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시와 글벗 원문보기 글쓴이: yanggo
연개소문 (淵蓋蘇文 ; ? ~ 665)
|
일명 천개소문(泉蓋蘇文)으로서 동부대인(東部大人) 태조(太祚)의 아들이다. 개금(蓋金) ·개소문(蓋蘇文)이라고도 한다. 15세에 부친의 직책을 계승하여 동부대인 대대로(大對盧)가 되었으며, 642년 당나라의 침입에 대비하고자 북쪽 1,000리에 이르는 장성(長城)을 축조하였다. 같은 해, 자신을 제거하려는 대인(大人)들의 기미가 보이자 주연을 베풀어 대신과 대인 180여 명을 죽이고 영류왕을 시해(弑害), 보장왕을 옹립하고 스스로 대막리지가 되어 정권을 장악,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하러 온 신라의 김춘추(金春秋, 후에 태종무열왕)를 감금하고 신라와 당나라의 교통로인 당항성(黨項城)을 점령하였다. 644년(보장왕3) 신라와의 화해를 권고하는 당 태종(唐太宗)의 요구를 물리치고 그 사신 장 엄(蔣儼)을 구속하는 등 강경책을 쓰자 이에 격노한 당 태종이 645년 17만의 대군을 이끌고 침입하였다. 그는 고구려군을 지휘하여 개모성(蓋牟城) ·요동성(遼東城) ·백암성(白巖城) 등에서 적에게 큰 타격을 가하고 마침내 안시성(安市城)의 혈전(血戰)에서 60여 일 간의 공방전 끝에 당군을 격퇴하였다. 그 후에도 4차례나 당나라의 침입을 받았으나 이를 모두 막아냈다. 한편 이보다 앞선 643년에는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도교(道敎)의 도사(道士) 8명과 《도덕경(道德經)》을 들여오는 등 업적을 남겼다. 한편, 단재 신채호 선생께서 우리 손으로 써놓은 연개소문의 사적이 전혀 없음을 개탄하기도 하였다. 아래 글은 연개소문에 관해 빠진 부분인 탄생과 성장과정에 대해 신채호의 '조선상고사'를 중심으로 소개한다. 연개소문의 탄생과 성장
연개소문은 서부 소속의 귀족이다.(연개소문이 서부 또는 동부 출신이라는 설이 있는데, 단재 선생은 성씨인 '연(淵)'을 서부인 연나부와 연결하여 그가 서부출신일 것이라고 확정하고 있다. 북한의 손영종 교수가 쓴 '고구려사'에서도 역시 서부출신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한편 신당서 고려전에는 연개소문을 동부대인으로 구당서 고려전에는 서부대인으로 기술하였다. <자치통감>에는 영주도독 장검의 표문을 인용하여 그를 동부대인으로 표기하였다. 이를 근거로 노태돈은 '고구려사 연구'에서 연개소문이 동부출신이며 집권 전에 동부대인의 직을 수행하였고 장수왕의 평양천도 이후 새롭게 등장한 신흥귀족세력으로 보았다.) 2. 규염객 전
규염객은 부여국 사람이다. 수 양제 시절 중국 태원에 와서 이정과 교분을 맺고 이정의 아내인 홍불지와 의남매가 되었다. 규염객은 중원의 제왕이 되고자 도모하였으나 당국공인 이연의 아들 이세민을 보고 그 영명한 기운에 눌려 이정에게 중원의 제왕이 되기를 포기하였음을 알리고 부여국으로 돌아와 난을 일으켜 부여국왕이 되었다. 이 소설에는 실존인물인 이세민, 이정, 유문정, 양소 등이 등장하는데 단재 선생은 이 규염객이 연개소문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참고로 이 소설은 중국인에게 매우 인기있는 작품으로 규염객은 중국의 보통사람들이 도가의 이상형으로 생각하고 있는 인물이라고 한다. 10여년 전 중국무협영화 시리즈 물로 만들어진 것을 우리나라에 들여온 적도 있다. 내용은 부여인 규염객이 수나라 때 태원에서 이정과 교분을 쌓고 그에게 병법을 전수하였으며, 양현감의 난 등으로 수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이정과 함께 거병하여 수나라를 멸망시켰으나 이세민이 영걸이란 말을 듣고 그에게 제위를 양보하여 신선이 되고자 동방으로 떠난다는 내용이다. 3. 갓쉰동 전
옛날에 연국혜라는 재상이 있었다. 나이 쉰에 이르도록 슬하에 자식이 없어 하늘에 제사를 바쳐 아들을 얻었다. 이름을 갓쉰동이라 하니 '갓 쉰에 이르러 얻은 아이'란 뜻이다. 어려서부터 영명하여 연국혜가 구슬처럼 아꼈으나 7살 되던 해에 어느 도사가 지나가다가 아기가 타고난 수명이 짧아 비범한 재주를 쓰지 못하고 죽으리라고 예언했다. 이를 막는 방법은 15년 동안 아이를 버려 부모와 만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 일러주었다. 연 재상은 아이의 등에 갓쉰동이란 이름을 새겨넣고 멀리 원주 학성동에 갖다 버렸다. 그 마을의 장자였던 사람 유씨가 꿈에 황룡을 보고 새벽에 바깥에 나갔다가 갓쉰동을 발견하여 데려다 길렀다. 유씨는 내력을 모르는 아이라 글자만 몇자 가르쳐 종으로 썼다. 갓쉰동이 나무를 하러 갔다가 기이한 노인을 만났는데 그에게서 검술, 병법, 천문, 지리를 배웠다. 유씨에게 아들없이 딸만 셋이 있었는데 이 가운데 막내인 영희는 그의 비범함을 사랑하여 서로 깊은 사이가 되었다. 영희는 귀인의 아내가 되기보다 대장부의 아내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고 갓쉰동은 우리를 괴롭히는 달딸국을 쳐서 없애는 것이 평화의 근본인 만큼 달딸국을 쳐부순 후에 영희와 혼인을 하겠다고 약속한다. 이에 유씨의 집을 떠나 달딸국으로 잠입하였다. 달딸국왕의 가노가 되어 지내던 도중 달딸국왕의 둘째 아들이 갓쉰동의 비범함을 알아채고 죽이려고 가두었다. 달딸국왕과 왕자들이 사냥을 나간 뒤 그는 공주에게 인정에 호소하여 달딸을 탈출하였는데 달딸 왕자가 이 사실을 나중에 알고 여동생을 죽여버렸다. 고국으로 돌아와 아버지를 찾고 조정에 출사하였으며 영희와 결혼하고 마침내 달딸을 토벌하는 큰 공을 세웠다. 단재 선생은 연국혜는 연개소문의 아버지 연태조이며 연개소문의 이름 개소문에서 개(蓋)는 갓으로 읽고, 소문(蘇文)은 쉰으로 읽어 갓쉰동은 연개소문이라고 생각했다.
연개소문은 당태종에 의해 임금을 시해한 역적, 김부식에 의해 왕을 참살한 불충무도한 사람, 함석헌 할아버지에 의해 군사쿠데타의 원조라는 악평을 들었다. 나는 이 글에서 우리 민족의 영웅이 어떻게 폄하 되었으며 실제 연개소문은 어떤 존재였는지 밝히고자 한다. 대체로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중국에 대항하여 큰 승리를 거둔 사람들은 이름이 전하는 경우가 거의 없고 성격도 포악하다는 식으로 묘사되고 중국에 패배하였거나 항복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성격좋고 인물좋고 이름도 정확하게 잘 나온다. 왜 그럴까? 대만에서 아직도 경극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연개소문은 중국인들에게 어떤 사람이었을까? 경극은 원나라 때 발생해서 명나라 때에 형태가 갖추어진 중국의 대표적인 전통극을 이르는 말이다. 청나라 때 수도였던 북경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공연이 되어 경극으로 부르게 되었으며, 우리가 영화로 보았던 '패왕별희'같은 것들이 바로 경극이다. 중국문화를 대표하는 이 경극 가운데 연개소문이 등장하는 경극이 있다는 것은 그가 중국인들에게 강한 기억을 남겨준 사람이란 반증이라 할 수 있다. 당태종을 거꾸러 뜨린 양만춘이 아닌 연개소문이 경극에 등장한다는 것은 중국인들에게 깊게 각인된 연개소문의 기억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1985년 중앙일보는 대만에서 공연하고 있는 이 경극에 대하여 짧게 보도한 바 있다.
삼국사기에는 연개소문에 대해 연못에서 나왔음으로 성을 연씨라고 했다고 하지만 그것은 김부식의 잘못이다. 1923년 낙양에서 연개소문의 아들 남생과 남산의 묘가 발굴되었는데 그 안에서 묘지석이 나왔다. 이 묘지석에는 남생의 아버지가 연개소문이며, 할아버지가 연태조, 증조부가 연자유, 작은 할아버지가 연휘만이라고 되어있고 모두 대막리지를 지낸 것으로 되어있다. 그는 어느날 갑자기 나타난 족보없는 괴물이 아니라 고구려의 전통적인 귀족집안 출신이다.
중국인들게는 수치였을 것이다.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구축하고자 했던 한족들에게 고구려는 하늘에 떠있는 두개의 태양과 같은 존재였다. 하늘에 두개의 태양이 떠 있을 수는 없는 법. 당태종은 왕조 교체기와 정권교체기에 고구려가 쳐들어 올 것을 두려워했다. 612년부터 618년까지 중원은 혼란기였다. 수양제의 살수 패전이후 전국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태원의 군사령관이던 이연을 20살이던 아들 이세민이 부추겨 수왕조를 무너뜨리고 당왕조를 세웠다. 이때 돌궐, 설연타, 고창, 고막해, 아사나 등 여러 민족들이 일제히 중원을 공략하여 당왕조는 이들을 제압하는데 정신이 없었다. 고구려도 이때 중원을 공격하자는 세력들이 있었으나 618년 안타깝게 영양왕이 죽고 영류왕이 즉위하였다. 그는 수군사량관으로 양제의 침입때 패수에서 내호아와 주법상이 거느린 수나라 수군 30만을 한번 싸움으로 격파하여 물리친 태자 건무였다. 이때 을지문덕을 비롯한 주전파들은 영류왕에게 강력히 중원공격을 요청했으나 영류왕은 평양 석다산의 평민출신으로 백성들의 신망을 크게 받고 있는 을지문덕을 경계하여 천금같은 기회를 방치했다. 젊은 무장들의 분노는 높았고 목숨을 내놓고 적과 싸웠던 조의선인들은 영류왕에 대한 분노로 왕을 비난했다.
젊은 연개소문이 주동이 된 조의선인들은 다시 한번 중원을 공격할 것을 요구했다. 중원이 통일되면 고구려는 침략을 받았고 광개토태왕 이후 고구려는 중원의 분열공작을 계속해 평화를 누렸었다. 통일된 중원을 고구려는 위험하게 생각했다. 왕은 이를 거부하여 고구려의 동맹국이던 돌궐, 고창, 고막해, 설연타, 거란 등이 당의 지배하에 들어가는 것을 방치했고 마침내 고구려는 당과 그 지배하에 들어간 이민족들의 연합군과 싸워야 하는 불리한 상황이 되고 말았다.(역사와 전설의 혼합 끝) 오히려 영류왕은 624년 당에 조공을 바쳤고 도교를 수입하였으며 당의 사신들이 와서 경관대탑을 부수고 수나라 포로의 송환을 요구하자 아무 대가없이 그대로 시행했다. 당의 사신들은 고구려 전국을 돌며 군사시설을 정탐했고 왕은 이를 방치했다. 젊은 조의선인들은 분노했다. 왕은 이들이 두려웠다. 그는 이들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천혜의 방어선인 요하를 그대로 둔 채 631년 요동반도의 비사성에서 장춘(부여 농안)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쌓도록 하여 조의선인을 징발했다. 그리고 아까운 국력을 낭비했다.
연개소문은 고구려의 전통을 따르기로 했다. 고구려는 왕이 정치를 잘못하거나, 패전하거나, 가뭄이나 홍수가 들어 민심이 흉흉해지면 왕을 죽이거나 추방하는 전통을 갖고 있었고 실제로 여러 왕들이 이런 이유로 죽거나 쫓겨났다. 고구려는 유교국가가 아닌 것이다. 그는 천리장성 감독관으로 떠나기 전 열병식을 열고 이를 참관하던 영류왕과 대신 108명을 잡아 죽였다. 그리고 영류왕의 조카 장을 왕(보장왕)으로 옹립했다.
연개소문의 업적
연개소문의 영류왕 제거는 좀 늦은 감이 있다. 626년 당의 이세민은 형제를 죽이고 아버지로부터 왕위를 빼앗다시피 하여 즉위한 뒤 16년 동안 고구려의 동맹세력인 북방민족들을 제압하고 이정, 위징, 방현령, 장손무기 등을 등용하여 내정을 착실히 다졌다. 그 유명한 정관지치(貞觀之治)라 불리는 황금시대의 기초를 닦았다. 고구려로서는 당을 칠 기회를 놓친 것이다. 광개토태왕 이래 200여년간 고구려의 강력한 동맹세력이었던 돌궐, 설연타, 유연, 고창, 거란 등 북방민족들이 이세민에게 제압되어 당의 세력권 안에 편입되었는데 특히 돌궐의 복속은 고구려에게는 군사상 치명적인 타격이었다. 동돌궐은 중원국가가 고구려를 공격할 때 측면을 견제하는 세력이었으며 서돌궐은 전력의 빈틈을 노려 장안과 낙양을 공략하는 후방의 견제세력이었다. 암울한 군주 영류왕으로 인해 고구려는 동맹세력이 모두 당의 지배하에 들어가는 중대한 문제를 방치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중원국가들과의 전쟁 때 고구려군의 전력으로 동원되었던 북방민족들이 거꾸로 고구려 공격의 선봉이 되었다. 고구려가 수문제, 수양제의 침략을 효과적으로 막아냈던 이유는 거란, 말갈 군대를 동원해 수나라를 선제공격하거나, 북방민족을 견제세력으로 활용하여 고구려를 방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사라짐으로 해서 고구려는 승리를 거두더라도 직접 전력에 타격을 입게 되었다. 이것은 고구려를 멸망시킨 장본인들인 이세적을 비롯하여 설필하력, 아사나두이, 설인귀 등이 북방민족 출신 장수들이란 점에서도 명백하게 드러난다. 영류왕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이제 고구려는 동맹세력없이 당과 일대일로 붙을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된 것이다. 수문제가 30만 대군, 수양제가 113만 대군으로 공격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했던 고구려가 불과 30년만에 겨우 10만의 병력으로 공격가능한 세력으로 약화된 것이다. 5. 연개소문의 활약 1) 내정 안정 연개소문을 정권을 잡자마자 영류왕을 추종하던 집단을 일소했다. 그리고 당의 내정을 정탐하기 위한 사자를 파견했다. 흔히 연개소문이 당에 사자를 보내 처음 도교를 수입하였고 불교를 억압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도교를 처음 수입한 사람은 영류왕이다. 영류왕 본기 7년 조에 영류왕은 당고조에게 도사파견을 요청하여 도교강의를 듣도록 한 기록이 나와 있다. 어쨋든 대당 강경론자인 연개소문은 왜 도교 수입을 시도했는가? 원래 이세민의 아버지 이연은 중국 한족출신이 아니다. 이연은 선비족인 척발씨(拓跋氏)의 후손으로 역시 같은 북방민족 출신인 수나라 왕가에 항복하여 북방민족 제압의 근거지였던 태원에서 군사령관으로 복무하고 있었다. 당왕조를 세운 후 한족들의 민심을 얻기 위해 그는 자기의 선조가 춘추시대의 노자라고 선전했다. 그리고 그에 맞춰 노자의 도덕경을 발간하고 도교를 장려했다.(노자는 성이 이씨임. 그러나 통상 북방민족이 항복해 오면 중국 역대 왕조들은 이씨성을 하사하는 관례가 많았다. 그 결과 지금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인구수를 점유하는 것이 이씨라고 한다) 연개소문은 이점을 노려 도교를 수입한다는 명분으로 당의 긴장을 풀어놓으면서 당을 정탐하는 한편 신속한 국내 안정을 추진했다. 국력 낭비가 심했던 천리장성 쌓기를 중지하고 조의선인들을 요하전선에 배치하고 양만춘, 추정국, 걸걸중상(대조영의 아버지) 등을 발탁하여 지휘를 맡겼다. 또 요하전선의 방어거점인 백암성, 오골성, 부여성, 안시성, 비사성 등을 수리하여 당의 침략에 대비했다. 2) 이세민의 침략 격파 이세민은 뛰어난 무장답게 연개소문의 집권 3년도 채 안되는 시점에 공격을 단행했다. 김춘추의 요청을 받은 그는 고구려 정복을 확신하여 정국공신 이정 등이 말리는 것도 듣지 않고 직접 고구려 원정군을 지휘했다. 고구려 주변의 동맹세력을 모두 제압한 뒤였으므로 그는 10만의 병력만으로 고구려 원정길에 나선 것이다. 그는 침략길에 나서면서 웃기는 조칙을 내렸다. "제하(중국 역대왕조)의 원수를 갚고, 임금을 시해하여 하늘의 이치를 거스른 연개소문을 징벌한다". 제하의 원수를 갚겠다는 말은 수긍해 줄 수 있으나 연개소문 보다 더한 짓을 자기 친아버지와 친형제에게 자행한 사람으로서 뻔뻔함은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는 수준이다. 어쨌든 664년 11월 강하왕 도종을 앞세워 탁군을 출발한 침략군은 요택(요하일대의 늪지대 약 80km에 달함)을 넘어 이듬해 4월부터 6월 사이에 고구려의 서쪽 방어선을 하나씩 격파해 나갔다. 수나라 60만 대군의 공격을 묶어놓아 을지문덕 장군이 대승을 거둘 수 있도록 만들었던 요동성 마저 함락되었다. 당군은 안시성으로 밀려왔고 성안에는 3만명의 주민과 병력이 있었다. 당군은 성을 포위한 뒤 충차(발석거라고도 함, 큰 돌을 쏘아대서 성벽을 무너뜨리는 무기), 당차(아름드리 통나무를 수레에 장착하여 성문에 충돌 파괴하는 공성무기), 운제(구름사다리, 수레위에 망루를 세워 성벽높이에서 성을 공격하며 돌진하여 성벽에 이르면 사다리를 놓아 군사를 침투시키는 무기)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해 공격했지만 양만춘 장군과 성민들은 끄떡없이 방어했다. 이세민은 강하왕 도종을 시켜 안시성보다 높은 흙산을 쌓게 하여 고구려 군을 공격했으나 부실공사로 인해 흙산이 무너져 안시성 성벽 일부가 무너지자 양만춘은 지체없이 돌격부대를 편성하여 흙산을 점령해 버렸다. 화가 난 이세민은 흙산 책임자인 부복애를 참살하고 앞장서서 안시성과 흙산을 공격하였으나 그의 황금투구와 황모일산을 알아챈 고구려 철궁부대(저격수 부대)의 화살에 눈과 무릎을 잇달아 맞아 말에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강하왕 도종은 몸을 날려 아버지인 이세민을 덮었고 목숨을 건지기 위해 도종은 부대를 10리정도 후퇴시켰으나 이세민은 자리에 눕고 말았다. 이 소식은 전선을 지휘하던 연개소문에게 곧바로 전달되었고 연개소문은 묘도(발해만 묘오타이 제도)에 대기하고 있던 고구려 수군을 진황도로 발진시켰다. 진황도를 거쳐 어양(지금의 북경지역)으로 상륙하여 당군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도종은 이세민을 대신해 패잔병력을 이끌고 요택으로 후퇴하는 한편 장안으로 사자를 보내 이정에게 구원군을 보내도록 했다. 때는 음력 9월이라 요서의 날씨는 매우 추웠다. 양만춘을 비롯한 고구려군의 맹렬한 추격에 쫓겨 달아나던 당병은 요택의 늪지대에서 고구려 기병에게 죽음을 당했고 만승천자라고 자랑하는 이세민은 한쪽 눈을 잃고 무릎에 고름이 차오르며 열에 시달렸다. 도종은 변변한 치료를 받을 수 없었던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입으로 상처에 난 고름을 빨아내며 만리장성 입구인 우북평으로 달아났다. 이정의 구원군과 패주하는 이세민 부대 그리고 양만춘의 추격군과 고구려수군은 어양 일대에서 맞닥뜨려 일전을 치뤘다. 이세민의 구원이 목적이었던 이정은 이세민과 도종이 퇴로를 확보하여 장안으로 달아나는데 성공하자 어양 외곽으로 후퇴했다. 연개소문은 이때 어양 일대에 24개의 고구려 성을 쌓았고 보급로를 확보할 목적으로 요동에서 어양까지 군량대를 만들었다. 어쨌든 안시성에서 다친 후유증으로 4년 뒤 649년 이세민은 52살에 숨을 거두었다. 그는 숨을 거두기전 고구려 원정군을 해체하면서 아들 治(당 고종)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고구려와 전쟁하지 말아라. 아비의 실패를 되풀이하면 사직을 지키기 어렵다. 우리가 고구려를 치지 않은 한 고구려도 우리를 칠 힘은 없다." 이세민은 맏아들 승건태자가 반란을 모의하였다 하여 644년 그를 죽였다. 이세민은 젊은 나이에 먼저 죽은 장손왕비를 무척 사랑하였는데 그의 오라비인 외척 장손무기을 주장을 받아들여 넷째아들인 치를 16살의 나이에 태자로 삼았다. 착한 아들이었으므로 자신의 유언을 충실히 지키리라고 믿었기 때문이라고 한다.(치는 잘 알려진 것처럼 착하고 유약하여 아버지의 후실이었던 무씨를 사랑하여 그녀에게 정권을 맡김으로써 측천무후의 전횡을 초래했던 사람이다) 3) 사수대첩 649년 당의 군주가 된 치는 아버지의 유언을 충실히 따랐다. 한편 고구려는 큰 타격을 받았다. 영류왕의 실정으로 국력이 소진된 상태에서 침략군과 싸운 데다가 이 싸움이 전과 다르게 고구려군 단독으로 당의 연합세력과 진행된 관계로 많은 기력을 소진했다. 게다가 당태종을 사로잡지 못해 당의 세력을 무너뜨리는데 성공하지 못함으로써 불안한 평화를 유지해야 했다. 한편 신라는 이세민의 유언내용을 듣고 고구려가 신라를 공격해 올 것을 두려워하여 김춘추와 아들 법민을 당에 파견하여 고구려와 백제 원정군을 내 줄 것을 간청했다. 백제는 이틈을 타 신라의 숨통을 끊어놓으려고 줄기차게 공격을 단행했다. 신라의 요청을 받은 당은 전술을 바꾸었다. 대규모 원정군으로 고구려를 공격하는 전통적인 방식 대신 주변 민족들을 이용하여 소규모로 자주 고구려를 공격함으로써 고구려의 힘을 조금씩 약화시키는 방법을 택했다. 고구려는 입술이 없는 이빨과 같은 처지가 돼가고 있었다. 654년 김춘추는 신라왕이 되었고, 655년 당의 새로운 권력자가 된 측천무후에게 사신을 보내 백제원정군을 요청했다. 측천무후는 소정방, 유인궤, 설인귀 등에게 13만의 병력을 주어 백제를 공략토록 하였고 신라와 연합하여 660년 의자왕을 사로잡는데 성공하였다. 백제는 고구려에게 구원군을 요청하였으나 당은 요동방면에도 중규모 부대를 보내 고구려 국경을 공격함으로써 고구려는 구원군을 보낼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이때 연개소문은 병으로 누워있었다는 설들도 있음) 660년 겨울, 백제를 점령한 여세를 몰아 소정방은 패수를 거슬러 올라가 기습적으로 평양성을 포위했다. 660년 12월부터 큰 눈이 내려 소정방 군은 군량미 조달에 애를 먹고 있었다. 측천무후는 좌효위대장군 방효태에게 10만의 병력을 주어 육로로 평양성을 향해 출발토록 하였고 신라에는 10만 대군의 군량미를 조달할 것을 요구해 신라의 김유신은 67살의 노구를 이끌고 평양성을 향해 군량을 수송하기 시작했다. 이 절대 절명의 위기에서 병석에 누워있던 연개소문은 작전의 핵심을 방효태 군에게 맞췄다. 방효태 군을 격파하면 소정방 군은 고립무원이 되고 군량을 수송하는 신라군은 전투력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연개소문은 정찰병을 통해 방효태가 평양 동쪽을 공격하기 위해 패수의 상류 쪽으로 접근할 것이라는 정보를 얻었다. 그는 3만의 별동대를 구성하여 병중에도 직접 눈보라를 뚫고 패수의 상류인 사수로 이동했다. 사수는 강폭이 좁은데다가 겨울이라 얼어있었다. 연개소문은 발석거를 대거 동원하여 사수 양쪽으로 부대를 나누어 매복했다. 사수에 도착한 방효태 군은 신속하게 강을 건너기 위해 통상 종대로 도하하는 병법을 어기고 횡대로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방효태 군의 대부분이 강 한가운데 이르자 연개소문은 공격명령을 내렸다. 고구려 군은 양쪽에서 발석거로 큰 돌을 강을 향해 쏘아댔다. 바위가 떨어지자 얼어붙은 강의 얼음이 갈라지고 방효태 군은 강속으로 쓸려 들어갔다. 요행히 강변으로 달아난 당군은 매복하던 고구려 군에게 죽음을 당하였고 한나절 뒤 지휘관인 방효태와 그의 아들 13명, 그리고 10만 대군 모두 전멸당하는 참담한 패전을 당하였다. 이를 역사에서는 사수대첩이라고 한다. 돌아오는 길에 연개소문은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연개소문의 사망연도에 대해 657년, 661년, 665년 설이 있다) 방효태가 전사한 후 평양성에 도착한 신라군으로부터 소정방은 군량을 조달받아 황급히 퇴각했고 신라군은 아무 소득없이 돌아가야 했다.
연개소문이 죽은 후 왕은 연개소문을 따라 군공을 많이 세운 맏아들 남생을 막리지로 삼았다. 3형제는 매우 사이가 좋았고 서로 협력하여 고구려를 잘 지켰다. 665년, 남생이 요동방면의 현황을 시찰하러 나간 사이 연개소문에게 숙청되어 앙심을 품고 있던 대신들의 족당들이 남산과 남건을 꼬드겼다. 남산은 남생의 아들 헌충을 죽이고 스스로 막리지가 된 뒤, 보장왕을 시켜 남생을 소환토록 했다. 남생은 소환에 응하고자 하였으나 아들 헌성은 당나라로 망명할 것을 주장했다. 남생은 말갈과 거란부족을 이끌고 당에 투항하였다. 당은 667년 그를 앞세워 고구려를 공격하였고 3형제를 이간시킨 신성이란 중을 이용하여 평양성으로 진입하는데 성공하였다. 남산은 끝까지 항전하다가 결국 신성의 협력을 받은 당군에게 포위되자 자결을 시도하였으나 미수에 그쳐 포로로 사로잡혔다. 결국 고구려는 668년 멸망하고 말았다. 7. 남생 3형제와 산상왕 3형제 비교 남생 3형제와 비슷한 경우가 고구려 10대 산상왕때에 있었다. 산상왕은 둘째였는데 형 몰래 왕명을 받아 10대 왕으로 즉위하였고 이를 뒤늦게 안 형 발기가 노하여 왕성을 공격하였다. 힘이 모자라자 그는 요서의 공손씨에게 몸을 의탁했고 공손씨는 3만 병력을 그에게 주어 고구려를 공격했다. 산상왕은 막내인 계수를 불렀다. 계수에게 지휘권을 맡겨 마침내 요하에서 계수와 발기가 맞붙었다. 전투개시 전에 발기는 계수를 불러내 말했다. "나는 장자로서 당연히 왕위계승권이 있는데 밤에 둘째인 연우가 왕위를 가로챘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너는 어째서 의롭지 못한 연우를 도우려 하는가?" 계수가 말 위에서 당당하게 대답했다. "작은 형이 왕위를 가로챈 것은 부당하며 나 또한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이민족에게 빌붙어 자기 나라를 공격하는 큰 형은 더더욱 용서할 수 없다. 사욕을 위해 제 나라를 치는 놈을 어찌 가만 두고 볼 수 있겠는가?" 발기는 부끄러워 그 자리에서 자결하였고 계수는 공손씨를 토벌한 뒤 발기의 시신을 수습하여 왕과 같은 예우로 장례를 치뤘다. 산상왕은 신하들이 계수의 행위를 성토하였으나 산상왕은 계수가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라고 일소에 붙였다. 남생은 아들의 말을 따르긴 했으나 개인의 안위를 위해 자기 조국을 멸망시키는 어리석음을 저질렀다는 점이 고구려의 불행이라면 불행이었다. <<두산대백과사전>> 참고 인터넷"http://www.history21.org"참고 |
첫댓글 수신제가를 못하고 치국하려한 원인이군요.....
그러게나요.. 자식은 맘대로 못한다는 옛말이 그 옛날에도 맞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