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귀고원(初歸故園)-최유청(崔惟淸) - 고향에 처음 돌아와서-
里閭蕭索人多換(이려소삭인다환) : 마을은 쓸쓸하고 낮선 얼굴도 많고 墻屋傾頹草半荒(장옥경퇴초반황) : 무너진 담장에 풀마저 우거졌구나 唯有門前石井水(유유문전석정수) : 오직 대문 앞 우물만이 남아 依然不改舊甘凉(의연불개구감량) : 달고 상큼한 지난 물맛과 다름없구나 원문=동문선 제19권 / 칠언절구(七言絶句) 고향에 처음 돌아와서[初歸故園] 東文選卷之十九 / 七言絶句 初歸故園 里閭蕭索人多換。 墻屋傾頹草半荒。 唯有門前石井水。 依然不改舊甘涼。
최유청(崔惟淸) 마을은 쓸쓸하고 사람은 많이 바뀌었네 집이 기울고 담장은 무너져 풀이 거반 우거졌는데 오직 문 앞의 돌우물은 그대로 있어 옛날의 달고 서늘한 맛 변하지 않았어라 ⓒ 한국고전번역원 | 신호열 (역) | 1968
里閭이려= 마을을 드나드는 어귀에 세운 문. 蕭索소삭= 索(삭)은 蕭索이니 홀로 사는 것이다. 蕭=쑥 소(다른 표현: 쓸쓸할 소, 맑은대쑥 소) 索= 동아줄 삭, 찾을 색, 구할 소. 換= 바꿀 환. 墻屋장옥= 土墻屋=벽을 흙벽돌로 쌓거나 거푸집 속에 이긴 흙을 다져 넣어 말리고, 그 위에 지붕을 덮은 집. 墻=담장. 牆과 同字. 依然의연= 전과 다름이 없이. 傾頹경퇴= 낡은 건물 따위가 기울어지고 무너짐. 舊= 옛 구(다른 표현: 예 구). 甘= 달 감. 涼=서늘 량.
* 최유청 [崔惟淸, 1095~1174] 본관 창원(昌原). 자 직재(直哉). 시호 문숙(文淑). 예종 때 문과에 급제, 직한림원(直翰林院)이 되었으나 인종 초 이자겸(李資謙)의 간계로 파직당하였다가 이자겸 몰락 후 다시 출사(出仕)했다. 좌사간(左司諫) ·시어사(侍御使) 등을 역임하고, 1132년(인종 10)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 때 진주사(陳奏使)가 되어 송나라에 다녀왔다. 1142년 간의대부(諫議大夫)로서 금나라에 가 책명(冊命)을 사(謝)하고 돌아와 호부시랑(戶部侍郞)이 되고, 이어 동북면병마부사(東北面兵馬副使) ·승선(承宣)이 되었다. 1149년(의종 3) 참지정사판상서형부사(參知政事判尙書刑部事) 등을 거쳐 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가 되고, 1151년 판병부사(判兵部事)를 겸임했다. 이 해 처남인 낭중(郞中) 정서(鄭敍) 등이 참소를 입은 사건에 연루 , 남경유수사(南京留守使)로 좌천되었으며, 이어 1157년 충주목사(忠州牧使) 등으로 좌천되었다. 1161년 봉원전대학사(奉元殿大學士)에 이어 다시 중서시랑평장사에 올랐으며,1172년(명종 2) 수사공집현전대학사판예부사(守司空集賢殿大學士判禮部事)에 이르러 치사(致仕)했다. 경사(經史)와 불경(佛經)에 밝았으며 글씨도 잘 썼다. 저서에 《남도집(南都集)》 《유문사실(柳文事實)》 《최문숙공집(崔文淑公集)》 《이한림집주(李翰林集註)》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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