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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
산 길을 마음에 놓아 산 사람되라
아침이면 아잔 박은 선교쎈타를 걸어서 돌았다.
운동 삼아 또 꿈을 보기 위하여, 또 기도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것이 그에게는 무한한 위로였다.
선교쎈타는 크게 세 곳이었다.
어린이들이 살면서 교육을 받는 루암밑 교육쎈타.
루암밑 교육쎈타 이후에 똑같은 목적으로 세워진 후이무앙 교육쎈타.
그리고, 청소년과 청년들이 지도자의 꿈과 사명, 그리고 능력을 훈련받는 메아이 선교쎈타였다.
루암밑 교육쎈타는 2000평의 대지 위에 네 개의 작지 않은 건물이 세워져 있다. 나무도 많아서 보기만으로도 풍요롭고 행복하다. 그곳은 구십여명의 어린이들이 먹고 자며 태국학교를 다니며 공부하고 있다. 할레하까 예(라후어/행복의 집)라고 이름을 붙였다.
이곳에 있는 아이들은 부모를 떠나 있다. 그러니 행복만 있는 곳은 결코 아니다. 부모를 떠나 있다는 것이 어린아이들에게는 힘든 일이 아닐 수 없다.
짜혜마을 나혜는 매일 밤 마약쟁이 엄마가 보고 싶다고 울다가 결국 밤에 강을 건너 집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러나 대체로 아이들은 세끼 배불리 밥을 먹는 것이 좋았다. 교육쎈타 앞에서 축구를 하는 것도 너무 좋았다. 여자 아이들은 나무그늘,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소꿉놀이를 했다. 그 재미에 엄마 생각을 잊곤 했다.
어째든, 루암밑 교육쎈타는 라후니 사람들에게 행복을 만들기 위하여 존재하고 있다. 그 행복은 아직은 희망뿐인 미래의 행복이지만....
후이무앙 교육쎈타는 루암밑 교육쎈타가 자리를 잡고 안정이 되자 자신감을 갖고 확장한 곳이다.
암퍼 황 지역에는 어린이를 위한 교육쎈타가 없었다. 그래서 암퍼 황지역에 살던 아이들이 곡강 줄기를 타고 먼 길을 내려와 루암밑 교육쎈타에서 머물렀다. 그러나 암퍼 황지역에서 온 아이들은 늘 치앙라이 지역 산에서 내려온 아이들에게 심리적으로 위축이 되곤 하였다. 또 부모들이 루암밑 교육쎈타까지 왕래하는 일도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배삯도 비싸거니와 태국 경찰들의 검문은 늘 두려움이었다.
이런 점을 감안해서 암퍼 황에서 가까운 후이무앙 마을에 두 번째 교육쎈타를 지은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도 구십명 또는 백명의 아이들이 숙식을 하며 학교를 다닐 수 있도록 하였다.
대지도 루암밑 쎈타만큼이나 컸다. 대신 건물은 큰 건물 한 동으로 지었다. 건물이 큰 건물 한 동으로 지어진 것은 여러 가지 이유 중에서도 건축 비용이 한꺼번에 헌납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때는 그 만큼 교육쎈타의 중요성이 인식되었고 선교사역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큰 돈이 한꺼번에 헌납되기도 한 것이다. 또한 선교헌금이라는 것이 순수한 마음에서 드려지기는 하지만 역시 사람들이 드리는 헌금이므로 헌금을 한 사람들에게도 그럴듯한 만족감을 주어야 하는 사업적인 요소가 고려되었기 때문이었다.
매아이에 자리한 선교쎈타는 아쟌 박의 야심작품이었다. 건축면에서도 그랬지만 건축 정신에서 더욱 그랬다. 그는 그의 생명을 메아이 선교쎈타에다 걸었다.
그는 우선 태국 정부가 땅을 무상으로 주겠다는 호의를 거절했다. 선교쎈타가 몇 십 년을 변함없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완전한 자유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비록 가시나무로 꽉 찬 비탈진 황무지이기는 했지만 암퍼 황 근교에 있는 일 만 평의 땅을 구입하여 태국교회연합교단에 등재를 했다. 완전한 자유를 확보한 것이다.
땅이 구입 되던 날, 아쟌 박은 그 곳에 제일 먼저 자신의 빈 무덤을 만들었다. 훗날 그곳에 묻혀서 죽으리라는 각오였다.
"주여, 내 이곳에서 죽어, 라후형제들에게 죽어서도 말하는 교훈이 되게 해주소서."
이 기도를 위하여 그는 그 날 가시밭 숲 속에서 밤을 새우며 그의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리고 그곳에 라후부족, 태국과 라오스 미얀마 중국 티벹에 이르기까지 모든 라후부족들을 위하여 일할 사역자 양성과 훈련을 하게 해달라고, 그것을 이루기까지 이곳을 지키게 해달라며 밤을 새워 기도했다.
이슬이 내리고 산새들이 벌레를 먹으려고 하늘로 오르고 그리고 해가 떠올랐다. 그 해는 대지를 40도에 이르도록 달구어 갈 해였다. 그러나 그렇게 뜨거울 해의 시작은 그저 따뜻하기만 했다.
어린 시절 아쟌 박은 배앓이를 자주했다. 당시 한국의 다른 아이들처럼 횃배를 아팠을 것이다. 그 때마다 아버지는 넓은 등판으로 어린 아들을 업고서 작았던 안방을 한번 돌아주었다. 그러면 그 짧은 시가에도 아버지의 사랑이 등판의 따스함으로 가슴까지 전해왔다. 배앓이도 자연스레 없어지고 세상을 살아 갈 용기가 뻗쳐났다. 뻗치는 힘 때문에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데 그것을 참는 것이 힘들 곤 했다.
그 아버지의 등판처럼 햇볕은 참 따뜻했다.
그리고 일 년 후에 이루어질 쎈타 건축을 그의 마음과 머리에 그리며 뛰어난 설계사처럼 그림을 완성해 갔다.
모든 라후형제들을 짊어지고 갈 성전!
그 성전은 기도하는 성전이어야 한다.
기도하는 자는 낮은 곳에 있어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낮아야 하고 사랑해야 할 사람들을 높이기 위하여 낮아야 한다. 성전은 낮게 지어져야 한다.
한국 교회당들은 말 그대로 모이는 곳이다. 그래서 많이 모이라고 높게 짓는다. 그러나 기도하는 성전은 사람들의 눈에 잘 뜨이도록 짓는 집이 아니다. 웅장함으로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것처럼 행세하는 상업적 건물은 더 더욱 아니다.
낮은 자리에서 더 낮은 자세로 엎드리는 것만이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는 것이며 사랑하도록 부탁 받은 사람들을 섬기는 것이다.
그래서 성전은 납작 낮아야 한다.
모세의 성막도 그러하지 않았던가?
성전이 낮아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산에 사는 라후형제들의 짐이 무겁기 때문이다. 라후형제들의 비참은 무겁고 무겁다. 그 무거운 그들의 짐을 짊어졌는데 무슨 힘이 그렇게 많아 우뚝 서겠는가? 힘이 많더라도 힘에 겨워 쓸러질 만큼까지 짊어져야...그래서 일어 설래야 일어 설 수 없어 낮게 쓰러진 모습이어야 그것이 성전이다.
'무거운 짐을 진 자의 기도하는 모습' 그것이 새겨져야 한다.
그래서 그는 땅을 파서 성전을 지었다.
메아이 선교쎈타의 다른 건물들은 실질적 편의를 주안점으로 지었다. 또 한꺼번에 드는 많은 건축비를 감당 할 수가 없어서 시간을 벌어 하나씩 필요를 채워가며 짓게 되었다. 결국 여덟 개의 큰 건물과 부수적 작은 건물들이 세워지게 되었다.
남자 예비지도자 숙소, 여자 예비지도자 숙소, 여학생 공부실, 남학생 공부실, 식당과 주방, 강의실, 선교사와 사역자들의 숙소, 그리고 성전, 의료진료실, 마약환자 수용실, 태국마을 유아보호실, 그리고 축구장.
모든 시설이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시설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시살들은 서로 조화를 이루게 하였다. 건물은 낫게로 지었지만 설계만큼은 한꺼번에 했기 때문이다.
'모든 건물의 독립성 그리고 조화'
'아름다운 조화 속에 돋보이는 개성'
이것이 메아이 쎈타의 설계정신이었다.
세상을 사랑했던 하나님이 세상을 지을 때 하나 하나를 사랑하고 모든 것을 기뻐한 것은 창조물 하나 하나의 목적과 의미,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의 조화를 만들었기 때문이리라.
오늘의 세상도 그래야 할 텐데...
아쟌 박은 가시나무와 넝쿨로 가득 했던 땅에 흙을 부어 채웠다.붉은 흙이 쏟아져 가시와 넝쿨을 덮으면 그는 예수의 붉은 피섞인 흙이 라후인의 고통을 덮고 억울함도 덮고 열등감도 덮고 그리고 분노도 덮는 것이라며 그 흙을 쓰담었다.
흙이 덮여 쌓여서 평지가 되고 그 면을 드러내자 그는 라후인의 하늘나라 씨앗으로 티크나무 오천그루와 꽃나무를 심었다.
실오라기 같은 묘목들이었다. 아니 줄기의 튼튼함 보다는 희망이 더 큰 묘목들이었다.
오천명의 라후 청소년들이 이곳에서 세상을 놀라게 할 사람들이 되리라.
앞으로 백년을 두고 이곳에서 살게 될 오천명의 라후 청소년들! 그들은 참피언의 피가 흐르는 새끼명마들이다.
모든 말이 자랐다고 참피언 말이 되는 것은 아니다. 참피언의 피가 흘러야 참피언 명마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에게는 참피언의 피를 수혈해야 한다.
이곳에서 살게 될 오천명 청소년은 라후니 부족의 육체의 혈관 속에 흐르는 열등과 저주의 피를 제거하고 은혜의 근원이 된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흐르도록 생명이 거듭나는 수혈을 해야 한다.
그 수혈을 위하여 우리는 작은 예수의 십자가가 될 것이다.
묘목을 심는 우리의 가슴노래였다.
모든 인생이 구세주의 삶을 살지는 못한다. 그러나 구세주의 피를 받고 구세주의 붉은 정열로 타오르면 돌덩이도 별이 되듯이 버려지고 짖밟혀지고 가시밭이 되어버린 종족, 라후니 사람들도 은혜의 사람들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아쟌 박은 선교쎈타를 건축하는 삼년동안 편안한 잠자리를 일부러 거절했다. 한국음식을 일부러 거절하고 라후형제들의 음식만을 먹었다. 그것은 기도였다. 다른 사람들이 건축을 위한 헌금을 내도록 감동을 일으키는 눈물이었다.
그리고 쎈타는 튼튼하게 건축됐다.
그러니,
선교쎈타를 걷는 아침이 어찌 평범한 시간이겠는가?
기도요, 결단이요, 비전의 확인이요, 독수리의 힘을 얻는 걸음이요, 이런 인생을 사는 감사일 수 밖에 없었다.
아짠 박은 아침 산책시간은 늘 위로의 시간이라고 말하곤 했다.
선교쎈타는 아잔 박에게 남모르는 아픔이 된다고도 했다. 그것은 선교쎈타 건축으로 인한 수고나 고생, 건강이 나빠짐 이런 것 때문은 아니라고도 했다.
그 아픔은 남은 힘이 한 점 없도록 다 쏟아 부어 선교쎈타를 세웠지만 아직도 더 많이 라후사람들이 버려진 체, 불뱀에 물려 죽듯이 버려지고 있는 것이 그의 아픔이라고 했다.
선교쎈타를 한 바퀴, 아침 공기 마시며 걷노라면 그 아픔에 일말 위로가 하늘에서 내려와 그를 덮어주었다.
썬교쎈타에서 살며 별이 되어가는 아이들, 청소년들, 그리고 청년들! 그들은 아침 이슬 보다 더 깨끗한 영혼들이었다.
그들의 형제, 라후부족을 짊어지고 죽으리라 다짐하는 별들이었다.
그것이 아쟌 박에게 내려오는 하늘의 위로였다.
이렇게 구상되고 지어진 선교쎈타는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감탄사를 내게 하는 웅장한 쎈타였다.
하지만 또 그곳에는 계속 해결해야 할 많은 문제들이 있었다. 특히 큰 문제가 있었는데 그것은 우리 모두가 똑같이 아쟌 박의 가르침을 이해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언어의 문제가 아니었다.
생각 문제였다.
한번은 아쟌 박의 사무실에 동전을 모아두는 깡통을 어느 누가 가져 갔다. 한참 건축 중이어서 한 푼이라도 아껴야하는 시절이었다.
아쟌 박 역시 매일 건축현장에서 막대기 하나라도 주어 모으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적지 않은 돈이 담긴 깡통이, 그것도 사무실 안에서 없어졌다. 외부 사람이 들어 올 수 없는 곳이고 보니 범인이 우리들 중에 있었다.
도둑질이라면 산마을에서 흔히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 가난한 문짝에 자물쇠를 잠근다.
그러나 이곳은 선교쎈타였다. 그리고 아쟌 박의 왕궁과 같은 곳이었다. 아무리 아쟌 박이 친절하고 겸손하고 그 곳 학생들과 잠을 자고 함께 먹어도 사실 그 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의 결정은 아쟌 박이 강력한 권한으로 행할 수 있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아쟌 박의 사무실에서 도난이 발생한 것이다.
돈의 손실도 손실이지만 아쟌 박의 권위가 짓밟힌 사건이었다.
우리 모두는 사실, 그 범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또 누군가가 이미 그 범인의 이름을 아쟌 박에게 알려 주었을 것이다. 아쟌 박도 범인을 알고 있었을 것이었다.
그 날, 아쟌 박은 우리 모두를 불러 모았다.
그리고 의외의 행동을 했다.
우리에게 용서를 빌었다. 우리에게 좋은 가르침을 주지 못해서 여러분 중에 한 사람이 이런 일을 저지른 것이라며 침통하게 말했다. 범인을 찾지 말라고 당부하고 알아도 내게만은 말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자기도 범인을 확인하면 용서하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에 차라리 모르고 있겠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를 잘 가르치지 못한 자신을 용서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다짐하기 위하여 자신을 몽둥이로 때리라고 부탁했다. 머뭇거리는 우리들에게 다시는 우리 공동체에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며 눈물로 부탁했다. 그리고 그는 열여덟대 몽둥이를 받았다. 세게는 아니었지만 몽둥이로 맞으며 그는 한차례 쓰러졌다. 그는 범인이 자기의 죄를 자백하며 깡통을 제자리에 돌려 놓을 뿐만 아니라 이것을 계기로 하여 새사람이 될 것을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지목했던 범인은 버젓이 아쟌 박에게 매질을 했고 그 후, 하교길에 종종 없어지고 군것질을 했다. 동전깡통은 그가 아는 비밀 장소에 그대로 있었다.
누군가가 아쟌 박에게 이 모든 사실을 말했을 것이지만 아쟌 박은 아무 조치를 취하지도 않았다.
우리는 그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도둑질을 해도 그것은 학생들의 잘못이 아니고 선생의 잘못이라는 말인지....
우리 라후니 사람들은 이런 자를 반드시 색출하여 혹독한 징계를 한다. 그것이 마을 지도자의 권위를 세우는 방법이었다.
또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쎈타 건축이 모두 끝나고 모두가 쎈타를 자랑스러워 하던 때였다. 축구장 공사가 끝나고 운동장에 풀도 적당히 나왔다. 그러니 모두가 한번 뛰어 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마침 산마을에 거주하는 나이 많은 전도인들이 센타에 내려와 있었다. 전도인들도 흥분이 되는지 축구게임을 한 번해 보자고 아쟌에게 졸랐다. 드디어 축구게임이 벌어졌다. 산마을 교회를 섬기는 나이가 30대가 넘은 전도인들과 중고등학교를 다니는 청소년들의 게임이니 결과는 뻔했다. 30이 넘은 전도인들은 축구공을 처음 차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니 게임은 그들이 연출하는 코메디로 이어졌다. 반면 청소년 팀은 펄펄 날았다. 골 스코어는 헤아릴 수도 없었다. 참다 못 한 아쟌 박도 전도인 팀에 끼어들었다. 그러나 한 사람이 열 한 명을 이길 수는 없었다. 전도인들이 실수를 할 때마다 청소년들은 배꼽을 잡고 웃었다. 청소년들은 잔인하도록 많은 골을 넣었다. 그리고는 좋아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며 골 세레머니를 했다.
그 때 아쟌 박의 얼굴이 정말 벌겋게 달아올랐다.
게임시간이 끝나자 아쟌 박은 소리 소리를 지르며 청소년 선수들을 불러 세웠다. 그리고 그들의 윗도리를 벗겼다. 윗도리를 벗긴 체 땅바닥을 기게 했다. 선착순을 시켰다. 꾀를 부리는 아이들에게는 발로 걷어찼다. 신음소리가 나왔지만 그의 분노는 삭을 줄을 몰랐다. 정말 우리들을 돼지 취급했다. 집으로 돌아 갈 수도 없는 자들을 소유물로 취하고 마음대로 때리는 잔인한 사람이 되었다. 더군다나 길길이 뛰었다.
보다 못한 나이 많은 전도인이 아잔 박을 말렸다.
그 때야 아쟌 박은 우레같은 목소리로 꾸짖었다.
"너흐 어가 마자라? 보시티웨 츠웨 라? 어가 져자레 보시티웨 츠웨 빠떠 처머 떼파타 가웨라? 너흐어코, 처머타 여야웨, 어가 마져웨 쳐타 하빼웨 떼파 져라? 떼치가 마져. 하웨거웨쳐 하사삐웨 너흐어코로 아찌까 마져웨. 하빼웨 마져웨쳐 떼파레 또누또샤 떼파타 카슈요. 또누또샤 카슈슈 야꺼 까이. 하하 까이."
(너희, 힘이 많으냐? 공을 잘 차냐? 힘이 많고 공 잘 차서 어른들을 이겼느냐? 너희들 속에는 어른들을 공경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라도 있느냐? 불쌍한 사람들을 돌보는 마음이 너희에게는 하나도 없다. 사랑이 없는 사람은 짐승과 똑같다. 짐승처럼 기어가라. 빨리 기어라.)
"쳐머 떼파 너희웨 레그뚜 머 떼즈 페어라?"
(꼭 그 나이 많은 사람들이 너희의 장난감이냐?)
아쟌 박의 기세에 눌려 아무도 대꾸를 못했다. 그러나 누구도 그의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전도인들도, 구경꾼들도, 라후사람은 아무도 아쟌박의 가르침을 이해 할 수 없었다.
이기는 것은 좋은 것이며 어째든지 이겨야 살아 남을 것 아닌가? 이긴 것은 자랑이지 그것 때문에 벌을 받아야할 이유는 전혀 없는 것이다.
"............"
우리 모두는 어안이 벙벙했다. 슬펐다.
아쟌 박이 그렇게 했다는데서 더욱 슬펐다.
그러나 아쟌 박도 그날 밤을 홀로 새웠다.
이런 일은 종종 일어났다.
그러나 우리는 아쟌 박의 마음이나 가르침을 이해 할 수 없었다.
이런 문제들을 생각하면 선교쎈타는 존재의 의미가 없었다. 그러나 아쟌 박도 우리도 이러한 모든 문제를 극복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돌이켜 보면 신비로운 일이다.
아쟌 박은 그것을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말한다.
실제적으로 아쟌 박과 관계를 유지하고 센타에 머물도록 한 주요 이유는 우리의 궁핍한 사정이 가장 중요한 이유였다고 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사정은 거의 같았다. 달리 갈 곳이 없었고 센타는 우리 라후니 사람들에게 공부를 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우리는 쎈타를 떠날 것인가 라는 생각을 할 여유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른 중요한 진짜의 이유는 우리가 그를 믿었기 때문이었다.
모든 사건과 일에서 이해와 대화가 단절되어 혼돈이 올 때, 그 혼돈을 극복하게 하는 것은 믿음이다. 그는 외국인 아쟌 박이었고 우리는 라후니 사람들이었지만 서로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그래서 선교쎈타는 오늘까지 우리의 쎈타이고 또 우리들의 자랑이 되었다.
사실, 선교쎈타의 건축은 빠시에게서 시작 됐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나요와 나카의 일을 겪고 난 후, 빠시는 치앙마이 시내에 팔려나온 라후족과 다른 산부족 여자아이들이 생각났다. 모두 아찌보다는 나은 형편이지만 몸을 팔고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빠시는 이일들이 자기의 동생들에게 일어나는 일처럼 여겨졌다.
"아쟈오. 코코 체웨 야에 떼파타 아짜 하사삐 마가어라?"
(아쟌. 산에 사는 아이들을 아짠이 돌봐 줄 수 없습니까?)
그날 아짠 박은 빠시에게 신통한 대답을 못했다.
아이들을 돌보게 될 경우 소요될 돈도 걱정이었고, 또 어린아이들 사이에서 어떤 불미스러운 사고가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점이 걱정되었다.
하지만 신통하게 대답하지 못한 진짜 이유는 라후사람들의 고통을 빠시처럼 느끼지 못한 것이 진짜 이유였다고 해야 할 것이다.
빠시는 아쟌 박이 늘 하던 대로 그 날, 밤을 새워 기도했다.
산마을 수탉들은 도무지 시간을 모른다.
그들은 새벽이 되었으므로 우는 것이 아니다. 새벽이 오라고 운다. 새벽 두시가 되기 전에 벌써 울기 시작한다. 그리고 한 마리가 울면 여기 저기 다른 수탉들도 무조건 울기 시작한다.
라후사람들은 허허 웃으며 잠을 다시 청하지만 외지인들은 날이 새면 저 수탉들을 꼭 잡아 먹어야지 하며 이를 간다. 그러다가 어슬렁 어슬렁 일어나서 대나무 불 옆으로 모여든다.
"저 수탉들이 우리에게 기도를 시키는 구먼"
선교지를 방문하는 사람들의 공통되는 이야기 대목이다.
목을 빼며 기도한 빠시의 목소리는 산마을 수탉과 같았다. 더러끄 여 예에서 자던 식구들은 제대로 잠을 잘 수 없었다. 아쟌 박도 역시 잠을 설쳤다.
"빠시가 나에게 기도를 시키는 구먼."
아쟌 박은 마당에 모닥 불을 피워놓았다.
모닥불은 넘실대며 흔들리면서도 오색의 아름다움을 잃지 않았다. 아쟌 박은 빠시의 마음과 자신의 마음을 많이 생각했다. 무엇이 다른지를....
"아짜오. 예타 으아흐 어또 떼파뚜요. 너 야에 떼파어뽀 짜뚜더뚜떼파타 가삐라오. 마다웨 어치까 떼치 마헤. 떼니코 떼뻐띠 짜웨까 페어. 너 하사삐오. 으아흐 라후야레 즈이마져웨 빠더 떼 마가. 너 떼 페웨요."
(아쟌. 집은 우리가 스스로 짓겠습니다. 당신은 먹을 것만 도와 주십시오. 안 좋은 것들도 괜찮습니다. 하루에 한번만 먹여도 괜찮습니다. 당신이 돌보아 주시기만 해 주십시오. 우리는 아는 것이 없어서 못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할 수 있습니다.)
라후니 성인남자들은 절대로 울지 않는다. 약한 남자는 살아남을 수 없고 사냥도 할 수 없다. 결혼도 할 수 없다. 남자가 약한 것을 보이는 것은 수치 중에 수치다.
그러나 라후니 성인남자가 울지 못하는 이유도 있다.
그것은 사랑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부부간에도 마음의 사랑은 없다. 욕정을 채우는 마음뿐이다. 자녀에게도 베품의 사랑이 없다. 소유를 아끼는 마음뿐이다.
아니다.
사랑을 할 수 없는 세월을 너무 많이 살아서 사랑을 포기 했을 것이다.
그러니 그 마음이 강팍해 지고 울 수 없는 메마른 마음이 되고 만 것이다.
그런데 빠시는 울먹였다. 나오는 눈물을 감추느라 고개를 옆으로 홱 돌렸다. 그 눈물이 아쟌 박의 마음에 뚝하고 떨어졌다.
아쟌 박은 사실 라후사람들의 교육을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라후니 사람들의 무지로 인하여 절망적 생각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가 품은 사랑은 실망으로 가려져서 빛을 발하지 못하고 있었다.
방캄마을을 구경 갔던 한국 방문객이 있었다. 그는 험악한 모습의 사람들과 참담한 마을 정경을 보자 대뜸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이들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며 양식이나 갖다 주고 이대로 살게 하는 것이 현실적인 방법이라며 섣불리 의견을 제시했던 일이 있었다. 그 일로 아쟌 박은 그 방문객과 절교를 할 정도로 심히 다투었다.
그런데 빠시가 라후니 사람들을 교육시켜 달라는 부탁을 할 때는 아쟌 박도 그 한국 방문객의 말이 사실은 맞는 말이라고 마음속으로 긍정하고 있을 때였다.
선교사가 된 것이 잘못된 선택이었다는 후회도 밀려오고 있었다.
태양이 달 그림자에 가려져서 세상에 빛이 사라지는 현상을 일식이라 한다.
인간은 때때로 신의 은총과 사랑을 알면서도 인간의 부패한 본능의 그림자 때문에 그 신의 은총과 사랑의 빛을 상실하고 말 때가 있다.
이것은 은총의 일식현상이다.
그때는 메마른 불평으로 가득하고 꼼짝도 할 수 없지만 그것은 잠시 있는 현상이다. 그 마음의 원인을 알고 제거하면 다시 은총은 사랑을 만들어 삶에 영적 활기를 충만하게 넣어 주는 것이다.
아쟌 박은 역시 외지인에 불과했다.
외지인이 라후부족에게 와서 이만큼이라도 헌신하는 것은 대단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실제 그런 사랑은 허세와 남에게 보이기 위한 외식적인 행사를 행하는 것이 된다. 진실로 라후부족이 껍질을 깨고 나오도록 생명을 줄 수 있는 진실한 사랑이 되지 못 한다.
이런 사랑은 직업적 사랑이다.
이런 직업적 사랑은 사랑을 도구로 사는 사람들에게 나타난다.
목사, 선교사, 자선 사업가, 수도승, 정치인 등등.
피아니스트들은 어린시절 피아노를 좋아했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피아노를 잘 안다. 피아노 연주에서 그들은 탁월하다. 그러나 피아노 치는 것이 직업이 되면 그 때부터 아름다운 음악은 살아가는 수단이 된다. 그러면 진정한, 순수한, 영혼을 감동 시킬 수 있는 연주는 사라지고 만다. 그 때부터 그의 연주는 직업적 연주가 된고 만다.
피아니스트가 음악을 연주하고 영혼을 감동시키기 위해서는 직업적 연주를 극복해야 한다.
선교사가 진정한 선교사가 되기 위해서는 직업적 사랑을 초월해야 한다. 직업적 사랑조차 너무 힘든 일이어서 직업적 사랑만 해도 그가 고상해 보일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에게 보이는 현상일 뿐이다. 그 사랑은 이미 사랑의 생명을 상실한 것이다. 생명을 상실한 사랑은 그 외형 때문에 칭찬은 받아도 사랑의 감동 보다는 사랑의 부작용이 만들어 지는 것을 막지 못한다.
아쟌 박은 아직 외지인이었다.
그의 출신이나 외모가 외지인이라가 보다 그의 삶의 자세가 외지인이었다. 언제든지 떠날 수 있다는 자세가 외지인이라는 증명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큰 희생을 치루는 것 같았지만 진실한 사랑일 수 없었던 것이다.
세상이 창조된 것은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었다.
창조 전의 세상은 무의 세상이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는 세상'이라는 표현만으로는 창조를 이룬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는 배경적 표현이 될 수 없었다. 부족했다. 그래서 성경은 창조 전의 세계를 아무것도 없는 세상이라고 표현하지 않았다.
창조를 방해하는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고 말한다.
거짓 것들, 가짜 사랑들, 있는 것처럼 꾸미는 그러나 실상은 아무것도 없는 것들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것은 어둠과 공허와 혼돈이었다.
아주 적절한 표현이다.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거짓으로 가득 차 있던 세상!
이 거짓으로 가득 찬 우주 공간에 창조의 아름다움을 만든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사랑이었을까?
그 사랑의 능력이 위대한 크기에 있었을까, 아니면 세상이 거짓으로 꽉 찼다 할지라도, 하나님만은 본질이, 항상 변함이 없는 자세가 사랑이시므로, 그 거짓 세상에서도 진실한 사랑을 할 수 있었다는 사랑의 진실함에 있었을까?
어둠과 공허 혼돈이 세상에 꽉 차서 세상은 팽창하고 폭발하고 그것이 다시 융합하고 에너지가 폭발하고 힘이 끝도 없이 뻗쳐 나가는 것처럼 보이고...그러나 실상은 아무 것도 없는 세상!
이런 세상에 창조의 실존들을 만들어, 별이 있어야 할 하늘에 별을 달고, 지구를 만들어 스스로 돌게 하고 그것으로 해가 뜨고 해가 지는 황혼을 만들고, 수 만 가지 꽃들이 그 색을 달리하여 조화의 아름다움을 가르쳐 주고, 사람은 누구나 흉내 내지 못하는 인격을 갖게 하여 존귀함을 갖게 한...
이 신비한 창조는 거짓된 세상을 대항한 힘의 능력이 무한했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힘과 능력으로 대항한 것이라면 거짓된 힘과 거짓된 능력을 이미 인정한 것이 되며 그 창조도 거짓된 것이 될 수 밖에 없는 철학적 오류가 생긴다.
거짓이 무한한 힘을 발휘할 때 그 거짓을 이길 수 있는 것은 또 다른 무한한 힘이 아니라 오직 진실뿐이다.
거짓이 아무리 많은 능력을 발휘한다고 해도 거짓으로는 절대로 이길 수 없는 것! 그것은 진실이다.
깜박이는 반딧불 앞에서 짙은 어둠이 물러가듯이 거짓은 위대함 앞에서가 아니라 진실 앞에서 뒷걸음 쳐 물러가는 것이다.
사랑은 능력이 아니라 진실성에 달려있다.
창조의 신은 사랑을 본능으로 갖고 계신 분이다.
그러므로 그의 사랑은 진실하다.
그 진실 때문에, 그 분의 사랑은 크고 놀라운 능력을 가져야 한다면 큰 능력으로..
그 진실 때문에, 그 분의 모습이 작고 천해야 한다면 베들레헴 마구간에도 태어나시는 것이다.
그 분은 그 진실 때문에, 그가 인간이 되어 십자가에서 죽어야 한다는 스스로 세운 원칙을 따라 인간들에게 수치를 당하고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한 것이다. 그것도 인간처럼 고통과 처절함을 그대로 당하면서...
왜냐하면 진실만이 거짓을 이기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었다.
빠시의 눈물은 진실한 사랑이었다.
크고 놀라운 일을 해야 하지만 가지고 있는 것이 너무 작아서 그의 진심이 더욱 빛나는 그런 사랑이었다. 그의 사랑 안에는 그에게 있는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는 정열이 있었다.
아쟌 박에게는 이런 사랑이 없었다.
그래서 그의 사랑은 어려움 앞에 쉽게 포기하고 할 수 있는 일만 골라서 적당히 행하는 직업적 사랑, 사랑행위였다.
아쟌 박의 마음에 뚝 떨어진 빠시의 눈물은 진실이었다.
진실이 담긴 사랑의 눈물은 모든 직업적 사랑보다 높다.
비록 그 사랑의 눈물이 눈물만으로 실천 될 수 밖에 없는 그래서 그 결과가 하잘 것 없는 결과일지라도 사랑의 눈물은 모든 직업적 사랑 보다 귀하다.
그리고 직업적 사랑의 사람들에게 깨우침을 줄 수 있다. 창조 때처럼....
빠시의 눈물은 아쟌 박의 마음에 거짓을 깨뜨리는 창조를 이루었다. 아쟌 박은 비로소 산마을의 아이들과 자기의 아이들을 동일시 여기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산마을의 아이들을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그의 마음을 흔들었다.
"하나님, 저는 산마을에 있는 하나님의 아이들을 돌보겠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자녀들을 돌보아 주십시오. 산마을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 나의 자녀들을 포기합니다."
사실 아쟌 박의 세 자녀가 학비가 가장 저렴한 선교사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에서 공부를 한다 해도 그 비용이면 산마을 아이들 삼십명은 족히 돌볼 수 있었다.
아쟌 박은 이것을 기도한 것이다.
그 때 아쟌 박의 마음에 들려온 하나님의 음성은 이러했다고 한다.
"헤이 윤식! 너의 자녀들은 나의 자녀들이다. 네가 나 때문에 돌보지 못한다면 내가 돌보마."
이렇게 해서 교육쎈타와 선교쎈타 건축이 시작 된 것이다.
-참고-
아쟌 박의 자녀들은 그 이후 미국에서 초청을 받아 무상으로 교육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학교 교사로써, 또 다른 두 딸은 의대생으로 미래 의사를 꿈꾸고 있다. 많은 학비를 감면 받은 것은 물론, 어려운 공부를 마쳤고, 많은 어려움이 있었기에 더 많이 기도를 하게 되었다는 아름다운 고백을 하고 있다.
아쟌 박은 빠시의 생각처럼 산마을과 같은 대나무 집을 짓고 아이들을 양육할 수 없었다. 빠시는 문명세계를 모르고 아이들을 돌보아야 한다는 마음이 급했기 때문에 대나무 집도 괜찮다고 했지만 막상 아쟌 박이 그 일을 할 때는 그렇게 할 수만은 없었다.
아이들에게 산마을에서 처럼 살게 할 수는 없었다. 제대로 된 집을 지어야 했다. 그 문제는 결코 마음먹는 것처럼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준비된 비용도 전혀 없었지만 그 과제를 가지고 다가가야 할 현대인들이 사는 세상이 그렇게 쉽게 움직여지는 세상이 아니었다. 어째든지 아쟌 박은 건축비 마련을 위하여 한국으로 돌아갔다.
무려 세달 동안 아쟌 박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쟌 박이 돌아오지 않는 세 달은 정말 지루하기만 했다. 아쟌 박의 부인인 아쟌 마가 매일 우리들에게 와서 먹을 것을 공급하고 또 함께 기도하며 아쟌 박의 소식을 알려줬다.
아쟌 마가 전해 주는 말로는 한국선교본부에서 어린이 양육사업을 허락해 주지 않으므로 지원을 받는 것은 고사하고 모금조차 할 수 없게 되었으며 아마도 이 일로 본부 관계자들과 아쟌 박 사이에 심한 다툼까지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면서도 아쟌 박은 돌아오지 않는 것이었다.
빠시와 더러끄 예 사람들은 아쟌 박이 못 돌아오면 그들끼리라도 산마을 아이들을 돌보자는 이야기를 수군거리며 실망되는 마음을 달랬다. 그러나 역시 그것은 의욕뿐이었지 현실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우선 태국 신분이 없는 아이들을 누구 하나라도 태국학교에 입학시킬 수 없었다.
아이들의 부모들에게 동의를 얻어 아이들을 데리고 오는 것도 절대로 불가능했다. 또 먹이고 입힐 수도 없었다. 사실 더러끄 예에서 사는 것도 아쟌 박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했다. 그런 처지에 어떻게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수백명의 아이들을 돌본단 말인가? 어림도 없는 말이었다.
이런 때에 새벽기도회에 나온 아쟌 마가 아쟌 박의 소식을 전해 주었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싼라썬 프라남 컹 프라쟈우. 프러 아쟌 박 짜 그랍반 프릉니 떤 챠오 카. 레오꺼, 야 똑쟈이 나카, 아쟌 짜 탐다이 둘레 댁댁 챠오카오 레오카. 레오꺼, 아쟌 탐다이 꺼쌍 허팍 프아 댁댁 레오 두웨이 카. 프러와 아쟌 랍 응언 퍼디 씽티 꺼쌍 허팍 레오 카. 디챤 츠아 와 프라쟈오 쏭 위아이펀 프악 라우 툭 콘 카."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합니다. 왜냐하면 아쟌 박이 내일 새벽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에 그리고, 놀라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쟌이 어린아이들을 돌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기숙사 교육쎈타도 지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쟌에게 돈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아쟌은 아쟌 마의 간곡한 부탁, 비행기를 타고 오라는 부탁에도 불구하고 기차로 돌아왔다. 아쟌 마는 많은 돈을 가지고 오고 방콕에서 치앙마이는 먼 길이며 위험하니 안전하게 비행기를 타고 오라고 간곡히 부탁했던 것인데 아짠 박은 너무 귀한 돈이므로 한 푼이라도 아껴야 한다며 버스를 타고 온다고 고집을 부렸다고 한다. 그러다가 버스 보다는 조금 더 안전한 기차를 타게 되었다는 것이다.
너무 놀랍고 기쁜 일이었다.
그리고 놀라운 일의 시작이었다.
우리가 기차역에 도착했을 때, 그는 기차역 대합실에 앉아 있었다. 아쟌 박의 몰골은 한국에서 돌아오는 모습이 아니었다.
몹시 지쳐 보였다.
비행기에서, 버스와 기차에서 시달렸으니 그럴만도 했다.
그러나 그 보다도 그는 말라서 돌아왔다.
머리털도 그 사이 너무 많이 길어져서 그의 깔끔함이 사라져 버렸다.
우리는 그의 초라한 몰골에서 라후니 사람의 모습을 보았다.
"아잔오. 너 라후야 페라뿌. 흐자라?"
(아쟌! 당산은 라후사람이 다 되었습니다. 많이 피곤하십니까?)
그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가 환히 웃을 때는 항상 감정을 숨기는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어떼떼라?"
(정말입니까?)
그가 환히 웃었다.
떼치 마흐"
(하나도 피곤하지 않습니다.)
그가 당당하지 않고 연약한 모습을 보이자 연민이 느껴졌다.
그것이 반가웠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걱정도 되었다. 저렇게 약한 모습으로 우리들을 위하여 태국 사람들 속에서 일할 수 있겠는가?
우리의 희망이 된 선교쎈타의 첫 번 건축은 이런 모습으로 시작 되었다.
라후 사람들이 아쟌 박처럼 된 것이 아니었다. 아쟌 박이 라후사람으로 한 발자국 다가서며 시작되었다.
그것이 은총을 진실하게 만드는 사랑이었다.
차가 기차역을 떠나 집으로 향하자 그는 이렇게 노래를 불렀다.
산 길
길이 없는 산길은 비탈위에 놓였네.
동행자의 마음은 내 등에 업혔네.
홀로 가기에도
햇볕이 뜨거운데
사랑한단 마음이 짐이 되었네.
내가 지고 가는 것은
돼지고기 닷근
쓸모없는 비타민 몇 알 뿐인데
이것은 사랑이 아니라는 가시생각 나를 찌르네.
산길이 힘들어 발길이 힘든지
가시생각 찔러서 힘든 발길인지
은총이 있으면
한 점 구름 띄어서 쉴 곳이나 만들지
하늘 파란색까지도 나를 아프게 하네.
산길은
어디라도 길이 되어
나를 부르네.
산마을
산사람
산슬픔
그것이 길이 되어 나를 부르네.
옛 십자가의 주인은
걸어 줄 다리 없고
기어 줄 두 손 묶여 죄인이 되었어도
사랑,
그것 있어
골고다를 그렇게 올랐다는데...
나는
돼지고기 닷근
비타민 몇 알이 그토록 무거워
주저 앉는다.
그래도 산길은 나를 받아 앉혀 두 발을 뻗게한다.
산길이 내 마음에 놓여
저들 사랑하는 산사람
언제 될런지...
(1993년 4월 어느날 / 산 길 / 박윤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