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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체이탈 되어 이상한 곳으로 가지 않나, 7식 영상들이 너무 많이 나타나, 안되겠다 생각하고 알수 있는 사람을 찾아다녔다. 그러다가, 동네 절에서 그 곳 스님 소개로 스승님을 만나 뵙고, 육조단경을 받아 그 다음날 육조스님의 첫 번째 사구게를 보다가 한 생각이 깨져나갔다. 스승님께 전화를 통해 확인을 받았었다. 스승님 뵙기 하루 전에는 유체와 또다른 질감의 어떤 것이 몸에서 이탈해 빠져나가는 체험을 하였고 한 생각 깨진 그날 저녁 척추 꽁지뼈에서 강력한 기운이 두정까지 쭉 올라왔고 심안으로는 지구를 저 하늘 위에서 바라보면서 아름답다는 마음이 들자 지구로 빨려 들어가는 영상을 보았다.
그리고 몇 일 이내에 전생을 보게 되었다. 여러 사람들의 경험담을 읽어 보면, 한 생만 보는 사람이 있고, 여러 생 사람으로 태어난 경우만 보는 사람이 있고 다양하다. 저의 경우는 지구상에서 받은 형상을 다 보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생물체의 진화방향에 따르는 것 같다. 어류에서 날 짐승 다음은 네발 짐승, 사람 순인데, 이것의 역순으로 보여진다. 회광반조이다.
시중의 일부 깨쳤다는 이가 사람에서 동물로는 몸을 받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건 사람 몸 받기 이전을 알지 못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사람으로 생활하다가 어떤 동물의 옷을 입을 조건을 만들면 그 동물 몸을 입을 수 있다. 승가에 들어와 탐욕을 부려 구렁이 몸을 입은 경우를 눈 밝은 이가 보고 알려진 일화가 많이 있다.
동물에서 사람으로 환생한 경우를 하나 알고 있는 게 있다. 제 스승님 절에서 기르던 진도개가 죽어 사람으로 환생한 경우인데, 스승님 꿈에 나타나 고맙다고 감사드리고 누구집에 태어난다고 하여, 그 집에 가서 이름을 지어준 일화가 있다. 분명 전생을 보는 것은 수행자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다. 앞에서 우룡스님의 말씀처럼 7식을 넘는 큰 파도가 전생체험인 것이다. 저는 그 파도를 스승님 은혜로 넘었다.
전생체험이 일반적으로 8식에서 드러난다고 알고 있다. 이건 잘못알고 있는 것이다. 왜 그런가는 계속된 글로 밝히겠다. 전생체험이 나타나고 이후로 식광으로 묘사되는 현상들이 많이 나타난다. 우룡스님의 글을 보면 식광은 8식의 파도다 하는데, 자신은 8식 이전에 식광이 나타났다고 하셨다.
사실 식광으로 묘사된 건 우주등하고는 종류가 다르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방문객님의 표현으로 관념의 숲이 식광과 유사한 것 같다. 그런데 어느날에 척추에서 기운이 두정으로 오르면서 티벳의 금빛 만다라 상이 나타나고 그리고는 그 중앙으로 내가 빨려 들어갔다. 엄청난 소리를 듣으면서.
만다라 경험 얼마 후 척추에 기운이 또 두정으로 상승하면서 나는 뇌안에 존재하면서 앞이마 중앙 최상부 쯤 위치에서 빛이 쏟아져 내려오고 있었다. 빛이 쏟아져 내려오는 걸 보고 있는 관찰자가 바로 나이다. 예수님에 대한 생각이 들자 곧 예수님 상이 나타났다.
융은 원형의 꿈을 꾸고나서 만다라 연구를 시작했고, 원형의 내부로 들어가 좌선하는 요가 행자의 꿈을 보고 해석하기를 이건 영혼 혹은 자아를 상징한다고 해석했다. 융의 꿈은 나의 체험과 같은 의미이지만 꿈의 표현 양식인 상징으로 포장되어 있는 것이다. 이게 자아인 것이다. 요가에서 아트만이라 불리는 것일 것이다.
7식의 활동을 보고 있는 관찰자는 바로 나이다. 관찰자인 나의 존재 있음을 아는 방법은 어떤 것인가. 꿈이 없는 깊은 잠을 자고 있을 때 지금 잠을 자는 자에게는 이세상도 잠자는 자도 멸해 없는 상태이다. 그런데 진짜 없는가 그렇지 않다 존재하고 있다. 마음이 활동하지 않은 상태이다. 꿈이란 마음이 활동하는 것이다. 꿈 속에서 나는 현실처럼 똑 같다. 꿈을 깨고 나야 꿈 인줄 안다. 꿈속에서 벌어지는 일은 내 마음의 작용이다. 나는 그 의미를 알고 있다. 꿈을 깨고 나면 꿈의 언어를 육근에 기초한 의식세계에서 모른다. 모두 육체 때문에 그렇다.
꿈속에서는 마음작용이 육체를 거치지 않는다. 잠에서 깨고 나면 기억을 끄집어 내고 분석 하는 6식, 7식의 역할이라서 육체를 거친다. 육체를 통해 마음이 작용할 때 어떤 변화가 있다는 것이다. 지금 비단금이라는 이름으로 지칭되는 이 사람이 이 육체로 생활한 이생에서 경험한 것은 그대로 저장될 것이다.
죽어 비단금의 몸에서 나라 지칭하는 그 무엇이 시체와 분리되어 저 세상으로 가게 되고 다음 생을 인연 따라 오매 엄마 태속에 10달 있으면서, 새로운 육체와 나라고 지칭하는 그 무엇이 한 생명체를 이룰 것이다. 육체의 형태를 이루면서 나란 놈은 새로운 육체에 맞혀 적응할 것이다. 태아도 하루 종일 잠만자지 않는다. 마음이 활동한다 이말씀이다. 엄마 배를 차기고 하니까. 태아 때의 일도 저장이 된다. 새로운 육체에 맞추어 새판을 짜 놓았으니 나란 놈이 밝지 않으면 깜깜하여 전생의 일을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간혹 전생을 기억하는 애들이 나타나는데 새판을 짤 때 뭔가 달랐거나 , 밝은 이가 새 몸을 받아서 온 것일 것이다. 생이지지라는 말이 있다. 태어나 배우지도 않았는데 안다는 건데 과거에 배운 걸 새 몸 받고도 기억하면 이에 해당되는 말이다.
이렇게 육체에 따라 자아의식이 형성되며 그 위치한 영역이 7식인데, 그 육체활동의 기억이 저장된 위치가 7식이어야 하지 않겠나. 어떤 스님은 8식을 전생 저장 장소라고 하고 나도 얼마전까지도 그렇게 알고 있었다. 사실 유식30송은 올초에 처음 보았는데, 8식은 藏식을 저장식이라 해석해 놓았기 때문이었다. 이 藏은 저장하다, 감추다, 깊게 숨켜두다는 뜻으로 여기서는 감추어져 있는 깊게 숨은 뜻으로 해석함이 옳은 것이다.
異熟一切種은 일체종은 사람,동물 등 모든 것들의 종자, 씨. 이숙은 다르게 익다, 자라나다. 즉 8식은 모든생명체의 종자, 씨이며 생생이 다르게 자라 익어지는식으로 근본식이며, 깊게 숨어 있는 식이다.
우룡스님은 7식의 파도로 전생을 본다 했고 수월스님이 우룡스님의 은사이신 고봉스님과 연결되므로 7식에서 체험된다는 것이 옳은 이야기임이 틀림이 없을 것이다. 유식학파는 요가행파라 하니, 요가의 아트만이 자아의식인 7식임이 맞다고 본다.
마음을 쓸때 유식에서처럼 식으로 전변해서 작용한다. 활동하지 않고 마음자리에 있는 마음이 머물러 있을 때 이게 심체가 된다. 이 심체의 성질이 원성실성이다. 이게 일심이다.
우리같은 중생들은 자신의 지시로 심체에 머물러 있던 마음을 움직인다. 어디로 움직이나 생멸문을 통한다. 생멸문을 통과하여 변신을 한다. 어떻게 변신하나 8식으로 변신하는 것이다. 그래서 중생심의 작용하는 근본식이 야뢰야식이 되는 것이다. 이게 용이다.
부처님은 어떻게 마음을 움직이시나 보자. 부처님의 심체에 머물던 마음은 진여문을 통과해서 움직이게 된다. 중생도 마음자리에 머물러 있는 마음은 부처님의 마음과 다름이 없어 그래서 일심이라 하는 것이고, 중생도 어두움을 걷어 내면 부처님과 다름이 없으니 중생심의 성질을 부처님 마음이 숨어있다 하여 여래장이라 하는 것이다. 8식은 성질이 의타기성이다. 연기에 따라 작용한다.
나의 경험인 뇌 안에서 벌어졌던 경험을 다시 보자. 삼매란 내 마음이 머무는 자리로 들어온 것을 의미한다. 이게 어딘가 하면 뇌안이다. 도가의 서적이나, 삼일신고를 보면 거기서도 뇌안을 말한다.
삼매의 특징은 육근을 통해서 들어오는 촉과 수가 끊어진다는 것이다. 깨어 있지 않으면 삼매에 돌입되는 것을 모른다. 내가 머리안에 있다는 것은 육체와의 연결라인이 모두 끊겨도 내가 머리안에 있다는 걸 안다. 머리에서 쏟아지는 빛을 보게 된다. 이 빛에 반응하여 예수님 생각을 낸다. 이것은 이빛에 반연 수하고(육체에서 오는 것은 촉에서 수로 온다) 식이 작용한 것이다. 생멸문으로 통해 의타기성질의 8식이 처음 작용한다. 8식에서 7식으로 작용한다.
예수님생각 내면 식상(7식임)이다. 그리고 빛이 예수님의 상이 된다. 행이다. 그래서 빛을 보고, 형상화 시킨 것은 8식, 7식이 여전히 사용되고 있지않나. 즉 아직도 8식 내부로 침투하지 못한 상태이다. 즉 이 자리도 진짜 마음자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 자리를 아트만이라 하면 틀린 소리가 된다. 아직도 8식 내부로 침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전생을 7식에서 보는가 8식에서 보는가에 따라 헛소리 하는 사람들이 생긴다. 시중에서 깨쳤다고 설치는 많은 경우에 그래도 조금 맞는 소리 하는 경우가 8식에서 전생을 보고 삼매체험을 해서 떵빈상태를 경험하게 되는 경우인데. 선불교를 마구니라 구업을 짓던 구름카페의 구름씨가 대표적인 경우이다. 그녀의 마음의 여행을 읽어 보면 전생을 여러생 체험 했어요. 이 분은 기공수련을 했는데, 이정도 될 래면 대주천을 알고, 심안도 열려야 하는데, 나와 인터넷상에서 논박할 때, 은근히, 심안도 열려있고, 전생도 알고 있음을 비추더군요. 또 만다라 개념도 알아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해서 진여자성이 공하다는 걸 없다는 무로 알아서 무아를 내가 없다로 단변에 빠진 경우입니다.
모스님의 화엄경 게송으로 푸는 불교와 반야심경을 읽어보면, 이 스님은 공을 설명함에 현대물리학을 동원하고, 마음을 설명할 때 융의 만다라 이야기를 예로 들면서 우주발생 운운하는데, 무아를 내가 없다고 보지만 윤회문제를 보면, 자신의 전생체험을 봤으니 있기 있거든, 그리고 우주등을 체험해서 무기공을 알았으니 무아의 무를 공으로 바꿔 공아로 하자로 또 헛소리를 해요. 그래서 불법이 왜곡되지 않으려면 7식과 8식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8식은 야뢰야식이다. 우주등을 체험한다. 식광과 우주등은 분명히 달라요. 식광은 마음을 내면 상이 변하나, 우주등은 그렇지 않아요. 척추를 따라 큰 기운이 두정으로 올라간다. 그러면서 나는 큰 기운의 움직임에 실려 척추를 따라 하늘 높게 올라간다. 십년가까이 이런 일이 반복됐었다. 점점 올라가는 높이가 높아진다. 우주등 체험을 하고 나면, 정좌하고 있을면 밝고 텅빈 상태에 들어가는데, 공으로 표현되는 상태이다 이전보다 더 높이 올라간 우주등 체험을 하고 나면 텅빈 상태가 미묘하게 체험 이전과 차이가 남을 안다. 그래서 8식에서 경험하는 공체험을 무기공이다 하고 가장 최상위의 무기공을 최일의 공이다 주장했었다. 가장 최상위는 머리에서 기운이 시작되어 두정에서 끝나고, 우주등도 없다. 최상위 무기공에서, 조금 더 깊이 들어간 공을 체험하며, 이보다 더 깊은 공을 또 체험 했다. 그래서 8식, 9식, 10식으로 마디가 공소의 차이가 있음을 체험했다(유식은 불교의 한흐름입니다.유식3성을 분명히 밝혀놓았고, 요가에서 최상위의 무기공을 범아일여라 하였기에 분명히 구분된다. 유식30송은 틀린소리가 없다. 9,10식을 8식으로 다 포함하면 된다). 이렇게 공체험을 해보니 최일의 공이 최상위의 무기공이 아니었다. 반야심경의 공은 최일의 공이다.
이게 아트만이며 참나이다, 마음자리이고 진여자성자리이다. 이걸 알았다고 성불 한게 아니다. 아직도 7,8식이 미세하게 남아 있어. 자재하게 진여자성자리를 쓰지를 못한다. 숙세 업습이 그렇게 무서운 것이다.
제가 점점 많이 알아지매 따라 부처님께 대한 공경은 더해집니다. 벌써 2000여년전에 모든 걸 알고 계셨고 막힘없이 쓰셨던 분이니 어찌 경배드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부처님을 경배합니다.
완전히 밝지 못해 부처님의 불법을 왜곡했을 수 있음을 두려워하고 있사오나
저의 견해를 밝혀야 할 것으로 판단하여 이 글을 올리오니 혜량해 주시옵소서.
삼배합장
첫댓글 소위 전생의 기억을 언급하시는 지나가다님!.... 업보로 구렁이로 태어난다느니 하는 거는 소위 눈밝은 스님들의 착각이거나 신화적인 각색일 확률도 있지않을까요? 좀 순진하신것도 같고...전생언급하면서 저런 종류의 말씀을 하시는 분들의 산냐를 그리 믿지 못하겠습니다. 그건 본인의 해석일 뿐이죠!
지나가다님이 진돗개의 꿈 일화를 말씀하시는데, 그런 종류의 거짓 영적인상을 받을 만한 조건들이 있습니다. 그런 것을 본인들이 다 구분해 낼수가 없을 뿐입니다. 저런식의 뜬구름 잡는 전생담론은 참 위험하죠! 위에서 언급된 지나가다님의 스승님이 누구시지요? 예전에 어떤 글에서 인산김일훈 선생을 아주 높게 평가하시던 기억이(?) 아니었나?
요즘 지나가다님이 활동하시지 않는데요. 그래서 제가 적습니다.
논점등과 관련하여, 특단의 필요성이 없는 한...가급적 스승은 언급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일종의 규칙과 같은 건데요. 우리가 싸움할 때에도, 부모가 거론되면...거으 막장이 되지 않습니까? 당사자 서로를 욕하는 것과 차원이 달라진단 말이죠.
물론 [경]에 입각할 때...체험으로 알려지는 전생에 대한 언급을 하는 경우, 조심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위의 본글은 밑도 끝도 엄이 있게 된 것은 아니구요. 선정의 경계와 관련하여 논쟁 중 등장한 겁니다. 아무래도 전개과정이 생략된 상태에서 글이 올라오니, 지나친 무리수로 보이는 경우도 있게 되죠.
하지만 위의 본글은 체험자끼리 체험과 관련한 논쟁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전생의 기억이 있는 이들끼리 논쟁을 하고 있는 것이죠. 전생 언급도 "나는 전생에 무엇이었다"고 내세우는 등의 행위였던 것은 아닙니다. 그런 과정에서 나온 말들이 아니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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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다님과 저는 무지 싸웠었는데요. 싸우는 사이면서 친했단 말이죠. 어떤 의미에서, 아주 바람직한 법우 관계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나가다님과 같은 법우를 다시 만날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입니다. 저 글이 있고 나서, 지나가다님이 머무르지 않고 나아가 또 다른 체험을 하고...그래서 지금은 논쟁할 일이 거의 없다고 봅니다. 견해가 같지 않음에도 그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