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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8월 2일 주일예배 설교
출애굽기 15:1-6, 16:1-6, 21:1-8
우리의 한계에 갇히지 않고 약속을 이뤄가시는 하나님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잘 알려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의 이야기입니다. 저는 오늘 창세기 15장과 16장, 그리고 21장이라는 세 개의 굵직한 본문을 한 번에 가져왔습니다. 조금 길고 버거우실 수 있겠지만, 한 사람 또는 한 가정에 드리워진 25년이라는 세월의 간극을 깊이 들여다볼 때, 이 이야기가 주는 묵직한 울림이 온전히 들릴 것입니다.
본문 15장의 상황을 보겠습니다. 아브람의 마음속에도 깊은 불안이 엄습해 있었습니다. 고향을 떠나라 하셔서 떠나왔고, 복을 주시겠다 하셔서 믿었는데, 정작 현실은 11년이 지나도록 나이만 먹어가고 자식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선 그 불안함을 아시니 아브람에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아브람아. 나는 너에게 방패이며, 너의 상급은 지극히 크다.”
그런데 당시 아브람이 얼마나 초조했는지, 하나님의 이 말씀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게 무엇을 주시겠냐? 나는 자식 없이 살아가고 있다. 내 집을 상속할 사람은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다
이 말 속 ‘자식 없이 살아간다’는 말의 원초적인 표현은 ‘나무의 잎사귀가 다 떨어져 앙상해진’ 의미로, 아브람이 자신의 상태를 ‘가문의 가지가 꺾여 완전히 헐벗고 수치스러운 상태’인 것을 적나라하게 표현한 것입니다. 심지어 자신의 기업을 이을 상속자(‘벤-메셰크’)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이방인 다메섹 사람(‘담메셰크’)이라는 사실을 비슷한 발음의 언어유희로 엮어내며, 씁쓸하고도 비참한 상실의 슬픔을 하나님 앞에 여과 없이 쏟아냅니다. 후손이 정말 중요했던 고대 사회 및 세계 속에서요.
무엇보다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다메섹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삼겠다’는 아브람의 선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억지 떼쓰기가 아니었습니다. 당대 고대 서아시아의 법적 관습(누지 토판 등)을 보면, 자식이 없는 부부가 신실한 종을 양자로 입양하여 노후를 의탁하고 재산을 물려주는 것은 당시 사회에서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상식적이고 합법적이며 책임감 있는 사회적 안전망이었습니다.
즉, 아브람은 지금 하나님께 이렇게 물으며 확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제 상급이 지극히 크다 말씀하시는데, 내 현실의 손바닥은 텅 비어 있습니다. 내 상속자가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입니까? 정녕 나는 그것을 준비해야 합니까?”
이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너의 몸에서 나오는 사람, 그가 너의 뒤를 이을 것이며, 그 후손이 별처럼 많을 것이다고 말씀하시고, 그러자 아브람은 그 말이 믿어지고 신뢰가 되며 안심이 됐나봅니다.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는 아브람의 그런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저는 이 이야기에서 아브람이 칭찬 받는 것은, 단지 믿고 신뢰해서라기보다는 또 다른 이유, 더 구체적이고 깊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방법, 그것을 실행하며 이뤄가는 방법, 그 약속을 기다리는 방법에 대해 하나님께 말하며 여쭈었다는 것입니다. 2-3절의 아브람의 반응과 대답은, 현재 내 현실과 상황에서는 이 방법이 최선인 것 같은데 이 방법이 맞습니까?라며 하나님께 확인하고 여쭌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내 자식이 없는데 뭘 주시겠습니까?라며 다소 도전적이며 항변하며 호소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만, 그래도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에 대해 현재 자신이 취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선택이 맞는지, 아니면 다른 계획이 있는지 확인하고 여쭈었다는 게 큽니다. 비록 그 속에는 은근히 다른 계획 곧 친자를 주시라는 속내가 담겨 있었을지라도요. 그 확인절차가 있었기에, 4-5절의 하나님의 계획, 약속을 듣고 확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계획을 확인하고 자신의 방향을 맞출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론,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는 아브람의 그런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이 말씀 속 의로 여기신 믿음은, 덮어놓고 무조건 믿고 신뢰한 의미라기보다는 하나님과 그 말씀에 대해 구체적으로 확인하고 구상하며 자신의 방향을 설정하기 위해, 그리고 하나님의 계획을 실행하며 이루기 위해, 그 약속을 기다리기 위해 자신의 현실을 자각하며 그 현실과 상황 위에서 구체적으로 확인하고 여쭌 믿음이라고 보입니다.
어쨌든, 이런 이유로 아브라함은 단지 유대인 및 이스라엘만의 조상이 아니라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반전이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과 삶이 이처럼 은혜로운 산봉우리에만 영원히 머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아브람도, 그리고 우리들도 냉혹한 현실과 마주하게 되는 게 우리네 인간의 인생입니다. 신앙인이라고 피해가는 것이 결코 아님을 보여줍니다.
두 번째 본문, 16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아이를 낳지 못하였다.”
구체적으로 여쭙고 확인하며 그래서 믿음과 신뢰를 가지고 기다리며 살아갔지만, 일상은 변한 것이 없었습니다. 1년이 가고 2년이 가도 아내 사라의 배는 불러오지 않았습니다. 무려 10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나이는 생물학적인 한계점, 즉 폐경의 시간이 임박해 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오죽 불안했겠습니까? 15장의 따듯한 감동은 희미해지고, 현실의 불안이 다시 그들을 집어삼키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아내 사래가 아브라함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합니다. 16장 2절입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아이를 가지지 못하게 하시니, 당신은 나의 여종과 동침하십시오. 하갈의 몸을 빌려서, 집안의 대를 이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브라함은 아내의 이 제안을 받아들이고,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을 얻게 됩니다.
오늘 본문들 중 16장이 가장 해석이 다양합니다. 관점과 입장에 따라 주요 해석이 극명하게 달라지고, 때론 첨예한 반박과 재반박이 있는 곳입니다.
먼저는 표현이 조심스럽습니다만, 전통적인 해석입니다. 15장에서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네 몸에서 날 자’가 후사가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음에도 불구하고, 16장에서 사래와 아브람이 인위적인 방법(육신의 생각)으로 그 약속을 성취하려 한 ‘신앙의 실패’로 보는 입장입니다. 사래와 아브람의 행동을 조급함과 그에 대한 동조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한 인간적 방편으로 보며, 이를 ‘언약적 조급함’으로 보는 입장입니다.
둘째는, 창세기 3장 곧 뱀의 유혹을 받아들인 하와와 아담의 이야기와 유사성을 찾는 입장입니다. 이들은 본문 내의 어휘와 구조, 그리고 해당 성경 내 다른 텍스트와의 상호텍스트성(Intertextuality)을 분석하는 입장으로, 그러다보니 사래가 하갈을 ‘취하여(took)’ 남편에게 ‘주매(gave)’,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listened)’. 이 표현과 구조가 하와가 선악과를 취하여 남편에게 주고 아담이 아내의 말을 들은 구조와 정확히 일치하다는 것을 근거로, 사래와 아브람의 행동이 일종의 ‘타락’적 성격을 띠고 있음을 문학적으로 암시한다고 해석합니다.
셋째는, 위 두 해석을 강하게 비판하고 반박하는 입장으로, 여성신학, 흑인여성신학, 해방신학에 입각하여 해석합니다. 즉, 그동안 이 이야기를 아브람 중심, 남성 중심으로 해석해왔는데, 고대 가부장적인 문화 속의 텍스트임을 지적하며, 아브람 등 족장 중심이 아닌 주변부의 사람들인 ‘하갈’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해석하는 입장입니다. 이들은 ‘하갈’이 여성이고, 이방인(애굽인)이며, 노예(하층민)라는 삼중적 억압 상태에 놓인 철저한 타자로 취급된다는 것과 하갈의 성적 착취, 대리모 강요, 쫓겨남을 주목합니다. 사래는 가부장제의 희생자(불임에 대한 압박)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다른 여성(하갈)을 착취하는 가해자(억압자), 그리고 아브람은 당시 가부장이면서도 정작 책임을 회피하고 방관하는 무책임한 태도의 남성을 보여주는 이야기로 이것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아직까지 전통적으로 그리고 텍스트와 구조 등 문학과 서사에 충실하게 해석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 폭력과 아픔을 묵인하고 암묵적으로 양산해는지 꼬집으며, 이를 탈피하여 현시대에 맞게 바라보자는 입장입니다.
넷째는, 이것을 역사적으로 접근하는 입장입니다. 이들은 당시 고대 서아시아의 법전 및 관습을 추적하고 연구하여 이를 토대로 상관관계를 밝히며 유추하고 찾아가는 입장입니다. 당시 시대상과 사회상을 보여주는 누지 토판(Nuzi Tablets) 및 함무라비 법전(Code of Hammurabi)에는 이런 내용이 명시되어 있다고 합니다.
불임인 본처가 남편에게 여종을 주어 후사를 잇게 하는 법적 장치. 또한 잉태한 여종이 본처를 멸시할 경우, 본처가 여종을 다시 노예 신분으로 강등시키거나 가혹하게 다룰(징벌할) 수 있는 권리까지 명시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를 근거로, 사래의 행동이 당시 윤리 기준으로는 비난받을 일이 아니었다고 봅니다. 가족의 생존(후손)을 위해 당대에서 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법적 조치’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여성신학 등 현대신학의 비판적인 문제 제기 곧 “이것이 과연 불신앙이며 실패일까?”에 동의하면서도 텍스트에도 주목하는 방법으로 해석하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비단 아브람까지 몇 천 년을 거슬러 올라가지 않더라도, 우리나라 역시 불과 몇 십년 전까지 후사가 없어 고민이고 괴로울 때 이런 방식을 많이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형제나 가까운 친척들 중에서 양자로 들이기도 하였지요. 이들을 이 이야기를 근거로 모두 불신앙으로 매도하고 취급하는 것은 그 수많은 사람을 신앙의 이름으로 정죄하는 폭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본문 15장과 16장이 암묵적으로 제시하는 아브람과 사래의 문제는 결코 ‘불신’이 아니라‘주도성’이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제가 보기에 본문 15장과 16장의 차이는, ‘되묻지 않았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15장에서 아브람은 하나님께 다소 항변하듯이 그리고 간접적으로 요구하듯이지만 되물었습니다. 확인했습니다. 내 상황에서는 이게 최선이고,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인데, 이 방법으로 하실 거냐? 그게 진짜냐? 아니면 다른 무엇을 주실 것이냐?면서 말했습니다.
그런데 16장의 사래와 아브람은 하나님께 말하지 않습니다. 확인하거나 여쭙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네 몸에서’ 난다고 말씀하셨으니, 이 방법도 ‘아브람의 몸에서’ 나는 것이니 타당하다고 여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시 사회 문화와 관습이 그러했기에 그러니 더욱 자연스럽고 당연한 방법이었기에 그래서 이 방법이 당연히 맞겠지 라는 생각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여쭙지 않고 자연스럽게 물흐르듯이 진행한 것처럼 보입니다. 너무나 당연하고 합리적이며 자연스러운 것이었기에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임에도 하나님께 확인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엇보다 이 본문들이 ‘주도성’으로 보이는 이유는 세 번째 본문, 21장에서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생물학적으로 이제 불가능한 사라에게 아이를 주시고, 그를 통해 후사를 잇겟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행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한계에 갇히시지 않는 분이심을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우리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역사하시고 약속을 이루시는 분이심을, 그야말로 만물의 조물주요 창조주요 주관자이신, 거룩하신 분임을 하나님께서 이 사건과 이야기들을 통해 스스로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며,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기억하고 이야기할 때 기억하고 되뇌일 것인데, 그때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신뢰’가 어떻게 시작됐는지, 그리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를 함께 기억하고 이야기할 텐데, 이것을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이런 하나님으로 스스로 우리에게 드러내시고 계시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이야기들을 근거로, 생명에 관한 문제로 깊이 기다리고 있고 고심하고 있는 이들에게 덮어놓고 하나님의 방법을 기다리라고, 하나님께서만이 하실 수 있는 그 길을 하나님께서는 하신다고,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이라고, 순종이라고 말하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나아가, 이 이야기들을 그렇게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창세기’, 말 그대로 세상과 하나님 그리고 믿음과 신뢰에 관한 ‘근원’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이 관점과 방향으로 시작되었음을 기억하며 견지하며 살라고 독려하는 것이지, 결코 지금 이 시대의 상황과 내 현실적인 부분에서 합리적이고 취할 수 있는 방법을 취하지 말고 ‘하나님만의’ 역사와 방법을 덮어놓고 기다리라는 것은 아니라고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가장 극적으로, 믿음의 ‘조상’의 사건과 이야기를 통해 스스로를 드러내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이, 세월, 시간, 건강, 생명, 죽음 등 인간은 그것을 완벽하게 통제하거나 마음대로 할 수 없고, 그런 한계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인간의 한계에 제약받지 않으시고 자신의 약속을 신실하게 이행하시며 이뤄가시는 하나님임을 가장 극적인 사건과 이야기로 하나님께서 스스로 드러내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본문의 이야기들에서 바로 여기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의 약속, 나아가 인간의 역사는 우리 눈에는 우리가 행하는 것 같고, 우리 계획하에 움직이는 것 같지만 실상은 하나님 손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신뢰’가 시작되는 ‘조상’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대대로 기억하도록, 가장 극적으로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신 것입니다.
만약 아브람이 젊고 힘이 있을 때 자식을 얻어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브람은 평생 이렇게 자부했을 길과 가능성이 열렸을 것입니다.
“거 봐, 하나님이 약속하시긴 했지만, 결국 내 합리적 판단과 내 능력이 더해져서 이 결과를 얻어낸 거야. 하나님께서 주신 아들이기도 하지만 내가 얻은, 내가 쟁취한 내 아들이야!”
그런데 아브라함과 사라가 이삭을 낳았을 때가 아브라함이 100세, 사라가 90세 때의 일입니다. 인간의 모든 생물학적 가능성과 합리적 대안이 완전히 소멸된 때입니다. 사라는 경수가 끊어졌고 그들의 몸은 ‘죽은 것과 다름없는’ 상태였습니다. 어떤 능력으로도, 당대의 어떤 뛰어난 제도로도 생명을 만들어 낼 수 없는 철저한 ‘절망의 자리’, ‘불가능의 한복판’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내 능력으로는 완전히 불가능한 그 불가능의 자리에서 기어이 ‘이삭(웃음)’을 탄생시키십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않았을 때, 또는 남지 않았어도, 하나님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방법으로 약속을 지키시고 이뤄가시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이 죽음의 자리에서 생명을 얻고 나니, 아브라함과 사라는 항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심스럽지만, 아브라함과 사라의 입장에서는 이런 고백이 나왔을 것 같기도 합니다.
“아, 내 힘으로 된 것이 단 1%도 없구나! 내가 조급해서 내 능력(하갈)을 동원하여 누군가를 아프게 하고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나의 실패에 매이지 않으시고 이 약속을 홀로 신실하게 이루셨구나! 하나님은 참으로 나의 계산을 초월하시는 분이시구나!”
이 불가항력적인 은혜를 뼈저리게 경험할 때, 비로소 인간은 자신의 빳빳한 교만을 꺾습니다. 내 계획을 도와주는 ‘비서’가 아니라, 내 존재 전체를 엎드려 경배해야 할 ‘진짜 하나님’으로 모시고 동행하기를 온몸으로 갈망하게 됩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섣부른 내 판단보다 주님의 뜻을 먼저 구하고 확인하고 여쭙는 겸손한 신앙인으로 빚어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평화목교회 교우 여러분.
우리는 이 땅을 살아가면서 이성과 지혜를 다해 치열하게 살아야 합니다. 막막할 때는 최선의 합리적 대안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이성과 지혜로 우리에게 주어진 팍팍한 현실을 최선을 다해 살아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던지는 묵직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내 삶을 이끌어가는 궁극적인 ‘주도권’이 과연 누구에게 있나? 누구에게 있다고 생각하는가?
우리는 최선을 다해 삶의 방법을 찾고 구상하되, 그것을 실행하기에 앞서 하나님께 묻고 여쭙고 확인하면 좋겠습니다. “주님, 내 현실에서는 이것이 최선인 것 같은데, 이 방향이 맞습니까? 주님의 다른 뜻이 있습니까? 솔직히 저는 다른 뜻을 원하기는 합니다.” 등 멈추어 서서 확인하고 여쭙는 ‘그 믿음의 과정’ 곧 ‘우리 인생의 주도권과 인도하심과 역사하심이 하나님께 있음을’ 살펴보고 확인하는 과정이 우리 안에 살아 있으면 좋겠습니다. 내 계획과 시대의 상식만이 정답이라고 확신하며 하나님께 묻기를 멈추어 버린 채, 인생의 결론을 내리며 달려가고 있지는 않은지 확인하면 좋겠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사래와 아브람처럼 16장의 조급함에 빠져 실수하기도 합니다. 묻지 않고 행한 우리의 섣부른 선택과 주도성 때문에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히거나, 삶의 복잡하고 고통스러운 매듭을 스스로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하지만 오늘 아브라함의 25년의 여정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거대하고 압도적인 위로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그런 연약함과 실패조차도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을 끝내 꺾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그러뜨린 상황 속에서도, 심지어 내 생물학적 한계와 이성의 계산기가 ‘절대 불가능’이라는 영점(Zero)을 가리키는 그 죽음과 같은 절망의 자리에서도 기어이 일하시는 분임을 만물의 근본을 이야기하는 창세기에서 드러내십니다. 우리의 한계에 결코 갇히지 않으시고, 홀로 신실하게 약속을 이뤄가시는 전능하신 창조주이십니다.
그러므로 참된 믿음과 신뢰의 기다림이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무기력하게 하늘만 쳐다보는 것이 아닙니다. 내게 주어진 눈물의 현실 속에서 치열하게 살아내되, 매 순간 주님께 묻고, 주님의 뜻을 확인하며, 내 삶의 궁극적인 주도권을 그분께 내어드리는 ‘겸손한 동행’입니다. 내 능력의 끝이 곧 하나님의 끝이 아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분, 우리의 실수마저도 당신의 주권 아래 품어 안으시며 기어이 생명의 약속을 이루어 내시는 그 은혜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인생을, 만물을 책임지시고 맡으시고 돌보십니다. 그 전능하시며 신실하신 하나님께 우리의 인생을 온전히 맡기기를, 주도권이 그분께 있음을 알고 내어 맡기기를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