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단의 소의경전인 금강경은 보통 상을 타파하는 경전이라고 잘 알려져 있습니다. 상을 타파하는 것이야말로 불교 가르침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대승찬’에는 “애써 분별하여 상을 취하지 않으면 잠깐 사이에 저절로 도를 얻는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분별상만 없으면 도가 드러난다는 것이지요.
지공화상 불이송에는 ‘촉목무비정각’이라고 하여 눈에 보이는 것마다 바른 깨달음 아님이 없다고 말합니다. 불법에서는 늘 바로 지금 이 자리에 깨달음은 환히 다 드러나 있다고 말합니다. 다만 분별심과 상, 즉 분별상으로 인해 그 깨달음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지요.
대승찬에 이런 구절도 있습니다. “마음으로 상을 취해 진실이라 여기면 끝내 견성하지 못함을 알라” 이처럼 상을 취하여 그 상에 사로잡히고, 그 상을 진짜라고 여기게 된다면 견성 성불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불교에서는 상, 분별상, 분별심에 대한 법문이 많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정작 ‘상’이라고만 하면 사람들은 대충 이해는 하겠지만, 상이 뭘까 하고 궁금해 하시는 분들도 많으시더군요.
쉽게 말해 ‘상’이란 모양 있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이거다 저거다 하고 분별할 수 있는 모든 것이 다 상입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도 상이고, 귀에 들리는 모든 소리도 다 상이고, 코로 맛보아지는 냄새, 몸으로 느껴지는 촉감도 다 상입니다. 이것과 저것이 둘로 나뉘어져 그것을 분별하고 구분해서 알 수 있는 모든 대상이 바로 상입니다.
이 색깔과 저 색깔이 서로 구분되기 때문에 그 모든 색이 바로 상입니다. 이 소리와 저 소리가 구분되면 다 상입니다. 엄마의 목소리와 아빠의 목소리가 구분되니 그 또한 분별상입니다.
냄새 맡아지는 향기 또한 좋은 향기, 나쁜 향기로 나누어지는 모양이 있기에 그 또한 상입니다. 심지어 사랑, 감사, 평화, 고요 같은 생각의 대상들 또한 형상으로 있지는 않지만 생각 속에서 특정한 모양으로 구분되는 대상이기에 이 또한 상입니다. 고요함과 시끄러움이 분별되고, 사랑과 미움이 구분되기 때문에 이 또한 상인 것입니다.
이처럼 상은 둘로, 그 이상으로 나뉘어지는 것들 가운데 구분되는 것, 분별되는 모든 것이기에 분별상이라고도 합니다. 분별심은 이거다 저거다 하고 분별하는 마음, 인식을 말하고, 그렇게 분별되는 대상을 분별상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신심명에서는 지도무난 유혐간택 단막증애 통연명백, 즉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으니 다만 가려서 선택하지만 말라고 했고 미워하고 좋아하지만 없으면 통연히 명백해진다라고 했습니다.
또한 대승찬에서는 ‘일체 모든 것을 싫어하거나 좋아하지만 않으면 번뇌는 반드시 제거될 것이다’라고 하여, 좋고 싫다고 둘로 나누는 분별상만 없으면 깨달음이 드러남을 설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무엇이든 상을 만들고, 둘로 나누어, 그 중에 좋은 것은 취하고, 싫은 것을 버리려는 마음, 바로 이 분별심 때문에 모든 번뇌망상과 괴로움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분별심에서 취하고 버리려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심지어 세간법을 버리고 불법을 취하려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불법을 실천하는 것이 아닌, 분별심, 간택심에 빠져 중도에서 벗어난 길일 뿐입니다.
불법이란 바로 이렇게 둘로 나누어 분별되는 상을 만들고 그 상에 빠져 취하고 버리는 것이 아니라, 전혀 분별되지 않는, 둘로 나누어지지 않는 ‘참된 하나’를 바로 보는 것입니다.
🩸글쓴이: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