 걸리겠지요. 이번 사순절 묵상에 아빌라 데레사의 글이 나옵니다. “우리가 주께 바라는 모든 것을 대뜸 들어주시는 것은 우리가 가진 겸손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해도 그런 은총을 받을 만한 사람이 못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라는 말을 들을 때, 여러분의 맘에 걸리는 부분을 바로 튕겨버리지 말고, 머물러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아니면 적어도 유보를 하면 좋겠습니다. “그래, 이 말은 아직 내 맘에 잘 들어오지 않네, 오히려 나의 어떤 부분을 건드리는 것 같은데... 잠시 괄호를 쳐놓자!” 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데레사의 이 말에 은혜를 받는 사람도 좋겠지만, 이 말에 걸리는 사람도 좋습니다. 내게 건드려지는 어떤 부분이 진정 나의 민낯을 보게 하는 중요한 지점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번 사순절에 우리가 깨어있음의 표시로 두 가지 일을 함께 하면 좋겠습니다. 하나는 튀르키예와 시리아에 있었던 지진 피해자들을 위한 기도와 모금입니다. 하루에 천 원씩 40일 동안 모으면 4만원이 될 것이고, 이천 원씩 모으면 8만원이 될 것입니다. 할 수 있는 만큼 모아서 부활절에 드리면, 모아서 지진 피해자들을 위한 후원금으로 드리겠습니다.
또 한 가지는 우리의 환경을 위한 작은 실천에 함께 동참해보는 것입니다. 가급적 필요하지 않은 것 사지 않고 재활용하기, 플라스틱 사용을 줄이기(일회용품 사용 줄이기), 고기 적게 먹기(축산업은 지구온난화 가속시키는 주요 요인 중 하나), 전기사용 줄이기, 종이사용 줄이기 등입니다. 이것들을 지속적으로 지킨다면 우리는 깨어있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이번 사순절에 우리는 “걸리는, 거슬리는” 자리를 새롭게 발견하고 거기에 머물러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늘 하던 반응대로 반응하지 않고 그냥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커다란 은혜를 주시어 여러분이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던 귀중한 깨달음을 주기기를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주 하나님,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어, 우리를 깨우쳐 주옵소서.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패턴을 잘 보게 하시고, 그 안에서 주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