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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동명천제단입니다.
대한제국 애국가
상제는 우리 황제를 도우사
성수무강하사
해옥주를 산같이 쌓으시고
위권이 환영에 떨치사
오천만세에 복록이 일신케 하소서
상제는 우리 황제를 도우소서
선농단(先農壇), 여러분은 선농단에 대해 어떻게 생각을 하고 계십니까?
선농단은 신라왕조(新羅王朝) 시대부터 시작된 매우 긴 유구(悠久)한 유래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선농단에서 지내는 제사인 선농제(先農祭)는 사실 선농제 하나만 있었던 것이 아닌 원래는 삼신(三神), 즉 선농(先農)과 중농(中農), 후농(後農)에 제사(祭祀)를 지내는 것이 원칙으로 선농제향(先農祭享)을 지낸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이 의미하는 것은, 농사(農事)에 대한 우리 조상들의 관심과 생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즉, 오늘날까지도 중요성을 높게 평가하는 농업(農業)이 차지하는 국가적 역할(役割)과 비중(比重), 그리고 성과(成果)에 대한 의미인데, 적어도 왕조시대까지 농업이 갖는 의미는 비록 지금과 같은 현대화 시설이 부족하고, 농기구(農器具) 및 농업기술(農業技術)이 많이 부족하여 생산력이 설사 매우 낮았다하더라도, 농업이 국가에게 갖는 의미를 매우 크게 생각하여 지속적으로 국가가 농업에 대한 국가의 지원책(支援策) 및 관심도(關心度)를 높여왔다면, 국가에 있어서 농업이 갖는 생산력(生産力)은 시대가 가면 갈수록 월등하게 높여질 수 밖에 없는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농업의 생산력이 왜 중요하냐면, 지금도 여전히 국가경제(國家經濟)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큰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특히, 국가경제에서 큰 문제점으로 지적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물가(物價)의 안정과 관련한 부분입니다. 결국, 이러한 물가를 좌우하는 결정적 요인이 바로 농산물(農産物)로 대표되는 1차 생산물(一次生産物)의 가격 안정이라는 것은 의심할 바가 아닙니다. 즉, 농산물의 가격이라고 할 수 있는 1차 생산물의 물가 안정(物價安定)이 국가 경제와 국민에게 주는 국민 생활의 안정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결정적 계기인 것처럼 비단, 현대만이 아닌 과거 왕조시대에도 여전히 농업은 동일한 수준의 위상(位相)과 중요도(重要度)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며, 따라서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만 과거, 왕조시대에도 현대 못지않게 농업이 갖는 국가 경제의 안정성은 역시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높았을 것임을 우리는 간접적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중요한 뜻과 의미를 생각하여 의식적(意識的)이고 정신적(精神的)으로 농업의 생산력과 국민 정신의 함양(涵養)을 추진한 것이 바로 신라의 삼신제(新羅三神祭)라고 할 수 있는 선농, 중농, 후농에 대한 제향이라고 하겠습니다. 결국, 신라가 고구려(高句麗)와 백제(百濟)를 압도하여 삼국을 통일(三國統一)하고 고조선(古朝鮮) 이후 단일민족 국가(單一民族國家)로 성장할 수 있었던 계기는 물론 화랑도(花郞道)로 대표되기도 합니다만, 신라가 삼국을 압도하는 큰 경제적 성과가 있었기 때문에 신라가 크게 성장할 수 있었고 마지막 통일전쟁(統一戰爭)에서 가장 중요한 보급(補給)이 원활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신라만의 독특(獨特)하고 완성도(完成度) 높은 삼신(三神), 즉 선농, 중농, 후농으로 대표되는 신라 선농제(先農祭)였다고 생각할 수 있는 문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조선왕조(朝鮮王朝) 시대 이후에는, 크게 선농제가 바뀌어 중농과 후농을 폐지하고 선농제 하나만 모시게 되었는데, 제향일(祭享日)도 정월 길 해일(正月吉亥日)에서 경칩 이후 길한 해일(驚蟄吉亥日)로 바꿔 거행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선농제를 지내는 장소로서 임금이 직접 친경(親耕)하시는 전지(田地)인 동적전(東籍田)을 설치하고 경작하셨으며, 태종대왕(太宗大王) 14년에 선농제를 위한 제단의 단(壇)과 유(壝)의 설치 규정이 정해지는 등, 선농제를 중사(中祀)로서 국가적인 의식으로 규정하는 사업을 완성하게 됩니다.
이러한 선농제는 1910년이라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순간까지 친경의 의식으로 순종황제 폐하(純宗皇帝陛下)께서 직접 하셨으나 대한민국 공화국(Founding of the Republic of Korea) 이후의 지금은 선농제가 동대문구(Dongdaemun-gu)에서 하는 하나의 동네 행사로 전락하였습니다. 매우 안타깝고 불쌍한 수준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금일, 저희 재건회에서 특별히 선농제와 선농단을 언급하는 이유는 바로 외세에 의해 정통성없이 건국된 대한민국 공화국(the Republic of Korea)에 의해 민족의 고유 의식(固有意識)이 초라하게 동네 행사로 추락하고 격하(格下)된 국가 제향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기 위함입니다. 즉, 우리 동이족(東夷族)이 처음 단군조선(檀君朝鮮)을 건국한 이후 마지막 대한제국(大韓帝國)까지 유구한 역사를 이어오면서 중심은 유교를 기본적 사상으로 정하고 기타 시기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의미가 깊고 중요한 때를 맞춰 도교적 요소(道敎的要素)와 불교적 요소(佛敎的要素)들을 민족적 의식(民族的儀式)과 제향으로 승격시켜 정립시킨, 정신과 문화가 있었다는 점입니다.
즉, 크게 보면 대사(大祀), 중사(中祀), 소사(小祀)로 정하여 국가적 의례를 지속적으로 정례화 함으로써 국가적 위상과 국민의 정신 문화를 함양하였고, 후손들에게는 국가(國家)의 중요성과 가문(家門)의 소중함을 동시에 알게 하는 대가족(大家族)의 대동단결(大同團結)을 유일하게 도모(圖謀)하게 하여 전 신민(臣民)과 국민(國民)이 일체화되는 계기를 마련하는데 지난 오천년의 역사를 우리는 소중하게 담아왔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한국(韓國)의 역사이며 동이족의 역사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금일 언급한 선농제에 확인되듯 이러한 오천년(五千年)의 순수하고 고유한 민족 문화와 정신은 대한민국 공화국의 건국과 함께 모두 사라져 지금은 단지 동네 주민들이 소규모로 설렁탕을 끓여먹고 술이나 한잔하며 소규모 잔치로 끝나는 동네 행사가 되었다는 것은, 진실로 대한민국 공화국이 갖는 민족의 오천년 역사상에 갖는 더러운 이질성(異質性)이 얼마나 심각하고 뿌리깊은가를 확인하게 하는 하나의 중요한 물증(物證)으로 증거(證據)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더 충격적인 사실이 있습니다.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지금 선농단 유적을 정비하여 개장된 현 선농단 공원의 경우, 원래의 선농단 유적은 이미 사라졌고, 임의로 단지 선농단 유적을 추정하여 복원을 했다는 점입니다. 원래 있던 선농단 유적은 선농단 유적지에 갑자기 대한민국 공화국 건국 이후, 주택을 많이 지으면서 완전히 사라지게 했다는 것으로, 이러한 상황은 선농단과 함께 왕조시대(王朝時代)의 양대 농업 제향 유적인 선잠단(先蠶壇)도 동일한 상황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단(壇)과 함께 제단의 중요 유적으로 유(壝)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만, 역시 유(壝) 또한 복원조차 못한 채 겉모양의 무늬만 남긴 상태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너무 마음이 아파 눈물이 나올 지경입니다. 일반 주택 때문에 국가의 중요한 유적이 사라졌다는 점은 어떻게 판단하고 받아들여야 할 문제일까?
어떤 면에서 볼 때, 사실 금일 언급하고 있는 선농단은 선농단 하나만을 위해 처음부터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원래는 무려 29군데에 달하는 방대하고 대규모의 다목적(多目的) 왕실 동적전(王室東籍田)이 중심이고 동적전의 중심과 상징을 나타내는 성지(聖地)로서 특별히 선농단이라는 염제 신농씨(炎帝神農氏)와 후직씨(后稷氏)를 모시는 단을 성스럽게 모신 것이 바로 선농단(先農壇)인 것입니다. 그런데, 대한민국 공화국(the Republic of Korea)이라는 엉뚱하고 황당한 나라가 세워지면서 왕실의 동적전은 커녕 신을 모셨던 제단마저 존치시키지 못하고 멸실(滅失)시켰던 것입니다. 과연 이러한 상황에서 유교(儒敎) 및 성균관(成均館)은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이러한 상황에서 과연 대한민국 공화국에 유교가 존재하는 것이며, 또한 성균관은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어불성설(語不成說)이고 동아시아(East Asia)의 치욕(恥辱)이며, 공자(孔子)를 모실 자격도 없는 대한민국 공화국의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비단 선농단만 해당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사례는 서울특별시(Seoul Metropolitan City)의 송파구(Songpa-gu)와 경기도(京畿道)의 하남시(Hanam-si)의 경우도 동일하게 나타나며, 송파구 경내 대부분이 수없이 많았던 백제시대(百濟時代) 왕릉(王陵)들이 모두 대한민국 공화국의 미치광이같은 주택 건설(housing construction) 등으로 사라진 것을 우리는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있으며, 비교적 가장 최근에 발굴된 잠실 진주아파트 재건축(Jamsil Jinju Apartment Reconstruction) 공사중 엄청난 규모로 발견된 백제 유적지들 역시 모두 송파구청(Songpa-gu Office)의 악랄한 악행으로 모두 사라졌습니다.
사실, 대한민국 공화국의 무식함이 어느 정도냐면 경복궁(景福宮)으로 대표되는 일본제국 통치시대(日本帝國統治時代) 이후 유지된 대표적 조선왕조 궁궐(朝鮮王朝宮闕)만 제외하고, 나머지 왕조국가를 상징하며 국가 제례와 관계되는 모든 국가 상징물은 모두 일본제국의 만행을 우습게 뺨칠 정도로 파괴하였다는 점에서도 모두 포함되는 내용입니다. 심지어 강남구(Gangnam-gu)에 위치해 있던 선릉(宣陵)과 정릉(靖陵)과 같은 왕릉조차 유적의 역사성은 깡그리 무시하며, 무참히 칼질하여 도로를 만든 미친 사례 그리고 일본제국 통치시기까지 남아있던 멀쩡한 경희궁을 박물관 만든다면서 비상식적으로 유적지 파괴하고 심지어 궁궐 건물을 전국 각지로 팔아버리는 파렴치함까지 지금까지 재건회(再建會)를 운영하면서 카페(cafe)에 올린 글만 해도 매우 많고 모두 언급하기 힘들만큼 상상을 초월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대한민국 공화국은 이러한 일본제국보다 더 심한 망나니 행동을 했을까?
바로, 개념의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국가의 문화유산(國家文化遺産)이며, 국가의 상징(國家象徵)보다 일반 주택(一般住宅)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무개념(無槪念)의 세계사적 무식함(ignorance of world affairs and history)이 얼마나 컸는가는 매우 충격적이라는 말밖에 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시대가 가면 갈수록 일본제국의 한국 근대화론(The Japanese Empire's theory of Korea's modernization)은 더욱 더 힘을 얻을 것입니다. 현재, 일본의 본토 모습을 봐도 명치유신(明治維新)으로 대표되는 과거와 현재가 서로 공존하고 상존하며, 과거가 현재에 더 빛나고 더욱 더 밝고 찬란하게 만들기 위한 노력을 일본정부가 경주(傾注)하는 모습만 봐도 과거를 천시(賤視)하고 깡그리 무시하며 무참히 파괴하는 대한민국 공화국과는 국민의 의식 수준이나 격이 크게 차이나기 때문이며, 동시에 노벨상(Nobel Prize)으로 대표되는 과학기술(Scientific Technique) 또한 일본이 훨씬 앞선 나라라는 점에서 본다면 대한민국 공화국은 솔직히 국가라고 하기도 부끄러운 수준이라고 하겠습니다.
근본적인 문제로 들어가서 더욱 문제는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성균관(成均館)의 태도이며 입장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교(儒敎)를 대변하고 대표한다고 한다면 어떤 정신과 사상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대한민국 공화국은 1948년 8월 15일에 건국되었으니까, 순수한 공화국 역사만 해도 무려 76년입니다. 76년동안 마치 살아 있지만 죽은 송장과 같이 눈만 뜨고 식물인간(植物人間)처럼 산다면 단체가 존재할 이유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무엇보다, 유교는 도교나 불교도 마찬가지지만 국가의 핵심 요소인 국왕(國王)이 없다면 존재할 수 없고, 동시에 존재의 의미나 가치가 상실되는 가장 대표적 종교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일본제국 통치시대(日本帝國統治時代)에서 보여줬던 친일 단체(親日團體)같은 그림자같은 모습만 보인다면 지금 공화국 시대(republic period)까지 성균관이 계속 존재할 의미가 무엇인지 의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조선왕조의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 7년인 1398년은 성균관이 건립된 해입니다. 올해까지 626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 공자(孔子)의 탄생부터 유교의 역사를 선정한다면 유교의 역사는 2,575년에 이릅니다. 무려 2,600년에 이르는 유교의 역사는 중국의 역사이면서 동시에 한국의 역사이며, 지금까지 아시아(Asia)를 이루는 중국인, 한국인, 일본인까지 전체 동아시아(East Asia) 인구의 정신 세계사(精神世界史) 및 정체성(正體性)을 형성한 매우 중요한 학문이면서 종교였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갑자기 대한민국 공화국이 건국되면서 어떻게 하루 아침에 유전적 정체성이 갑자기 사라질 수 있었을까 하며 생각한다면, 매우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결국, 근래에 근친결혼(近親結婚)이라고 할 수 있는 근친혼금지(近親婚禁止) 4촌 축소까지 공화국 헌법(republic constitution)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사실상 성균관의 사망선고나 다름없는 상황까지 온 것과 다름 아니라고 할 것입니다. 국가(國家)에서 가장 중요한 국(國)도 포기하고 지금은 가(家)까지 포기하는 성균관이 과연 유교를 대표할 수 있는지 의구심(疑懼心)이 들 수 밖에 없고, 아예 폐지(廢止)를 추진해야 하는 것 아닌지 묻고 싶습니다.
국가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과연 공화국(republic)이 유교의 전통적 의미 그리고 정통적 사관으로 봤을 때, 진정 정상적이고 유교적 가치관에 충실한 국가라고 할 수 있는지 먼저 성균관측에서 답을 내놓아야 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금일 언급하고 있는 선농단의 주제신(主祭神)이 바로 염제 신농씨(炎帝神農氏)와 후직씨(后稷氏)입니다.
그런데, 신농씨를 언급할 때 반드시 언급할 수 밖에 없는 것이 바로 삼황(三皇)입니다.
사실, 삼황오제(三皇五帝)의 정립은 한나라(漢朝) 이후 특별한 관점과 정치적인 목적에 의해 만들어진 하나의 정립된 역사관으로써 바로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를 통해 확립된 중국 자체 역사에 관한 개념이라고 하겠습니다.
과연, 중국의 시조신이라고 할 수 있는 삼황은 과연 중국인의 조상이 될 수 있을까? 후직씨도 마찬가지입니다. 역사서 중 하나인 산해경(山海經)에 언급된 수많은 신들의 이름과 면면을 살펴봐도 매우 중요하고 또 우리 조상이라고 하지 않을 분들이 한 분도 없을 만큼 잃어버린 우리의 상고사(上古史)를 복원하고 찾을 수 있는 근거와 자료는 현재도 매우 많습니다. 하지만, 공화주의적 시각(republican view)에서 역사를 보면서 우리는 많은 우리의 역사가 사라졌고, 또 스스로 외면, 무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틈을 비집고 들어와서 국민을 현혹시키며 장사하고 있는 단체들이 있습니다. 바로, 일부 특정 종교 단체들이 있는데, 심지어 남의 종교 경전까지 자신들의 고유 경전처럼 국민을 속이며 장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대한민국 공화국 건국 이후, 한국 전쟁(the Korean War)을 거치며 중국에 대해서 언급할 때 다소 혼동되는 부분이 중국(China)과 중화인민공화국(the People's Republic of China)의 구분이 없다는 것인데, 우리가 역사에 대해 언급할 때 중요한 부분은 공화국과 왕조시대는 엄격하게 구분해야 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전통적인 역사학에서 볼 때 공화국은 이전의 왕조와는 전혀 성격이나 체질, 그리고 체제 자체가 다른 완전히 별개의 국가라는 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역사를 언급할 때 중화인민공화국이나 대한민국이나 현대사에 대해서는 연계해서 언급할 수 있겠으나, 전통적인 공화국 건국 이전의 역사는 분리해서 언급할 필요가 있겠다는 말씀을 함께 드립니다.
이러한 언급의 핵심은 중국과 한국은 공화국 건국 이전에는 하나의 국가, 역사라고 언급해도 다르지 않다고 할 만큼 거의 한 국가처럼 움직이고 역사를 만들어왔다는 점에서 사실 구분을 하려는 것 자체가 의미를 찾기 어렵다는 점을 여러분께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바로 이유는, 동일한 조상을 모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점은 일본도 똑같이 해당되는 사안입니다만, 일본과는 시조에 대한 언급에서 약간의 차이는 존재한다는 것을 간과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특히, 삼황의 존재에 대해 중국인들은 모두 중국의 고유 조상이다고 언급하고 있지만, 사료와 역사서들의 자료를 면밀하게 본다면 사실 주나라(周朝) 이전의 역사는 엄밀하게 동이족의 역사로 보는 것이 가장 합리적으로 역사학에 기초가 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문제는, 지금 공화국 시대 이후 국경선(boundary line)으로 완전히 별개의 국가로 언급된 이후로 중국과 한국이 완전히 다른 역사로 강제로 그리고 억지로 분리시키려는 움직임 때문에 결국 주나라 이전의 역사도 중국과 한국으로 완전히 구분이 되어지는 아픔의 역사로 남게 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유감이고, 사실 이러한 역사에 대한 진실과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역사 자체적인 의미보다는 공화주의를 넘어서야 하는 근본적 문제점이 있다는 점을 본 카페를 통해 여러분께 말씀드리고 호소드리는 바입니다.
결국, 역사의 왜곡과 괴리는 다른 곳에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닌 바로 공화주의의 폐해로 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나라가 남북으로 분단되고 통일을 못하고 있는 근본 이유를 살펴보면, 모두 공화주의에 기초합니다.
공화주의만 아니라면 지금처럼 남북이 갈라지고 분단된 채 전쟁을 하기 위해 노력하고 국력을 낭비할 어떤 이유도 찾기 어렵고 또한, 중국 역시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 이후 지금의 중화민국(the Republic of China)과 통일을 못하고 분단된 상태로 역시 존재하는 이유도 결국 공화주의 때문 아니겠습니까? 만약 중국과 한국이 두 개의 왕조 국가인 대청제국(大淸帝國)과 대한제국(大韓帝國)으로 현재까지 남아 있었다면 과연 지금처럼 남북, 그리고 중국(the People's Republic of China)과 대만(Taiwan)으로 분리되고 분단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대청제국의 고증학 문화(考證學文化)와 더불어 계승 발전되었다면, 역사의 진실에 보다 더 가깝게 갈 수 있는 하나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을 것이고, 중국과 한국이 결코 다른 나라가 아니라는 점도 대한제국과 대청제국의 존재를 통해 입증될 수 있는 매우 중대한 결정적 요소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과연 이러한 사실을 단군교(檀君敎)의 아류(亞流)인 대종교(大倧敎)와 유교의 대표 기관인 성균관은 인지하고 있을까?
역사 복원이라는 말을 우리는 언론이나 방송을 통해 수없이 많이 듣고 있고 또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입으로만 하는 역사복원, 그리고 일부 종교단체에서 돈벌이 수단으로 가식적인 역사복원을 계속 떠든다면 그것은 역사복원이 아닌 역사장사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대한제국의 복원없이 어떻게 역사복원(歷史復元)이 될 수 있으며, 친일을 청산하고 남북이 통일 될 수 있겠습니까.
지금까지 대한민국 공화국 건국 이후 많은 대통령(president)들이 바뀌었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인 욕심과 사심으로 인해 점점 대한민국 공화국이라는 나라는 엉망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도대체 정상적인 나라라고 하기에는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가고 있는 대한민국 공화국에서 과연 희망이라는 것은 있습니까? 좌파, 우파로 전 언론사가 도배가 되고 국민의 삶은 양극화로 점점 심화되는 상황에서 과연 얻고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과연 대한민국에서 통일에 대해 언급할 수 있는 상황입니까?
코미디(comedy)같은 국가입니다.
부디, 재건회에 관심있고 대한제국 복원에 뜻이 있는 분들이라면 정말 현명한 판단을 하셔서 무엇이 역사복원이고 무엇이 통일을 위한 길이며, 무엇이 또한 미래를 건설할 수 있는 길인지 정확한 판단과 냉철한 결정을 하시길 제안드립니다.
대한제국 만세! 존왕양이 만세!
감사합니다.
대한제국 재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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