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 미 사단장 딘 소장 실종사건
딘소장 포로와 대전 전투
[되돌아보는 6.25 수수께끼] 미국의 수치.. 장군이 포로 되다
미국의 장군이 북한군의 포로가 되는 비극적인 사건의 시작이 대전에서 발생한다.
우리나라 곳곳에는 (만주 포함해서) 우리 조상과 선열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얼룩지지 않은 곳이 없다. 무심코 지나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흔히 먹고 살기 바빠서라지만, 가끔은 우리는 생각해봐야만 한다. 오늘의 우리가 바로 어제의 이런 선조들의 피와 땀과 눈물 위에 서있다는 것을, 그리고 오늘의 우리는 먼 훗날 우리 자손들의 토대요 밑거름이 된다는 것을, 그래서인지. 일찍이 함석헌 선생은 못난 조상이 되지말자고 외치지 않으셨던가.
625 전쟁을 다시 되돌아 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5번째 편은 미국 사단장으로 대전지역 전투에서 실종되었다가 포로로 잡혀간 딘 소장에 관한 이야기를 문창재의 칼럼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중간에 변평섭의 충청역사유람에 실린 내용도 참고했다. 자세한 원문은 한국일보의 되돌아보는 6.23 수수께끼 칼럼이나, 충청투데이의 충청역사유람 글속에 있으니 이를 읽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한강방어선이 무너지자, 국군은 금강방어선을 치고 지원군이 오기를 학수고대한다.
금강방어선마저 계획대로 되지 않고 무너지자 이번에는 낙동강 방어선 즉 최후의 방어선까지 물러나지만,
금강방어선을 지휘하던 미군의 딘 소장이 후퇴중에 실종되었다가 포로가 되는 내용이다.
문창재의 글을 보자.
한강방어선을 뚫기에 또 사흘을 허비한 인민군은 (1950년) 7월 3일 전차를 앞세우고 남진을 시작했다. 한강방어선에 총력을 쏟은 국군은 더 이상 방어할 여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6월 29일 한강방어선을 시찰하고 도쿄로 돌아간 맥아더 장군은 본국에 긴급 병력지원을 요청한다. 그리고 규슈 고쿠라(小倉) 주둔 스미스 부대를 한국전선에 급파한데 이어. 24사단 본대를 파견하면서 그는 말한다. “시급한 것은 6일 간의 시간”을 버는 것이다.
문창재의 글은 이때의 상황을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다급해진 전선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국군은 다 어데로 갔는가? 형편없는 무장, 절대적인 열세의 군사력, 계획된 남침으로 그야말로 칼로 대나무 쪼개듯, 파죽지세로 남하를 시작하는 북한 인민군, 그에 맞서는 국군, 미군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 밖에 없는 한국군,
(*이때의 모습은 마치 임진왜란 때, 평양에서 명나라 지원군을 기다리는 유성룡의 심정이라고나 할까?).
한강방어선이 뚫리자 그 다음은 금강방어선이다.
한강 이남의 수원에서 금강까지는 얼마나 되는가. 200km가 안되는 거리.
도보로 걸어도 완전군장 하루 40km라면 닷새 거리에 불과하다. 경부선 1번 국도를 따라가 보면 그 현장과 자세한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고 볼 수도 있다. 스미스 부대의 전투가 벌어졌던 오산에는 기념관이 있고, 당시의 상황을 잘 정리해놓았다. 인민군의 탱크앞에 속수무책이었던 스미스 대대이야기.
천안 이남의 연기군(현재의 세종시) 개미고개 전투현장이 남아있고, 금강으로 이어지는 곳에는 금병산 줄기의 방어선과 , 공주의 고맛나루 전선 등을 무시할 수가 없다. 대전에 임시 수도를 정했던 정부는 또다시 대구 부산으로 내려갈 수 밖에, 그 와중에 지휘관을 잃는 사건이 발생한다.
딘 소장의 실종사건은 사소한 우연치고는 너무나 큰 사건이었던 것. 문창재의 글로 다시 되돌아가 보자.
인민군 남진을 저지시키라고 항공편으로 보낸 스미스 부대는 7월 5일 오선전투에서 참패했다. 뒤따라온 미24사단 역시 평택-안성저지선, 천안저지선, 금강저지선에서 차례로 밀려 ‘대전 사수’가 급선무가 되었다. 워커 8군사령관은 사단장 윌리엄 딘 소장에게 7월 20일까지 대전을 지키도록 지시했다. 포항에 상륙할 해병1사단을 추풍령 전선에 배치할 시간을 벌어달라는 것이었다.
야크기 지원을 받은 적 제3, 제4사단이 경부축선을 따라 밀물처럼 치고 내려왔다.
교통의 요지인 대전은 옥천 유성 논산 금산 조치원 등 5개 지역으로 분기되는 도로망을 갖고 있어 수비 병력이 분산될 수밖에 없었다. 딘 장군 요청으로 최신형 대전차포가 왔지만 충분하지 않았다. 병력도 턱없이 부족했다.
병력부족에 지리가 어둡고 훈련되지 않은 부대는 지휘관들까지 앞에 나서야 할 상황을 초래했다.
천안전투에서 34연대장 로버트 마틴 대령이 전사하자, 딘 장군은 바주카포를 메고 일선으로 달려갔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유럽에서 용맹을 떨친 이 포병 전문가는 직접 바주카포를 쏘아 적 전차를 파괴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러나 중과부적이었다. 병력을 가득 태운 트럭들이 전차를 앞세우고 대전시내로 들이닥쳤다.
시가지 혼전 중에 그의 사단은 통신장비마저 불통되어 부대 간 연락이 끊겼다. 원래는 지연작전이 19일 밤까지로 예정되었지만, 하루가 연장되었다. 20일 악전고투 끝에 연락병을 투입해 철수명령을 내린 딘 소장은 인접 병력을 모아 50여대의 차량 편으로 철수 길에 나섰다.
바로 이 때 돌이키지 못할 실수가 발생했다.
운전병이 옥천-영동 방향으로 좌회전해야 할 길을 지나쳐 남쪽으로 계속 달린 것이다.
그리고 곧 첫 번째 위기가 닥쳤다. 길가에 매복했던 적의 공격으로 대원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딘은 몇 사람의 대원과 함께 산속으로 피했다. 그 중에 부상병이 포함되었다.
부상병이 심한 갈증을 호소하자 딘은 물을 찾아 계곡 아래로 내려가다 아래로 굴러 떨어져 의식을 잃었다.
기다리다 지친 대원들이 떠나고 나서야 의식을 되찾은 그는 혼자 산야를 헤매었다.
그러다가 역시 혼자가 된 동료를 만나 함께 행동했다. 산짐승이나 다름없는 도피생활이었다. 낮에는 자고 밤에 별자리를 보고 동쪽으로 간다는 게 제자리를 뺑뺑 돈 적도 있었다. 허기를 달래려고 밭에 버려진 날감자를 먹고, 갈증이 나면 빗물을 마셨다. 그게 탈이 되어 심한 이질을 겪기도 했다.
그러다가 천사를 만났다. 전북 무주군 적상면 한 농가에 들어가 배가 고프다는 시늉을 하자, 집주인(박종구)은 음식을 차려주고 정성스레 돌봐주었다. 그 집에서 이틀 밤을 자고 길을 나섰다가 악마를 만났다. 키 작은 중년 남자 둘에게 대구까지 길 안내를 해 주면 100만환(1,000달러 상당)을 주겠다고 제안하자, 그들은 “오케이!”를 연발했다. 그들을 따라가다가 10여명의 청년들과 마주쳤다. 그들은 불문곡직 딘을 결박해 진안군 어느 파출소로 끌고 갔다. 미리 신고를 했던 모양이다.
포로가 된 딘은 전주를 거쳐 대전으로 압송되었다가 평양으로 끌려갔다.
국군의 북진 때는 북한의 임시수도 강계(江界·평북)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그는 포로 신문과정에서 신분을 감추느라 심한 고초를 겪었다. 44시간 잠을 못 자게 하는 고문도 당했다. 90㎏ 가깝던 거구가 58㎏이 되었을 정도였다.
그 통역자는 도쿄유학을 다녀와 김일성대학에서 문학을 강의하던 고 이규현(李揆現·문공부장관 역임)이었다.
그는 국군 북진 때인 1950년 10월 미군부대에 투항해 자유인이 되었다. 언론계(한국일보논설위원·중앙일보편집국장)에 종사하다가 문공부 장관에 발탁되었다.
그에 따르면 딘은 인민군 정치보위부장 방학세의 직접 심문까지 받았지만 끝까지 비밀을 지켰다. 인천상륙작전 비밀을 지키려고 자살을 시도했는데, 그 과정에서 신분이 탄로되었다.
사단장이 실종되자 미군은 바로 그날 구출작전에 나셨다. 미국 역사상 처음인 불명예를 씻으려는 담대한 행동이었다. 33명으로 구성된 결사특공대는 열차편으로 대전역에 돌입했다. 역 가까이 어딘가에 고립되었을 것으로 추정한 것이었는데, 그게 착각이었다.
대전외곽 세천 터널 일대에 배치된 적 매복조의 집중사격을 받아 10여 명이 전사했다. 가까스로 도착한 대전역에서 1시간 가까이 수색전을 펴다가 퇴각 중 또 공격을 당해 대원 20여명과 기관사 김재현이 전사했다. 특공대 전원 사상(33명 전사, 1명 중상)의 참패였다. 사단장 실종, 연대장 전사, 부대전력 40% 망실, 특공대 전원 사상이라는 비참한 기록은 미국 역사상 처음 있는 치욕이었다. 특히 사단장 실종이 뼈아팠다.
미군병사들이 왜 그렇게 허약했는지, 그것도 미스터리의 하나였다.
기자 월프레드 버체트의 인터뷰 기사로 세상에 알려졌다. 그는 북한 당국의 초청으로 평양에 들어가, 어느 이층집에서 딘 장군을 만났다. 딘이 북한 사병과 장기를 두는 사진을 곁들여, “딘 장군은 스위스의 휴양지 같은 곳에서 생활하고 있다”고 보도한 것이다. 북한이 왜 자신을 선택했고, 왜 딘 장군을 노출시켰는지, 그 의도에 눈감고 특종에만 급급했다는 비판이 따랐다.
딘 장군은 1953년 정전 후 포로교환 때 인민군 총좌 이학구(李學九)와의 교환형식으로 풀려났다. 꺼칠한 몰골에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모습으로 귀환한 그는 지나친 ‘영웅대접’을 민망해 했다. “나는 영웅이 아니다. 한 사람의 포로에 불과했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딘 장군의 철수로
그는 한국전선에 3.5인치 대전차포를 처음 들여온 사람이다. “지금 곧 3.5인치 대전차포를 보내달라고 전문을 보내줘. 포트 베닝 기지(조지아 주)에 여분이 있을 테니까. 오늘 2.36인치 포를 쏴봤는데 적 전차가 끄떡도 하지 않아.” 이 부탁을 받은 하우스만의 급전으로 그 전차포가 공수되어 주한미군에 긴급히 배치되었다. 한국군 사단에도 대전차포 중대가 하나씩 배속되어 낙동강 방어전투를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그는 한국과 인연이 깊은 사람이었다. 1947년 제2대 주한 군정장관 겸 주한미군부사령관으로 부임한 그는 제주 4·3 사건 진압 지휘자였다. 1948년 5월 5일 제주에 날아간 그는 진압 대책회의를 주재하다가, 조병옥(趙炳玉) 경무부장과 김익렬(金益烈) 9연대장의 충돌을 정리하고 강경진압으로 방향을 잡았다. 평화적 해결을 주장한 김 중령이 강경책 일변도의 조 부장 멱살을 잡고 흔들어 육탄전이 벌어지자, 헌병을 동원해 그를 끌어냈다.
미군정 시대 그의 강경정책에는 논란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다 접어두고, 6·25 때 그가 수모를 당해가면서 경부축선을 지켜준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전공이다. 그와 그의 사단이 없었으면 낙동강 방어선도 제몫을 못했을 테니까.
-----
미 사단장 딘 소장의 실종 사건은 한편의 영화같은 비극적인 이야기이다.
당사자의 고통은 말할 수 없는 것이기에 더욱 절절한 이야기가 아닌가. 지나가면 다 잊혀버리고 마는 것이 무정한 현실이긴 하지만. 지나가면서 이런 사건을 떠올리는 사람이 얼마나 될 가?
지금도 식장산과 계족산 줄기가 만나는 대전의 동구 판암동 일대는 예전 삼국시대 때 신라와 백제가 창칼을 마주하던 곳이요, 임진왜란 때도 이 부근에서 격전이 벌어졌던 곳, 금산에는 이치전투며, 금산 칠백의총이 있지 않은가. 금강줄기와 산맥이 어우러져 빚어내는 천혜의 요험지, 지금도 철로와 국도와, 고속도로가 한 골짜기로 몰쳐서 지나가는 곳이다. 대전서 추풍령까지의 계곡아닌 계곡사이로. 이러한 지형이니 당연히 옛 산성들이 빼곡하다할 정도로 밀집한 지역임은 말할 필요가 없다.
----
변평섭의 글 충청역사유람 9: “대전에서의 마지막 피난 국회편”에서 이 당시의 상황을 알아보자.
그의 글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6·25 전쟁으로 한강 철교가 끊기기 전 정부 요인들은 서둘러 대부분 대전으로 집결했다
이시영 부통령은 6월 29일 뒤늦게 대전에 도착하여 동아연필 창업자이며 우송대학과 대전상고의 설립자이고 독립운동가였던 김노원 선생집에 짐을 풀었다
지금은 없어진 대전시 동구 성남동에 있던 '성남장'에는 주요 장관들이 방을 차지했고 초대 국무총리를 지냈던 이범석 장군은 같은 정치적 동기였던 주기영씨의 인동 집에 입주하는 등 어수선한 분위기가 계속되었다.
이와 같은 분위기 속에 1950년 7월 1일 충남도청 회의실에서 임시 국회가 소집되었다.
우리 국회가 발행한 '國會史'에 의하면 이날 출석한 국회의원은 재적 191명 중 84명. 신익희 국회의장은 단상으로 올라가 출석 보고를 받고 과반 미달로 회의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에 '간담회' 방식으로 회의를 진행하겠다고 선언한다.
이승만 대통령, 이시형 부통령을 비롯, 행정부에서는 신성모 국방, 백성욱 내무, 임병직 외무, 이우익 법무, 김석관 교통, 장기영 체신 등 11명의 장관들이 참석했고 특별히 무초 주한 미대사도 이례적으로 초청되었다.
그러나 서울을 황급히 떠나 왔기 때문에 국회속기사가 불참한 가운데 개회가 선언됐다. 충남 출신 국회의원으로는 김종회(대덕), 이금종(연기), 김명동(공주을), 박충식(논산갑), 이상철(청양) 의원 등이 참석했다
이상철 의원이 발언을 신청했다. 그는 대통령이 국회에 통고도 없이 서울을 떠난 것과 특히, 예고없이 한강철교를 폭파하여 62명의 국회의원과 서울 시민들이 남으로 내려 보지 못한 것을 따졌다. 의석 여기저기서 정부를 성토하는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와 같은 소란한 회의장을 가라앉힌 것은 무초 미국 대사의 말이었다.
그는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이 속속 부산항에 상륙하고 있으며 맥아더 장군이 한국 수호에 확고한 결의를 가지고 있다고 보고하자 흥분한 회의장은 진정됐고 이승만 대통령도 안도의 얼굴빛을 보였다.
이날 국회간담회에서는 국회 내에 정부와 전시문제를 다룰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하기로 결의했다. 위원으로는 서민호, 김종회, 지청천, 황수성, 김용우 이용제 의원을 선출 했다. 가까스로 국회분위기를 진정 시켰지만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국회의 불만은 계속되었다. 심지어 신익희 국회의장과 조봉암 부의장 등은 충남도지사 관사를 임시 경무대로 사용하고 있는 이승만 대통령을 찾아가 대국민 사과를 요구하기도 했다. 그렇게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상황은 불안했다.
행정부에서도 이시형 부통령이 대통령에 대한 불만이 팽배했다.
물론 부통령인 자신까지도 속이고 서울을 떠난 것이 가장 큰 요인 이었다. 결국 이시영 부통령은 부산 피난정부시절 '거창 양민학살' 사건을 문제 삼아 1951년 '국민에게 고함' 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부통령직을 사임해 버렸다.
지금은 고인이 된 충남 청양출신이며 민주당 장면총리 때 내무장관까지 역임했던 이상철 옹은 생전에 필자(*변평섭)에게 이런 말을 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충남도청 복도를 힘없이 걸어가던 모습이 눈에 선해요, 옆에 있는 무초대사에게 즉각적이고 대대적인 미군 지원을 간절하게 호소하는 거였죠."
(*변평섭은 <전 세종시 정무부시장·충남역사문화원장을 역임했다>)
------------------------
딘 소장 운전병의 순간적 판단 실수가 엄청난 어려움으로 이르게 된 것은 그냥 단순한 우연의 일인가?
역사는 이렇게 사소한 데에서 방향을 틀어버린다. 운명이라고나 할까.
옥천과 금산으로 갈라지는 원동 삼거리 갈림길에서 다시 한 번 지난 날을 생각해본다.
(2020. 9. 8. 자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