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의 실마리, 완서.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박완서 에세이
오래전 궁금해서 찾아 본 박완서님의 필명은 글의 실마리였다. 글의 완성일거라 생각했더랬는데 완전히 빗나가고 말았었다. 본명은 음은 같으나 뜻이 다른 한자로 할아버지와 아버지께서 머리를 맞대고 지어주신거란다. 남녀불평등이 존재할법한 시절에 태어나셨지만 할아버지 아버지에게서 사랑을 듬뿍받은 듯하다.
1931년 태어나 1970년 불혹의 나이로 문단에 데뷔, 2011년 타계하기까지 쉼없이 작품활동을 하신 분, 박완서님. 집필을 멈춘지 10년이나 지나버렸다.
어느 겸손한 재단의 송라이터교실에 참여한 인연으로 그곳에서 운영하는 책방의 신규도서목록을 이메일로 받게 됐다. 도서목록을 훑어 내려가던 중 나의 동공을 확장시키는 제목이 있었으니 - 오클랜드 도서관에 구매신청하려던 나의 목록에 있었던지라 눈동자가 커질 수 밖에 - 그게 바로 이 책이었다. 처음엔 도서대여가 가능한 줄 알고 문의드렸더니 비영리책방이라고 하셔서 구입의사를 밝혔다. 그리고 구매하러 가는 길에 송라이터 선생님의 어쿠스틱 공연도 함께 할 수 있어서 꿩먹고 알먹고 누이 좋고 매부 좋고 그야말로 에헤라디야였다.
역시나 작가가 된 박완서님의 따님 호원숙님이 늦은 가을 아치울에서 프롤로그를 열었다. 어머니를 바라보는 딸의 입장에서 혹은 선배작가를 대하는 후배작가로서 그렇게 말문을 연 것이다.
박완서님이 남긴 "660여편의 산문 중 가장 글맛나는 대표작 35가지를 골라" 작가님의 10주기를 기리기 위해 2020년 12월에 출판돼 2021년 2월에 초판 4쇄를 기록했다.
박완서님이라면 어릴 적 보았던 드라마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가 떠오른다. 그땐 정말 어렸을 적이라 뭔지도 모르고 연속극이라 봤던 기억밖엔 없다. 그런 인연으로 오클랜드 도서관에 데뷔작인 '나목'이 있길래 6여년 전에 빌려보았었다, 제목 뜻도 제대로 모른채. 이 나목과 관련해, 이번 베스트 에세이집을 보면서 재밌는 사실을 알게 됐다. 박완서님의 마흔어느 봄날에 동네 단골 미장원엘 갔는데 그때 손님 접대용으로 비치된 잡지 여성동아를 보았고 거기서 여류장편소설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고 응모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단다. 평소 문학집을 구독해 보는 독자였지만 그곳에서의 문학모집엔 흥미가 없었다가 여성동아는 왠지 끌리셨다고. 그렇게 시작되어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밤에 이불을 뒤집어 쓰고(?) 3개월 가량 써내려 간 1200장 정도의 원고 '나목'을 탈고한 게 1970년 7월 14일, 마감 하루전이었다. 9월 초순 1등 당선을 통보 받고 무엇보다 어렸던 자제들이 이제 엄마 직업란에 작가라 쓸 수 있어 무지 기뻐했고 바닥에 엎드려 글쓰는 부인에게 밤에 뭐하는거냐고 혀를 차던 남편 또한 서재를 마련해 줘야겠다며 태도 변화를 보였노라고 회상했다. 그 때 "글을 하나 써내는 것도 자식을 하나 낳아 놓는 것 만큼 책임이 무거운 큰일이라는 걸 뼈저리게 느꼈"고 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골몰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고.
박완서님에게 글쓰기란 "순전히 중년으로 접어든 여자의 일종의 허기증"에서 출발하였던 것이었지만 "자랑할거라곤 지금도 습작기처럼 열심히 하라는 것밖에 없다. 잡문 하나를 쓰더라도, 허튼 소리 안하길, 정직하길, 조그만 진실이라도,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진실을 말하길 매질하듯 다짐하며 쓰고 있지만 열심히 하라는 것만으로 재능 부족을 은폐하지는 못할 것 같다"고 여기며 "작가가 될까 말까의 고민"을 많이 한 듯 하다.
"나의 어렸을 적 어머니는 참으로 뛰어난 이야기꾼"이라며 "무작정 상경한 삼모자녀가 차린 최초의 서울 살림은 필시 곤궁하고 을씨년스러운 것이었을텐데도 지극히 행복하고 충만한 시절로 회상"했다. 산을 두어번이나 넘어 가야 하는 학교로 보내는 높은 교육열을 지닌 독하신 어머니셨지만 재미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헤쳐주시던 살가운 어머니이기도 하셨나보다. 그런 어머니를 닮고 싶어 어머니가 가장 자주 하던 말인 '넉넉하다'가 제일 좋아하는 말이 됐단다. 살림이 분명 궁핍함에도 우리는 넉넉하니 먹고 가라 자고 가라 그렇게 인심을 쓰셨다니 자라면서 어머니에게서 보고 배운 것이 많았을 듯 싶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 지척의 고향의 땅을 못가게 막는 보이지 않는 힘에 대해 남북가리지 않고 들입다 악담을 퍼부었"건만 끝내 밟아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이것은 박완서님도 마찬가지였다. 꿈에서도 늘 그리던 그 고향. 자신의 글쓰기 원천이었다던 그 고향을 "아무의 환영도, 주목도 받지 않고 초라하지도 유난스럽지도 않게 표표히 동구밖을 들어서고 싶다"며 계절은 어느 계절이어도 상관없지만 일몰 무렵이었으면 참 좋겠다"고 했건만 끝내 그 소망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이렇게 나지막히 읊조리면서..
"내 둘레에서 소리없이 일어나는 계절의 변화, 내 창이 허락해주는 한 조각의 하늘, 한 폭의 저녁놀, 먼 산빛, 이런 것들을 순수한 기쁨으로 바라보며 영혼 깊숙이 새겨두고 싶다. 그리고 남편을 사랑하고 싶다. 가족들의 생활비를 벌어 오는 사람으로서도 아니고, 아이들의 아버지로서도 아니고, 그냥 남자로서 사랑하고 싶다. 태초의 남녀같은 사랑을 나누고 싶다."
하늘나라에 가시면 먼저 보내신 남편분도 아드님도 어머니도 모두 다시 만나, 박완서님이 하고 싶었던 걸 하셨으면 좋겠다.
1931. 10. 20 ~ 2011. 1. 22
박완서님의 글들은 이 숫자와 상관없이 영원할 것입니다.
♡ 낮은마음의 모든 관계자 분들에게 고마움과 존경을 표하며 ♡
1년에 52권 열일곱번째 읽은책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2021년 5월 7일 쇠요일에
첫댓글 글이 점점 따뜻하게 느껴집니다.
브라운스베이 시니어홀 한인 서가에 박여사
책이 열 권 정도 돼요. 작가 중에서 제일 많은 저서, 접근하기 쉬운 수수한 글이어서 그럴까요.
박완서님은 작가 초기 시절 원고료도 야박한데다 요즘같이 문예지도 많지 않아 넉넉한 삶을 사신 건 아니어서 대기업의 사보란에 콩트도 연재하셨다나봐요. 그치만 개인적으로 지닌 작가의 소명과 맞지 않아 많은 고민 끝에 그걸 끊어내셨다고 해요.
그리곤 사람 냄새나는 단편 등 많은 글들을 쓰셨는데, 첫 작품이 여류장편소설공모전 당선작이라 그런지 여인들의 맘을 흔들어 놓는 솜씨가 있으셔요. 그래서 따뜻하고 인기도 있나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