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박한 귀향살이에서 피어난 복음의 꽃
한국 기독교 역사상 복음전도자로서 가장 유명한 분을 들라면 많은 사람들이 최봉석(권능) 목사를 거명할 것이다.
“예수 천당!” 새벽 시간부터 변함없이 들려오던 이 외침은 최권능 목사의 좌우명처럼 빛나는 부르짖음이었다. 33세에 예수님을 믿고 45세에 목사가 된 최권능은 신학교를 다니면서도 신학에는 관심이 적고, 오직 기도와 전도에만 열중한 나머지 평양 신학교를 세 번이나 낙제했다.
그는 세속적인 성공이나 명예는 철저히 무시한 사람이었다. 그는 오직 혼을 꿰뚫고 영혼과 직접 통하기를 원했다.
전도하고 교회 세우는 일 외의 일체를 헌신짝처럼 생각하였다. 그는 27년간 전도를 하였는데 만주에서 12년간 50개, 우리나라에서 15년간 30개, 합해서 약 80개의 교회를 세웠다고 한다.
시대적 상황과 신앙의 배경
정부의 관리들은 극도로 부패했다. 지방 관리들의 폭정에 견디다 못한 백성들에 의해 나라 곳곳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났을 때 최봉석(예수님 믿기 전의 이름)의 나이는 24세였다. 한편 1876년 단 1명이던 기독교인의 수는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1906년에는 4만 4천명이 되고, 1910년에는 11만 명으로 늘어났다.
지금의 세무서장과 같은 직분이었다. 당시 최봉석 청년은 평양 감사 민영휘의 비서 같은 직책을 맡아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현감과 부친 사이에 언쟁이 벌어졌다. 현감은 양반이고 창장은 아전이다. “하겠느냐 못하겠느냐?” “못하외다.” “누굴 어떻게 보고…” 흥분한 현감이 급기야 최봉석의 부친을 구타하려는 기세를 보일찰나 최봉석이 달려들어 현감을 마구 구타했다. 흙발로 몇 번 밟았다.
이로 인해서 5백리 밖에 있는 삭주로 쫓겨 가는 신세가 되었다. 봉석은 삭주까지 5백리 길을 발바닥이 붓도록 걸었다. 강 건너에는 중국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이때 벌써 삭주읍에는 교회가 있었다. 삭주 교회가 선지 4년이 되던 해였다. 삭주 교회의 설립자격인 백유계(白留溪)라는 유지가 있었다. 백유계는 한의사였다. 병 고치러 오는 사람들에게 전도를 시작한 것이 결국 1896년 교회를 세우기까지 발전하게 된 것이다.
백유계를 전도한 이는 그의 고종사촌 동생인 양전백이었다. 양전백은 1895년 마포삼열 선교사로부터 24세 때 세례를 받은 지 3년밖에 되지 않는 초신자였다.
그가 외사촌 형에게 전도한 것이 삭주읍교회까지 서게 된 것이었다. 조선 예수교 장로회 사기 1896년에 분명히 이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백유계는 양전백으로부터 전도를 받은 후에 복음을 전할 목적으로 서적을 잔뜩 사서 지고 갔다고 한다. 그래서 이웃들에게 전파하였는데, 남녀 다수의 신도가 생겼다.
다음 해 1897년 기와집 7칸을 사고, 초가 6간을 더 사서 교회를 세운 것이다. 마포삼열 목사는 서울에서 2년쯤 있다가 1893년에 평양에 와서 26세의 청년으로 1866년에 순교한 선배인 토마스 목사의 순교지인 대동강변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5백리 삭주 뿐 아니라 7백, 8백리가 되는 강계, 만포진까지라도 방방곡곡 사람 사는 마을이면 다 걸어 다니며 전도에 힘썼다. 학교도 많이 세우고 스스로 학문도 가르쳤다.
또한 1901년 평양 신학교뿐만 아니라 숭실전문과 기타 학교를 설립했다. 장로회 총회의 총회장도 역임하고, 1930년에는 선교 40주년 기념식을 가졌던 분이다. 1939년 평양신학교가 신사참배 문제로 문을 닫게 되던 해에 고국인 미국에 돌아가 있다가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그 7명 가운데 길선주 목사, 양전백 목사가 있었다. 그리고 소년시절 토마스 목사의 순교를 목격한 서경조 목사가 있었다.
귀향지에서 만난 예수님
시름없이 거문산을 쳐다보기도 하고 압록강가에 나가 보기도 하였다. 삭주에는 교회가 있었는데 최봉석은 예수를 믿는다고 성경책을 끼고 다니는 사람이 어쩐지 자기하고 좀 다른 것 같이 생각되었다.
둘째 아들을 낳을 무렵 약을 지으러 가서 인사를 하고 아는 사이였다. 백유계는 최봉석에게 왜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지 설명하며 전도하였다.
최봉석은 이러한 천리타향에서 자기 신상을 염려해 주는 그 사랑에 감격했다. “그 예수는 누구든지 믿을 수 있는 것이요?” 최봉석은 어쩐지 자기같이 불량한 사람은 믿을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은 당신 같은 유능한 기골이 있는 인재를 구하고 있습니다. 우리 평북에서는 이번에 팔도에 앞서서 전도회를 만들었습니다. 내 고종제가 되는 양전백이 거기 발기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전도인으로, 나아가서는 목사가 되어 새 문명을 받아 가지고 우리도 열심히 일을 해봅시다.”
백유계의 소개로 삭주 교회의 신도들과 정식 인사를 하게도 되었다. 이것이 1902년 33세가 되는 해의 일이다.
1903년부터 조선 교회에 부흥의 불길이 붙고, 1906년에는 교인의 수가 4만 명을 돌파하였다.
1902년 최봉석이 세례를 받을 무렵에는 의주가 가장 복음이 많이 들어온 곳이라 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예수님을 믿은 백홍준, 이응찬 등도 의주 청년들 이었다. 그리고 백홍준은 한국 최초의 전도사가 되었다.
그리고 한국 최초의 7인 목사들 중 양전백 목사도 의주 사람이었다. 이 무렵 최봉석은 세례교인이 되었다.
귀양살이를 하는 삭주는 그에게 복음을 싹 틔우는 은혜의 장소였다. 어쩜 그는 고달픈 귀양살이를 통해 이 땅에서 나그네와 같은 인생을 살아야함을 조금씩 깨우쳐 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둠의 땅을 빛의 땅으로 기경하는 이는 오직 주님이시다.
그리고 같은 해에 세례까지 받았다.
우리 배달민족은 사랑이 있는 민족이다. 자식, 이웃, 친구, 임금 사랑 등이다. 그러나 그 사랑에도 불구하고 주님 사랑 같은 영원한 사랑, 빛 된 사랑이 없다면 아무 것도 아니다. 진정한 사랑과 빛을 발견한 이곳의 청년들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맹호출림(猛虎出林)의 기세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귀양살이를 하는 최봉석에게 복음을 전했다. 훗날 박형룡(朴亨龍) 박사는 7세 때부터 14세의 소년이 될 때까지 벽동 교회에서 자라나서 최권능 조사가 목사가 된 후까지 있다가 그에게 학습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최권능 목사는 만주로 갔다.
예수님을 전하는 확성기
최권능 목사는 예수님의 사랑으로 불이 붙었다. 그는 자기의 생명이 붙어 있으면 그 전체를 예수님의 사랑으로 알았다. 그는 예수님을 위해서 죽고자 했고, 예수님을 위해서 살고자 함으로 스스로 무의식까지 예수님과 일체가 되기를 원했다.
그는 참으로 예수님뿐이었고, 믿음의 그 무한한 환희를 안 전도자였다. 그는 지식을 애써 구하지 않았다. 예수님을 전하는 확성기가 되면 그만이었다. 예수님을 전하는 기계로도 족한 것이었다. 전 생명을 바쳐 구원의 생명이 되고자 백절불굴의 전도자가 되었다. 새벽 공기와 함께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그 생명의 입김, 전도로 그 빚을 갚고자 했다.
‘그리스도의 신앙’, ‘주 안에 거할 것’, ‘오순절의 성령’ 등이 늘 그들의 설교 요지가 되었다.
1904년에는 노일(露日)전쟁이 벌어졌고, 일본이 전쟁을 이기자 남만주 철도가 일본 사람 손으로 넘어갔다. 조선은 일본의 보호국이 되었다.
1905년 최봉석은 백유계의 뒤를 이어 삭주 교회의 영수가 되었다.
1906년 최봉석은 매서인(賣書人)으로 만주 땅까지 다니며, 일본인들의 교회 박해 소식을 많이 접하였다. 책도 잘 배부하고 전도도 잘했다.
예수님을 향한 불붙은 사랑이 죽어가는 영혼들로 옮겨졌다. 그는 자신을 송두리째 불태워서라도 오직 예수님을 전하는 것이 주 업무요, 그것이 삶 자체였다. 척박한 귀향살이에서 피어난 복음의 꽃은 서서히 한 영혼을 전도의 일꾼으로 변모시켜 가고 있었다.
단순한 믿음의 여정 속에 빛나는 복음에 대한 열정 하늘의 만나로 살아가는 신실한 하나님의 종
전도자 최권능 목사의 눈에는 오직 예수님이 계실 뿐이고, 민족의 차별이 없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최권능 목사는 일본군 장교도 인간이지 별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그 믿음이 좋다고 칭찬받은 백부장 생각도 나는 것이었다. 러일전쟁을 이겼겠다, 조선 사람쯤은 보호국의 미개족속으로 여기고 아주 경시할 때다.
“예수 천당!”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말이 놀라서 펄쩍 뛰는 바람에 연대장이 말에서 떨어져 기절을 했다.
보았기 때문에 우르르 달려와서 총을 겨누었다. “내가 기도하면 살아요.” 헌병들은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이때 일본말을 잘하는 사람이 뛰어와서 통역을 했다. 최권능 목사는 열심히 기도를 드렸다. 그랬더니 연대장이 깨어났다.
“최봉석! 다시 이런 일이 있으면 즉결처분 한다.”라는 경고장을 붙였다.
그런데 최 목사는 그 장소에 가서 벽보를 뜯어 호주머니에 넣고 집에 있는 부인 앞에 그 종이를 내어 놓으면서 “이것 보시오. 면류관에 별이 붙었수다.” 하면서 경고장을 내어 놓았다는 것이다.
“예수 천당”으로 그 연대장이 구원받으면 면류관은 하나님께 받을 것이요, 그 일로 인해 박해를 당하니 빛나는 별을 얻을 것이라는 것이다.
“여보, 면류관이고 뭐고 아침거리가 없어요.” 하고 신음 비슷한 말을 하였다. 그러자 최 목사는 벼락같은 소리로 “그렇게 믿음이 없소? 당신의 아버지 하나님께서 세상을 떠나셨는가? 하하, 육신만 생각하는 사람은 참 답답도 하군. 기도만 하면 아버지께서 주실 터인데….”라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 저녁 무렵 누군가 아무도 모르게 쌀과 찬거리를 사립문 곁에 놓아두고 갔다. 마치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숨은 봉사로 오른손이 구제하는 걸 왼손이 모르도록 한 이 순수한 신앙의 흔적들이 최 목사의 주변에 늘 있었다.
최 목사가 자고 일어나면 어디서 누가 갖다 놓았는지 수수 가마, 쌀가마, 밀 가마 등이 있었다.
영혼을 사랑하는 열정에서 빚어진 기적
송아지를 좀 살려달라고 부탁을 하는 것이었다.
안고 있다며 새댁을 구박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최 조사는 하루 꼬박 죽은 송아지를 놓고 기도했다. 송아지는 꼼짝도 안 했다. 밤을 새우며 기도를 하는 열성에 그 집 사람들이 감동을 받았다.
무슨 인기 전술이라도 쓰는 것 같아서 부끄러운 마음이 들기도 하였다. 그러나 최권능 조사는 사람 앞에서, 어떤 이득을 위해서 기도를 시작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자신도 모르게 기도를 시작한 것이고, 기도를 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어서 시작한 것이다.
마음 깊은 곳에서 샘물과 같이 솟아오르는 기쁨을 느끼면서 최 조사는 3일을 계속 기도하던 중에 죽었던 송아지가 다시 살아난 것이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기적이 일어났을 때 최 조사는 다만 이렇게 말하였다.
저는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한 것뿐입니다.”
낙제생 전도꾼
어느 날 마포삼열 교장은 최권능 조사를 불러 주의를 주고 있었다.
최권능 조사는 교장 앞이라 말은 못 하고 속으로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세상에 마귀들이 우글우글한데 예수탄을 쏴야지 딴 총알로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불발탄은 안 돼! 신학탄은 비둘기에게 콩알을 쏘는 거다.’ 최 조사의 조직신학, 구약신학, 신약신학 등의 점수는 아주 형편이 없었다. 그러나 노방전도 점수 하나만은 100점이었다. 최 조사는 낙제를 하였다.
하지만 자기를 위해서 기도를 하며 속히 목사가 되기를 바라고 있는 벽동 교회의 신자들이 낙담할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거북하였다. 낯익은 사람들이 반갑게 인사를 했다.
세 번째 낙제를 하자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졸업식은 끝났다.
예수님의 천진한 믿음의 익살꾼
똑똑 노크를 했다. 문을 열자 외국인들의 푸른 눈동자가 최조사의 얼굴에 한꺼번에 집중이 되었다. 교수들의 표정은 미묘했다. 민망하고 거북한 듯한 표정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또 낙제가 되어 졸업을 못했습니다. 저는 기도하고 전도하는 일에 바빠서 공부 못 하고 세 번째로 낙제를 했습니다. 그러니 어느 세월에 목사가 되겠습니까? 여기 많으신 교수님들의 마음을 감동시켜서 저에게도 졸업장을 주시어 목사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저를 이렇게 사랑하셔서 오늘 저도 이렇게 졸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참 안됐고 안타까운 일이오. 그러니 내년에는 열심히 공부하십시오. 전도도 좋지만 열심히 신학 공부도 해야 교회가 부흥됩니다.”
좀 전에 제가 기도할 때에 ‘졸업장을 주시어 목사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할 때에 ‘아멘!’이라 하셨잖아요?” 마포삼열 교장은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때 저만치 앉아 있던 선교사 한 분이 말했다.
“교수님들, 어찌 이렇게 믿음이 없는 말씀을 하십니까? 기도를 할 때 구한 것을 이미 받은 것으로 확신하는 것이 기도하는 바른 자세가 아니겠습니까?” “그건 억지입니다.”
마포삼열 교장은 최 조사를 불렀다. “하나님은 구하는 이에게 주십니다. 맞습니다. 최 조사는 우리 신학 교육에 보탬이 되는 학생생활을 해주었습니다. 우리가 눈이 어두웠던 것입니다. 방금 하나님은 저에게도 총명을 주셨습니다.”
결국 최 조사는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게 되었던 것이다.
최 조사의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사랑과 열정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원동력이 되었다.
하나님을 안 섬기면 다 죽소
장로회 사기를 보면 1913년에 최권능 조사가 평북 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기록이 있다. 최권능 목사는 후일 보수신학의 본체인 총회신학대학 학장이 된 박형룡 박사에게 학습을 준 분이기도 하다.
만주로 와보니 불쌍하게 살고 있는 농민들의 심각한 형편을 목도하였다. 강냉이 한 가마니에 딸을 파는 부모가 있었다. 우리 동포들도 긴 겨울동안 노름과 술타령으로 지내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형편은 비교적 괜찮은 편이었다. 당시 남만주 철도를 수중에 넣은 일본의 군대가 만주에 들어와 있었다. 이 무렵 만주에 와서 사는 우리 동포 가운데는 마적들과 싸우기 위해 총칼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나님의 강력한 능력이 담긴 한마디
예수님이라는 말만 해도 중국 사람들은 다 알아 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한마디가 사람들의 골수를 쪼개고도 남았다. 그에게는 남들이 지니지 않은 비상함이 있었다. 마치 만주 땅에 여호와 하나님을 강력하게 외쳤던 예레미야가 서 있는 듯 했다. 그의 외침은 영혼을 울리는 뇌성이었다.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는 곳에 믿음의 역사가 곳곳에서 일어났다.
이를 통해 만주 전도에 불이 당겨졌고, 가는 곳마다 교회가 세워졌다. “예수 천당!” 그의 목소리에는 이상한 위엄과 힘이 있었다. 1923년 남만주 노회장으로 피선되었고, 같은 해 남만주 노회에서 개척전도 공로 표창도 받았다.
듣게 되었다. 고향을 떠난 지도 오래 되었고, 제2의 고향인 삭주를 떠난 지도 12년이 되었다. 그동안(12년) 50개의 교회를 세웠던 것이다. 삭주에는 둘째 아들과 딸 광옥이가 있었다. 대동강과 가족의 얼굴도 보고 싶어졌다. 큰 아들 내외는 만주에 남기로 하고, 최목사는 귀국하게 되었다. 삭주의 집을 팔고 고향인 강동으로 이사 왔다.
이 무렵 최목사와 가까이 지낸 노영선 목사의 간증이다.
무진서 조반을 먹고 가는데 큰 길이라 내왕하는 사람이 많았다. 최목사님은 한 사람도 빼지 않고 전도하며 40리 길을 걸어갔다. 대동교에 오니 사람이 너무 많아 그 무리들을 향해 ‘예수 천당’을 외쳤다. “예수 천당! 예수 믿읍시다.” 만나는 사람 누구에게나 외치는데 공교롭게도 교역자도 만나게 되었다. 교역자들이 “나는 목사요!”, “나는 전도사요!” 하면 최목사는 그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벙어리!” 하면서 교역자들을 호되게 꾸짖었다. “송장이 수의 입고 다니는 것 같구나! 어서 전도하시오!”라고 외치기도 했다.
하늘의 어명을 받은 하나님의 사신
마침 화전(火田)을 만들기 위해 산에다 불을 질렀는지 한 곳에서는 온통 연기가 하늘을 가리우고 있었다. 화전민들의 집은 한 곳에 모여 있지 않다. 두 세 집 정도 모여 있어도 또 5리나 가야 다른 집들이 있는 것이 보통이다. 고구마를 심은 밭이 펼쳐져 있었다. 집 앞에는 아이들이 어린애를 업고 서서 낯선 사람의 얼굴을 신기한 듯이 보고 있었다. 어디서 졸졸졸 물 흘러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최목사는 “사람 죽는다아! 사람 죽네!” 냅다 소리를 질렀다. 집에서 사람들이 신을 신기가 무섭게 달려왔다. “뭐요?” “예수 믿고 천당 가시오. 예수 안 믿으면 사람은 다 죽소!” “뭐 어째? 이놈의 영감쟁이가 누굴 놀리는거야?” “여러분, 예수 안 믿으면 다 죽어요, 알겠어요?” 장정들은 화가 나서 최목사를 때리려고 했다.
최 목사는 얼른 도망을 치려고 했다. 그러나 60대 노인이 빨리 뛸 수가 없었다.
그때 문득 생각난 것이 있었다. “나는 하나님의 사신이다!” 목소리가 벽력같았다. 마패 비슷한 메달을 내 보였다.
워낙 위엄 있던 사람이라 모두 그 자리에 엎드러지고 말았다.
그 메달은 남만주에 전도 목사로 파송 당시 장로회 총회에서 표창을 받을 때 받은 은메달이었다. 그 은메달을 내보이자 저녁 햇빛에 반짝반짝 빛나는 것이 산골 농민들 눈에 암행어사 마패로 보인 모양이었다.
“흙이나 파는 두더지가 뭘 압니까? 용서해 주십시오.” 모두 싹싹 빌었다. “
나는 여러분들이 이런 깊은 산골에서 하나님을 섬길 줄도 모르고 지내는 것이 불쌍해서 하나님 섬기는 도리를 가르쳐 주려고 온 하나님이 보내신 사신이요. 아까 내가 한 말은 거짓말이 아니오. 사람은 하나님을 안 섬기면 다 죽소!” “하나님만 섬기면 우리 죄는 다 용서되는 겁니까?” 이렇게 되니 문제는 간단했다.
인근에 사는 사람들을 모두 불러 모았다. 그리고 교회를 하나 더 세우게 된 것이다.
그는 우선 사당부터 찾아가서 불을 질렀다. 동네 사람들이 모두 나와 한 편에서는 대성통곡을 하면서 우리 동네 망한다고 울부짖었다. 청년들은 최목사를 죽일 기세로 달려들었다.
그들은 최목사를 사당 옆 구덩이에 생매장을 시키려고 몰아넣었다. 그리고는 어린 아이로부터 노인까지 저마다 손에 돌멩이를 들고 던질 기세를 하였다. 마치 스데반 집사님처럼 처형을 당할 순간이었다.
번쩍 꺼내 들었다. 그리고 고함을 쳤다.
“이 십자가에 새겨진 것은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에서 받은 은메달인데, 이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때려 죽여도 괜찮으면 죽이시오!” 이렇게 당당하게 외치니 그 황해도 산골 사람들도 그 메달을 무슨 마패로 알았는지, 서서히 돌멩이를 땅에 내려놓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오히려 모두가 무릎을 꿇고 엎드려서 빌었다.
“우리가 모르고 그랬으니 살려주시오.” 그러자 최목사는 “살려면 예수를 믿으시오! 사는 길은 오직 예수 믿는 길이요.” 하였다. 최 목사는 이곳에서 3개월을 머무르면서 교회를 세웠다.
번뜩이는 최목사의 지혜안에 담긴 하나님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은 그 어느 곳도 없었다.
믿음의 기도는 기적을 부른다
1928년도부터는 이용도 목사의 대 부흥의 선풍이 불기 시작했다. 최목사는 평안도와 황해도 외의 곳에는 가지 않았다.
돼지 주둥이가 바위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일이 있었다. 장정 서너 사람이 당겨도 떨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최목사가 가보니 과연 큰 돼지의 주둥이가 돼지우리 안에 있는 바윗돌에 붙어 있었다.
“여러분, 기도를 하면 떨어집니다. 이것은 마귀의 장난입니다. 여러분, 성황당을 많이 모셨지만 무슨 소득이 있습니까? 이 돼지 주둥이가 떨어지거든 성황제 중지하고, 예수 믿고 천당 가도록 하십시오.”
최목사가 기도를 하니까 곧 돼지의 주둥이가 바위에서 떨어졌다. 믿음이 있는 곳에 기적은 임했다.
이렇게 되어 이 마을에도 교회가 세워졌다. 이렇게 도합 30개의 교회가 서는 것을 보면서 평양에 자리를 잡았다.
세상에 속한 것 같으나 하늘에 속한 자
길선주 목사였다. 당시 평양에만도 초교파적으로 50여명의 교역자와 2만 여명의 평신도가 있었다. 최목사는 집에 있는 신주(神主)를 때려 부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 우상과의 싸움을 일생동안 계속했다.
학살했다. 이통에 최목사의 3남 광화군이 중국 아이로 오인 받아 혹독하게 매를 맞았는데, 집에 돌아온 지 며칠 만에 숨지고 말았다. 이 소문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아들을 잃은 최목사에게 위로의 인사를 하였다.
“조선은 넓은 감옥이오. 이 감옥에서 벗어나서 자유로운 천국에 갔는데, 내가 슬퍼할 이유가 없지 않소? 이 세상은 하나님의 것이오. 참으로 예수님을 믿으면 항상 기뻐할 일 뿐입니다.”
최목사는 예수님을 믿는 척하고 교회만 왔다 갔다 하며, 비둘기 모양 생각은 콩(세상 부귀)에만 있는 신자와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여신도로 옥중에서 고생한 안이숙 선생님의 집에 자주 들렀다는 기록이 그의 수기에 나온다.
내 몸에는 예수 천당이 꽉 찼단 말이요
안이숙 여사의 저서 「죽으면 죽으리라」에 보면 최권능 목사에 대해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그는 몹시 깨끗한 인격자였다. 식사할 때도 노인 같은 데가 없이 깨끗하고, 오래 같이 앉았어도 노인 냄새가 전혀 없었다. 그리고 수줍어하는 태도가 보여 질 때는 언니와 나는 서로 쳐다보며 미소를 지으며 그를 더 존경했다. 그는 말이 솔직하고 거동이 공손했다.”
예수님께 미친 전도꾼
기독교인들을 가시 돋친 눈으로 보기 시작했다. 최권능 목사는 일본인들의 종교박해가 올 듯한 기세가 보이기 시작할 때 부터 주변의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매는 몽땅 내가 혼자 맡아서 맞고 순교도 내가 맡아서 하겠습니다.”
그는 기독교인이었다. 오다는 조선의 교회 지도자들에게 신사참배 (神社參拜)는 단순한 애국행사이므로, 우상숭배는 아니라고 설득했다.
조선교회의 목사들이 그러면 신사에 혼(魂)이 없는가? 혼이 없다면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하니까, 혼이 없다고는 할 수 없었는지 혼이 있다고 하였다.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학생은 학교에서 정학이나 퇴학을 당하게 되었다. 교회와 교회의 집회에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평양의 거리를 다녔다. 어떤 때는 신호등까지 아주 무시했다. “영감! 신호등이 안 보여?” 덜미를 잡고 최목사를 인도로 끌어냈다. 그는 신호등을 무시하고 찬송가를 부르며 거리를 횡단하려 했던 것이다.
“당신은 무엇 때문에 길거리에 나와 있는 거요? 사람들 다칠까봐 지키는 것 아뇨? 수고해요, 수고해. 서로 만나 수고한다고 인사는 못 할망정 이게 뭐요? 신사 체면에 남의 덜미를 잡고….”
경찰서에서도 예수 믿고 천당 가야지 안 믿으면 멸망한다고 경찰서가 떠나갈 듯이 소리소리 질렀다. 경찰서장이 이것을 봤다.
용서해 달라고 했다. 최 목사는 경찰서를 나왔다. 그리고 또 한 번 큰 소리로 “예수 천당!”을 외쳤다. 순경들이 내다보고 웃고 있었다. “미친 영감 같으니라구.”
가고 있었다. 기업체를 갖고 있는 부자 장로였다. 이 생각 저 생각에 골몰하며 예배당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회개하고 예수!” 어깨를 툭 치는 것과 동시였다. 장로는 손에 들었던 성경을 길바닥에 떨어뜨리고 펄쩍 뛰면서 놀랐다. 뒤를 돌아보니 최권능 목사가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목사님 다 망했어요. 돈 없어요.”
살쾡이 같은 교묘한 회유책
해서 사태는 점점 더 어렵게 되어갔다. 최봉석 목사는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쪽의 거두요, 어느 집회에서나 신사참배를 결사적으로 반대하는 태도를 보였으므로 지명수배를 받게 되었다.
최목사는 평북 서천군의 선미도라는 섬에 가 있었다. 최목사는 순교할 각오를 매일 다짐하면서 또 한 번 예수님을 위해서 외칠 기회를 조용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방천 둑이 나무뿌리로 메워지는 기사와 이적을 생각할 때에 누구보다도 이번 싸움에 자기가 앞장서야 되겠다고 생각하였다. 그곳에서 일본인 형사에게 체포된 최목사는 평양경찰서로 호송되었다. 오윤선 장로, 채정민 목사, 주기철 목사 등이 잡혀 들어왔다. 그리고 참혹한 고문을 당하게 되었다.
내가 너희들을 사랑하듯 너희들도 사랑하라고 했단 말이야. 일본은 서양 사람들의 압제하에 시달리던 아시아인들을 건져내려고 피를 흘리고 있어. 성전(聖戰)이야. 일본군인 하나하나가 총에 맞아 쓰러져 죽어가면서 동양의 평화, 세계의 평화를 늘 염려하시는 천황폐하의 만세를 부르면서 죽어가고 있단 말이야. 조선의 목사들이 뭘 했어? 일본의 가가와(賀川)는 13년간 빈민굴에 들어가 깡패, 불량배를 선도하지 않았는가? 조선 교회에 가가와의 1/3 만큼이라도 사랑을 가진 목사가 있으면 이름을 대란 말이야. 가가와도 신사참배에 앞장서서 반대하지 않았단 말이야. 그런데도 신사참배를 반대하며 신성한 아시아인의 해방전쟁에 흠집을 낼 작정인가?” 하며 “쾅!” 하고 탁자를 쳤다.
학살당한 중국인의 피가 하늘에 호소할 때 일본은 망합니다.”
멈출 수 없는 외침, 예수 천당
바로 옆방에서 성도들이 얻어맞고 신음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조선놈의 그 도둑놈 근성을 고쳐주는 거야. 이 고약한 늙은이 기어코 굴복 시키겠다. 아가리를 구두 발길로 콱콱 다져라 양심이 돌아오게시리.” 이쪽 저쪽 방에서 몽둥이로 맞는 소리가 들려 왔다.
입을 너무 맞아 말을 못하고 신음 섞인 소리로 “예수 천당!” 하였다. “자알 논다. 예수 천당? 지독한 늙은이군!” 이렇게 되어 그들이 점심을 먹는 동안 최권능 목사는 다시 “예수 천당!”을 외치기 시작했다. 어쩐지 겁이 나지 않았다.
아프다는 소리 대신에 “예수 천당!”을 소리 지르기 시작했다. 허리가 결리고 가슴이 막혀서 말을 못하게 되어도, 숨이 터지는 동시에 “예에∼수 처언 다앙!”이 나왔다. “쿵” 매가 떨어진다. “예수 천당!” 예에∼수 발음을 못하고 실신을 했다. 그러면 얼굴에 물을 끼얹었다.
내 전신에 피가 들어 있어 바늘로 찌르면 어디든 피가 나오듯이 예수 천당이 나올 터이니까.”
“탁” “예수 천당” “탁” “예수 천당” “탁” “예탕” “아주 말도 못하게 때려버려!” “탁탁탁탁” “으으으음 예에 수 처언 다앙….” “기절인가? 그런가 봐요”. 사실 취조란 것이 필요 없는 상황이었다. 범죄사실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목적은 사실을 자백시키는 것이 아니었다. 매와 죽음으로 위협해서 그들의 신앙을 꺾자는데 목적이 있으니, 마귀의 짓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최권능 목사님의 예수 천당은 결코 멈추어지지 않았다. 그의 영혼 안에 불타는 예수님의 사랑을 꺼트리기에는 그 어느 것도 역부족이었다.
하늘에서 전보가 왔구나. 나를 오라고 나를 백번 죽인 다 해도
최권능 목사는 감방 안에서 큰 소리로 찬송을 불러 다른 성도들의 용기와 인내에 도움이 되게 했다.
죽인다고 해도 그들은 순교자의 영광을 만드는 도구가 되는 셈이다. 곧 그들은 하나님의 사역에 협조할 뿐인 것이고, 맞아 죽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에 동참하는 것이 된다. 그리고 때려 죽이는 사람은 자기의 영혼을 마귀에게 파니 밥 팔아 똥 사먹는 밑지는 장사다.’ 최권능 목사의 머리에 이런 생각이 번뜩임과 동시에 최목사의 얼굴에서는 광채가 나기 시작했다.
거기 참배하기가 그토록 싫다면 일본의 천황 폐하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생각합니다. 그러나 제가 섬기는 하나님은 이 우주의 창조주이며 이 우주를 다스리는 분이라, 천황 폐하라도 그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여러 나라의 임금님 가운데 한 분이라 생각합니다.”
기독교 교인이 많아지고, 참으로 좋게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최 목사는 평양에서 예수에 미친 사람이란 소문이 났을 뿐이야. 평양 사람 100명 중에 99명은 최목사를 정신병 든 사람으로 보고 있어.”
나는 직접 예수님을 내 생활을 통해서 체험을 했고, 죽은 사람을 살려내고, 나도 죽었다가 되살아 난 일이 몇 번이나 있습니다. 당신네들이 나를 100번을 죽인다 해도 나는 예수 천당을 외치면서 다시 살아날 것이오.”
자신들에게 승산이 없음을 알고 물러서게 되었다.
안이숙 선생 등 끝까지 굴복치 않은 성도들은 평양 경찰서 유치장에서 평야 형무소로 넘어갔다. 주 기철 목사 중심의 산정현 교회의 신앙 양심의 뿌리는 완강하고 확고했다. 산정현 교회에서만 두 사람의 목사와 4사람의 장로가 옥중 성도가 되었던 것이다.
주님 안에 갇혀 사는 사람들
도보행렬을 하여 재판을 받으러 가게 되었다. 형무소 감방에서 끌려나온 최 목사와 일행이 된 남녀 성도들은 얼음판 위를 걸어가게 되었다. 짚으로 만든 용수를 쓰고 길을 걸었다. 흰옷을 입은 최권능 목사의 머리는 양털같이 희고 퍽 경건한 모습이었다. 얼음판 위에서 채찍으로 빨리 가라고 마구 때리는 바람에 넘어졌다.
72세로서 제일 연로했던 최권능 목사가 넘어지면서 그 채찍을 얼굴에 얻어맞자 추위에 언 얼굴이 터져서 피로 웃옷을 적셨다. 재판은 일사천리로 끝났다. 일본 헌법 제3조에 해당하는 죄명이 씌워졌던 것이다. 천황의 신성불가침이란 관념에 저촉이 된 것이다.
온갖 수단을 다 썼다. 감방에서 파렴치범들과 같이 있게 되었다. 기한도 없었다. 최권능 목사의 옥중생활은 성결한 것이었다.
필요가 있다. 그들은 주님만을 위하고, 주님만을 높이고, 그의 영광만을 생각하는 자세로 조용조용 감옥생활을 하였다. 그 가운데 무한한 기쁨을 맛보면서 천성 문을 향하여 나아가는 성결한 성도들의 대열을 빈 마음으로 우리들도 함께 바라보자.
감옥 안에 울려 퍼지는 영혼의 찬양
어느 주일날 조선인 형사들에게 거의 죽을 지경이 되도록 얻어맞았다. 그렇게 되자 같은 유치장에 있던 파렴치범들까지 몹시 최권능 목사를 동정하고 핍박자들을 미워했다.
문자 그대로 광음(光陰)을 아끼는, 70이 넘은 주님의 종의 생활이 시작 됐다. 목숨도, 하나님이 주신 시간도, 하나님이 주신 모든 기회도 최대한 선용하였다.
/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최권능 목사의 마음 깊은 곳에서 이러한 찬송이 흐르고 있었다.
최권능 목사의 ‘예수 천당’과 주기철 목사의 ‘일사각오’ 이 두 가지 구호가 산정현 교회에서 나타난 것도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우리 조선 성도들의 영광스러운 구원을 위해서 허락하신 특별한 믿음이요 구호였던 것이다.
혈육의 정을 빛으로 승화하다
“얼마나 고생을 하오? 아이들은 잘 있어요? 고생이 많지요?” 자신도 모르게 말을 했는데, 자기가 한 말이 예수님의 뺨이라도 친 것 같았다.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의 실수 같기만 해서 그날 밤을 뜬 눈으로 새웠다. ‘아이들은 누구의 아이란 말인가? 다 하나님의 자식인데, 하나님 이상으로 그들을 보호할 수가 있다는 생각 자체가 잘못이 아닌가? 나는 내 생명도 재산도 처자도 다 주님께 맡기고 주님만 따라야 한다.’ 라고 결심을 하였다.
“항상 기뻐하라!” 빙긋이 웃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 빙긋이 웃었다. 이렇게 면회시간은 전격적인 것이 되었다. 여러 말이 필요 없었다. 눈빛을 스치고 지나가는 찰나의 빛 그것으로 대화를 했다. 그는 금식을 하며 배가 고픈 양들에게 자신의 양식을 나눠주었다.
하늘의 전보
몸이 극도로 쇠약해져 갔다. 주님이 계신 곳으로 차츰 가까워짐을 느끼게 되었다. 형무소 소장은 최 목사의 집에 병보석을 통고하였다.
최목사의 부인, 딸, 임기봉 전도사 등이 형무소를 찾아 갔을 때, 최 목사는 이미 임종에 가까운 상태였다.
차츰 돌아오기 시작했다. “나를 기독병원에 입원 시켜주면 13일간 살겠다.” 하는 최 목사의 가느다란 음성을 듣고 그 길로 기독병원으로 갔다. 병원에서는 최 목사에게 안정을 요구했다.
그러나 그는 찾아오는 지하 성도들 하나하나의 손을 잡고 문안 인사를 받고 격려를 하였다. “박 집사, 오 집사 합동해서 유익, 기뻐하라. 주기철, 박관준 ,이기선, 안이숙 우리 모든 형제들을 위해 기도해 주시오.”
이 때 주기철 목사는 이미 순교하여 돌박산에 장례를 마친 뒤였다. 병원에서 링거주사를 놓으려 해도 살과 뼈만 남고 이미 혈관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문자 그대로 그는 하나의 초자연이었다. 미음과 과일을 먹었다.
최 목사님은 그를 평소에 아끼고 따르던 교우들과 부인, 자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늘에서 전보가 왔구나. 나를 오라고 …” 하면서 찬송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고생과 수고가 다 지난 후/ 광명한 천국에 편히 쉴 때/ 주님을 모시고 나 살리니/ 영원히 빛나는 영광일세/ 영광일세 영광일세 내가 누릴 영광일세/ 은혜로 주 얼굴 뵈옵나니/ 거룩한 영광 내 영광일세.”
최권능 목사는 찬송이 끝남과 동시에 하늘나라로 떠나갔다. 그를 바라보는 성도들의 마음 속 깊이 찬송소리가 메아리치는 가운데 미소를 남기고 갔다.
산정현 교회 교인들은 남녀가 모두 소복을 입었다. 장지는 평양 기독교 공동묘지 돌박산이었다. 고등계 형사들의 눈을 피하여 2백여 명의 문상객들이 장지까지 따르니 그 행렬은 대단했다.
이로써 우리의 순교자 최권능 목사는 우리에게 “예수 천당!”의 여운을 남겨준 채, 순교의 영광을 안고 주님 품에 먼저 안겼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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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하늘사랑 원문보기 글쓴이: 주님과베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