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동공자(海東公子)의 후예 해주최씨(海州崔氏)는 1985년 국세조사에서 남한에만 3만8천6백28가구, 인구는 16만명을 헤아린다. 김(金)·이(李)·박(朴)氏에 이어 우리나라 네 번째 대성인 최(崔)씨 가운데서도 경주최씨(慶州崔氏) ·전주최씨(全州崔氏)에 이어 세 번째로 수가 많다. 시조는 최온(崔溫). 그의 아들이 바로 해동공자(海東公子)로 추앙되는 고려의 명재상·석학 최충(崔冲)이다. 한 개인이 자신의 능력을 성실하게 개발, 한 세상을 아쉬움없이 살다 감으로써 1천년 뒤 후손들에게 〈명문(名門)〉의 긍지를 남기는 가장 성공적인 사례를 최충(崔冲)은 보여준다 예부터 명인(名人)의 탄생에는 신화같은 전설이 전해 내려오는데 해주최씨 보서(譜書)기록에 의하면 모친의 태몽에 규성(奎星)에 별이 엉키어 크게 빛나는 것을 보았다 하였고, 해주목사(海州牧使) 김흥조(金興組)가 밤에 수양산(首陽山)에 큰 별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는데 그후 사흘동안 산(山)이울고 용수봉(龍首峰)이 무너지며 봉우리위에 구름과 안개가 자욱히 뒤덮여 있어 기이하게 여기고 하급 관리를 시켜서 별이 떨어진 곳을 조사해보니 별다른 일은 없고 최온(崔溫)의 집에 바로 그때 아들이 태어났더라는 것이다. 고려 성종 5년(986:고려사에는 984년으로 기록) 황해도 대령군(大寧郡-지금의 海州) 향교터에서 시골관리 최온(崔溫)의 아들로 태어난 최충(崔冲)은 풍채가 뛰어난데다 학문을 좋아하고 굳건한 성품을 지닌‘이상적인 인간형‘이었다고 한다. 문벌이 출세의 절대적인 요건이던 당시 향리(鄕吏) 집안출신인 그가 재상에까지 오른 것은 그가 출생하기 16년전인 광종9년(958)에 채택된 과거제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고려조가 실력으로 사람을 뽑는 과거제도를 통해 키워낸 최초의 인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 22세에 과거에 장원급제한 그는 좌습유(左拾遺)를 시발로 한림학사(翰林學士)·간의대부(諫議大夫)등 학자로서 역임할수 있는 청직(淸職)을 두루 거쳤다.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등 요즘으로치면 행정직을 두루 역임한뒤 재상의 자리에 오른 것은 문종1년(1047) 62세에 문하시중(門下侍中)이 됐다. 70세(72) 벼슬에서 물러날 때까지 그는 이 수상직 9년을 포함해 전후 20여 년간 권력의 중심인물로 고려의 국정을 좌우했다. 법령을 정비하고 국방을 강화하는 등 다방면에 공적을 쌓은 그는 훗날 아들들에게 경계하는 말에서,"선비가 세력으로써 세상에 나아가면 유종(有終)의 미(美)를 거두는 일이 드물고 학문과 덕행으로 나아가야 경사가 있는 것이다. 나는 다행히 문행(文行)으로 현달해 청검(淸儉)·근신(謹愼)을 마음에 다져 세상을 잘 마칠 수 있었다."〈최자(崔滋)의 ‘보한집(補閑集)‘〉고 술회한다. 유가적(儒家的)인 모범적 인생행로를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사업은 70세(72)로 벼슬에서 물러난 뒤 더욱 큰 업적으로 남는다. 다름아닌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종합대학이라 할 구재학당(九齋學堂)의 창설. 당시 서울인 개성(開城) 송악산(松嶽山) 기슭에 9개학부의 요즘으로 치면 사립대학을 세워 83세(85)로 세상을 떠날때까지 후생들을 지도했다. 그의 구재학당(九齋學堂)은 문헌공도(文憲公徒)로 불렸는데 그의 영향으로 많은 명류들이 사학을 열었다. 이른바 12공도(公徒)다. 과거제의 실시와 함께 본격적으로 도입된 유학(儒學)이 연구되고 마침내는 불교(佛敎)에 대신해 국가의 지도이념이 되기에 이르는 계기를 만들게 된다. 그는 최유선(崔惟善)·최유길(崔惟吉) 두 아들을 두었는데, 두 아들이 모두 재상에 올라 해주최씨(海州崔氏)는 최충(崔冲)의 부자 2대(代)에 명문(名門)으로서 기반을 확고히 다지게 된다. 최유선(崔惟善)은 형부상서(刑部上書)를 거쳐 중서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다. 문종묘정에 배향되고 문화(文和)의 시호가 내려졌으며, 최유길(崔惟吉)은 호부상서(戶部上書)·상서우복야(上書右僕射)·수사공판삼사사(守司空判三司事)를 지낸 뒤 수사공섭상서령(守司空攝尙書令)에 올랐다. 최충(崔冲)은 두 아들에게 일찍이 경계의 시〈계이자시(戒二子詩)〉한편을 유훈(遺訓)으로 남겨 지금까지 해주최씨가(海州崔氏家)의 정신적 규범이 되고 있다. "내가 아들에게 훈계하고 우리 집안의 보배를 주려한다. 청념하고 검소함을 몸에 새기고 문장으로 한몸을 수 놓으면 집안에 전하는 것이 나라의 보배가 되고 대를 이어 나라의 중신이 될 것이다. 허영과 사치하는 사람을 본받지 말라 꽃이 피어도 봄한철 뿐이니라. 내 집에 귀한 것 없으나 오직 한 가지 보배 전하니, 문장은 비단이요 덕행은 구슬이라. 오늘 이르는 말을 뒷날 잊지 않으면, 나라의 기둥이 되어 길이 흥창하리라. 〔오금계이자(吾今戒二子) 부여오가진(付與吾家珍) 청검명제기(淸儉銘諸己) 문장수일신(文章繡一身) 전가위국보(傳家爲國寶) 계세작왕신(繼世作王臣) 막학분화자(莫學紛華子) 화개일향춘(花開一餉春) 가세무장물(家世無長物) 유전지보장(惟傳至寶藏) 문장위금수(文章爲錦繡) 덕행시규장(德行是珪璋) 금일상분부(今日相分付) 타년막감망(他年莫敢忘) 호지랑묘용(好支廊廟用) 세세익흥창(世世益興昌)〕" 그의 경계의 가르침대로 후손들은 학문과 덕행으로 대를물려 나라의 기둥으로 쓰였다. 최충(崔冲)의 손자(최유길(崔惟吉)의 아들) 최사추(崔思諏)는 이자연(李子淵)의 손자 이자겸(李資謙)을 사위로 삼았는데 이자겸(李資謙)의 딸, 그러니까 최사추(崔思諏)의 외손녀는 예종(睿宗)의 왕비가 되었다. 당시 고려 조정을 움직이던 문공인(文公仁)·유인저(柳仁著) 등이 모두 최사추(崔思諏)의 사위들이다. 또 최유선(崔惟善)은 이자연(李子淵)의 조카 이예(李預)를 사위로 삼고 최유선(崔惟善)의 손자 최약(崔약)은 이자연(李子淵)의 손자 이자덕(李資德)의 사위가 되었던것이다. ‘고려사(高麗史)‘최충(崔冲)의 열전(列傳)에는 「최충(崔冲)의 자손에 문행(文行)으로 재상에 오른자가 수십인이었다」고 했으며 그의 손자 최사추(崔思諏)의 열전에서는 「문벌이 성함이 한 시대에 비할 바가 없었다.」고 적어 고려조 최대의 명문 해주최씨(海州崔氏)의 융성을 전하고 있다. 최사추(崔思諏)는 이부상서(吏部尙書)·추밀원사(樞密院使)·수사공(守司空)·문하시랑평장사(門下 侍郞平章事) 등을 역임하였으며 숙종 8년(1103) 고문개(高文盖) 등의 반란음모를 적발, 처리한 공으로 보정공신(輔正功臣)이 되고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랐다. 그의 형 최사량(崔思諒)도 공부시랑(工部侍郞)·서경유수(西京留守)·좌복야참지정사(左僕射參知政事)의 요직을 역임했다. 의종때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최윤의(崔允儀)는 학문에도 뛰어나 ‘상정고금예문(祥定古今禮文)‘을 저술했는데 이 책의 간행에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가 사용되었다고 ‘이규보문집(李奎報文集)‘에 기록되었다. 그때까지의 목판인쇄에서 한 단계 진보한 활자의 혁명을 이룬 것이다. 그러나 세계최초 금속활자 발명의 영광을 안긴 이책은 불행히도 전해 오지 않는다. 최충(崔冲)이 재상의 자리에 오른 문종대에서부터 무신란이 일어나기 전 까지 1백여년이 고려 해주최씨(海州崔氏)의 영화 가운데에서도 절정이다. 일족이 대를이어 조정의 중직을 역임하여 고려의 내정(內政)·외교(外交)·학문·예술의 큰 역할을 맡았다. 금(金)·송(宋)·원(元)등 고려의 국가안보와 직결된 북방·서방의 이웃나라에 외교사절로 다녀온 최씨가(崔氏家)의 고관(高官)들만도 최유길(崔惟吉) 금(金)·최사제(崔思齊) 송(宋)·최사량(崔思諒) 송(宋)·최관(崔灌) 금(金)· 최윤의(崔允儀) 금(金)·최유엄(崔有엄) 원(元) 등 7명에 이른다. 그중 최유엄(崔有엄)은 4차례나 원(元)에 사절로 드나들며 고려를 원(元)의 직할령으로 병합하려는 모의를 저지하는 공을 세웠다. 대대로 문신의 가문이었던 해주최씨(海州崔氏)는 의종 24년(1170) 문인정권하에서 천대받던 무신들의 울분이 정중부(鄭仲夫)의 쿠데타로 터지면서 당시의 다른 문신 집안들과 함께 된서리를 맞는다. "문관(文官) 쓴 자는 다 죽이라"는 무인(武人)들의 이성을 잃은 폭력에 최(崔)씨 일문도 큰 희생을 내고 권력에서 밀려나 산야(山野)에 숨었다. 정중부(鄭仲夫)-경대승(慶大升)-이의민(李義旼)-최충헌(崔忠獻)으로 이어지는 20여년간 쿠데타의 악순환은 문인들에게 악몽과도 같은 세월이었다. 명종(明宗) 26년(1196) 최충헌(崔忠獻)에 이르러 무인들끼리의 권력쟁탈전은 끝나고 고려조는 실질적인 〈최(崔)씨 무인왕조〉로 넘어간다. 최충헌(崔忠獻)과 아들 최우(崔瑀), 손자 최항(崔沆), 증손자 최의(崔誼) 까지 4대 60년의 군사독재가 계속되는 것이다. 각지에서 잇단 반란·저항을 사병조직의 무력으로 철저하게 분쇄·진압하고 견고한 권력기반을 구축한 최(崔)씨 정권의 2대 최우(崔瑀)는 과거의 문신 등 불만세력에 대해 유화정책을 썼다. 무지·난폭한 무인들의 전횡을 피해 중앙을 등진 문인(文人)·학자들을 후한 예우로 힘써 조정에 불러들인 것이다. 이규보(李奎報)·이인로(李仁老)등이 이때 최(崔)씨 정권에 등용된 이름난 문인들. 문인(文人)정치 시절의 최대족벌이었던 해주최씨(海州崔氏) 가문에서도 이때 최자(崔滋)가 초빙에 응해 벼슬길에 나선다. 충청(忠淸)·전라안찰사(全羅按察使)를 거쳐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한림학사(翰林學士)·승지(承旨)를 역임하고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오른다. 그는 유능한 관리였을 뿐 아니라 뛰어난 문장가로 ‘유가집(有최家集) 10권‘‘보한집(補閑集)‘등 저술을 남겼고 그가 지은 ‘삼도부(三都賦)‘와 몇 편의 시는 ‘동문선(東文選)‘에 수록됐다. 그중에도 그의 ‘보한집(補閑集)‘은 이인로(李仁老)의 설화집(說話集)인 ‘파한집(破閑集)‘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기 위해 저술된 문학평론서이자 문단 일화집으로 고전적 가치를 지닌다. 그는 이 저술에서 시(詩)의 기(氣)·성(性)·정(情)·의(意)와 재(才)와 정(情)의 한계등을 논하여 좋은 시는 선천적 자질과 후천적 소양과의 조화에서 이루어짐을 말하고 말〈사어(辭語)〉과 리듬〈성률(聲律)〉보다는 기골(氣骨)과 의격(義格)을 더 강조했다. "무릇 글을 짓는이는 마땅히 먼저 글자의 근본을 살펴야 한다. 무릇 경사백가(經史百家)에 씌어있는 것에 비추어 참작해서 붓이 나가는 데 따라 쓰면 문사(文辭)가 정밀하고 강해져서 능히 얻기 힘든 교묘한 말을 말할수 있다. 만약 문사가 정밀하고 강하지 못하면 비록 뛰어난 정감과 호탕한 기상을 가지고 있어도 그것을 펴낼도리가 없어 마침내는 졸렬하고 난잡한 시문이 되고 만다. 오늘날의 후배들은 그 때보다도 훨씬 묘하니 으레 책읽기를 일삼지 않고 출세를 빨리 하려고 과거의 글을 익히며 쉬운 글에만 밝다. 요행히 급제하면 여전히 학업에는 힘쓰지 않고 오직 푸른 것을 뽑아 흰것과 비기고, 하나를 세워 둘로 대(對)를 만들며 생경한 것을 다듬고 냉랭함을 덥히는 걸 잘하는 일로 여길 뿐이다." 후진 시인들의 글짓는 태도를 비평한 그의 이 말은 문장과 시에 대한 그의 뚜렷한 주관을 나타내고 있다. 30여년 은둔 끝에 최우(崔瑀)정권 때부터 벼슬길에 나선 해주최씨(海州崔氏)는 곧 이어 닥칠 몽고(蒙古)의 간접 지배, 고려말의 혼란으로 이어지는 풍운속에서 옛날의 영화를 회복하지 못한채 조선조로 넘어온다. 문인맥이 압도적으로 우세한 해주최씨(海州崔氏)의 전통에 이채를 띠며 무인정권의 혼란기에 우뚝 선 인물이 최춘명(崔椿命)이다. 고종 18년(1231) 유라시아를 석권한 몽고가 유독 조공을 거부한채 독립노선을 표방한 고려를 무력으로 짓누르려 쳐들어왔을 때 그는 평안도(平安道) 자주부사(慈州府使)로 침략군의 장수 살리타이(살례탑-撒禮塔)에 맞선다. 인근의 모든성이 다 함락되고 끝내 고려는 몽고와 강화했으나 그는 온 성안의 백성과 군사를 이끌고 굳게 성을 지켰다. 공격을 하다하다 지친 몽고군은 고려 조정에 항복을 명령토록 종용, 조정에서 두 차례나 전령을 보내 "화의가 성립됐으니 항복하라"는 왕명을 전하자 마지못해 성문을 열었다. 조정의 명을 거역한 죄로 잡혀 사형을 받게 됐는데 적장 살리타이가 오히려 나서서, "내가 평생을 전장에 다니며 수백차례 전투를 했으나 이런 장수는 본적이 없다. 몽고에는 거역했지만 고려에는 충신이니 죽여서 되겠느냐"고 오히려 만류, 살아났다는〈사나이의 이야기〉가 ‘고려사(高麗史)‘에 전해온다. 후에 1등공신에 오르고 벼슬이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에 이르렀다. 후손들은 고려초와 중엽 그토록 융성을 누리던 해주최씨(海州崔氏)가 무인란을 계기로 쇠운에 떨어지고 다시 그 같은 세력을 회복하지 못한사실 등에서, "평화시에 두드러지고 난세와 위기에 약한 특성을 보이는 것 같다"고 말하고 있다.
조선조에 들어 해주최씨(海州崔氏)는 45명의 문과 급제자를 냈으나 벼슬보다는 문장과 충의의 가문으로 더 빛난다. 해동공자(海東公子) 이래 문학으로 해주최씨(海州崔氏)의 명성을 드높인 인물은 조선조를 대표하는 시인의 한 사람이자 일세의 풍류아였던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이다. 선조때 종성부사(鍾城府史)를 재낸 그는 시인·문장가였을 뿐 아니라 글씨를 잘 쓰고 피리를 잘 불며 활쏘기에도 명수였던 당대의 멋쟁이였다. 관북(關北)에 있을 때 역시 문학을 이해하고 그 자신 뛰어난 시재를 지닌 여류시인(女流詩人-妓女) 홍랑(洪娘)과의 로맨스는 우리 국문학사에 한편의 아름다운 전설처럼 전해온다. 묏버들 가려꺽어 보내노라 님의 손에 주무시는 창밖에 심어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잎 곧 나거든 날인가도 여기소서. 선조 6년 북해평사(北海評事)로 경성(鏡城)에 있을 때 사랑을 맺었다가 이듬해 벼슬이 갈려 고죽(孤竹)이 서울로 돌아오게 될 때 영흥(永興)까지 배웅하고 함관진(咸關鎭)에 이르러 저문날 비내리는 속에 버들가지 한줄기를 꺽어 애인 고죽(孤竹)의 손에 건네며 홍랑(洪娘)이 읊었다. 이 시조는 우리시조 문학의 이채(異彩)이다. 고죽(孤竹)은 이 시를 절양류기여천리인(折楊柳寄與千里仁) 위아시향정전종(爲我試向庭前種) 일야신생엽(一夜新生葉) 초췌수미시첩신(憔悴愁眉是妾身)이라고 한문으로 옮겨 지금껏 전해오나 작고한 국문학자 양주동(梁柱東)박사는 "홍랑(洪娘)의 절절한 우리말 시조에 짝을이룰 화답 시조가 없었던 것이 일세문장의 이름에 아쉽다"고 고죽(孤竹)을 타박하는 것으로 홍랑(洪娘)의 아름다움을 찬양하기도 했다. 근래 국문학자 김동욱(金東旭) 교수가 주창, 경기도(京畿道) 파주(坡州) 고죽(孤竹)의 묘소아래 그녀의 시비가 세워졌다. 고죽(孤竹)은 율곡(栗谷) 이이(李珥)·구봉(龜峰) 송익필(宋益弼) 등과 함께 당시〈8문장〉의 호칭을 들었는데 그중에도 당시(唐詩)의 대가로 옥봉(玉峰) 백광훈(伯光勳)·손곡(蓀谷) 이달(李達)과 함께 〈삼당(三唐)〉으로 꼽혔다. 옛고을이라 성곽도 없고 산중재실이라 수풀 우거져 쓸쓸타 벼슬붙이 다 흩어지고 물건너 처량한 다듬이 소리……. 〈고군무성곽(古郡無城郭) 산재유수림(山齋有樹林) 소조인리산(蕭條人吏散) 격수도한침(隔水搗寒砧)〉 기발한 착상과 산뜻·유려한 표현으로 이루어진 그의 시작품은 ‘고죽집(孤竹集)‘으로 엮어져 조선조 중기의 우리 문학에 높은 위치를 차지한다. 멋쟁이 시인답게 성품도 곧고 맑아 돌아간 뒤 숙종때 청백리(淸白吏)에 뽑혀 오르기도 했다. 충의에서 조선조의 해주최씨(海州崔氏)를 대표하는 인물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의병을 이끌고 진주성(晉州城)을 사수하다 고종후(高從厚)·김천일(金千鎰)·황진(黃進) 등과 함께 순국한 최경회(崔慶會)로, 그는 영해군수(寧海郡守) 등을 지내다 부모의 상을 당해 벼슬을 버리고 고향 능주(綾州-지금의 전남 화순(和順))에 돌아가 있던중 임진란(壬辰亂)이 터지자 집안과 고을의 선비·청년들을 규합, 의병을 일으켰다. 금산(錦山)·무주(茂朱)·성주(星州)등에서 왜군(倭軍)을 무찔러 경상우도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에 임명됐고 이듬해 제2차 진주성(晉州城) 싸움에서 의병장 김천일(金千鎰)등 6만 군민과 함께 진주성(晉州城)을 지켰다. 그 전해 1차공격에서 패한 설욕을 하기 위해 총력을 집결한 왜군(倭軍)의 공격에 맞서 9날9밤을 싸우다 끝내 성이 무너지고 이를 비롯한 6만여명의 군인과 민간인이 몸을 던져 나라를 지켰다. 나중에 좌찬성(左贊成)이 추증(追增)되고 충의(忠毅)의 시호가 내려졌다. 진주(晉州) 촉성루(矗石樓)에서 왜장(倭將)을 껴안고 남강(南江)에 몸을 던져 순국한 유명한 의기(義妓) 논개( 論介)는 바로 그의 후실(後室). 흔히 〈기생(妓生)〉으로 알려졌으나 사실은 기생이 아니라 어엿한 두 번째 부인으로 남편이 전사하자 그 복수를 위해 기생으로 가장하고 왜군(倭軍)을 안고 투신했다는 것이 작가 정비석(鄭飛石)씨가 최근 오랜 조사 끝에 밝힌 논개(論介)의 신분이다. 촉성루(矗石樓)에는 현재 〈삼장사(三將士) 시(詩)〉로 불리는 한편의 한시(漢詩)가 편액에 새겨져 걸려 있다. "촉석루상삼장사(矗石樓上三將士) 일배소지장강수(一杯笑指長江水) 장강지수유함(長江之水流함) 파불갈혜혼불사(波不渴兮魂不死) - 촉석루 세 사나이가 한잔 술로 웃으며 장강을 가리킨다. 장강물은 도도히 흐르네. 강물이 마를 지라도 넋인들 죽을 소냐." 또 조선조 해주최씨(海州崔氏)의 인물로는 최만리(崔萬里)가 있다. 한글창제 반대론자로 알려져 더 유명한 그가 사실은 강직하고 청렴한 청백리(淸白吏)였으며, 원칙에 충실한 지조의 인물이었음을 근래 국어학자 이숭녕(李崇寧)씨가 논문을 통해 밝힌 바 있다. 이(李)박사는 "최만리(崔萬里)의 한글창제 반대주장을 사대(事大)사상의 전형으로 몰아세우는 것은 난센스"라고 말하고 잘못된 일반의 최만리관(崔萬里觀)을 바로잡도록 주장했었다. 그의 현손인 월담 최황(崔滉)은 함경도(咸鏡道) 암행어사로 실적을 올렸으며 대사간(大司諫)·대사헌(大司憲)을 거쳐 이조판서(吏曹判書)·좌찬성(左贊成)을 지냈다. 임란(壬亂)때는 왕비와 세자빈을 희천(熙川)으로 모셔 평난공신(平難功臣)에 뽑혔고 해성군(海城君)에 봉해졌다. 그의 아들 최유원(崔有源)은 광해군때 대사헌(大司憲)으로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모를 극력 반대했다. 조선조 유일의 해주최씨(海州崔氏) 재상인 영조조의 영의정(領議政) 최규서(崔奎瑞)는 고죽(孤竹)의 현손으로 대사간(大司諫)에 있을 때 숙종이 장희빈(張嬉嬪)을 정식 왕비로 맞으려는 것을 극력 반대했다. 대사헌(大司憲), 대제학(大提學),형조(刑曹)·이조판서(吏曹判書)를 거쳐 우의정(右議政)·좌의정(左議政)·영의정(領議政)에까지 올랐다. 노소(老少) 분당에서 소론(少論)의 영수였다. 이인좌(李麟佐)의 난(亂)을 토평한 공으로 영조로부터 일사부정(一絲扶鼎)이란 친필을 하사받아 현재 경기도 안성시 원곡면 불지리의 어서각(御書閣)에 보존되어 오고 있다. 시호는 충정(忠貞)이고 영조묘정에 배향됐다. 문집으로‘간재집(艮齋集)‘이 전한다. 최운서(崔雲瑞)는 현종때 문과(文科)·무과(武科)에 모두 급제, 충청도병마절도사(忠淸道兵馬節度使)를 지냈고, 그밖의 많은 후손들이 두각을 나타내며 명문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해주최씨대종회(海州崔氏大宗會)는 동방(東邦)의 위대한 인물인 해동공자(海東公子) 문헌공(文憲公) 최충(崔冲) 탄신 1천년을 맞이하여 ‘최충연구논총(崔冲硏究論叢)‘의 발간(發刊)·기념(記念) 심포지엄등 각종 기념행사를 대대적으로 개최하였고, 1990년에는 문헌공탄진천주년기념 대동보를 발간하였으며 1992년에는 경기도 오산시에 제2의 문헌서원을 창건하여 매년 4월 제3일요일에 유림등 관내기관장과 전국 각지역 1500여 종인이 운집한가운데 문헌대제를 봉행하고 정기총회를 개최하여 효자·효부에게 표창하고 유공자에게는 공로패, 국가고시합격자에게는 축하패를 수여하는등 숭조상문과 경로효친 사상등 전통윤리·도덕 함양에 힘쓰고 있다고 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