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내 살던 곳, 주접동 547번지
새 책은 으레 제목부터 훑게 된다. 낫, 문고개, 농막, 지게, 방죽 , 뚝새풀, 장구배미 촌석, 돌확. 글 제목만 보아도 두메산골이 떠오르고 뚝배기 장맛 같은 작가의 느낌이 그대로 전해온다. 도배도 안 된 흙집에 가마솥 보리밥하며 달래 냉이 쑥 된장에 보리깜부기. 아카시아 꽃잎을 따먹고 채 여물지도 않은 수수가지랑 콩 가지를 꺾어 잿불에 구어 먹었다던 아릿한 추억들.
나는 그러한 정감 어린 목가적인 추억이 없다. 작가의 고향을 구수한 된장찌개로 표현한다면 그 시절의 안양은 아마도 당시 ‘존슨탕’이라 불리던 부대찌개 쯤 될 것이다. 도시도 아니고 두메도 아닌 어정쩡한 형태로서 양념에 따라 나날이 달라지는 바로 그런 이질적인 맛이 꼭 연상된다. 그 시절의 안양은 논도 있고 미군부대도 있고 유원지도 있고 공장들도 들어차는 한마디로 뒤죽박죽 형태의 햄과 소시지에 고춧가루가 같이 섞여든 존슨탕 같은 동네였다.
나는 일제시대에 졌다는 가축위생연구소란 곳의 작은 관사에서 살았다. 곳은 수리산 밑의 소골안과 가깝고 냇가를 사이에 둔 평촌동이라 불리는 마부나 목수들이 많이 산 동네와도 맞닿은 곳에 위치했다. 불과 다섯 집이 전부인 관사라 동네라 불리기도 그렇고 외따로 떨어져서 마치 외로운 섬 같은 한갓진 관사였다. 연구소가 차지한 시설전체를 살펴보면 꽤 짜임새가 있다. 요즘 일본 왜놈 하며 속상하여 마구 떠드는 데 그 당시 이런 시설들을 갖춘 정도이니 쉽게 대적할 일본은 아니다.
소각시설까지 갖춘 가축실험을 하는 본 건물을 중심하여 동편에 큰 주거지를 두고 그 옆에 사육장을 두었으며 말이나 돼지들을 관리하는 건물을 사육장 한 가운데 배치하였다. 사육장은 별도의 작은 관사를 끝머리에 두었으며 벚나무가 건물의 경계를 이루었다. 연구소 옆으로는 임업시험장과 잠업시험장이 현재의 명학 역에 이르는 부근까지 꽉 차지하였다. 그리고 고천을 지나 지지대 고개를 넘어가면 농촌진흥청에 축산시험장이 또 이어진다.
수원과 안양에 농축산 집산지를 형성해 놓은 것이다. 그뿐 만이 아니다. 안양을 보듬은 수리산을 가운데 모셔 둔 읍내로부터 쳐서 북쪽 끝 쪽에는 담배촌이라는 곳이 있는데 그곳으로부터 돌을 채취하여 안양역으로 운반하는 철로가 놓여 있었고 금성방직이나 태평방직이 또 포진하고 있으며 듣기로 비행기 만드는 곳을 지으려다가 말았다고 하니 당시 왜놈들이 안양을 어느정도로 대접했는지는 미루어 짐작할 만 하다. 동편에 관악산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물이 서울 쪽이 아닌 안양천으로 향하는 용수 특성까지 고려하여 생각한 그들이 아니었나 싶다. 그 관악산 물 굽이굽이가 바로 당시 유명했던 안양유원지다.
전체 한 영역과도 같았던 농축산 시설들은 학교를 다닐 무렵부터선 두 동강이 나 신작로가 생겨났다. 나는 바로 사육장 구석의 작은 관사에서 살았다. 내가 태어난 곳은 큰 관사인데 당시 부모님은 더부살이로 일 년쯤 얹혀살다가 작은 관사로 이사를 왔다고 했다. 내 살던 곳은 큰 관사 보단 집채 자체가 작고 고작 다섯 가구 밖에 불과한 것이 당시 일제시대 때 낮은 직위들이 살았던 집임에 틀림이 없었다. 배열로 보아 아마도 큰 관사는 연구하는 사람들이 살고 작은 관사는 사육하는 동물들을 돌보는 사람들이 기거하였을 것이다. 관사란 개인 소유가 아니다. 솥단지 달랑 하나 갖고 결혼을 해서 큰 관사에서 문 칸 방을 얻어 쓰다 그 집을 얻는데 부모님은 무척 공을 들였다고 했다. 아주 단출한 집이었지만 부모님으로선 독립세대 그것만으로도 당시 꽤 흡족했을 터이다. 집은 비록 작았지만 일본인 특유의 오밀조밀함이 그대로 반영된 소박한 집이었다.
집 한 채가 두 집이 같이 살게 된 형태로 각기 방 두 개 중 작은 방 쪽엔 한 평도 채 안 되는 작은 마루가 있었고 큰 방 뒤쪽에 부엌하고 헛간이 딸려 북쪽을 향했다. 출입은 미닫이문이 달린 마루를 통하도록 되어 있었지만 그 문은 아버지나 손님이 오시면 통했고 부엌 쪽에도 문이 나 있어 어머니와 나는 부엌 쪽 문을 늘 이용했다. 방 한 편에는 작은 다락이 2단으로 짜여있어서 아래에는 쌀을 놓고 위에는 이불을 얹었다.
집은 대문이나 담이 따로 없었으며 집의 외벽은 수수깡을 엮어 진흙을 바른 벽체에 나무 너와를 촘촘히 끼운 전형적인 일본식이었다. 옆집은 신의주에서 기관사를 하였다가 피난 때 내려왔다는데 7남매로 그 집이 좁아서인지는 몰라도 다 큰 형들과 누나는 그곳에 살지는 않았다. 그 집 막내가 나보다 한 살이 위였는데 나는 신작로에서 새로이 보는 것들 말고도 얻는 새로움은 그 집의 형과 누나로부터 주워듣거나 챙겨줘서 알아차린 것들이다.
나로서는 든든한 백이 그 집의 형들이었다. 형들도 나를 이곳저곳 데리고 다니며 애지중지 나를 무척 아꼈다. 우리동네 다섯 가구는 공동우물을 쓰고 공동 화장실을 사용했으며 집 옆으로 흙벽돌로 지은 창고가 있어 곳에서 닭들을 키웠다. 대부분이 가마니를 잇댄 움막 같은 곳의 기거를 면치 못하던 시절이니 따스한 집이 있다는 것은 그 자체가 든든한 성채를 지닌 거나 거반 다름없다.
허술하기 짝이 없는 수리산 밑에 소골 안에 움막집을 따라 들어가 본 이후 그 생각은 깊었다. 하지만 우리 집도 그리 성하지는 못했다. 한 겨울 바람 불 때면 부엌문은 오토바이 모터마냥 연실 덜덜 거리는 소리를 내었고, 테이프로 창을 일일이 다 봉했지만 드센 웃풍은 방안 가득했다. 다 떨어진 팬티로는 걸레를 하고 아버지가 입었던 깨끗한 러닝으로는 행주로 사용 했는데, 그것들을 문지방에 길게 늘여 문 틈새로 기어들어 오는 추위와 대적을 시켜 놓고 잠을 잤다.
그런 걸레더미는 그 다음날 아침 뻣뻣한 동태걸레가 되어 번번이 나동그라졌다. 한 학년이 오르면 가정방문을 하던 시절 오늘은 이 동네 내일은 저 동네 선생님들은 동네 아이들을 데리고 옮겨 다녔다. 소골안 아이들은 이리 피하고 저리 피하고 집에 아무도 없다고 핑계를 대곤 하였다. 냉천동 부자 동네를 가본 후로는 나 역시도 왠지 집을 보여 주고 싶은 마음이 없어 도망을 쳤는데 집에 가보니 선생님은 이미 마루에 걸터앉아 계셨다.
피하는 부끄러움은 못산다는 사실을 스스로 안다는 말도 될 것인데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그 어린 나이에 못산다는 것이 부끄러움이 되고 창피하다 여기는 마음이 어디서 생겨났던 것인지. 어쩌면 회색 그늘의 아이들은 스스로 영악해지든 여무는지 모른다. 가난한 나라 여행길에 마주친 아이들의 모습이 흡사 모두 그러했다. 가난에 대하여 어른들은 죄가 아니며 부끄러워 할 일도 아니고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게으름이라고 가르쳤다.
나 역시도 그리 말하지만 실은 그러하지가 않다. 솔직히 돈이면 웬만한 것이 해결되는 사회임에 허탈과 이탈을 줄여보자는 의도의 말이라는 생각을 나는 더 갖는다. 가난은 창피함일 수 있고 아픔일 때가 많다. 인생을 옥죄는 멍에라 한다면 너무 가혹한 편견일까. 오히려 나는 절대빈곤이라 할 촌구석에 틀어박혀 가난이란 말조차 입에 담지 못할 무참한 지경을 견뎌낸 덕분으로 평온하고 따뜻한 속성의 목가적인 느낌을 자연스럽게 자아내는 작가들이 무척 부럽다.
어쩌면 이는 상대적 비교가 필요 없는 고장에서 산 고유성과 지순함을 지닌 특혜인지도 모르겠다. 누구는 말도 안 되는 엉터리라고 할지 모르지만 아직 세상 때가 묻어나지 않는 동네 전체가 처참한 미얀마 산골에서 해맑은 웃음을 보고 나는 그 생각을 또 다시 했다. 이질감은 상대적 빈곤에서 오는 좌절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그 말은 요즘도 그대로 들어맞는다 싶다. 복지국가 건설은 국가의 부강보다는 개개인의 균형적 분배에 달려 있다는 생각을 나는 한다. 특히 우리같이 가난에 쩌 들다 지친 시샘이 많은 민족에게는 더 더욱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