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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위총의 난
조위총의 난(1174-1176년)은 1174년9월에 황해도와 평안도 일부지역을 중심으로 조위총 등이 이끄는 봉기군이 정중부 일파의 부패한 무신정권을 치기 위해 일으킨 난이다.
조위총(?-1176년)은 병부상서로 서경 유수를 겸직하고 있던 중, 1170년(의종24년)에 정중부, 이의방 등이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손에 넣고 전횡을 일삼자, 1174년(명종4년)9월에 격문을 돌려 정중부 일당을 치겠다고 선언하였다.
"듣자 하니, 개경의 중방에서 의논하기를, 우리 북경의 여러 성이 사납고 난폭해져서 마땅히 토벌해야 한다고 하면서, 대군을 보내 우리를 공격한다고 하니, 우리가 어찌 가만히 앉아서 죽기만을 바라겠는가."
이러한 조위총의 거짓 격문을 읽은 재령 이북(서흥에서 봉산일대까지의 지역)40여 성의 령 대부분이 이에 동조하여 반기의 깃발을 들었다. 그들은 모두 몇몇 무신들이 독차지하다시피하여 휘두르는 무신정권의 전횡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그 동안 지방 관리들의 수탈에 견디지 못하던 농민들 상당수도 조위총의 봉기군에 가담하였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문신 출신인 평장사 윤인첨을 원수로 삼아 3군을 거느리게 하여 반란군을 진압케 하였으며, 그와 동시에 내시예부낭중 최균을 여러 성에 보내어 반란군에 합세하지 못하도록 회유책을 썼다.
진압군은 재령 근처의 절령에 이르러 반란군을 만나 접전을 벌이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 찬 눈보라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그래서 앞을 제대로 내다볼 수 없었다. 게다가 진압군은 곳 지리에 익숙지 못한 터라 함부로 진격할 수조차 없었다.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조위총은 선봉장으로 용감히 돌진하여 진압군을 공격하였다. 그러자 진압군은 혼비백산하며 도주해 버렸다. 이때 윤인첨도 포위당했으나, 도지병마사인 정균(정중부의 아들)의 도움으로 봉기군의 포위망을 뚫고 간신히 탈출에 성공하였다.
첫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봉기군은 그 여세를 몰아, 동계 방면의 화주영을 점령하고 있던 김박승, 조관 등과 합세하여 개경의 교외 역까지 진격해 나갔다.
이때 개경에서는 화가 난 이의방이 서경 출신의 장수들, 즉 대장군 김덕신, 장군 김석재 등을 모두 잡아 처형해 버렸다. 그런다음, 이의방은 군대를 끌어 모아 봉기군과 대처했다.
그는 최숙에게 정예기병 수십 명을 보내 봉기군의 취약한 곳을 기습하게 했다. 기병부대에의해 허를 찔린 봉기군은 놀라서 일시 후퇴했다. 이를 기점으로 하여 이의방이 이끄는 관군은 봉기군을 대동강 유역까지 몰아붙였다.
그러자 봉기군은 서경 성문을 굳게 닫아 걸고 토벌군에 강력히 저항하였다. 토벌군은 추위 때문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일단 후퇴하여 전열을 가다듬었다.
그런 다음 같은 해 11월에 이의방은 토벌군을 5군으로 재편성한 뒤 윤인첨을 원수로 임명하고 두경승을 후군총관사로 삼아 총공격을 개시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때 어이 없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이의방이 자기 딸을 무리하게 태자비로 세우고자 하여 무신들의 반감을 샀던 탓에 정균(정중부의 아들)과 종참에 의해 살해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에 정중부 일파는 조정 내의 대신들을 무마하고 시간을 벌기 위해 조위 총에게 협상 안을 제시하였다.
그러자 조위총은 사신을 보내 `이의방을 처단한 것을 축하한다`는 상표를 조정에 보냈다.
그러나 정중부 일파는 화해는커녕 그 사신을 옥에 가둬 버리고 말았다. 정중부 일파의 얄팍한 기만책을 간파한 조위총은 다시 봉기하였다.
1175년 1월에 재편성된 토벌군이 서경을 향해 진격하였다. 두경승은 토벌군을 이끌고 함남의 남쪽을 거쳐 서북 지방에 있는 연주(개천)를 먼저 공략하였다. 그러나 연주 전투는 수개월이나 걸렸다.
조위총은 모든 가능한 지원 병력을 연주로 보내 끝까지 저항하였지만, 두경승의 집요한 공격에 밀려 끝내 연주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봉기군 수백 명이 포로로 잡혔다.
그러자 이북 지역의 여러 성들이 하나둘씩 토벌군에게 투항해 왔다. 이제 유일하게 남은 것은 조위총이 지키고 있는 서경뿐이었다. 두경승은 서경의 성을 완전히 포위하고 동북쪽에 흙을 쌓아 올려 그 위에서 성안을 집중 공격하였다.
사면초가에 빠진 조위총은 김존심과 조규를 금으로 보내 지원부대를 요청했다. "이의방이 왕을 살해하고 모반하였으니, 이를 물리칠 지워 군대를 보내 달라."
그런데 금나라에 사신으로 가던 도중에 김존심이 조규를 죽여버리고 토벌군에 투항해 버렸다. 조위총은 다시 서언을 사신으로 보내 금에게 군사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금은 조위총의 제의를 거절해 버리고, 오히려 사신을 붙잡아 고려 정부에 넘겨줘 버렸다.
금의 군사 지원에 대한 소망이 좌절되자, 조위총의 기세는 현저히 꺽이게 되었지만, 그 후로도 그는 근 1년 여 동안 성을 굳게 지킨채 끈질기게 저항하였다.
그러던 중 1176년 6월 토벌군의 윤인첨이 이끄는 부대는 서경의 통양문을, 두경승이 이끄는 부대는 서경의 대동문을 동시에 공격하였다. 이러한 토벌군의 대대적인 총공세를 견디지 못하고 마침내 서경성은 함락되고 말았으며, 이때 수령 조위총은 붙잡혀 처형당했다.
간신히 성을 빠져 나간 봉기군의 잔당들은 깊숙한 산으로 들어가 투쟁을 계속했지만, 그다지 위협적인 것은 못 되었다.
망이 망소이의 난
망이의 난(1176-1177년)은 1176년(명종 6년) 1월과 1177년 2월 두 차례에 걸쳐 공주를 중심으로 충청,전라 각지에서 사회질서, 신분질서가 문란해진 틈을 타서 일어난 민란이다. 당시 특수 행정 구역이었던 소를 배경으로 하여 일어난 난이기 때문에 명학소민의 난이라고도 하며, 조위총의 난과 아울러 고려조의 최대 농민전쟁이다.
망이, 망소이 등과 같은 농민 출신들이 주동이 되어 1176년 1월에 공주 명학소를 중심으로 난을 일으켰다. 망이, 망소이 두 형제는 수탈을 일삼는 무신정권의 권세가들과 지방 관리에 대한 불평불만자들을 끌어모아 스스로 `산행병마사`라고 칭하고서 봉기하자고 외쳤다.
그들은 농민 대중의 압도적 지지를 받아 1천여 명을 이끌고 일시에 공주를 기습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이에 정부는 채원부와 박상수를 보내 회유책을 썼으나 그들은 이를 물리치고 완강한 저항을 계속하였다. 이 무렵 남부 지방에서도 민란이 일어났다.
예산의 농민반란이 그것이다.(고려 시대의 민란은 1162년부터 향후 40여 년 동안 전국 각지에서 끊임없이 일어났다. 1162년 이천, 동주, 선주 등에서 대규모의 민란이 일어났으며, 1172년 창주, 성주, 철주 등지의 서북지방에서 민란이 일어났고, 1174년에는 서경에서 조위총 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서북방의 40여 성에서 동시에 민란이 일어났었다)
봉기군의 세력은 날이 갈수록 커져서, 나중에는 공주 일대뿐만 아니라, 덕산, 여주, 진천, 주, 아산 등지까지도 차지하였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장정을 선발하여 정황재와 장박인에게 장사(용병)3천명을 주어 봉기군을 공격토록 했다.
그러나 토벌군은 한 달도 못 되어 봉기군에게 격퇴당하고 말았다. 그러자 조정은 다시 명학소를 충순현으로 승격시키고 이곳에 현령과 현위를 보내어 위무케 하는 등 파격적인 행정 조치를 취하여 봉기군을 무마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 조치는 오히려 이 지역의 농민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어 명학소민들이 너도나도 봉기군에 대거 동조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고 말았다. 봉기군은 예산현을 공격하여 감무(조세 및 민호 징발을 직접 관장하던 책임자)를 생포하여 죽여 버렸으며, 그 여세를 몰아 곡창지대인 충주까지 쳐들어가 점령하여 버렸다.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조정은 대장군 정세유와 이부를 남적처치병마사에 임명한 후 관군을 증파하여 남적(중부이남 지역에서 일어난 반란군을 남적, 그 이북 지역에서 일어난 반란군을 북적이라 했다)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 작전을 벌인 결과 1176년 9월에 예산의 농민 봉기군을 평정하였다.
이를 계기로, 관군의 집중 공격이 한층 심하여져서 다수의 농민 봉기군 도자들이 싸울 기력을 잃어 버리고 도망가 버렸다. 이 때문에 상황이 불리해지자, 수령 망이는 더 이상의 싸움은 무의미하다고 판단하여 1177년 1월에 토벌군과의 화해를 요청했다.
그는 귀향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 식량을 지급해 줄 것 등을 화해 조건으로 내세웠다. 그러자 조정은 농민의 지속적인 항쟁을 두려워한 나머지, 그 화해 조건을 받아들여, 망이 등과 같은 반란 주모자들을 처형하지 않고 오히려 곡식을 주어 고향으로 돌아가게 도와주었다.
그런데 조정은 망이가 귀향하는 동안에 명학소에 거주하고 있던 망이의 아내와 어머니를 인질로 가두었을 뿐만 아니라 명학소에 토벌군을 보내 반란의 주모자들을 감시케 했다.
고향에 돌아온 망이는 그때서야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에 격분한 망이는 1177년 2월에 농민들을 끌어모아 다시 반기의 깃발을 들었다.
망이는 봉기군을 지휘하여 우선 인근에 있는 가야사(덕산)라는 절을 공격하여 점령하였으며, 이어 황려현(여주)과 진주(진천)를 함락하였다. 그러자 이에 힘입어 예산에서 손청도 다시 봉기하여 충청남도 북부 지역을 공략했다.
망이가 이끄는 봉기군은 불과 열흘도 안 되어 충청북도 진천까지 점령하였으며, 3월에는 홍경원이라는 사찰까지도 점령하여 불을 지르고 당대 권세가들과 결탁하여 특혜를 누리면서 노비를 거느리고 호사스럽게 지내고 있던 승려 10여 명을 처형한 다음 주지승을 협박하여 조정에 편지를 쓰게 하였다.
"이미 우리 고향을 현으로 승격시키고 또 수령을 두어 무마하고서 곧 그 길로 군사를 보내어 우리를 토벌하고 나의 모친과 처를 잡아 가두니, 그 뜻이 어디 있는가? 우리는 싸우다가 죽을지언정 결단코 항복하여 포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반드시 개경으로 쳐들어가서 이 분풀이를 하고야 말리라."
이로써 조정에 대한 사실상의 선전포고를 한 망이는 봉기군을 지휘하여 공주와 아주(아산)를 점령하는 등 청주를 제외한 충청남북도 전 지역과 경기도 일부까지도 파죽지세로 점령해 버렸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조정은 강경책으로 선회하여, 1177년 5월에 충순현을 다시 명학소로 강등한 후, 토벌군을 독려하기 위하여 선지사용별감을 파견하였으며, 토벌군을 3군으로 편성한 다음 주력부대로 하여금 먼저 손청(예산을 중심으로 일어난 봉기군 수령), 이광(미륵산을 중심으로 일어난 봉기군 수령)등이 이끄는 봉기군을 공격하게 하여 주모자들을 잡아 죽였다.
갑자기 양 날개를 잃어 버린 망이의 봉기군은 그 기세가 한풀 꺽이게 되었다. 게다가 계속되는 전투로 식량과 병기의 부족이 심했을 뿐만 아니라 농번기를 당하여 도망가는 농민들의 수가 증가했기 때문에 사태가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다가 봉기군은 정세유가 지휘하는 토벌군이 삼면에서 동시에 쳐들어오는 바람에 도저히 이를 당해 낼 도리가 없어 항복하고 말았다. 결국 망이와 망소이 두 형제는 생포되어 청주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망이, 손청, 이광의 난은 이후 고려 시대에 수없이 일어난 민란의 주요 밑거름이요 기폭제가 되어 주었다.
1177년 5월에는 서경에서도 다시 민란이 일어나 서경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1178년 1월에 이의민이 이끄는 관군에 의해 서경의 봉기군은 다시 진압되고 말았다.
그리고 나머지 봉기군도 같은 해 10월에 박제검이 이끄는 진압군에 의해 토벌되고 말았다. 그러나 1179년 1월에 다시 서경 지방에서 민란이 재발하였다. 이때 이부가 서경 봉기군의 지도자인 견종을 꾀어 살해해 버림으로써 무산되고 말았다.
1180년 1월에 다시 경성에서 폭동이 일어났으며, 1182년 3월에 전주에서 기두, 죽동 등이 주동이 되어 관노들과 농민들을 이끌고 봉기하였으나,한 달 만에 관군에 의해 평정되고 말았다.
그러나 같은 해 9월에 관성(옥천)에서 또다시 민란이 일어났으나 곧 진압되었다. 1187년 9월에는 서북면 순주에 있는 귀화소에 안치되어있던 도적 수백 명이 탈출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1190년 1월에는 경주 지방에 민란이 일어나자 관군이 출동하여 진압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같은 해 12월에 강순의를 남로착적사로 임명하여 남적을 공격하여 난을 평정하였다.
1193년 7월에는 경상도 운문에서 김사미가, 그리고 초전(위산)에서는 효심이 주동이 되어 대규모의 민란을 일으키자, 조정에서는 곧바로 대장군 전존걸 등이 이끄는 토벌군을 보내 민란을 진압토록 했으며, 같은 해 11월에는 남로착적병마사인 최인이 이끄는 관군을 더 증파하여 봉기군을 공격토록 했다.
그러자 1194년 2월에 경상도 농민봉기군의 지도자인 김사미가 항복을 청해 왔다. 그러나 진압군은 김사미를 목을 베어 죽여 버렸으며, 그 해 12월에 남로병마사로 하여금 봉기군을 공격하게 하였다.
결국 봉기군은 밀성(밀양)에서 격파당하고 말았으며, 봉기군의 지도자인 효심은 체포당했다. 1198년 5월에는 개경에서 만적 등이 노비 폭동을 계획하다가 발각되어 처형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1199년 2월에는 명주 및 동경(경주)에서 민란이 일어나 주군을 장악하였으며, 1200년 5월에는 진주리 정방의 등이 민란을 일으켰고, 밀성(밀양)에서 관노 50여 명이 집단으로 도망하여 운문적에 들어갔으며,같은 해 8월에는 전주의 잡족인들이 민란을 일으켰으나, 1201년 1월에 진주의 민란은 정방의가 관군에 잡혀 처형됨으로써 평정되고 말았다.
1202년 10월에는 탐라(제주)에서 민란이 일어났으며, 같은 해 10월에는 경주 별초군이 폭동을 일으켰다. 그 해 12월에 탐라 민란은 진압되었지만, 같은 달에 경주, 운문, 울진 등에서 봉기군들이 연합하여 대규모 민란을 일으키고서 주군을 일시에 장악해 버렸다.
그러나 이듬해인 1203년 4월에 경주 민란의 주모자인 도령이 잡혔으며, 7월에는 운문산 봉기군의 효좌도 잡혔고, 8월에는 태백산 봉기군의 주모자인 아지마저 붙잡혀 마침내 민란은 평정되고 말았다.
1203년 9월에는 부석사, 부인사의 승려들이 난을 꾀하다 모두 붙잡혀 섬으로 유배당하고 말았다. 1217년 서경에서 최광수 등이 고구려의 부흥을 내걸고, 그리고 1237년에는 담양에서 이언년 등이 백제 부흥을 각각 표방하고 난을 일으켰으나 평정되고 말았다.
이렇듯, 고려 시대에는 크고 작은 민란들이 수없이 발생했다. 문벌귀족들의 횡포, 그뒤를 이은 무신들의 유혈 정권 투쟁, 중앙집권 통치력의 약화, 지방관들의 탐욕, 중앙 권세가들의 토지겸병과 농민 수탈, 무정부 상태나 다름 없는 중앙정부의 무능력, 그리고 그 동안 누적되어온 사회적 모순 등이 이러한 민란들을 발발하게 하는 주요 요인을 제공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