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흘 전 광복절이 지났다. 바쁜 나날 아니면서도 나는 하루 전날부터 바깥을 나돌면서 우리 집 태극기를 달지 못해 할 말 없고 부끄럽다. 지난 제헌절에도 국기를 내걸지 못했다. 사연인즉 베란다 국기봉 거는 자리는 성한데 삼단 깃봉이 탈이 난데 고치질 못했다. 공작 솜씨를 발휘하면 수리해 쓸만한데도 내 정성이 모자랐다. 개천절 전까지는 사용 가능하도록 준비해야겠다.
아침나절 원고를 정리하고 책을 몇 줄 읽었다. 점심식후 하늘을 쳐다보니 소나기가 올 낌새는 아니었다. 요 며칠 국지성 호우가 내려 일부 지역은 물난리를 겪었다. 오후에는 바깥으로 산책을 나섰다. 아직 늦더위가 있는지라 산행 나서기는 무리였다. 내가 사는 아파트에서 가까운 코스를 정했다. 창원종합운동장 부근 야트막한 산자락이 하나 있다. 창원교육단지 뒷산에 해당한다.
나는 집에서부터 걸어 기능대학 후문으로 향했다. 기능대학은 근래 교명을 폴리텍대학으로 바꾸었다. 기계공단 여건에 맞는 기능인을 배출하는 교육기관이다. 들머리는 소나무 숲길로 시작되었다. 비가 그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길바닥은 젖어 미끄러웠다. 미끄러운 길보다 더 조심스러운 것은 길가 옻나무였다. 창원근교 산자락에는 내가 움찔 놀라는 옻나무가 유난히도 많이 자란다.
옻나무는 참옻나무와 개옻나무로 나뉜다. 함양산청 지리산 계곡의 참옻은 나무둥치가 굵고 잎이 도톰하고 크다. 야산 어디나 흔한 개옻은 나뭇가지가 야위고 잎사귀도 작다. 참옻은 옻칠 원액을 채취하거나 새순은 귀한 산나물로 먹는다. 옻을 타지 않는 사람이나 만질 일이지 나처럼 옻을 잘 타는 사람은 참옻 근처는 얼씬거려서 될 일 아니다. 나는 개옻을 살짝 스쳐도 옻이 탄다.
가을이 왔음을 알려주는 징후가 몇 있다. 오동잎이 지면 가을이 왔다. 오동잎은 유난히 커 찬이슬만 맞고도 땅으로 떨어졌다. 부추의 하얀 꽃대가 나오면 가을 들머리다. 부추는 봄에서 여름까지 자라면 베고, 자라면 또 벤다. 여름 끝물이면 부추가 자라면서 꽃대까지 같이 올라왔다. 대추 볼이 붉게 물들면 가을이 왔다. 대추는 잎 돋을 때는 게을러도 차례상에는 제일 먼저 올랐다.
누가 나보고 가을이 오는 낌새를 무엇으로 아느냐고 물어온다면 답할 거리가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일찍 물드는 옻나무 잎이라고 들고 싶다. 옻나무는 여름내 검푸른 잎을 오만하게 달고 버텼다. 그런 옻나무도 순환하는 계절의 변화 앞에서는 무릎을 꿇고 만다. 대개 낙엽활엽수들은 서리를 맞고서야 단풍으로 물든다. 옻나무는 찬이슬도 아닌 산들바람에도 잎사귀가 붉게 물든다.
옻나무가 물드는 것을 신호탄 삼아 다른 나무들도 가을 채비를 서두른다. 옻나무와 사촌쯤 되는 나무로 붉나무가 있다. 붉나무는 다른 나무와 마찬가지로 서리가 내려야 선홍색으로 물든다. 내가 산책한 창원여고 뒷산에는 옻나무 외 소나무와 아카시나무가 주종을 이루었다. 극동방송국이 가까워질 무렵 올봄 개관한 과학체험관 지붕이 보였다. 청소년에게 유익한 견학시설이다.
극동방송국 쪽으로 내려가 충혼탑 사거리를 지났다. 광복절 지난 지 며칠 되었다만 나는 뒤늦게 충혼탑을 참배했다. 창원 이사 와서 초등학교 다니는 두 아이와 함께 찾은 이후 충혼탑 경내 들어서기는 두 번째다. 고대병사 갑옷투구 모양에 향불 세 개를 꽂아둔 듯한 탑신이었다. 참배단은 광복절에 다녀간 듯한 어느 여고 동아리의 이름이 새겨진 하얀 국화꽃 다발이 놓여 있었다.
나는 충혼탑 경내를 빠져 나와 대상공원으로 들었다. 대상공원은 창원전문대학 뒤에서 시티세븐까지 이어진 능선이다. 오리나무 숲에 체육기구가 놓여 있었다. 산언저리 실내골프장이 두 곳 있다. 골프가 대중화 되어 실내골프장에서 기량을 연마하는 사람이 많았다. 산언덕에서 내려다보니 골퍼가 새장 속 갇힌 새 같았다. 골프는 나하고는 거리가 먼 운동이라 가던 길을 계속 걸었다. 10.08.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