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1일 미국 워싱턴 국회의사당에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아래)이 연설하는 가운데 카멀라 해리스 미국 부통령(뒤 왼쪽),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이 우크라이나 국기를 들고 있다. AP 연합뉴스© 제공: 한겨레 “우리는 러시아를 이겼다.” 지난 21일 미국을 방문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미국 의회 연설에서 한 말이다. 실제로 우크라이나는 세계 각국으로부터 연대와 지지를 얻으며 적어도 국제 여론전에서 완벽하게 승리하는 모양새다. 우크라이나는 미국과 유럽연합(EU)으로부터 각각 480억달러(약 61조3천억원)와 25억유로(약 3조3053억원)를 지원받았으며, 세계 각지에서는 구호물품 기부와 우크라이나 지지 시위가 연일 벌어지고 있다. 지난 2월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을 때, 러시아가 손쉽게 승리를 거둘 거라는 관측이 대부분이었다. 러시아가 세계 2위의 군사 강국인 데 반해 우크라이나는 세계 22위의 군사력을 지닌데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코미디언 출신의 정치 경험이 일천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정치 베테랑 블라디미르 푸틴을 상대하기 쉽지 않으리란 전망이었다.
그러나 모두의 예상과 다르게 전쟁은 10개월간 이어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는 지난 9월 우크라이나의 동북부 반격으로 핵심 거점으로 꼽히는 하르키우와 헤르손 지역을 우크라이나에 내주기까지 했다. 다급해진 러시아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으로 예비군 동원령을 내리고, 핵 위협을 하는 등 초강수 행보에 나서고 있다. 최근 러시아는 유엔 인권이사회의 이사국 자리를 박탈당했으며, 카타르월드컵을 포함하여 올림픽, 유로2024 등 국제 스포츠 무대에서도 퇴출당했다. 러시아에 대한 국제 여론이 악화하자 중국과 중앙아시아 등 러시아의 전통적인 우방국조차 러시아와 거리두기에 나서면서 러시아의 고립은 더욱 심화하고 있다. 중국 시진핑 국가주석은 지난 9월 우즈베키스탄에서 열린 상하이협력기구(SCO) 회의에서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 우크라이나 전쟁에 관한 ‘의문과 우려’를 전했으며, 옛 소련 국가 중 하나인 카자흐스탄 역시 11월 외신 기자회견에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한 명확한 반대의 뜻을 밝혔다. 러시아가 여론전에서 우크라이나에 참패한 것이다. 코미디언에서 ‘국민 일꾼’ 되기까지 ‘다윗과 골리앗’의 대결 같았던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예상 밖의 활약을 보여준 우크라이나 전력의 중심에는 ‘정치 초짜’에서 ‘전쟁 영웅’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거듭난 젤렌스키가 있다. 젤렌스키는 1978년 우크라이나 중부 공업도시 크리비리흐의 유대인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컴퓨터공학을 전공한 그의 아버지는 크리비리흐 경제연구소에서 사이버 네트워크 및 컴퓨터 하드웨어학과 교수로 근무했다.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유대인 가정에서 자란 젤렌스키는 유년 시절 우크라이나어 대신 러시아어를 사용했으며, 초등학교 입학 전 몽골로 파견된 아버지를 따라 몽골에서 4년간 거주했다. 10대 시절 역도, 레슬링, 사교댄스 등 다양한 활동을 경험한 그는 이스라엘 유학을 위해 영어 시험인 토플에까지 응시했지만, 부모의 반대로 유학은 무산되었다. 이후 그는 키이우 국립경제대학에서 경제학 학사와 법학 석사 학위를 받았으나 법조인 대신 연기자의 길을 택한다.
개전 직후 우크라이나 키이우 밤거리에서 결사항전을 선언하는 모습. 비비시(BBC) 유튜브 화면 갈무리© 제공: 한겨레 젤렌스키는 국제(구소련 위주) 대학생팀별 코미디 경연 방송인 ‘카베엔’(KVN: 미국과 한국의 (SNL)처럼 정치풍자가 포함된 코미디 프로그램)을 통해 17살에 처음 데뷔했다. 그가 속한 팀은 1997년 지역 리그에서 우승했으나, 보조적인 역할을 맡았던 그의 활약은 두드러지지 않았다. 1998년 젤렌스키는 자신의 팀인 ‘크바르탈 95’를 결성하였고, 이 팀은 2001년 카베엔 우크라이나 리그에서 우승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 카베엔으로부터 프로듀서 요청을 받는 등 제작자로서 자신의 가능성을 확인한 젤렌스키는 ‘크바르탈 95’를 코미디팀이 아닌 제작사로 변경하고 정치풍자 쇼를 제작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국민의 일꾼’이다. ‘국민의 일꾼’은 평범한 고등학교 역사 교사였던 주인공이 하루아침에 대통령이 되면서 부정부패에 저항하는 모습을 그려낸 정치풍자 시트콤이다. 젤렌스키는 이 시트콤에서 부패가 만연한 우크라이나 정치계에 맞서 저항하는 청렴한 대통령 역을 맡아 대중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국민적인 인기를 등에 업은 그는 시트콤과 동명의 정당을 창당해 대권에 도전했으며, 2019년 결선투표에서 73%라는 압도적인 득표율로 제6대 우크라이나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런데 취임 초기 젤렌스키 대통령은 경솔한 발언과 정실 인사 문제 등으로 대중의 비판을 받았다. 그는 내각의 주요한 자리에 정치 경험이 전혀 없는 연출자 동료들을 배치하는가 하면, 미국의 러시아 침공 경고에 위협을 느끼지 않는다며 전쟁을 대비하기는커녕 외려 서방을 비판하기도 했다. 그 결과 70%를 기록했던 대통령의 지지율이 30%까지 추락하면서 민심 이탈 현상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보여준 그의 리더십은 그를 따라다니던 ‘정치 초짜’이자 무능한 대통령이라는 꼬리표를 떼게 하고, 그를 ‘전쟁 영웅’으로 만들었다 미국 시사주간지 은 2022년 올해의 인물에 젤렌스키 대통령과 ‘우크라이나 정신’을 선정했다. 은 “용기도 두려움만큼 전염될 수 있음을 증명하고,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사람들과 국가를 뭉치게 하고, 세계에 민주주의와 평화의 취약성을 상기시켰음”을 선정 이유로 썼다. 대체 젤렌스키의 리더십에는 어떤 비밀이 있기에 강력한 것일까?
세계에 통한 소통의 전략
우크라이나 국민은 물론 전세계를 움직인 젤렌스키의 리더십에는 세 가지 비밀이 있다. 먼저 용기의 리더십이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자 미리 대비하지 못한 정부 각료들과 시민들은 충격과 혼돈에 빠졌다. 그들은 급박한 상황 전개에 우크라이나에 남아 러시아에 대항하여 싸워야 할지 아니면 해외로 도피해야 할지에 대한 갈피조차 잡지 못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의 해외 도피설은 이러한 혼란을 더욱 가중했다. 그러나 개전 직후 젤렌스키가 올린 한 편의 동영상은 상황을 반전시켰다. 그는 내각 인사들과 함께 키이우 밤거리를 걸으며 “대통령, 총리, 국가 수뇌부들이 모두 여기 있으며, 우리는 국가와 독립을 지켜낼 것”을 선언했다. 러시아군이 키이우에 접근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는 긴박한 상황에서도 그는 대통령으로서 죽음을 불사하고 자신의 자리를 지킨 것이다. 젤렌스키는 최전방까지 들어가 병사들과 연대했고, 키이우에 남아 자신의 소식을 올리며 국민에게 자신의 건재를 확인시켰다. 둘째, 확신의 리더십이다. 젤렌스키는 개전 직전부터 지금까지 에스엔에스(SNS)를 통해 끊임없이 우크라이나 국민의 항전과 우크라이나의 승리에 대한 높은 기대와 확신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지난 2월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기 몇 시간 전 에스엔에스에 올린 영상 담화에서 “당신이 우리를 공격할 때 당신은 우리의 등이 아니라 얼굴을 보게 될 것”이라며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항전을 확신했다.
특히, 지난 9월 우크라이나군의 동북부 반격으로 일부 영토를 수복하는 가운데 젤렌스키가 러시아를 규탄하며 올린 연설문은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에 비유될 만큼 명연설로 회자된다. 그는 이 연설문에서 “가스, 전기, 물, 식량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너희(러시아) 없이 살 것이다”라고 외치며 우크라이나의 결사 항전 의지를 확신했다. 또한 그는 “역사는 모든 것을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을 것이고, 우리(우크라이나)는 결국 너희(러시아) 없이, 전기도 가스도 음식도 있는 곳에서 살게 될 것”이라 확언하면서 우크라이나의 승리를 단언했다. 이처럼 젤렌스키가 보여준 항전과 승리에 대한 결의와 믿음은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사기를 고취하기에 충분했다. 이는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비해 물리적으로 열세인 상황에서도 우크라이나 국민이 두려움 없이 러시아에 투쟁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러한 믿음은 우크라이나 국민의 98%가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자국의 승리를 확신한다는 여론조사 결과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소통의 리더십이다. 러시아어에 능숙한 젤렌스키 대통령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자 러시아 국민을 향해 러시아어로 전쟁 중단과 평화 연대를 호소했다. 9월에는 러시아군을 향해 러시아어로 투항할 경우 신변의 안전을 적극적으로 보장하겠다며 항복을 촉구했다. 젤렌스키의 러시아어 연설은 우크라이나가 적국이 아닌 러시아의 가족과 친척이 사는 국가라는 이미지를 심어주면서, 러시아군의 사기를 떨어뜨렸다. 또 관객과의 소통이 중요한 코미디언 출신이자 최연소 대통령인 젤렌스키는 에스엔에스를 이용해 우크라이나 국민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우크라이나에 대한 세계의 지지와 연대를 이끌어냈다. 그는 자신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카키색 상의를 입고 전장에 방문하는 모습을 에스엔에스에 계속 올리며 우크라이나 군인과 시민의 사기를 크게 북돋고 있다. 또한 그는 뛰어난 언변술을 바탕으로 세계 각국의 의회를 상대로 화상 연설을 이어가며 여론을 모으고 지원을 호소하고 있다.
2019년 4월19일 대통령으로 당선돼 환호하고 있는 젤렌스키. EPA 연합뉴스© 제공: 한겨레 특히 그는 우크라이나 전쟁 상황에 대해 다른 국가가 공감할 수 있도록 상대국이 과거 외세로부터 당했던 충격적인 사건과 경험을 연상케 하는 나라별 ‘맞춤형 연설’로 지지를 이끌어내고 있다. 젤렌스키는 미국 의회에서 “우리는 매일 9·11(2001년 9월11일, 빈라덴과 이슬람 테러단체 알카에다가 민간 항공기를 납치해 미국 뉴욕 세계무역센터 등에 충돌시킨 테러 사건: 편집자 주)과 진주만을 경험하고 있다”고 했으며, 영국에서는 “숲에서, 들판에서, 해변에서, 거리에서 계속 싸울 것이다”라고 말하며 2차 대전 당시 총리 윈스턴 처칠의 연설을 인용했다. 독일에서는 “숄츠 총리, 저 벽을 허무시오”라며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의 베를린 장벽 연설을 오마주했다. 그의 맞춤형 연설은 각국의 공감과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우크라이나는 미국과 유럽연합으로부터 한화 약 65조원에 달하는 전쟁 비용을 지원받게 된다.
전후 우크라이나가 풀어야 할 문제
우크라이나 전쟁의 종료 시점과 방법에 대한 다양한 예측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러나 시시각각 변하는 전쟁의 양상과 국제정치 상황 속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의 미래를 정확하게 전망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확실한 것은 전쟁의 포화가 언젠간 멈출 것이란 점이다. 우크라이나가 독립 국가로 종전(혹은 휴전)을 맞이할 경우 젤렌스키는 국가 재건이라는 엄청난 과제를 수행해야 한다. 유럽투자은행 총재는 막대한 전쟁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서 1조달러 이상이 필요할 것으로 예측했다. 그러나 전쟁으로 매달 50억달러의 적자를 기록하고 있는 상황에서 자력으로 1조달러에 이르는 재건 비용을 충당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서방은 우크라이나를 지원할 준비가 되어 있다. 미국은 우크라이나 지원을 위한 449억달러(약 57조원)가 포함된 2023년 예산안을 통과시켰으며, 유럽연합은 2023년까지 우크라이나에 180억유로(약 24조8천억원)를 지원하는 입법 패키지에 합의했다. 반대하는 여론 또한 존재한다. 헝가리는 유럽연합의 우크라이나 원조에 거부권을 행사했으며, 미국 공화당은 공개적으로 반대 의견을 표출하고 있다.
이런 반대를 극복하고 우크라이나가 서방으로부터 안정적으로 자금을 지원받기 위해서는 선행해야 할 과제가 재정 사용의 투명성 확보다. 지원국한테 자금이 용도에 맞게 사용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은 신뢰를 구축하고 지속적인 지원을 이끌어 내는 데 핵심적인 구실을 한다. 이를 위해 젤렌스키는 우크라이나의 고질적인 문제인 과두정치와 부패를 척결하고 투명하고 민주적인 의사결정 체계를 구축해야 할 것이다. 젤렌스키가 우크라이나 재건을 위해 풀어야 할 문제는 ‘비용’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수백만 난민이 다시 우크라이나로 돌아올 방안을 구축하고, 전쟁의 참혹함으로 인한 국민의 신체적, 정신적 트라우마를 치료해야 하며, 동서로 나뉜 국민을 통합해야 한다. 러시아에 의존적인 에너지 구조 또한 풀어야 할 문제다. 우크라이나가 전면적으로 재건되는 상황은 오히려 소련의 유산에서 벗어나 유럽과의 통합 속도를 높이고, 국가 현대화를 달성하는 기회로 작용할 수도 있다. 또한 재건을 위해 자유주의적 가치를 공유하는 서방과 우크라이나가 긴밀하게 협력하는 모습은 우크라이나가 서방의 동맹국이라는 메시지를 유럽연합 가입보다 더 강력하게 보여줄 것이다. 젤렌스키는 이 과정에서 국민을 통합하고 세계를 움직인 특유의 리더십을 발휘하여 재건을 뛰어넘어 새로운 우크라이나를 건설해야 할 것이다.
기사제공:정선미 한국외대 국제지역연구센터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