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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cm의 트레이시는 브랜드 대학교 여자 농구부의 촉망받는 선수였습니다.
1993년 1월이었습니다.
브랜드대학인 인근의 다른 대학과의 농구경기를 치렀으며 트레이시는 유감없이 자신의 실력을 발휘하여 브랜드대학의 승리에 큰 몫을 하고 있었습니다.
경기가 끝나갈 무렵 트레이시가 슛을 하고 바닥에 오른발을 내딛는 순간 그녀는 갑자기 경기장이 울릴 정도의 비명을 지르면 주저앉았습니다.
충격으로 무릎 뼈가 으스러진 것이었습니다.
즉시 병원으로 옮겨져 몇 시간의 대수술을 받았습니다.
수술하는 의사들의 표정은 밝지 않았습니다.
그 수술 후 트레이시는 3개월에 걸쳐 무려 아홉 번이나 수술을 받아야 했습니다.
의사들은 트레이시의 오른쪽 다리를 살리기 위하여 뼈를 이식하고 살을 옮기는 필사의 노력을 했으나 이식된 뼈와 살은 제 기능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다리를 자르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다리를 절단하는 수술 전날 농구팀 감독이 트레이시를 찾아왔습니다.
트레이시는 애써 밝은 표정을 짓고 있었습니다. "트레이시, 너의 등번호인 10번은 네가 돌아올 때까지 남겨 두겠다." 감독의 말에 트레이시가 대답했습니다.
"감독님, 꼭 팀에 복귀하겠습니다." 그러나 이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트레이시의 부모들은 트레이시를 위로하기 위한 말쯤으로 생각했습니다.
3개월 후, 브랜드 대학교 농구부의 첫 연습이 시작되던 날, 농구장에 가장 먼저 나타난 사람은 연습가방을 어깨에 멘 트레이시였습니다. 그녀는 오른쪽 무릎 아래쪽에 의족을 끼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선수들이 집합하자 감독이 선수들의 연습 조를 알려 주었습니다. "트레이시! 너는 1번조다!"
감독은 전력질주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연습에 트레이시를 참가하게 하였습니다.
다리를 절단한 뒤 4개월 만에 트레이시는 첫 경기에 참가하였습니다.
이 날 그녀는 그 첫 경기에서 12득점을 하고 6개의 리바운드를 잡아냈습니다.
다리를 절단하기 전보다 훨씬 좋은 성적이었습니다.
물론 그녀의 등번호는 여전히 10번이었습니다.
. 우리는 어려움을 만나면 좌절하고 맙니다. 모든 의욕을 잃고 절망하며 자신의 운명을 한탄하고 남을 원망하며 저주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시선을 약간만 다른 곳으로 돌려보면 무한한 가능성을 여전히 갖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장애일의 말이 생각납니다. “1만 가지 일 중에서 내가 장애인이기 때문에 하지 못하는 일은 1천 가지이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9천 가지의 일을 할 수 있다“고.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日) 피의 사람 찬송 : 268장(통 202장)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함은’/ 본문 : 베드로전서 1장 18∼25절
묵상 :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벧전 1:18~19)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우리 눈에 보이지 않으십니다.
영이신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말씀으로 나타내셨고,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이 이 땅에 육체를 입고 오신 목적은 육체를 찢어 피 흘려주심으로써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돕고 싶어도 도울 수 없고, 인간이 하나님의 영원한 능력으로 살고 싶어도 살 수 없게 하는 것이 바로 ‘죄’입니다.
그 죄의 담을 헐어버릴 수 있는 어떠한 능력도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오직 예수의 피만이 모든 죄의 문제를 종결시킬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압제에서 이끌어내실 때 애굽에 열 가지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그 중 마지막인 열 번째 재앙은 애굽의 처음 난 장자를 모두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바른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그 재앙이 넘어가도록 하셨습니다(출 12:6~13). 이 유월절 피의 사건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사람에게는 저주와 죽음과 영원한 멸망이 넘어갈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의 실천을 예표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침례를 받기 위해 요단강에 오셨을 때 선지자 요한은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라고 했습니다.
선지자 요한이 이렇게 말한 그 순간은 유월절의 피의 사건을 통해 약속하신 하나님의 피의 언약이 드디어 현실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절대적인 사건입니다.
결국 그 이후로 선지자와 유대인들이 바라보고 기다렸던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는 그 약속대로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속죄의 제물이 되어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구약시대에 양의 피를 보고도 장자의 죽음이 넘어가고 바로의 압제에서 해방의 자유를 누렸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소유한 자의 능력은 얼마나 생명으로 넘쳐나겠습니까?
그때부터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서 죄를 찾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피로 속죄함 받은 증거를 찾으십니다.
회개하라고 하신 것은 예수의 피 공로로 하나님을 만나라는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피 없는 제사, 피 없는 정성, 피 없는 제물은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양을 잡아 피 흘린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습니다.
우리는 피의 약속을 붙잡고 주님께 예배하고 주님을 만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사람은 죄와 저주, 질병과 고통, 영원한 지옥이 모두 해결된 사람이요, 영원한 천국 문이 열린 축복의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제 영원한 천국까지 자유로운 자가 되어 믿음을 방해하는 모든 장애물을 예수의 피의 능력으로 파괴하고 이기는 믿음의 승리자가 되어야 합니다.
기도 : 주여,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사람입니다. 이제는 저주도, 고통도, 죽음도, 지옥의 영원한 멸망도 넘어갔습니다. 영원한 자유를 얻었습니다. 평생 예수의 피의 권세와 은혜로 승리하길 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빙점이란 소설로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미우라 아야꼬(三浦綾子)가 한 이야기입니다.
북해도의 가장 큰 도시가 삿뽀로의 '키따이찌죠오(北一條)교회의 교회학교 유년부 부장 집사가 있었는데 나이 많은 총각 집사이었습니다.
이 총각 집사가 삽뽀로 철도청에서 오랫동안 근무하다가 아사히가와라고 하는 곳으로 발령이 났습니다.
아사히가와는 북해도에서도 가장 끝에 위치한 곳입니다.
이곳에서 근무하다가 주일이 되면 꼭 돌아와 본 교회에서 봉사하고 다시 아사히가와로 돌아가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삽뽀로와 아사히가와 사이에는 '시오카리'라고 하는 큰 고개가 있습니다.
이 고개는 너무 높아 고개 밑에서 기관차 한 대를 더 붙이고 기관차 두 대가 끌어야만 넘을 수 있습니다.
이 총각 집사가 다음날이 자기의 결혼식 날이기에 삿뽀로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기차가 올라 가다가 마지막 끝에 객차 두 번째 세 번째 사이의 연결고리가 끊어졌습니다. 뒤로 다시 밀려 내려가기 시작합니다.
이때 기관차 두 대는 그 사실도 모르고 나머지 객차들을 끌고 그냥 고개를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떨어진 객 차 두 대는 계속 후진하고 있었습니다.
기차에 대해서는 이 총각 집사만이 조금 아는지라 달려가서 브레이크를 당겼으나 브레이크가 고장이 난 상태였습니다.
처음에는 서서히 후진하지만 가속도가 붙으면 높은 고개에서 벼랑에, 또는 골짜기에 떨어지게 되어 140명이 모두 죽는 것은 시간 문제였습니다.
이 때 이 총각 집사가 하나님 앞에 "주님, 주님께서 만약에 이 기차에 타셨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라고 간단히 기도합니다.
이 기도 후에 "주여, 제가 하겠습니다."라고 하며 밖으로 뛰어 내렸습니다.
돌을 주워 다가 막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 사이에 객차는 지나가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몸을 던져 기차를 막았습니다. 몸이 어떻게 됐겠습니까?
박살이 나고 말았습니다. 연락이 되고 구조대가 달려왔습니다.
시신을 꺼냈더니 주머니에서 유서가 나왔습니다.
교회학교 부장을 하며, 독실하게 믿는 이 사람은 죽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유서를 지녀야 한다고 하면서 지녔던 유서입니다.
"나의 죽음을 필요로 하는 곳에서 나는 비겁하게 살려고 하지 않겠다.
내가 죽지 않을 자리에 가서 죽음을 자청하지 않겠다."라는 줄거리였습니다.
그는 자기 몸을 던져 140명의 생명을 구원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친구를 위해 죽으면 이 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남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을 갖는 것이 무엇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롬 5:6-8)
행복한 가정
찬송 : 559장(통 305장) ‘사철에 봄바람 불어 잇고’본문 :
에베소서 5장 22~25절, 6장 1~4절
묵상 :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 6:1~3)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실 때에 부부를 한 시에 짓지 않으시고 남자인 아담을 먼저 지으셨습니다.
아담이 독처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신 하나님은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고 그의 갈비와 살을 취하여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남자는 흙으로 지으셨으나 여자는 남자의 살과 뼈를 가지고 만들었으니 여자는 남자와 한 몸이요, 남자도 여자와 한 몸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자를 이끌어 남자 아담에게 주시면서 남자가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합하여 한 몸을 이루라고 명령하셨고 그때부터 남자와 여자는 부부가 되어 한 가정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부부는 서로 자기 몸이요, 자기 뼈이기 때문에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요, 아내가 남편을 사랑하는 것도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짝지어주신 것을 사람이 절대로 나눌 수 없다고 했습니다(막 10:9).
성경은 남편에게 명령하기를 아내 사랑하기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온갖 고통을 담당하면서까지 인간 영육 간의 고통을 해결해주신 것처럼 사랑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또한 아내들에게는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부에게 이와 같은 사랑과 순종만 있다면 얼마나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부부윤리를 만드시고 부부생활과 가정생활이 위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가정에는 행복이 깃들이도록 하셨으니 하나님은 인간이 행복할 수밖에 없도록 지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자녀가 이 땅에 태어나면서는 부모로서 자녀에게 해야 할 사랑과, 자녀가 부모에게 해야 할 순종의 말씀을 주셨으니 곧 사랑과 순종입니다.
부모는 주 안에서 금세를 위해서도, 내세 영혼의 때를 위해서도 자녀에게 영육 간의 행복을 부여해주어야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훌륭한 인물들은 대부분 가정교육을 잘 받은 사람들입니다.
자녀를 키울 때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진실한 사랑이 무엇인가를 알아서 영적으로 사랑하며 참된 사랑으로 자녀의 신앙인격을 키워주어야 합니다.
인간은 어떻게 교육받느냐에 따라서 현재와 미래와 영혼의 때가 결정됩니다.
우리 민족의 대명절인 추석을 맞았습니다.
모든 부모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본을 자녀들에게 보여줘야 합니다. 또한 자녀들은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합니다.
부모가 나를 어떤 고통 중에 낳았으며 어떤 고생을 하면서 기르고 교육했는가를 알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앞에 죽기까지 복종하심과 같이 부모에게 순종하고 공경하여 땅에서 잘 되고 장수하는 자녀가 되기를 원합니다.
이번 추석을 기해 남편과 아내가 영혼의 때를 위하여 서로 사랑하도록 약속하기 바랍니다. 부모와 자녀가 오직 영혼의 때를 위하여 주 안에서 사랑하고 순종하기를 기원합니다.
기도 : 주여, 명절 을 맞이해 예수 안에서 부부가 뜨겁게 사랑하고, 부모와 자녀가 사랑 속에서 영적으로 복을 받게 도와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최후에 천국을 유업으로 받는 영적인 부자들이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어떤 목사님이 이웃 교회에 시무하는 후배 전도사님으로부터 자기 교회의 주일 밤 예배에 설교를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그러기로 약속을 하고 날짜가 거의 되갈 무렵이었습니다.
이웃 교회의 전도사님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주보에 실기 위해 설교제목과 성경본문을 알려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말했습니다. "
본문은 시편 23편 1절부터 6절까지" 그러자 전도사님은 "그러면 제목은요?" 하고 물었습니다.
목사님은 "제목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전도사님이 이를 받아 적으면서 "그 다음에는 요?" 하고 물었습니다. 아마 그 뒤에 뭐가 더 있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그거면 됐지, 뭐가 더 필요해?"라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약속한 주일 밤 저녁 예배에 그 이웃교회를 찾아갔습니다.
안내를 받아 강단으로 올라가 자리에 앉아 주보를 펼쳐 보았습니다.
목사님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밤 예배 설교제목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그거면 됐지 뭐가 더 필요해?"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기가 콱 막혔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란 제목에 핀잔처럼 전도사에게 한 말이 제목으로 가 붙었기 때문입니다.
목사님은 찬송을 하면서도, 눈을 감고 기도를 하면서도 제목을 바로 잡아야 할 것인가, 아니면 그냥 무시하고 설교를 해야 할 것인가 고민이 되었습니다.
고민 끝에 목사님은 "그래, 제목대로 설교를 하자!"하고 결심을 했습니다.
준비한 설교의 원고를 덮고 전혀 새로운 각도로 설교를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제목을 바꾸니 성경이 새롭게 보였습니다.
"여러분은 푸른 풀밭의 싱싱한 풀을 원하십니까,
맑은 시냇가에서 시원한 물을 마시고 싶으십니까?
그러나, 여러분! 시편 23편에 나오는 양은 그 풍성한 풀밭에서 풀을 뜯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고 누워 있습니다
. 너무 배가 불러서이겠습니까, 아니면 욕심이 없어서이겠습니까?
양은 배가 불러도 몇 시간씩 계속 풀을 뜯고 우물거리며 되새김질을 한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아주 단순하고도 분명합니다.
목자에게서 오는 참 만족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고백합니다. "여호와께서 나의 목자가 되시니 나에게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나의 목자가 되시고 내가 그 분의 양이 되니 참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그거면 됐지 뭐가 더 필요하겠습니까?"하고 외쳤습니다.
온 교회 성도들이 "아멘, 아멘~"하며 큰 은혜를 받았다고 합니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을 요구합니다.
기도에 수없이 많은 요구사항만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목자이시라는 것을 확신하기만 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입니다.
잔잔한 물가로 인도해 달라는 말도, 푸른 풀밭에 눕게 해 달라 울면서 조를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목자가 할 몫이기 때문입니다.
만족해하고 감사해 하고 그래서 찬양이 절로 나오면 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하나님만 의지하라
찬송 : 435장(통 492장) ‘나의 영원하신 기업’ 본문 : 고린도후서 1장 8∼9절
묵상 :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고후 1:8∼9)
오늘 본문 말씀은 사도 바울이 선교하다 환난을 당한 것을 통해 주시는 영적 교훈의 말씀입니다. 바울이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말하고 있는데, 자세한 내용은 언급하지 않았으나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고 합니다.
고린도 후서 11장에 보면 그가 얼마나 많은 환난을 당했는가 하는 것을 좀더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고후 11:23∼27).
바울은 이런 수많은 환난을 통해 하나님이 주시려 하는 영적 교훈을 분명히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화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라”(롬 5:3∼4)
인류 역사에서 위대한 인물들은 한결같이 환난과 역경의 터널을 거쳤습니다.
베토벤은 청각장애인이 되어 피아니스트 생활을 중지하고 작곡가가 되었습니다
밀턴은 시각장애인이 되어 ‘실락원’을 썼습니다.
존 번연은 12년의 감옥생활에서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혔다고 하는 ‘천로역정’을 저술했습니다.
바울은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다고 했습니다.
죽는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이상하게도 사람은 죽을 상황이 돼야 버려야 할 것 버리고, 고쳐야 할 것 고칩니다.
사람들은 ‘마지노선’이 무너져야 하나님께 손을 들고 나옵니다.
마지노선이 무엇입니까.
2차대전 당시 프랑스 사람들은 마지노 요새를 믿었습니다.
너무 튼튼하게 지었기 때문에 난공불락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 요새만 있으면 독일군을 막을 수 있다고 자신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요새에 약점이 하나 있었는데, 막강한 폭발력을 동반한 공중 공격에는 취약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설마하며 방심하는 사이 결국 독일이 공중에서 프랑스를 공격해온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흔히 최후의 선을 일컬어 ‘마지노선’이라는 말을 많이 쓰는 것입니다. 우리는 미련해서 인생의 마지노선이 무너져야 하나님 앞에 항복하고 나오는 것입니다.
바울은 또 “자신을 의뢰하지 말라”고 합니다.
신앙은 자기 신뢰를 버리는 것입니다.
자기 육체 건강 물질 지식 지혜는 믿을 것이 못됩니다.
잘나봤댔자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다 쓸데없는 것입니다
. 다 무상한 것입니다. 그런고로 이런 것들을 다 버려야 합니다.
어떻게 버립니까. 환난을 통해 버리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환난이 주는 유익입니다. 독일의 종교개혁자 멜란히톤은 “환난과 곤고가 나를 골방으로 몰아넣어 기도하게 하고, 그 기도는 환난과 곤고를 몰아낸다”고 말했습니다.
영국의 청교도 브루스 목사는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가 얼마나 웅변적인가 하고 수사학적으로 보지 아니하시고, 우리의 기도가 얼마나 긴가 기하학적으로 보지 아니하시고, 우리의 기도가 얼마나 많은가 산술학적으로 보지 아니하시고, 우리의 기도가 얼마나 조직적인가 논리학적으로 보지 아니하시고, 다만 우리의 기도가 얼마나 진실한가를 보신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진실한 기도를 들으십니다.
기도 : 오늘도 눈물을 뿌려 기도하며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합니다. 주께서 도와주시고 함께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