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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예배의 회복(요4:19-26)
기독교 신앙의 중심은 예배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를 이루며,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예배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우리의 신앙의 실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예배가 회복되어야 우리의 영혼이 회복되고 우리의 영혼이 회복되어야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관계가 회복된다는 것은 하나님과 하나됨을 이루어 지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의 영혼이 만족하고 우리에게 진정한 기쁨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우리의 예배를 회복함이 우리 신앙의 회복이며, 은혜의 회복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우리 인간은 누구나 영혼의 갈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영혼의 갈망을 사람들은 보이는 물질로 채우려 하니 끝이 없는 욕망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물론 물질은 있으면 유익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물질이 우상이 되면 실패하고 맙니다. 마음의 평안을 잃어버리고 원망과 불평으로 가득 차서 그 인생은 그림자로 자욱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유대지방에 가셨다가 다시 갈릴리로 가시기 위해 사마리아를 통과하실 때 수가라고 하는 동네의 우물가에서 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 나누신 대화의 일부입니다. 예수님은 우물에서 물을 길르고 있는 여인에게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소개하시면서 그 샘물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임을 밝히셨습니다. 누구든지 주님께로 오면 참된 기쁨의 샘물을 먹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예수님께 대해 점차 눈을 뜨고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갑자기 이 여인에게 네 남편을 불러오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 여인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17절,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18절,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지금 이 여인에게 가장 큰 상처는 지금까지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함께 사는 남자도 진짜 남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옛날 시골마을에 사는 여인,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러기에 그녀는 자기를 숨기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뜨겁게 햇빛이 내리째는 정오에 물을 길러 온 것입니다. 사는 것에 많은 고통을 느끼고 있는 이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갑자기 남편을 불러 오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이 여인을 구원하시려고 예수님의 의도이신 것입니다. 이 여인이 구원받으려면 가장 먼저 자신가 누구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속에 감추어진 죄를 다 드러내야 합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하나님앞에 자백해야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앞에 나아가는 자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자기가 어떤 존재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자기가 죄인중에 괴수임을 인정하고 고백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죄씻음을 받아야 합니다. 기구한 인생을 살고있는 이 여인에게 무겁고 얽메이게 하는 죄는 바로 남편문제였습니다. 이 여인에게 남편문제는 커다란 상처였습니다. 당시로서는 커다란 수치였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그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 때 이 여인은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의 이름을 가진 선지자이심을 인정합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하나님을 생각했고 하나님앞에 드릴 예배에 대해 묻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자신의 죄악을 고백하고 하나님을 인정하는 순간부터 큰 변화가 옵니다. 예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감정이 자신을 사로잡게 됩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하나님에 대한 갈망이 생긴 것입니다. 예배에 대한 갈망입니다. 이것은 영혼의 갈망입니다.
20절,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이 여인이 갑자기 예배에 대한 관심으로 화제를 옮겨 갑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는 동안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분이 대화의 대상이 아니라 예배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예배에 대해 의문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라고 하는데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해야 한다고 하는데 어디서 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장소의 문제를 묻고 있습니다. 물을 길러 온 여인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예배 문제로 관심이 바뀐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대화의 주제가 달라집니다. 지금까지 가져왔던 자기 중심에서 예배, 기도, 섬김, 교제, 헌신 등 하나님중심으로 관심으로 바뀌게 됩니다. 세상 물질에만 관심을 가졌던 이 여인이 예배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변화입니다.
전에는 어떻게 하면 내가 더 잘 살까, 어떻게 하면 내가 더 만족할까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어떻게 하면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예배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변화입니다. 이렇게 중심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자기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가치관이 변화되고 중심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전에는 주님을 믿으면서도 중심이 언제나 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내가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예배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에게도 이러한 중심의 변화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그 때 예수님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21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1. 예배의 대상은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배는 장소가 중요한 게 아니다. 산에서 예배하든지, 예루살렘에서 하든지 상관없다. 그것은 예배의 핵심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배의 장소가 아무리 화려하고 예배의 자세가 아무리 신령하더라도 누구를 예배하는지 모르고 드리는 예배는 우상숭배와 똑같은 것입니다. 우상 앞에서 아무리 신성하게 예배를 드린다고 해도 그것은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장 먼저 예배를 받으시는 분, 즉 우리의 예배의 대상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하는 것입니다. 22절,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여기서 안다는 말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예배드릴 때 예배의 대상을 아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여러분, 다른 사람과 교제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 사람을 아는 것입니다.
알지 못하면 진실한 대화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아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분을 잘 알지 못한다면 교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미신을 믿는 사람은 상대방을 잘 몰라도 괜찮습니다. 그저 복만 내려주시면 된다고 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살아계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그렇지 않습니다. 인격적인 교제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고 예배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4절에도 보시면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이십니다." 육체가 아니란 말입니다. 외모를 보지않으시고 중심을 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잘 모르면 무례히 행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무엇을 기뻐하시고 무엇을 싫어하시는지 알면 알수록 더 가깝게 섬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하나님은 어떠한 하나님이십니까?
1)하나님은 창조자이십니다. 모든 만물을 만드신 분이십니다. 예배를 드릴 때는 언제나 창조자 하나님을 믿고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전능하신 창조자 하나님을 높여드리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모든 우상에게 드리는 예식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이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지혜로우신 능력의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2)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우리를 죄와 멸망에서 건져주신 분이십니다. 구약 성경에서의 예배의 배경은 하나님이 우리를 건져주셨다는 것입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 사로잡혀 있었던 우리를 구원하여 내셨다는 그 은혜가 예배자의 마음속에 꽉 차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
님앞에 예배드릴 때에 우리가 무엇때문에 나왔습니까? 어느 분은 교회를 은혜를 받으러 왔다고 말합니다. 순서가 잘못된 표현입니다.
아닙니다. 먼저 나를 애굽같은 죄와 세상, 애굽같은 어둠과 죽음에서 우리를 건져주신 그 은혜를 생각하며 하나님앞에 감사하는 것으로 예배가 시작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셔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심으로 우리를 멸망받지 않게 하시고 구원해 주신 은혜를 우리는 감사하지 아니할 수 없고 찬송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3)하나님은 우리의 주권자이십니다. 창조주이시고 구원자이신 하나님은 우리의 주인이십니다. 또 그 하나님은 우주만물의 주권자이십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역사를 계획하시고 통치하시고 완성시키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사야 43: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의 주인이십니다. 범사에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 신앙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요즘 우리가 묵상하고 빌립보서 2:12하에서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할 때 그 자세는 바로 항상 복종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그 가운데 하나님 나라가 임하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드리는 하나님은 1)창조자 2)구원자, 3)주권자이십니다. 이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신앙고백이 있을 때 진정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를 받으실 분은 오직 하나님이신 줄 알고 그만 경배하고 그만 높이어야 합니다. 예배는 인간이 하나님을 향해 드릴 수 있는 최고로 가치있는 행위입니다.
아무리 많은 헌금을 하고, 아무리 오랜 시간을 교회에서 보낸다고 할지라도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돌릴 수 없다면 그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요한계시록 5장 12에 보면 천천과 만만의 천사들이 보좌를 둘러서서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라고 노래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분명히 깨닫고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배드려야 할 오직 유일하신 분은 하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성경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3가지로 정리한다면 1)창조자 2)구원자 3)주권자 오늘 본문에서 밝히고 있는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생명을 주신 아버지이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예배하는 것이 우리의 삶의 기본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좀 더 적극적으로 말씀드리면 삶의 목적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2. 예배의 자세는 영과 진리안에서 입니다.
23절,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 예배의 자세는 두 가지입니다. 1)영으로 드려야 합니다. 성령이 역사하시는 예배입니다. 성령의 감동이 있고 내 심령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진정한 찬양과 감사가 있는 예배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영으로 예배하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몸이 와 있어도 중심이 딴 곳에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시기에 우리의 외모에 속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배를 드릴 때, 성령의 감동을 사모하고 성령안에서 우리의 중심을 드리는 것입니다. 입으로 찬양을 부르지만 우리의 영이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찬양을 드릴 수 있도록 집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인 예배요 진정한 예배입니다. 진정한 마음은 무엇입니까? 분리되지 않은 마음의 자세입니다. 이것저것 생각하며 마음이 흩어져 있으면 온전한 예배를 드릴 수 없는 것입니다. 삶과 신앙이 일치하고, 예배드릴 때의 마음과 몸이 분리되지 않아야 합니다. 오직 한 마음, 오직 한 곳,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과 생각이 일치되어 엎드릴 때, 그곳에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것입니다.
찬송을 부를 때, 찬송가사를 깊이 생각하면서 그 찬송 속에 거하셔서 내 마음을 감동시키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도를 드릴 때, 세상과 나는 간 곳이 없고 오직 구속하신 주님만이 보여야 합니다. 설교를 들을 때, 오늘 내게 주시는 말씀이 무엇인가를 열심히 찾아 경청하면서, 회개할 것은 회개하고, 바꿀 것은 바꾸고, 청산할 것은 청산하는 결단을 가져야 합니다.
이렇게 드리는 예배에 감격이 있습니다. 이렇게 예배를 드린 사람은 반드시 한 주간을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그의 삶 속에 살아 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맛보았기 때문이며, 바로 그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기 때문인 것입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2)진리안에서 드려야 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진리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진리안에서"라는 말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리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십자가의 은혜를 기억하면서 하나님앞에 예수의 이름으로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내 공로가 아닙니다. 내가 선하기 때문에 하나님앞에 나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또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그 말씀이 내게 들릴 때 말씀이 생명이 되고 인격이 되고 삶이 되는 것입니다. 말씀이 내게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붙잡아야 합니다. 그러면 말씀이 실재가 되는 것입니다. 내 삶이 되고 내 인격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직 성령안에서 우리의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를 위해 기도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합니다. 여러분 속에 성령님과 말씀이 역사할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가 될 것입니다. 그런 예배를 드릴 때 우리의 영이 충만해집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3. 예배할 때는 바로 오늘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여인이 예수님께 20절,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라고 묻습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에서 예배해야 된다고 생각했고,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리심 산에서 예배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수가성의 평범한 여인의 입장에서는 누구의 주장이 옳은지를 알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21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고 하셨습니다. 예배는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 때의 문제라고 말씀하십니다. 가나의 혼인잔치 사건에도 예수님은 때의 문제를 지적하셨습니다. 우리가 예배할 때를 말한다면 오늘이라고 말하여야 합니다.
(고후 6:2)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지금이 소중합니다. 오늘 이 시간이 소중합니다. 예배의 날을 소중이 여기고 온전히 지켜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공식적으로 드리는 예배의 때는 주일입니다. 주일을 거룩히 지켜야 합니다. 주일은 창세기에 보면 안식을 주시고 복주시는 날입니다. 출애굽기에서는 구원의 날입니다. 신약에 와서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입니다.
성령이 강림하신 날입니다. 사도요한에게 하나님의 계시가 임하신 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일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주일을 통해 영적인 회복이 이루어지고 주일을 통해 하나님앞에 우리의 믿음을 표현해야 합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다고 해도 오늘 주일을 바로 지키지 못하면 은혜가 새고 있는 것입니다, 축복이 새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온전한 교제가 소홀히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일을 지키되 이날을 하나님의 날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역에 우리의 시간과 몸을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앞에 신령과 진정으로 지키기 위해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온전히 나의 사랑을 고백하고 시인해야 합니다. 그래서 관계가 회복되어지고 교제가 회복되어질 때 하나님의 은혜가 저와 여러분에 부어지는 것입니다.
뿐 만 아니라 어떤 한 장소에 국한시켜서는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예루살렘뿐만 아니라 온 세계 어느 곳에서든지 예배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장소에 구애받는 예배는 이제 끝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온 우주에 충만하십니다. 어디에나 계시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셔서 존재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전체를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도바울이 (롬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우리는 이렇게 교회당에서 예배를 드립니다. 여기서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몸으로 체험하고 성령충만을 경험합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예배를 드리기 위해 영과 진리안에서 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나 이러한 공동체 예배가 끝이 아닙니다.
공동체 예배가 끝나면 삶의 예배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오늘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공동체예배입니다. 하나님이 불러주신 우리 모두가 하나되어 하나님앞에 찬양과 경배, 헌신과 봉사를 통해 예배를 드립니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될 때 성령님이 우리가운데서 역사하십니다. 이것이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입니다.
하나님 앞에 마땅히 드려야 할 예배를 드리기 위해 교회 공동체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가 없어진다면 교회가 존재할 이유도 사라질 것입니다.
미국의 대통령을 지낸 루즈벨트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어떤 장소에서나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고 어떤 시간에도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한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어떤 장소에서나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가 되려거든 특정한 시간인 주일날, 특정한 장소인 교회에서 먼저 예배드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거룩한 예배의 감격을 교회에서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 가정에서나 일터에서 자기 혼자 하나님을 예배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 생활을 등한히 하는 사람이 어디서나 영이신 하나님을 전심으로 예배드릴 수 있다고 보기 어려운 것입니다. 교회는 모든 경건 생활의 모체가 됩니다. 모든 영적인 삶의 출발은 교회의 예배를 통해서 가능한 것입니다. 교회에 모여서 바른 예배를 드리고, 예배의 감격에 충만하게 잠길 때, 가정 예배가 이어지고, 생활 속에서 예배가 잘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에 성공하는 사람이 모든 삶의 영역에서도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아무리 바빠도 예배가 먼저입니다. 하나님 앞에 바르게 예배함이 없이는 내 삶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 모든 사업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바른 관계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바른 예배의 자세에서 바른 삶의 자세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렇게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우리를 선택하셔서 구원받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깨끗하게 하신 다음 영과 진리안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아다니시면서 영광을 받으시고 하늘의 신령한 축복을 허락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다 함께 하나님이 찾으시는 신령한 예배자가 되어 온전한 믿음의 승리자로 굳게 서게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