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포 이야기 II] 나른함과 싱그러움 사이에 놓인 오월의 나무들
[2010. 5. 17]
오월의 빛이 짙어졌습니다. 그 빛 따라 내내 짓궂기만 하던 지난 봄이 빠르게 꼬리를 감춥니다. 오월은 약동의 계절이라고는 하나, 사실 무척 나른한 계절입니다. 가만히 앉아 있으면 한낮에도 졸음이 솔솔 몰려오잖아요. 나무들도 그렇습니다. 삼월, 봄 내음 풍겨오는 처음부터 봄을 재우치며 제가끔 울긋불긋한 빛깔과 향기의 꽃을 피우던 동백 산수유 목련과 같은 나무들은 이제 한숨 돌리는 듯, 차분한 초록 옷으로 갈아입습니다. 초본식물들이야 계속 이러저러한 꽃을 피우지만, 아무래도 이 즈음의 나무들 가운데에는 이팝나무와 오동나무의 꽃이 가장 눈에 들어옵니다. 대개의 큰 나무들은 나른함에 파묻히지요.
그렇다고 해서 나무들이 정말 나른한 낮잠을 자는 건 아닙니다. 겉보기와 다르게 나무들은 이제부터 더 바빠집니다. 꽃을 떨군 나무들은 곧바로 꽃의 열매를 맺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양분이 많이 필요하겠지요. 그래서 크고 작은 잎들을 돋아내며, 광합성을 해야 할 겁니다. 자신에게 필요한 양식 뿐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는 지구 상의 다른 생명체에게까지 양식을 나눠주어야 하니, 얼마나 바쁘겠어요. 겉으로 보이는 나른함과 달리 속으로는 그 어느 때보다 활기찬 계절입니다.
오늘 밤에 KBS2-TV에서 방영할 '낭독의 발견'의 주제가 '오월'입니다. 오월이 주는 나무의 이미지를 이야기하는 패널로 제가 그 프로그램에 나갔습니다. 며칠 전 같은 KBS1-TV의 '한국 한국인' 출연에 이어 며칠 만에 다시 또 텔레비전으로 인사 드리게 됐습니다. 시인 문태준 님이 저와 함께 오월의 이미지를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그저 나무에 드러나는 오월의 이미지를 이야기할 뿐이었지만, 문태준 님이 이야기하는 오월의 이야기는 참으로 상큼했습니다. 저는 오늘 밤에 수첩을 들고 문태준 님의 이야기를 새겨 들을 겁니다. 우리 독자 여러분들과도 함께 나누고 싶은 이야기들입니다.
오월 들어서면서 두 번에 걸친 텔레비전 출연과 무관하게 저는 거의 보름 넘게 적잖은 고난을 겪고 있습니다. '고난'이라는 표현이 썩 어울리지 않긴 하지만, 달리 표현할 길이 없는 편치 않은 일들을 연이어 겪고 있는 중이랍니다. 컴퓨터의 데이타를 저장하는 하드디스크가 두 번씩이나 망가졌어요. 보름 쯤 전에 프로그램의 로딩 속도가 떨어져 하드디스크를 초기화했는데, 이 과정에서 저로서는 무척 큰 일을 당했습니다. 새로 이용한 데이타 백업 프로그램을 잘 이해하지 못한 탓에 무척 많은 양의 자료를 한꺼번에 잃었습니다.
무척 많은 양이라고 했지만, 실은 2010년 한햇 동안의 자료 외의 모든 자료를 한꺼번에 잃은 겁니다. 다행한 것은 그나마 DVD에 따로 저장해둔 사진만 온전히 보관했다는 겁니다. 그러나 제가 처음 컴퓨터를 쓰던 25년 전부터 지금까지 챙겨두었던 자료는 모두 잃은 겁니다. 사태를 알게 된 제 친구는 이 참에 버릴 것 버리고 꼭 필요한 것만으로 새로 시작하라고 충고를 했지만, 그런 고마운 이야기는 귀에 들어오지 않고, 잃어버린 자료들에 대한 생각만 무시로 떠올랐습니다. 복구 전문회사에 알거지가 된 하드디스크를 맡기긴 했지만, 열흘 넘도록 아직 결과를 장담 못한다고만 하네요.
당장에 해야 할 일들을 미룰 수 없어, 다시 또 하드디스크를 하나 새로 구입해서, 컴퓨터를 정상 가동시켰습니다. 그렇게 한 일 주일 정도 잘 썼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데이타 복구 회사에서조차 복구 불가능 쪽으로 방향을 잡자, 차츰 마음을 가다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려 했지요. 겨우 남은 몇 안 되는 데이타를 새 하드디스크에 옮겨서 썼지요. 그런데 바로 엊그제 토요일 아침에 다시 또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번에는 하드디스크를 아예 인식하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결국 지난 주말 내내 일 주일 쯤 걸쳐 준비했던 원고들을 처음부터 다시 써야 했습니다.
이야기를 하자니, 한숨부터 나오네요. 한꺼번에 워낙 많은 자료를 잃어서, 도대체 잃은 게 뭔지조차 생각 나지 않을 만큼 정신이 멍합니다. 당장은 그 많은 자료들의 실체를 짚어낼 수 없지만 아마도 꼭 필요한 자료를 찾을 때 되어서야 잃어버린 걸 알게 되겠지요. 몇 가지 분명하게 떠오르는 자료를 빼놓고는 어떤 게 요긴하고, 어떤 걸 버려야 하는 지 도무지 감이 오지 않습니다. 그렇다 해도 지난 20여 년에 걸쳐 모아두었던 일기와 편지, 자잘한 단상과 메모들, 강의 자료 등을 생각하면, 마치 저의 일부가 떨어져나간 듯해서 참 답답한 지경입니다. 오늘 편지는 이렇게 답답한 이야기부터 올리게 되네요.
그래도 꽃은 피고, 봄은 이렇게 지나가겠지요. 이제 다시 우리 천리포수목원의 식물 이야기로 돌아가야 하겠습니다. 맨 위의 사진은 우리 수목원에서 봄이면 눈에 잘 뜨이는 상큼한 풀꽃, 레우코줌(Leucojum)입니다. 하얀 꽃잎이 1센티미터 조금 넘는 크기로 피어나는 레우코줌은 꽃잎 끝에 초록색 반점이 있어서 얼핏 보면 이른 봄에 보여드렸던 설강화(Galanthus)와 혼동하기 쉽습니다. 둘 다 백합과에 속하는 식물이긴 하지만, 설강화와 레우코줌은 속(屬)이 서로 다릅니다. 설강화 꽃이 거의 떨어질 무렵에 꽃을 피우는 레우코줌은 꽃송이도 훨씬 크고, 키도 훨씬 크기 때문에 구별이 어렵지 않습니다.
둘째 셋째에 이어지는 두 장의 사진은 요즘 길가에 한창인 조팝나무 종류의 식물입니다. 하얀 꽃송이가 모여 피어나는 가운데에 노란 꽃술이 다닥다닥 붙어있어서 마치 좁쌀을 ??어 지은 조밥처럼 보이는 꽃입니다. 조팝나무라는 이름은 그래서 붙은 겁니다. 같은 모양의 꽃을 피우는 조팝나무에는 종류가 여럿 있습니다. 조팝나무(Spiraea prunifolia for. simpliciflora)와 참조팝나무(Spiraea fritschiana)를 비롯해 산조팝나무(Spiraea blumei), 긴잎조팝나무(Spiraea media) 등 우리 식물도감에 조팝나무라는 이름으로 오른 식물도 열 다섯 가지나 됩니다.
위의 사진은 가는잎조팝나무(Spiraea thunbergii)입니다. 가는잎조팝나무는 수목원의 옛 정문 옆 게스트하우스인 측백나무집 옆에 울타리처럼 이어진 나무들 사이에서 피어났습니다. 수목원을 걷다 보면 꽃송이 가운데 노란 점을 가진 하얀 꽃이 우우우 피어난 조팝나무를 여럿 볼 수 있습니다. 그 중에 꽃의 모양은 다른 조팝나무들과 비슷하지만, 붉은 색의 꽃을 피우는 조팝나무도 있습니다. 꼬리조팝나무(Spiraea salicifolia)와 일본조팝나무(Spiraea japonica)가 그들인데, 대개 오월 말에서 유월 초에 꽃을 피우지요.
그 다음 두 장의 사진은 마가목(Sorbus commixta)의 잎사귀입니다. 앞에 오월의 따가운 햇살을 받으며 세상의 어떤 생명체보다 분주해졌다고 이야기한 잎사귀입니다. 새로 나는 잎이 말의 이빨만큼 뾰족하고 단단하다고 해서 처음에는 '마아목(馬牙木)'이라고 불렀다는 나무입니다. '마아목'이 나중에 부르기 쉽도록 마가목으로 바뀐 것이지요. 사진에서 마가목의 잎 가장자리에 톱니가 날카롭게 발달한 걸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마가목의 가지에는 아홉 장에서 열 세 장의 날카로운 잎이 깃털 모양으로 모여 돋아나는데, 이런 형태를 식물학에서는 깃꼴겹잎이라고 합니다.
살짝 접혀서 나는 마가목의 잎은 규칙적이되, 풍성하게 돋아나서 시원스러운 느낌을 줍니다. 그러나 마가목은 잎 뿐 아니라, 꽃이나 단풍 모두 좋습니다. 오월 말부터 가지 끝에서 피어나는 꽃은 하얀 색인데, 하나하나의 꽃송이는 지름이 1센티미터도 안 될 만큼 작지만, 여러 송이가 뭉쳐서 피어나기 때문에 참 화려하지요. 넷째 사진의 가지 끝에는 꽃송이가 올라온 것이 살짝 보입니다. 이 꽃이 떨어지면 가을에 모든 잎사귀를 떨군 뒤, 빨간 열매를 맺게 되는데, 그게 참으로 장관입니다. 큰 키로 자란 나무 가지 끝에 맺힌 빨간 열매는 참으로 매혹적입니다.
마가목을 좋아하는 많은 분들 중에는 꽃보다 잎을 더 좋아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옛 사람들이 잎의 특징에 기대어 나무의 이름을 붙인 것도 아마 이 나무의 가장 특징적인 아름다움이 나뭇잎에 있기 때문이지 싶습니다. 마가목은 처음 나는 잎이나 한창 무성한 초록의 싱그러운 잎도 보기 좋지만, 정말 환상적인 것은 가을 단풍입니다. 빨간 열매가 아직 다 익기 전에 마가목은 모든 잎을 빨갛게 물들입니다. 단풍나무 외에는 아마도 화살나무와 마가목의 붉은 단풍을 따를 나무가 없을 듯합니다.
여섯째 일곱째 사진은 만병초(Rhododendron brachyhcarpum) 종류의 식물입니다. 높은 산에서 잘 자라는 만병초는 만병을 고쳐주는 영험함을 가졌다고 전해지는 귀한 나무입니다. 이름처럼 한방에서 약재로 쓰는 식물이기도 하지요. 진달래과에 속하는 만병초는 진달래와 달리 상록성 식물입니다. 꽃은 진달래나 철쭉과 비슷하게 피어나지만, 철쭉보다 많은 꽃송이가 한데 모여서 나기 때문에 화려함은 철쭉을 훨씬 넘어섭니다. 그런 까닭에 조경수로 많이 심어 키우는 나무이지요.
만병초는 대개 진달래와 비슷한 색깔의 꽃을 피우는데, 종류에 따라서 꽃의 빛깔에 차이가 있습니다. 노랑 꽃을 피우는 건 노랑만병초(Rhododendron aureum)라 하고, 짙은 홍색으로 피어나는 만병초는 홍만병초(Rhododendron brachycarpum var. roseum)라고 부릅니다. 색깔은 서로 달라도 모두가 큼지막한 여러 개의 꽃송이가 뭉쳐서 피어나는 것은 모두 똑같습니다. 그래서 이 즈음에 볼 수 있는 어느 꽃보다 더 화려한 꽃이 바로 만병초의 꽃입니다.
맨 끝의 사진은 앵초 종류의 식물, Primula vulgaris subsp. sibthorpii 의 꽃입니다. 앵초 이야기는 지난 해에 이 편지를 통해 전해드렸던 글을 아래에 링크해 두겠습니다. 참고로 살펴보세요. 앵초 이야기 다시 보기 <==홈페이지에 로그인하신 뒤에 위의 링크를 클릭하시면 앵초에 관한 글을 보실 수 있습니다.
오늘 나무 편지는 여기서 줄이고, 오늘 밤 텔레비전 '낭독의 발견'에서 '오월의 이야기'로 다시 인사 올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고규홍(gohkh@solsup.com)
첫댓글 풋풋한 이파리 냄새와 꽃향기가 우리 집 안방까지 퍼져오는 것 같습니다.
기회가 생기면 천리포수목원에 꼭 한번 가 보세요. 정말 좋은 곳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