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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에서 1909년은 구학과 신학이 맞붙은 역사적인 해였다. 1909년 1월 『황성신문』은 구학 개량(改良)의 기치를 높이 들었고, 동년 3월 『서북학회월보』에서는 유교의 구신(求新)을 선언하였다. 구학이 기반한 유교 전통에 대한 신학 측의 대대적 공세였다. 그러나 구학 측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동년 4월, 조선 낙학(洛學)의 마지막 종장 전우(田愚)는 군산도(群山島)에서 친히 양계초(梁啓超)의 『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을 조목조목 비판하는 학술 문자를 지었다. 동년 5월, 전우의 활동에 고무되어 전우의 고족 유영선(柳永善)도 군산도에서 전우의 신학 비판에 가세하는 문자, 곧 「신서론(新書論)」을 지었다. 신학이 기반한 양계초의 학술에 대한 구학 측의 대대적 반격이었다. 사실 구학과 신학의 대결은 처음부터 미디어를 등에 업은 신학의 일방적 우위로 귀결할 것이라 예단하기 쉽지만 속단은 금물인 법이다. 신학을 비판하는 구학의 핵심적인 주장은 무엇이었는지 「신서론」에 담긴 유영선의 목소리를 들어 보기로 하자.
세상에서 신학(新學)을 하는 사람은 입만 열면 보신(保身)과 복국(復國)을 말한다. 나는 평소 그것이 우리 성인의 가르침과 같은 것이 있는 진정한 학문인지 의심하고 있었고 그 이름을 왜 신학이라 하는지 괴상하게 생각하였다. 금년 봄 소위 양계초(梁啓超)의 『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을 얻어 대충대충 읽어 보았다. 이는 신학 하는 사람들이 조종(祖宗)으로 떠받드는 것이다. 그 책에서는 ‘인류는 평등하다. 신하는 임금에 대해 감제하고 감독하며 제거하고 멸절한다. 그러나 임금은 민권을 침탈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또, ‘자제는 부형의 압제를 받지 않는다. 은혜는 낳아줌에 있지 않다. 효도하지 않아도 책망하지 않는다. 그리고 부모가 자식을 부용(附庸)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또, ‘아내가 스스로 남편을 버려도 정부에서 금하지 않는다. 딸이 스스로 배필을 선택해도 부모가 간여하지 않는다.’고 하고, 형제가 처를 공유함을 사람 처지의 알맞음이라 칭찬한다. 또, ‘공자의 가르침은 지킬 필요도 없고 지켜서도 안 된다.’고 하고, 부모를 무시하는 묵자를 추존(推尊)하여 천고의 위대한 실천가라고 하며, 야소교는 더욱 떠받들고 사모한다. 또 분서갱유(焚書坑儒)를 저지른 광포한 진(秦) 나라를 유문(儒門)의 공신이라 칭찬하고, 난신적자(亂臣賊子)를 철후(哲后)의 치신(治臣)이라 존경한다. 내가 이에 나도 모르게 후유 탄식하고 번쩍 놀라 말한다. 천하 고금의 난리는 인륜이 밝아지지 않는 데서 연유하지 않음이 없다. 성인의 도가 행해지지 않으면 의리와 이욕이 서로 섞이고 자식과 도적에 분별이 없어 마침내 멸망에 이르는 것이다. 어찌 이러하고도 보신하고 복국할 수 있는 이치가 있겠는가? 천고 만고에 어찌 다시 이런 엉터리 책이 있단 말인가? 참으로 신학이라 할 만하다. 무릇 강상(綱常)은 근본이다. 기예는 말단이다. 근본이 어지러운데 말단이 다스려지는 일은 없다. 지금 근본이 붕괴되었는데 어떻게 말단을 다스릴 것인가? 지지(地誌), 역사(歷史), 체조(體調), 산수(算數) 따위는 이 책도 밖에 붙들어 매고 중요하게 보지 않는다. 단지 이런 종류만 배우는 것이라고 하지만 그것이 강상을 타파하고 성현을 모멸하는 종류이니 취하지 않으려 한들 그럴 수 있겠는가? 더구나 소소한 기예가 어찌 국가의 흥성과 회복에 보탬이 되겠는가? 가령 이와 같이 해서 자신과 가족을 지키고 종국(宗國)을 복원한다 하더라도 군자는 귀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은 또 ‘정부에서 육영원(育嬰院)을 설립해 국중의 아이들을 거두어 길러 국가의 소유로 삼고 부모가 사사로이 하지 못하게 한다.’고 한다. 그러면 이 제도가 있기 전에는 사민과 군졸이 모두 한 사람도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지 않고 국가를 군더더기와 사마귀처럼 보았다는 말인가? 어찌 ‘효를 옮겨 충으로 하라, 윗사람을 친히 하고 어른을 위해 죽으라.’는 우리 성인의 가르침을 버리고 이처럼 스스로 수고하는가? 이 책은 무엇보다 ‘이[利]’라는 한 글자를 학문의 전체 강령으로 삼고 일본의 부강을 칭찬하여 ‘아! 인생 세간에 세위(勢位)와 부후(富厚)를 어찌 소홀히 할 수 있을까?’라고 했다. 이는 참으로 양씨(梁氏)가 속내를 토해낸 말이다. 이것으로 사람을 이끈다면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이익을 다투어 빼앗지 않으면 만족하지 못하리니 나는 천하의 난리가 언제 그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맹자가 양(梁) 혜왕(惠王)이 나라를 이롭게 하는 물음에 대해 답변한 것을 유독 보지 못했단 말인가? 아! 저 고슴도치와 이리 같은 것이 금전을 지원해 세력을 굳히고 권유하고 찬성(贊成)한 것이 저들 오랑캐에게 아양을 떠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슬프다. 우리의 원기가 미망(迷罔)에서 병들어 고개 숙여 가르침을 듣고 흑칠한 통 속에 기어들어가는 이가 많으니 탄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것이 진정 백성의 지혜를 발달시키고 나라의 살림을 증익하는 것이라면 저들이 어째서 금지하지 않고 도리어 억지로 가르치게 하는 것일까? 저들이 진정 우리 백성을 사랑하는 것인가? 이것은 천하에서 쉽게 알 만한 이치인데 다만 눈 먼 사람만 보지 못할 뿐이다. 세상에서 신학 하는 사람은 이에 대해 어찌 한 마디 전어(轉語)를 내리지 않는가? 기유년 단오날에 구학(舊學) 하는 사람 유영선(柳永善) 희경(禧卿)은 신치동(臣癡洞) 해상에서 글을 쓴다.
- 유영선(柳永善), 「신서론(新書論)」,『현곡집(玄谷集)』
▶ 신서론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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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한국 사회의 시간적 감수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말은 무엇일까? 새로움이 아닐까? ‘새’마을, ‘신’도시, ‘뉴’타운, 이렇게 지역 개발의 욕망은 항상 새로움으로 표상되어 왔다. 일상생활에서도 새로운 제품, 곧 신품을 원하고 새로운 방식, 곧 신식을 원하는 풍조로 가득 차 있다. 정치적, 사회적 모임에서도 끊임없이 새로운 계파, 곧 신파가 성장해 간다. 의주가 있지만 여기에 신을 붙여 신의주(新義州)를 부르고, 여성이 있지만 여기에 신을 붙여 신여성(新女性)을 부르고, 한이 있지만 여기에 신을 붙여 신한(新韓)을 부르는 식의 언어 습관이 과연 옛날에도 있었던가?
한국에서 근대는 곧 신(新)이다. 신(新)이 아닌 것은 구(舊)로 타자화된다. 신이 문명의 세계, 곧 신문명이라면, 구는 관습의 세계, 곧 구관습이다. 구문명, 신관습이라는 말은 상상할 수 없다. 오직 신문명, 구관습의 일방통행이 있을 뿐이다. 이제 신(新)은 신(神)이나 다름없는 최상의 경지가 되었다. 하지만, 존재를 규정짓는 신구 관념이 과연 존재의 본질을 올바르게 전하고 있는 것인가? 학문만 하더라도 그렇다. 학문은 단지 학문이었을 뿐 신구의 수식어가 필요 없었다. 신학이니 구학이니 하는 것이 실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었다. 소년신학(少年新學), 연원구학(淵源舊學)이라는 말처럼 단지 시간의 선후에 따라 이따금 신구를 사용했을 뿐이다. 퇴계와 율곡의 시절에 학문은 구학과 신학으로 분열되지 않았다.
신(新)을 지향하는 광풍이 전사회적으로 몰아치는 근대에 들어와 학문은 비로소 구학과 신학으로 분열되었다. 『만국공보』를 보는 사람들, 강유위와 양계초를 읽는 사람들,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를 보는 사람들은 문명과 애국에 몰입하며 신학을 자처한다. 혁구도신(革舊圖新)을 부르짖는 그들은 신학으로 전향하지 않는 사람들을 구학이라 부르며 주의를 준다. 지금 때가 어느 때인가? 신학은 항상 시대를 묻는다. 그리고 시대에 맞추어 가치의 변화를 요구한다. 하지만 구학은 항상 가치를 물었다. 그리고 가치에 맞추어 세상의 변화를 요구했다. 시대인가? 가치인가? 한국 근대 신구학 논쟁은 오늘날에도 충분히 토론 거리가 된다.
하지만 신학과 구학은 서로를 충분히 설득시킬 무기를 지니지 못했다. 신학은 자신이 추종하는 시대를 구학에게 설득시키지 못했고, 구학은 자신이 신봉하는 가치를 신학에게 설득시키지 못했다. 과연 지금이 문명의 시대인가?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이 몇 년 남지 않은 끔찍한 제국주의의 세상, 이러한 세상을 ‘허위문명’이라 비판하는 문명비판론이 나오는 이 시절에 신학은 충분히 자기 시대를 직시하지 못했다. 하지만, 과연 구학의 가치는 세상의 변화를 위한 언어로 기능할 수 있었는가? 그것은 세상의 안으로 나아가는 목소리가 아니라 세상의 밖으로 물러서는 목소리는 아니었던가? 유교 전통의 혁신을 요구하는 유교개혁론이 나오는 이 시절에 구학은 유교 덕목의 자기성찰적인 재정립에 적극적이지 못했다. 유영선의 신학 비판이 황성(皇城)의 한복판이 아니라 서해 바다 외로운 섬에서 일어난 것은 여러 모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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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노관범
*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박사 * 가톨릭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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