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 나의 보물 1호
올해 55주년 결혼기념일에 맞춰 남해 여행을 계획했다.
그러나 갑자기 폭설 수준의 습설이 내렸다. 여행하기에는 최악의 날씨다.
여행 대신 자축하는 의미로 집에서 가장 가까운 고수재 <도담원>으로 점심 먹으러 갔다.
풍광 좋고 분위기는 카페 같고, 음식도 깔끔하고 맛있다.
특히 여사장님이 친절하다. 다시 오고 싶은 맛집이다.
돼지갈비와 냉면으로 점심을 먹고, 카페에 가서 차 한잔하자는 남편 말을 물리쳤다.
도로 사정이 워낙 나빠서 집으로 왔다.
결혼 55주년을 맞고 보니, 혼수 장만 할 때 얼렁뚱땅 했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생각난다.
엄마가 결혼 전에 돌아가셔서 아버지와 혼수를 장만 했지만 그때는 혼수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냥 둘이 결혼하게 만 해준다면 감지덕지할 때 였다.
그래도 돌아가신 엄마는 대단한 분이셨다. 편찮으신 와중에 아버지를 통해
내가 국민학교 때부터 혼수를 준비하셨다.
목화 솜, 양단 이불부터 명주, 모시, 광목, 옥양목, 삼베, 무명 이런 것들을 한필씩 준비해놓으셨다.
옷감으로는 호박단, 나이야가라, 비로드, 지지미, 양단 새로 나오는 옷감을 하나씩 마련하셨다.
금반지와 쌍가락지까지 해두셨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무것도 모르셨다.
당시 인견공장을 하시며 돈이 장롱 서랍에 몇 다발씩 있었는데 말이다.
우리 집에서 약혼식 할 때 신랑 예물로 뭐가 필요하냐고 물으셨다.
그때는 내가 파이롯트 만년필이 좋아보여서 신랑 예물로 해달라고 했다.
남편 코트는 아버지가 거래하시던 영주에서 제일 큰 양복점에서 장만했다.
외상값 받는 대신에 제일모직 코트로 맞추어 주셨다.
양복까지 같이 하면 편하고 좋을 텐데, 양복은 또 외상값 받을 곳이 있는 단양 도담 시골 양복점으로 갔다.
남편은 싫은 내색 한번 하지 않고 따라다녔다.
아주 작은 시골 양복점이지만 워낙 인물이 출중하고 옷걸이가 좋으니 서울 명동에서 맞춘 것만큼 멋있었다.
구두는 비단하고 관련 없을 것 같은 양화점에서 장만했다.
며칠 후 찾아서 신어보니 구두가 커서 우리 시 아주버님 드리고,
시간이 없어 급히 기성화를 사서 신고 결혼식을 했다.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하다 싶었다.
남편은 동네에서 사람 좋기로 소문난 집안의 자제라 아무 군소리도 안했다.
경상도의 경우 가구 혼수는 신랑 쪽에서 하는데 장롱과 찻장을 소도시 영주에 있는 가구점에서 고르라고 하신다.
그것 한 가지는 외상값 받을 게 없는지 현금으로 사셨다...ㅎㅎ
아버지는 해달라고 하면 다 해주셨다.
하지만 나 또한 아무것도 모르고 욕심도 없었다.
신랑 결혼예물은 그냥 금반지 하나 해 달라고 했다.
아버지는 이북말로 "몇 돈하면 되네 ?" 하신다.
가슴도 작지! 내가 왜 그때 3돈이라고 하지 두 돈이라고 했을까?
실반지 수준으로 해주셨다.
시계도 사달라고 할 껄, 그 땐 왜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그냥 결혼만 하면 좋다는 생각뿐이었다.
살아가면서 생각하니 아버지를 원망 할 것도 없고, 내가 세상 물정을 너무 몰랐던 거다.
요즘 금값이 천정부지로 올라 돌 반지 하나에 72만원까지 올랐다.
금이 재테크의 수단으로 자리잡은지 오래다.
물론 나에게도 금이 좀 있었다.
엄마가 나의 몫으로 해놓은 것도 있었다.
언니, 오빠들은 내가 엄마 병수발하면서 고생했다고 엄마가 남겨놓은 금 한냥과 은방울을 나에게 주셨다.
처녀 때 금 한냥으로 내 팔지를 만들었다. 후에 은방울은 남편 은수저를 만들었다.
남편 은수저를 넘치는 에너지로 너무 닦아서 은 숟갈이 닳아서 구멍이 났다.ㅎㅎ
시댁에서 예물로 해주신 금반지와 내가 소유한 금은 의미있게 유용하게 썼다.
남편이 퇴직 할 때 받은 행운의 열쇠 몇 개는 손자들 백일, 돌 선물로 주었다.
전부 그냥 있었으면 요즘 같으면 돈 되는데 아쉽다.ㅋ
옛 어른들은 시집 갈 때 혼수를 바리바리 싣고 가는 것보다 눈에 안보이는 복을 싣고 가야 된다고 말씀하셨다.
어쩜 그렇게 딱 맞는 말일까. 나는 인복, 먹을 복, 자식 복, 남편 복까지 있다. 비록 금붙이는 없지만,
금보다 더 귀한 나의 보물 1호 남편이 옆에 있다. 든든하고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