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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가 in 서울 중이다. 아비 스케줄은 이남 장-덕수궁 정도이고
pm7시까지 놀다갈 작정이다. 누가 아바랑 놀아줄래?(11.57)“
봄바람이 꽃바람으로 나서 보스턴백(마스터 바니)에 이어폰-타올-담배를
챙겨 넣고 인 서울을 했어요. 4호선 동대문에서 하차 뚜벅 이로 1k로 쯤
걸었을 것입니다. 동대문 종합상가 주차장에 오토바이가 꽉 찼어요.
보령 약국은 지금도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네요. 40년 전에 후배 태용 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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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취직했다고 가오를 잡았는데 놈은 아침에 고추나 서는지 모르겠네요.
와우, 이건 또 뭔가? 로또1등14번 당첨 된 집이라. 이 정도 줄이면 당첨자도,
복권 집도 대박입니다. 길 건너 광장시장에선 산행 다녀온 선남선녀들이
뒤풀이 작업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날씨 때려죽이게 좋습니다. 파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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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을 지나 금방(a gold digger)골목입니다. 첫 번째 집이 진가 민가 합니다.
넉살좋은 사장이 저를 알아봅니다. 지금 금 시세가 301,000이라네요. 요새는
점집에서 복채를 돈 대신 금으로 받는다고 합디다. ‘당골 네‘들이 한번 내려
오면 3.000만원씩 환전을 해간다는 것 같아요. 골드바5돈(1,510.000)을
주문하고 나와 창경궁 뒤편 벽 쪽으로 올라갔다 내려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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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로 가서 보석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로 가서 보석이 되었다"
문장 멋지지 않나요? 오, 누가 내 향기와 빛깔에 맞는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마약같은 문장에 취해서 누군가도 저처럼 샛길을 찿아 간다고 갔다가
도로 내려왔을지 모릅니다. 물론 혼자 다니는 투어는 상관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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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맘대로 할 수 있으니까요. 예주가 계획보다 1시간 빨리 만날 수 있다고
에스더가 전화를 했어요. 오케이. 티케팅 하는데3.000원을 냈고, 창경궁까지
모두 관람하면 10.000이라고 했지만 시간 상 3.000원을 선택한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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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구꽃 매화꽃 앞에서 인증 샷 할때 자꾸만 동남아 여인들 하고 겹칩니다.
폭 각시마냥 한복을 입고 다니는데 다들 입이 귀에 걸렸어요. 지들이 궁궐
나인쯤 된다고 생각을 하는 건가. 사람들이 많아서 코스를 거꾸로 가려고
현대 쪽 담벼락으로 막 가고 있는데 누가 부릅니다. “누구... 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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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리 가면 안 돼? 난 몰랐어요. 괜찮은 줄 알고 .” "여기는 나오는
곳이에요. 그리고 젊은 사람이 나이 먹은 어른한테 반발하면 못써요. 내
나이가 몇 살인지 아세요? “ 헐. ”몇 살이신데요? “ ”쉰 세 살이라고“ ”오메,
많이도 쳐 드셨네요. “ 공주야! 아빠가 언제 반말했냐? 난 안 한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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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해요. 내 말투가 세긴 해도 난 적으로 규정짓기 전엔 싸우지 않아요.
그 놈과 싸울 생각이 전혀 없었다니까요. 진짜에요. 무슨 이득이 있다고
싸우느냐고요. 나 참 더러워서 내가 이방인도 아니고 내 돈 내고 나와바리
에서 꽃구경 좀 하겠다는데 니미럴 왜 텃새를 부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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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문 비원 쪽에서 표 끊고 줄서서 들어와 우측으로 꺾으면 왼쪽에 인정
전을 확인하고 찬찬히 투어를 하면 됩니다. 팔로우미!
이성계가 조선 설계자 정도전과 함께 태조 3년(1394)에 한양으로 천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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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궁으로 경복궁을 지었지만 제1차 왕자의 난 이후 즉위한 정종은 정종 1년
(1399)에 옛 고려의 수도인 개경으로 수도를 다시 옮깁니다. 그러나 정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태종은 한양으로 재 천도를 결정하지요. 재 천도를 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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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 작업으로 태종은 향교 동에 이궁건설을 명해 태종 4년(1404)에 공사를
시작하여 태종 5년(1405)에 완공합니다. 그 궁이 바로 창덕궁이에요.
한양에 이미 경복궁이 있는데 굳이 새 이궁을 짓는 것은 태종이 경복궁에서
머물기 싫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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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임금들은 이러한 양 궐 체제의 두 궁 사이를 오가며 번갈아가며
거주한 경우가 많았다고 해요. 태종은 창덕궁을 완공하기 직전에 개경을
떠나 한양에 도착하는 그 길로 경복궁이 아닌 창덕궁으로 이어해요.
내가 하면 '이사'고 왕이 어가를 옮겼으니 '이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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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5년에 한양으로 돌아온 이래 태종은 태종 18년(1418)에 아들 세종
에게 양위할 때까지 주로 창덕궁에서 거처했습니다. 태종은 자신이 피바람
을 불러일으킨 곳이라 그런지 경복궁을 기피했어요. 다만, 커다란 국가 중요
행사들은 주로 경복궁의 근정전이나 경회루 등에서 열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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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5년 창건 당시 창덕궁의 규모는 외전 74칸, 내전 118칸 규모였다고 해요.
궁궐의 기본적인 기능들은 일단 다 갖춘 상태였지만, 완공한 이후에도 창덕
궁 증축 공사를 계속 합니다. 태종 12년(1412)에는 정문인 돈화문을 세웠어요.
과거 비원으로 불러진 돈화문 쪽으로 매표소가 있었고 에스더한테 전화가
걸려 왔어요. "강아지! 창덕궁의 또 다른 이름이 뭐다냐?" "몰라, 아빠나 알지
누가 그걸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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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각에 붙어 있는 글씨는 ‘돈화문’이었고 그리 어려운 한자는 아닙니다.
대략10년 전까진 ‘비원’이라고 불렀던 것이 정확히 기억납니다.
창덕궁의 아름다운 풍경 중 하이라이트는 궁 북쪽의 창덕궁 후원인데
'금원(禁苑)', '북원(北苑)' 이라는 명칭 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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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원'은 '아무나 못 들어가는 정원'이라는 의미이고 '북원'은 '궁궐 북쪽의
정원'이라는 뜻인데 한동안 이 정원을 칭했던 이름은 '비밀의 정원'이 바로
'비원'입니다. 비원(Piwon, the Secret garden)은 5대 궁궐 중 유일하게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 돼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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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각에서는 "조선총독부가 조선 궁궐의 격을 낮추고 특히 창덕궁 후원을
낮춰 부르기 위해 비원이라고 명명한 것"이라는 설도 있으나 사료적 근거는
없습니다. 그래도 오래 전부터 정사에 등장하는 명칭이 후원인 만큼 비원
보다는 '창덕궁 후원'이라는 명칭을 쓰는 것이 합당할 것으로 여겨 이름을
정정한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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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대 병원 쪽이나 인사 동 방향에서 차타고 지나다닐 때 자주 보았는데
투어는 두세 번 외국인 가이드로 다녀온 기억이 있습니다. 이방원이가
집권 6년 차에 궁궐을 모두 완공한 후 맨 나중에 창덕궁 후원을 조성했어요.
창덕궁은 처음에 작은 규모로 지은 데다 대부분 주거 및 편전 등 실용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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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한 건물들 위주로 구성했다가 세종에게 양위 한 뒤(1418) 아들의 권위를
세워주기 위해 창덕궁 정전 일대를 개축하는 공사를 단행했다고 합니다.
솔로몬의 성전 건축 때처럼 공사를 하면 백성들이 힘들다는 신하들의 상소가
빗발쳤지만, 태종은 "힘든 일이기에 더더욱 내가 안고 해야겠다."면서 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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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칩니다. 태종과 세종 시대에 많은 공사를 감독했던 '박 자청'이란 인물이
공사 총책을 맡아 공사를 세종이 즉위하고 난 후까지 지속했는데, 이 때
인정전이 5칸으로 규모가 커졌고 정전 일대가 정비되어 비로소 제대로
궁궐다운 모습을 갖추었습니다. 세종이 집권 후반기에 줄곧 경복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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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무르면서 창덕궁의 비중이 줄어드는 듯 했으나, 문종 이후 조선 전기 동안
여러 왕들은 창덕궁을 애용했습니다. 우선 세종 이후 바로 단 종 대에 인정전
및 그 일대를 다시 한 번 증개축 합니다. 또한 세조(수양)는 후원을 크게 확장
하는 공사를 벌이면서 민가 73채를 철거하기도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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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세조 때 창덕궁 후원 규모는 태종 때보다 규모가 3배 더 커집니다.
성종 때는 창덕궁 옆에 있던 수강궁을 개축하여 창경궁이라 명합니다.
왕들이 창덕궁을 애용한 것은 경복궁보다 구조, 입지, 심미안적으로 거주
지로서 더 걸맞아서라는 이야기가 있어요. 두 궁을 다 가보면 건축을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녹음이 있는 창덕궁이 거주에 더 좋아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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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조선시대의 경복궁은 내부에 지금처럼 녹지와 나무가 있지 않았고,
거의 흰색 모래나 돌 판(박석)이 깔려 있었으며 건물도 바글바글하게 모여
있었으니 이는 중국도 마찬가지였는데 명, 청대의 황제들은 예법을 철저히
준수해서 빡빡하게 지어진 자금성을 부담스러워해 많이 머물지 않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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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금성 옆에 위치해 있고 넓은 호수와 정원이 갖추어져 있어 한결 여유로운
'중난 하이'에 많이 머물렀대요. 선조 25년 임진왜란(1592) 초기에 선조가
한성을 떠나 파천하면서 궁을 버리자,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은 모두
불살라졌습니다. 불 지른 놈이 백성인지 왜군인지 알 길이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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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26년에 한성으로 돌아온 선조는 성종의 형이었던 월산대군의 저택을
개수한 정릉 동 행궁에 기거합니다. 전란이 끝난 후 선조는 경복궁을 중건
하는데 너무 많은 비용과 물자가 소모될 것으로 예측되자 경복궁 중건을
포기하고 창덕궁을 먼저 중건하도록 결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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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죽기 3년 전인 선조 38년(1605)부터 창덕궁 중건 공사를 시작합니다.
창덕궁 중건 공사는 광해군 즉위 후인 1609년 광해군 1년(1609)에 마무리
됩니다. 그러나 중건 직후 광해군은 바로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지 않고
보수 공사를 명했으며, 1년 후에 창덕궁을 법 궁으로 선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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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버려져있던 시기, 불 타 폐허가 된 창덕궁과 버려진 후원은 경희궁과
함께 범들이 낮 동안 몸을 은거 하던 장소였다고 합니다. 이에 창덕궁과
경희궁은 곧 재건되었으나 흥선 대원군 집권 이전까지 재건되지 못한 경복
궁은 27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표범들의 서식지로 전락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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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아트센터에 들어가 보았는데 까치 호랑이 작품이 큰 것은 310.000원,
작은 것은 210.000원 정가가 붙어있었고 너무 예뻐 깜빡했으면 살 뻔 했어요.
에예공! 수-랩도 갤러리 전용 홈페이지가 필요할 것 같구나. 인조 원년(1623)
인조반정으로 창덕궁은 인정전을 제외하고 상당부분, 특히 서쪽 궁역이 완전히
불타는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때 창경궁은 비교적 무사했으나 이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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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괄의 난으로 창경궁 역시 내전 구역이 완전히 불타는 큰 피해를 입어요.
인조 치세에 와서 창덕궁 중건 공사는 매우 서서히 진행되어 인조 25년
(1647)에야 공사가 끝납니다. 그 이유는 근본적으로 인조반정의 주요 명분
중 하나가 광해 군이 지나치게 궁궐 공사를 벌여 민생을 파탄에 빠뜨렸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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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 때문입니다. 또 광해 군이 남기고 간 인경궁과 경희궁이 기존의 창덕
궁과 창경궁보다 더 큰 규모였기 때문에 인조는 이들 새 궁전을 이용할 수
있었고 실제로 경희궁에 주로 거처했습니다. 비록 인조반정의 명분 중 하나가
광해군의 궁궐 병이었지만, 재위 초기 창덕궁과 창경궁의 가치와 권위로 인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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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궁전을 복원하는 것 자체에 대해서는 당시에도 큰 이견이 없었다고
해요.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이 점을 언급하며 창덕궁이나 창경
궁의 재건까지는 왕실 이미지 복구를 위한 리 모델링 사업 정도로 인정해
줄 수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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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인조반정을 주도했던 쪽 대신들은 자신들의 반정 명분을 위해서 인경
궁과 경희궁을 다시 헐어낼 것을 주장했고, 다른 대신들은 실리적인 견지에서
애써 지은 인경궁과 경희궁을 사용하고, 창덕궁과 창경궁은 차후에 복구하는
쪽에 무게를 실었어요. 인조가 인경궁을 결코 사용하지 않았다는 주장도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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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사실이 아닙니다. 인경궁 문서에도 나와 있지만 인조는 인조 10년(1632)
에 소성대비(인목왕후)가 연루된 저주사건이 터지기 전까지 신하들 반대를
무릅쓰고 어떻게든 인경궁을 써보자는 입장이었습니다. 인경궁의 처리 및
창덕궁, 창경궁을 중건을 놓고 조정에서도 오랜 정쟁이 있었지만, 인조 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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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1632) 소성대비가 엮인 저주사건이 터진 이후 인조는 인경궁을 헐어
창덕궁과 창경궁을 중건하도록 지시합니다. 이미 지어놓은 궁전을 굳이
헐고 그 자재를 옮겨다 새로 짓는 것도 생각보다 많은 비용과 노력이 드는
일이었기 때문에 다수의 대신들이 그냥 인경궁을 사용할 것을 주장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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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는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어요. 창덕궁과 창경궁을 중건하면서
인경궁은 해체되었고, 남은 전각들도 모두 헐렸습니다. 광해군 이후 창덕
궁은 흥선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까지 조선 후기 내내 정궁 역할을
담당했으며, 조선 후기 대부분 정치적 사건의 배경이 창덕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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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창덕궁은 조선왕조 사상 가장 오랜 기간 왕의 주 거처로 쓰인
궁궐입니다. 그렇기에 조선 사극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궁궐이기도 해요.
고증을 그다지 중시하지 않던 과거에는 경복궁에게 그 입지를 많이
빼앗겼지만 현재는 저부터 창덕궁은 새로운 발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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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 시절에도 대화재로 창덕궁 상당 부분이 다시 한 번 전소됩니다.
불타기 전 창덕궁 건물 대부분은 인조가 인경궁을 헐어다가 중건한 것이
었기 때문에 청기와 건물도 많고 화려했다고 전해지나 순조 때 화재로
청기와 건물은 선정전을 제외하고 전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연병할, 이놈의 나라는 도대체 문화유산을 지키질 못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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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5년(1868)에 흥선 대원군이 경복궁을 (재)중건하면서 창덕궁은 정궁
의 지위를 상실합니다. 그러나 그 후로도 고종과 왕실은 경복궁과 창덕궁을
오가며 거주하는 등 여전히 창덕궁을 중요한 궁으로 인식하고 활용합니다.
고종 21년(1884) '갑신정변' 당시에는 청군의 공격으로 전쟁터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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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1897년(건양 2년)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했던 고종이 환궁한 후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나서 경운궁(덕수궁)을 황궁으로 사용했으나, 1907년
(융희 원년) 순종이 즉위 후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39년 만에 도로
정궁이자 황궁이 됩니다. 단순히 임금이 머문 것만을 기준으로 하면,
1894년(고종 31년) 이후 13년 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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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융희 4년) 경술국치 이후에는 구 대한제국 황실이 창덕궁을 소유하여
거주합니다. 전 황제였던 순종은 이왕으로 강등 당했고, 창덕궁은 순종의 궁호
로도 쓰였습니다. 1912년 일제는 후원 및 인정전 등 창덕궁 주요 전각을 일반
에 공개해요. 1917년의 화재로 내전 일곽이 전소해 조선총독부에서 경복궁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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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각을 옮겨다 재건하기도 했습니다. 의외로 덕수궁(경운궁), 경복궁 못지않게
근대화 시기의 영향을 받았던 궁궐 중 하나입니다. 궐 내부에 덕수궁 석조전
같은 양관이 세워지지 않았을 뿐 서양 문물의 영향이 물들어 있습니다.
주요 전각들의 내부는 서양식 형태이며, 정전인 인정전이나 임금의 집무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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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인 선정전, 생활공간인 희정 당과 대조전 내부에는 전구가 달려 있습니다.
일제가 패망한 후 1947년에는 미군정에서 몰수하여 정부 소유가 됩니다.
그 후 대한민국 정부(문화재청)의 소유가 되었지만, 정부의 배려로 1960년
대 이후 순정 효 황후, 영친 왕, 이방자, 덕혜옹주 등 구황실 일족이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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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각(창덕궁 낙선재)에서 거주합니다. 그러다 1989년 4월에 이방자의
별세를 끝으로 완전히 구 대한제국 황실과의 인연이 끊어졌어요. 그렇게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20세기 후반까지 구 대한제국 황족(순정 효 황후,
영친 왕, 이 방자 여사, 덕혜옹주)들이 거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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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대한제국 멸망 이후에도 오랫동안 구 황족들의 거처 역할을 했습니다.
한양 5대 궁궐 중 창덕궁이 대체적으로 가장 원형의 모습을 가장 잘 보존
하고 있다고 해요. 창덕궁 후원(비원)에 예약 관람 신청을 하여 가봤다면,
가이드가 초반부터 입에 닳도록 하는 말일 것입니다. 이 때문에 조선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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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궁궐로 경복궁이 아닌 창덕궁을 꼽아야 한다는 의견도 심심치 않게
농담 삼아 나오기도 합니다. 경복궁 대부분의 전각들은 길어야 19세기에
새로 지은 것이며, 그나마도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가 대다수를 허물었다가
광복 이후에 여러 차례에 걸쳐서 새로 복원한 것이라 깔끔하다 못해 다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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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위적인 느낌을 자아냅니다. 반면에 창덕궁 전각들은 인정전을 포함한
대부분 이 원형이라서 궁궐 자체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될 수 있었어요.
창덕궁 돈화문에서 조금 더 걸어가면 유네스코 기념비가 나오는데 '창덕궁
Palace' 라고 적혀있어요. 창덕궁 궁. 특히 돈화문(敦化門), 인정전(仁政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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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정전(宣政殿) 등 많은 건물들이 원형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에 사적으로의
가치도 높습니다. 달리 말하면 다른 조선 궁궐들보다 상대적으로 창덕궁의
가치가 높다는 이야기이지요. 실제로 창덕궁 전각들은 무겁다 못해 매우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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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이 한양 5대 고궁 중 대중성이 압도적인 나머지 그 역사성까지 압도할
것 같으나, 이러한 민간 통념과 달리 경복궁의 역사성은 창덕궁보다 훨씬 짧은
편입니다. 창덕궁은 경복궁보다 갑절이나 넘는 시기 동안 왕의 주요 궁궐(편의
상 '정궁') 지위를 유지한데다, 상기했듯이 경복궁은 사실 임진왜란으로 전소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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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 흥선 대원군이 집권하는 275년간은 복구하지도 않았던 궁궐이며, 조선왕조
500년간 경복궁에서 왕이 정사를 보던 시기는 150년 안팎입니다. 즉 경복궁은
조선 초기와 고종 시기에만 궁궐로서의 역할을 수행한 셈이지요. 반면에 창덕
궁은 조선 건국 초부터 그 멸망까지 계속 원형을 보존하며 존재했던 유일한
궁궐입니다. 창덕궁 리스펙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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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도 대중들의 대우는 다소 박한 편입니다. 그 이유인 즉 창덕궁이 경복
궁에 비해 접근성이 한참 못 해요. 실제로 경복궁 인근엔 청와대와 정부서울청사,
세종문화회관, 광화문광장 등 중요 시설과 인접해있는데다가, 지하철역과 바로
연결되어있는데 반해서, 창덕궁은 주요시설과 인접해있지도 않고 안 국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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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걸어가야 합니다. 이런 사실을 아는 궁궐 덕후들 사이에서는 '조선의 궁
맛을 제대로 보려면 경복궁보단 창덕궁 / 창경궁에 가라'는 소리가 있을 정도
입니다. 내가 새로 정정해서 말하는데 궁궐은 창덕궁'이 최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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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시 즘에 수-랩에 패밀리가 모였고 오버 허그와 오버 댄스로 핏줄 의기투합을
단단히 했어요. 에스더가 무대에 올릴 책장26개를 오늘 중으로 만들어야한다
고 했고, 예주가 졸전에 책 팔이 에 열을 올려서 아빠도 책값으로70.000원을
지불했어요. 박 성광의 ‘웅삼이’ 연출에 최 민수 캐스팅이 신의 한수가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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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박으로 이어질지 의문입니다. 아빠가 사온 귤을 까먹고 주문한 커피까지
올킬하고 고기 집으로 고고싱! MB때 유일하게 살아남은 삼각지 고가 밑에
선술집으로 카카오 택시가 우리들을 데려다 주었고 미군 이전철수 전에
이곳 아파트에 살았던 그녀가 잠깐 떠올랐어요. Who is s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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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주가 비염 때문에 술을 마다하는데 속없는 아비가 술 맛이 있으면 안 될
것입니다. 두 잔 마시고 잔을 엎었고 에스더가 대패 살2개를 추가 주문했을
것입니다. 맛은 칼집 낸 고기 집보다 못합니다. 에예공! 사람은 이성적인
존재지만 실상은 감정의 지배를 많이 받는 것도 사실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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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가 희로애락인 줄 내 진즉에 알았지만 만약에 매사 슬픈 일과 열
받는 일만 있다면 비단 저뿐 아니라 철학자 할아비라도 죽을 맛일 것입니다.
그래서 김 혜자 씨가 그랬대잖아. "삶에는 사는 것 외에는 다른 답이 없는
것 같다고" 예주야! 아빠가 40년 신앙의 완성 단계에서 개신교가 유일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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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라고 말하지 못해 미안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학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니? 에예공! 사랑해 사랑해 죽을만큼.
2023.3.30.thu. 사랑하는 아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