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이 말씀하신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리라.”
(마태 11,28)
오늘 복음 말씀은 예수님의 두 가지 비유 말씀, 곧 되찾은 양의 비유와 되찾은 은전의 비유 말씀을 전합니다. 이를 전하는 루카 복음사가는 ‘목자와 양 떼’의 표상을 이용하는데 이 표상은 구약 성경에서 하느님과 그 분 백성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를 말하는 데에 이용되는 고전적 주제입니다. 성경 속에서 흩어졌거나 잃어버린 양들을 되찾았다는 것은 하느님의 구원을 뜻하는 전통적 은유로서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이 비유 말씀을 들어 하느님께서 죄인들인 소외받은 이들을 찾아 그들에게 구원을 주셨다는 의도를 드러냅니다. 오늘 복음의 서두는 바로 이 같은 루카 복음사가의 의도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나누며 말씀을 나누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못마땅해 하며 다음의 말로 투덜거립니다.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루카 15,2)
죄인이라 여겨지며 구원의 대상에서 배제되었다고 여겨지는 세리들과 대화를 나누며 식사까지 함께 하는 예수님을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율법의 규정들을 지키지 않고 부정한 행동들을 서슴지 않게 하며 하느님의 구원으로부터 배제된 그들은 율법학자들의 눈에 그저 부정한 죄인들에게 지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들을 예수님은 다르게 바라보십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 곧 그들을 어떻게 여기시는지가 예수님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한 두 비유 말씀 안에서 그대로 드러납니다.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서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지 않느냐? [...] 또 어떤 부인이 은전 열 닢을 가지고 있었는데 한 닢을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 안을 쓸며 그것을 찾을 때까지 샅샅이 뒤지지 않느냐?”(루카 15,4.8)
예수님께 세리들과 죄인들은 잃어버린 양 한 마리이며 잃어버린 은전 한 닢이었습니다. 그 양 한 마리와 하나의 은전은 나머지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광야에 내팽겨 둔 채 찾아 나서야만 하는 소중하고 귀한 양이었으며, 아홉 닢의 은전을 내버려두고 등불을 켜고 온 집안을 쓸며 샅샅이 찾아야만 하는 소중한 은전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것을 찾았을 때, 그 기쁨에 환호하며 주위의 모든 이들에게 함께 기쁨을 나눌 그 같은 소중한 그 무엇이었습니다. 이 같은 예수님의 마음, 곧 세리와 죄인들을 향한 예수님의 각별하고도 특별한 사랑의 마음을 예수님의 다음의 말로 다시금 표현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루카 15,10)
죄인과 세리들을 향한 예수님의 이 마음은 나약한 죄인일 뿐인 우리들에게 더욱 특별히 다가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다름 아닌 바로 나를 향한 사랑의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를 향한 하느님의 이 사랑. 그 사랑을 체험한 시편의 저자는 자신이 느낀 사랑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다음과 같은 오늘 화답송의 시편으로 표현합니다.
“그분께 노래하여라. 찬미 노래 불러라. 그 모든 기적 이야기하여라. 거룩하신 그 이름 자랑하여라. 주님을 찾는 마음은 기뻐하여라.”(시편 105(104),2-3)
한편, 오늘 제 1 독서의 바오로 사도 역시 그 같은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그 사랑으로 변화된 사랑의 사도답게 자신이 체험한 하느님의 사랑이 그의 삶 안에서 얼마만큼 중요한지를 다음의 말로 고백합니다.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필리 3,7-8)
여드레 만에 할례 받은 벤야민 지파 출신의 바오로, 히브리 사람에게서 태어난 정통 히브리 사람, 율법이라면 남 못지않게 열심인 바리시아파인 그가 자신에게 이롭던 그 모든 세상적 배경들을 해로운 쓰레기로 여기게 된 것은 바오로가 표현하는 그대로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이었습니다. 바오로가 말한 그 지식이란 다름 아닌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 말씀하신 우리를 향한 그 분의 마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한명 한명을 생각하는 예수님의 사랑어린 마음, 나 하나를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나만을 찾아 온 산을 헤매는 마음, 나 하나를 위해 온 집을 샅샅이 뒤지는 마음이 바로 바오로가 말한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지식의 더할 수 없이 높은 가치를 깨닫게 된다면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삶을 온전히 충만케 하고 그 사랑이 우리를 변화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뒤처지고 사람들로부터 소외받아 외로움과 고독에 몸부림 치고 있다면 오늘 우리에게 전해진 이 복음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십시오. 소외된 채 아파하며 힘들어 하는 우리들을 찾아 예수님께서 길을 나서십니다. 바로 나를 찾기 위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인 나를 찾기 위해 예수님께서 온 산을 샅샅이 찾아 나서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나를 발견하고 그 누구보다 더 기뻐하며 외로움에 몸부림치는 나를 안아주시고 당신의 품으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늘 복음환호송이 말하듯 주님께 다가가는 것 오직 그것이 필요할 뿐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우리가 하느님 곁으로 다가간다면 주님이신 그 분은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우리에게 편안한 안식을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오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우리를 찾아 나서고 마침내 우리를 찾아 당신의 품으로 인도해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언제나 기쁘고 행복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리라.”
(마태 1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